SM 엔터테인먼트(이하 에스엠) 인수를 둘러싼 하이브와 카카오 간 공방전이 점차 고조하고 있다. 일단 3일 법원이 이수만 전 에스엠 총괄 프로듀서가 카카오를 상대로 제기한 신주·전환사채 발행 금지 가처분을 인용 결정했다. 이에 따라 카카오의 에스엠 인수에는 일단 차질이 빚어졌다. 하이브와 카카오 사이에서 핑퐁처럼 오가던 에스엠의 항로가 일단 하이브쪽으로 더 기울었다.
그런데 특히 이 싸움에서 간과되는 존재가 있다. 케이팝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고, 케이팝 정체성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팬덤이 이 인수 논의에서는 완전히 들러리로 전락했다. 에스엠과 하이브, 카카오 관계자들 모두 자신들의 방식만이 팬과 아티스트를 위한 최선이라고 강변하지만, 실상은 이들이 팬덤을 돈을 위한 전쟁의 본질을 가리는 도구로만 소비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3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영원홀에서 에스엠을 둘러싼 경영권 분쟁에 관한 토론회가 열렸다. 홍석경 서울대 교수(서울대 한류연구센터장)가 사회를 본 이번 토론회에는 이동연 한예종 교수와 조영신 SK브로드밴드 경영전략 그룹장이 발제자로 참여했다.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 이종임 서울과기대 강사, 김수아 서울대 교수, 이동준 서울대 아시아문화연구소 방문연구원,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 이지행 동아대 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이 토론자로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발제자와 토론자들은 에스엠을 둘러싼 분쟁에서 팬덤이 소외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한편, 팬덤이 이번 인수 경쟁에서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지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한편 이번 인수 경쟁은 한국 케이팝 역사에서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 의미를 지닐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하이브와 카카오 양자 모두 인수 시 독점 논란을 낳을 수 있지만, 현 케이팝 구조에서 독점에 따른 폐해는 크지 않으리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팬덤은 들러리인가
토론자로 나선 이지행 연구원은 이번 인수전에서 "(이달 말 예정된 에스엠의 주주총회를 앞두고) 만일 팬덤이 소액주주 운동과 결합한다면 사상 최초로 팬덤이 기업 경영권의 향방을 결정하는 금융자본의 행위자로서 기능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이 같은 전망은 이동연 교수의 발제에서 현재 에스엠 경영권 분쟁 당사자들이 과연 "소속 아티스트의 입장이나 그들을 응원하는 팬덤의 입장에서 진지하게 (인수전을) 논의한 적이 있느냐"고 지적한 데 따른 응답으로 나왔다. 이 교수는 팬덤이 행동주의의 하나로 다가오는 에스엠의 주총에서 소액주주로 참여해 팬의 목소리를 경영진에 전달하는 방안이 가능하다고 평가했다.
팬덤에 관해 이처럼 큰 기대가 제기된 배경에는 케이팝의 특수성이 있다. 케이팝을 여태 전통적(?)인 주류 팝과 구분짓는 중요한 차별점이 능동적이고 강력한 팬덤이다. 비티에스(BTS)와 아미(ARMY)의 관계가 대표적인 사례다. 케이팝 팬덤은 보통의 대중음악 팬층과 달리 조직적이고 큰 발언권을 가진다.
이를 포착한 한국의 에스엠, JYP, YG와 같은 주류 기획사는 팬덤으로부터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플랫폼 강화에 나섰다. 에스엠의 경우 버블(Bubble)을, 하이브는 네이버와 합자한 위버스(weverse)를 소유하는 식이다. 이 같은 플랫폼은, 조영신 그룹장에 따르면 케이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인 "지속가능한 회사를 만들기 위해 팬덤으로부터 어떻게 수익화를 촉진/강화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기획사의 답이다. 기획사도 케이팝 팬덤의 특수성을 포착하고, 이를 중요하게 생각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문제는 이 같은 기업 주도 플랫폼에 팬덤이 종속되면서 팬덤의 능동성이 기업의 자본주의적 속성에 일방적으로 따라가는, 즉 대상화하는 존재로 전락한다는 점이다. 에스엠 경영권 분쟁에서 각 회사 당사자들이 팬덤을 위해서는 자신들이 정답이라고 강조하면서 정작 팬덤의 목소리는 전혀 인수전에 반영하지 않는 현실이 이를 보여준다. 결국 케이팝의 주인공은 자본이라는 냉정한 현실을 현 인수전이 보여주고 있다.
이종임 강사는 이를 두고 "현재 케이팝에서 팬덤은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계속 존재하게끔 하기 위해 그들을 지지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고 기획사는 '이를 악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팬덤이 강력하지 않으면 내가 사랑하는 아이돌이 살아남을 수 없다. 이를 위해 팬덤은 계속해서 아이돌에게 돈을 써야 한다. 기획사는 이를 이용해 팬덤을 겨냥한 2차 상품을 꾸준히 내놓는다. 기획사는 일단 뜬 아이돌을 대상으로 하는 파생 상품을 늘려 부침이 심한 이 업계에서 생존의 가능성을 키울 수 있지만, 여태 능동적인 집단으로 분류됐던 팬덤은 결국 '아이돌의 생존을 위해' 아이돌과 함께 "감정 노동을 해야 하는 노동자"(이종임)로 전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김수아 교수는 "팬덤 플랫폼 비즈니스가 기획사에 의해 독점 운영되면서 팬덤이 가진 자율적인 연대는 사라지고, 팬덤은 오직 소비자의 위치로만 한정"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결국 "기획사는 아이돌을 향한 사랑을 지속하고 싶어하는 팬덤의 불안정성을 공략하기 마련이고 팬덤은 이미 독점화한 팬덤 플랫폼을 통해 더욱 더 기획사에 종속"되는 게 오늘날 케이팝에서 팬덤의 현실이라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팬덤이 주주행동주의와 결합한다면?
이 같은 현실에서 팬덤은 에스엠을 둘러싼 경영권 분쟁 역시 무력감을 갖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내가 사랑하는 아티스트에게 어쩌면 막대한 영향을 끼칠지 모를 이번 분쟁에서 팬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인다. 이 분쟁의 전장은 수천억 원이 오가는 주식 시장이고, 이곳에서 팬덤의 중요성, 아티스트의 방향성은 그리 중요한 소재가 되지 않는다.
역으로 이동연 교수가 제안한 소액주주 운동 가능성에 이 싸움터의 바깥에 있는 이들이 기대를 거는 이유이기도 하다. 팬덤이 주주권 운동을 통해 실질적인 영향력을 갖게 된다면 팬덤은 여전히 강력한 음악산업의 행위자로 건재함을 입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다른 해석도 낳을 수 있다. 도대체 팬덤은 어디까지 소비해야 하는가. 얼마나 돈을 더 써야 팬덤은 당당한 케이팝의 행위자로 인정받을 수 있나. 왜 팬덤이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가.
실제 과거 이런 일이 있었다. 지난 2008년 슈퍼주니어의 멤버 추가 영입을 반대하는 팬덤이 '1팬1주' 운동을 벌여 에스엠 주식 5만8206주를 취득했고, 이들은 주주로서 에스엠에 팬덤의 입장을 전달했다. 비슷한 사례가 이번에도 재현될 가능성은 일단 있다고 볼 수 있다.
"케이팝 역사에서 중대한 분수령"
한편 이번 에스엠 경영권 분쟁 자체는 한국 케이팝의 진화사에서 중대한 분수령이 되리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이동연 교수는 현 에스엠 분쟁의 본질은 "케이팝의 글로벌 열풍을 실제 제작자본으로 현실화하는 '글로벌 자본' 형성 불가피성이 전근대적 연예제작 관행과 충돌하면서 생긴 사태"라고 진단했다. 달리 말해, 케이팝이 글로벌화하면서 해외의 대규모 자본이 들어오는 등 자연스럽게 케이팝 기획사도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진화하고 있지만, 이 과정에서 이수만으로 대표되는 케이팝 1세대의 전근대적 조직 관리가 충돌하면서 이번 사태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다.
실제 케이팝 1세대 프로듀서이자 기획사 대표격인 이수만과 양현석, 박진영 등은 모두 최근 들어 크고 작은 논란의 무대에 서고 있다. 이수만의 경우 이번 분쟁을 통해 라이크기획을 통한 사실상의 배임 혐의를 받고 있고, 에스엠 뮤지션의 세계관을 자신의 해외 부동산 투기에 이용했다는 주장에까지 휘말린 상태다.
케이팝은 이미 글로벌 분업체제의 산물이 됐다. 스웨덴 프로듀서가 작곡한 곡에 한국 아티스트가 가사를 붙이고, 전문 댄서로부터 그룹 댄스를 섭렵하고, 대형 기획사의 프로듀서가 이 모든 과정을 총괄하며, 해외 에이전시가 신곡을 전 세계에 홍보하는 체제가 이미 안정적으로 정착했다. 모든 제작 과정이 지구적인 표준 체제에 맞춰 돌아가고 있는데 일인 창업주의 경영 행태만 구시대적이라면, 이는 결국 새로운 물결에 의해 도태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번 에스엠 경영권 분쟁의 승자가 누구가 되든, 분쟁 이후 케이팝은 새로운 전기, 즉 케이팝 1세대의 본격적인 퇴조라는 새 시대를 맞게 되리라는 전망이 제기된 배경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 분쟁에서 빠진 질문과 논의 사항은 여전히 많다. 팬덤이 대표적인 사례였지만 다른 중요한 이야기 역시 이번 분쟁에서 배제돼 있다.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는 "이수만 일인 체제가 에스엠의 성장 과정에서는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지 않았으나, 최근 에스엠 실적이 나빠지자 '전근대적 일인 체제가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 것 아니냐"며 "그렇다면 과연 주주 자본 체제로 변화하는 건 근대적 체제인지에 관해서도 질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정 의견가는 이어 "노동조합이 없거나 별 힘을 쓰지 못하는 엔터 산업의 현실에서 각 기획사의 노동자들 목소리가 전혀 공론화되지 않는 점, 아티스트의 처우가 여전히 열악하다는 점 역시 이번 인수 논쟁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과제"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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