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2월 극동국제전범재판소는 문을 닫았다. 맥아더 장군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주요 전범자들이 재판도 없이 풀려나고, 국왕 히로히토가 아예 기소조차 안 된 채로 전쟁범죄 처벌을 비껴간 것은 두고두고 논란을 불렀다. 도쿄 법정의 11인 판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프랑스 출신 앙리 베르나르는 이렇게 탄식했다.
"전쟁을 선포했던 주범(히로히토)은 도망가고 종범들만 처벌받게 된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현실이다."(에드워드 베르,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2002, 496쪽)
베르나르 판사의 지적대로 군 통수권을 지닌 '주범' 히로히토는 빠져나갔지만, 군 명령계통의 사다리에서 아래쪽에 있던 '종범'(하급 군인들) 상당수는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적용된 범죄는 전쟁 지도부에 적용됐던 '평화를 깨트린 죄'(crimes against peace, A급 범죄)가 아니었다. 통상적인 전쟁범죄(war crimes, B급)로 기소되거나, 또는 비무장 민간인들에게 가혹 행위를 저지른 '반인도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 C급)로 재판을 받았다. 실제로는 B급과 C급의 구분이 애매했기에, 당시 많은 수감자들은 그냥 ‘BC급 전범자’로 일컬어졌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사항. 도쿄재판에서 전쟁범죄의 유형을 A,B,C급으로 나누었다고 해서 A급 죄질이 무겁고 C급이 가볍다는 뜻은 아니다.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 조례> 영문판은 제5항에서 a조, b조, c조에 해당하는 전쟁범죄를 유형별로 나누었다. 그에 따라 A급, B급, C급 전쟁범죄로 일컬어지게 됐다. 여기서 '급'은 죄질의 등급이 아니라 전쟁범죄 행위의 유형을 나눈 것뿐이다.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전시 내각의 주요 범죄자들도 오로지 A급 범죄 하나로만 교수형을 언도받은 경우는 없다. A·B·C급을 아우르는 여러 개의 전쟁범죄 행위로 다중 기소됐었다.
BC급 전범자 948명 처형
도쿄재판이 A급 주요범죄자들을 다루었다면, BC급 전범자를 다룬 재판은 아시아 전역에서 열렸다. 중국, 필리핀, 싱가포르, 네델란드령 인도네시아 등 일본이 한때 침공했던 아시아 곳곳에서였다. 모두 49개에 이르는 전범재판소 법정에 피고로 나온 일본 전범 용의자 숫자는 2만5000명(추산), 유죄 판결을 받은 전범은 5700명(사형 판결 948명 포함)이었다. 이 가운데 한국인은 148명(사형 23명 포함), 대만인은 173명(사형 26명 포함)이 처벌을 받았다(우쓰미 아이코,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 동아시아 2007, 8-9쪽 참조).
도쿄재판이 무려 2년6개월을 끌었던 데 견주어, B·C급 전범들을 단죄했던 법정의 진행 속도는 무척 빨랐다. 재판 1건 당 평균 이틀 걸렸다. 재판정에 들어선 첫날 피고는 검사와 판사의 얼굴을 보고 전쟁범죄에 관련된 사항을 몇 마디 주고받은 뒤, 1주일이나 2주일 뒤 두 번째 법정 출두에서 판결이 내려지는 수순이었다. 피고가 억울하다고 주장할 경우에도 법정 다툼과 변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아시아 각지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일본 전범들은 1951년 일본 스가모 형무소로 옮겨졌다. 그 무렵부터 일본 국내의 석방 여론을 빌미로 하나둘씩 풀려났다. 1957년 초 일본 스가모 형무소에는 A급, B급, C급 합쳐 107명의 전범자들이 갇혀 있었다. 마지막 수감자들이 감형과 동시에 전원 석방이 이뤄진 것은 1958년 말. 이들 전범들은 1948년 말 맥아더 장군 덕에 풀려난 전범들보다 꼬박 10년을 더 감옥에서 지낸 셈이다. 포로를 학대했다는 혐의로 중형 선고를 받았던 어느 BC급 전범은 바깥으로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불만을 터뜨렸다.
"(우리는) 포로들을 몇 번 구타했을 뿐인데, 나라 전체를 전쟁으로 끌고 갔던 A급 전쟁범죄자들보다 더 중형을 선고 받았다."(정용욱, 「일본인의 ‘전후’와 재일조선인관」, 일본비평 3호, 서울대 일본연구소, 2010.8, 285-286쪽)
적지 않은 BC급 전범들은 자신들의 상관 때문에 '희생양'이 되었다고 여겼다. 상관이 자신들에게 나중에 전쟁범죄로 판결 받게 될 행동을 하도록 명령한 뒤, 그게 문제가 되자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자신들에게 죄를 떠넘겼다는 얘기다. 한편으로, 일부 전범들은 스스로를 ‘전쟁에 따르기 마련인 막연한 희생자’로 여기며 체념하는 모습을 보였다(존 다우어, <패배를 껴안고>(Embracing Defeat) 민음사 2009, 677쪽). 그 어느 쪽이든 히로히토를 비롯한 전쟁 지도부가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한국인 전범은 가해자이지만 억울한 피해자"
유죄 판결을 받은 148명의 한국인 가운데 군인은 3명뿐이다. 필리핀 포로수용소장 홍사익 중장이 조선인 출신 군인으론 혼자 사형 언도를 받았고 1946년 9월26일 교수형으로 죽었다. 식민지 조선의 평민 출신인 홍사익(1889-1946)은 일본 육사와 육군대학을 거쳐 중장까지 오른 특이한 경력을 지녔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내온 <친일파 인명사전>에 5000여 명의 민족반역자와 함께 그의 이름이 올라있다.
한반도 출신 군인 가운데 유죄판결을 받은 나머지 2명은 '지원병'(실제로는 강제 징병) 출신이다. 전쟁 막판에 필리핀에서 대미 게릴라전을 벌이다가 붙잡혔다. 또 다른 조선인 전범자 16명은 중국에서 군속으로 통역 일을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 가운데 8명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이들은 일본군이 중국군 포로나 민간인들을 거칠게 심문하는 자리에 함께 했을 것이다. 가혹행위를 받는 중국인들 눈에는 '식민지 조선에서 붙들려온 불쌍한 통역관'이 아니라 일본 침략자들과 한통속으로 여겼을 게 뻔하다.
식민지 조선 출신 전범자 148명(사형 23명 포함) 가운데 절대다수는 포로수용소 감시원들이었다. 115명이 유기징역형을 받았고, 14명이 사형 언도로 죽었다. 유기형을 받은 이들은 싱가포르 창이 감옥 등에 갇혀 있다가 1951년 다른 전범들과 함께 일본 스가모 형무소로 옮겨갔다. 길게는 1957년까지 그곳 감옥에 갇혀 지냈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조국으로 돌아가긴 쉽지 않았다. 그들의 가슴에 새겨진 '전범' 또는 '부역자'라는 낙인이 발목을 잡았다.
한국인 BC급 전범, 특히 포로수용소 감시원 출신 전범들에 관심을 둔 일본인 연구자 가운데 우쓰미 아이코(전 오사카경제법과대학 교수)를 뺄 수 없다. 우쓰미는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하고 사죄해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양심적 지식인이다. 그녀의 전범에 관한 연구 성과는 2007년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으로 나왔다.
여러 한국인 BC급 전범들을 찾아가 인터뷰하거나 조사한 뒤 우쓰미가 내린 결론은 '이들은 전범으로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일본군국주의의 구조적 피해자'라는 것이다. 식민지 출신 젊은이들이 일본군대 안에서 구조적으로 겪었을 억압과 피해자 측면은 외면당하고, 가해자 측면만 일방적으로 재단돼 억울하게 전쟁범죄자로 처벌받았다는 것이다.
우쓰미의 연구 성과가 알려질 무렵, 한국에서도 일제의 강제동원과 '위안부' 문제 등 일본의 과거사 미청산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2010년 한국 정부는 '대일 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란 긴 이름의 부서를 출범시켰다. 여기서 나온 여러 보고서 가운데 하나가 <조선인 BC급 전범에 대한 진상조사>다(집필자: 조건, 2010). 여기엔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모집 배경과 패전 뒤 전범 처벌 실태가 잘 정리돼 있다. 우쓰미의 책과 조건의 보고서를 길잡이 삼아 글을 이어가보자.
포로감시원이 된 식민지 젊은이들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에 성공한 뒤 일본군은 빠른 속도로 동남아시아 지역을 점령해갔다. 말레이 반도(1941년 12월), 마닐라(1942년 1월), 싱가포르(2월), 자바(3월), 필리핀(5월)이 잇달아 일본군이 장악하면서 많은 포로들이 생겨났다. 그 숫자는 30만 명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연합군 소속(미국,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호주)의 백인 포로는 12만 명쯤으로 추정된다.
1937년 난징 학살은 중국군 포로를 제대로 수용 관리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저 많은 포로를 가둬놓고 먹이고 재우는 것보다 죽이는 쪽이 훨씬 낫다'는 결정에 따라 벌어진 참극이었다. 난징 학살 뒤 국제사회의 호된 비난을 받았던 일본 육군성은 1941년 12월 포로정보국을 설치하고, 뒤늦게 대책 마련에 나섰다. 그런 과정에서 1942년 5월 포로감시원을 대대적으로 모집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식민지 조선과 타이완 출신들로 포로감시원들을 채우려 했다는 점이다. 이른바 '내지인'(일본 본토 출신)은 전투 병력으로 쓰고, 포로감시원 같은 비전투 인력은 식민지 출신으로 채운다는 방침이었다. 2년 계약에 징병에서 면제시켜준다는 속임수 조건을 내걸어 지원자들을 모았다. 1942년 6월 3200명쯤의 포로감시원 후보자들은 부산의 임시군속교육대(일명 노구치 부대)에서 2개월 동안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 뒤 필리핀·미얀마·태국·인도네시아·뉴기니 등 동남아 각지로 가는 수송선을 탔다.
악명 높은 일본군 헌병과 똑같은 전범 비율
포로수용소 감시원의 신분은 '군속용인'(軍屬傭人), 다시 말해 군무원 신분의 민간 피고용인들이다. 일본군 이등병보다 더 밑으로 무시당했고 천대를 받았다. 작은 실수에도 일본군 특유의 호된 체벌을 받곤 했다. 일본군 체계 안에선 이들은 절대 약자이고 '피해자'였다. 그런 이들이 어쩌다 '가해자'로 전범이 되었을까. 포로수용소라는 '가해의 현장'에서 찍힌 전범자라는 낙인은 그들의 의지와는 달리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까.
여기서 하나 비교를 해보자. 허리에 칼을 찬 일본 순사나 일본군 헌병이 목에 잔뜩 힘을 주던 시절이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아이 울음을 그치게 하려면 "일본 순사가 온다" 또는 "일본 헌병이 온다"고 했다는 말이 그냥 나왔겠는가. 조선에서 그러했듯이, 일본군이 만주로, 중국 본토로, 그리고 동남아로 침략전쟁을 벌일 무렵 일본군 헌병은 '저승사자'로 통했다. 일본 군국주의 침략전쟁의 하수인으로 온갖 전쟁범죄를 저질렀을 게 뻔하다.
일본군 헌병 출신자들이 만든 단체인 전국헌우회(全國憲友會) 자료에 따르면, 일제의 전쟁기간 헌병 총수는 3만6073명이었고, 이 가운데 1534명이 전범자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전범 비율은 4.25%(우쓰미, 9쪽). 한국인 포로수용소 감시원은 모두 합쳐 3016명이었고, 이 가운데 129명이 전범으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니 비율로는 4.28%다(조건, <조선인 BC급 전범에 대한 진상조사> 보고서).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함으로 악명이 높았던 일본군 헌병의 유죄 비율과 거의 같다. 무엇이 잘못됐기 때문일까.
포로수용소는 어디서나 감시하는 자와 감시받는 자 사이의 긴장 관계가 이어지고 때로는 그 긴장이 폭력적으로 분출되기 마련이다. 구조적으로 전쟁포로 학대를 둘러싼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실제로 전쟁이 끝난 뒤 많은 연합군 포로들이 수용소에서 겪었던 학대 책임을 물어 식민지 출신 한국인과 대만인들을 '전쟁범죄자'로 고발했다. 포로감시원들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원된 식민지 출신의 '피해자'였지만, 연합군 포로의 눈으로는 그들도 '가해자' 편이었다.
포로감시원들은 철도나 다리 공사 현장에 연합군 포로들을 데려가기도 했다. 말이 통하지 않고 덩치 큰 포로들을 다루려면, 험한 소리로 윽박지르거나 때리는 일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 말기엔 보급 식량이 떨어졌기에 병사들도 배를 주렸으니, 포로들 끼니 해결은 더더욱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저런 악감정이 쌓인 채 전쟁이 끝나자, "저 녀석이 나를 학대했어!"하고 손가락질하면 꼼짝 없이 전범자로 엮이기 마련이다. 전범재판에서 피고석에 선 포로감시원들이 식민지 조선인이란 특수한 사정은 고려되지 않거나 무시됐다. 결국은 일본의 전쟁 책임을 이들이 떠안는 모양새가 됐다.
이들과는 대조적인 삶을 살았던 2명의 친일파가 생각난다. 일본 관동군의 헌병 보조원으로서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잡으려 밀정 노릇도 마다했던 김창룡 전 특무대장(1920-1956), 일제 고등계 형사로 악명을 떨쳤던 노덕술(1899-1968)이다. 이 둘은 1945년 일본 패전 때 잽싸게 옷을 갈아입고 도망쳤다. 전범자 처단을 비껴갔을 뿐 아니라 남한에서 목에 힘주며 살았다. 그렇기에 세상은 정의롭지 못하고 불공평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일까.
17살 포로감시원 이학래
포로수용소 감시원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이학래(1925-2021)의 경우를 보자.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이학래는 17살이던 1942년 포로수용소 감시원이 됐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로 잘 알려진 철도 공사 현장에 투입됐던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했었다. 미얀마(버마)-태국을 잇는 총길이 415km의 철도 공사는 '죽음의 철로'라는 악명을 얻었다. 5만5000명의 연합군(영국군, 네델란드군, 호주군) 포로 가운데 1만3000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아시아 현지 노동자들도 많이 죽었다. "철로 받침목 하나에 사망자 한 명 나왔다"는 말조차 생겨났다. 패전 뒤 '포로 학대' 혐의로 싱가포르 창이 형무소에 수감됐던 이학래는 사형판결을 받게 된 과정을 이렇게 적었다.
"취조를 받고 자신의 증언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의 서류에 서명하라는 요구를 받기도 했다. 법정에서의 유일한 자기변론마저 허용되지 않았고 기소사실(환자에게 힘든 노동을 강요한 혐의)에 대한 반증마저 허용되지 않았다. 영어로 진행된 재판이라 애당초 언어라는 면에서 불리했기 때문에 항변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이학래, <전범이 된 조선청년> 민족문제연구소 2017, 67쪽)
2년 반을 끌었던 도쿄 재판과는 달리 아시아 전역에서 벌어졌던 재판은 아주 빠르게 마무리됐다. 1심이 곧 최종심인 군사재판은 즉결재판이나 다름없었다. 이학래의 경우 단 한 번 취조를 받고 기소돼 두 번 출정 만에 교수형을 언도받았다. 조선인에 대한 편견을 지닌 일본인 변호사는 그저 법정의 형식적인 참여자였을 뿐 도움이 안됐다.
이학래는 그래도 운이 아주 나쁘지 않았는지 징역 20년으로 감형 통보를 받았다. 1951년 다른 전범들과 함께 일본 스가모 형무소로 옮겨졌다가 1956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그 뒤로 같은 처지의 한국인 출소자들과 '동진회'란 모임을 만들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BC급 조선인 전범자와 전몰자에 대한 보상요청 운동을 꾸준히 펼쳤다.
1991년 동진회는 일본 정부의 사죄를 요구하며 국가배상청구 재판 투쟁을 벌였다. 우쓰미 아이코 교수처럼 소수의 일본인들도 힘을 보탰다. 일본 사법부의 양심에 한 가닥 기대를 걸었지만, 1999년 최고재판소(대법원)에서 패소로 결말이 났다. 그 뒤로도 여러 모임과 전시회를 여는 등 투쟁은 이어졌으나 지금껏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이학래는 2021년 96세로 타계했다).
충성 강요할 때와 달리 "외국인이라 연금 못 준다"
지난주 글에서 살펴봤듯이,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효 직후 도쿄재판에서 교수형을 받았던 A급 전쟁범죄자들은 '공무사'(公務死)로 인정받고, 유족들은 연금을 챙기게 됐다. 다수의 일본인 전몰자와 부상자들도 '은급법' 또는 '원호법'을 통해 금전적 보상이 주어졌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식민지 조선 출신 전몰자나 부상자들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보상 명단에서 빼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히로히토에게 충성을 강요하며 전선으로 내몰 때와 그 뒤의 태도가 이렇게 달라지다니!
돌이켜 보면, 1945년 일본 항복 뒤 '전범' 혐의를 뒤집어 쓴 한국 청년들은 이중 삼중의 희생자였다. 히로히토를 정점으로 한 일본 군국주의에 1차로, 연합국의 전범재판에 2차로 희생당했다. 그리고 3차로 일본 정부로부터 '외국인' 차별을 당했다. "일본은 우리를 침략전쟁에 이용하고는 '외국인'이라며 외면한다"고 탄식하는 그들의 원통한 마음을 누가 위로할 수 있으랴. 2006년 한국 정부의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포로감시원들을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로가 될까.
올해 2월7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판결이 내려졌다. 1968년 베트남 파병 한국군이 관련된 '퐁니·퐁넛 마을 학살사건'의 피해자에게 3000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었다. 사건 발생 55년 만의 일이다. 액수가 많고 적고를 떠나, 뒤늦게나마 베트남 희생자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과거사와 관련해 일본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면서, 정작 우리가 손 놓고 외면했던 것은 없을까(베트남전쟁에 대해선 따로 살펴본 예정임).
끝으로, 짧게나마 소개하고 싶은 인물이 있다. 조선인 BC급 전범 연구에 관심을 쏟았던 우쓰미 아이코는 남편과 함께 <적도에 묻히다>란 책을 냈다(역사비평사, 2012년). 이 책의 중심인물은 이학래처럼 포로감시원이었던 양칠성이다. 그는 1945년 일본군에서 도망쳐 인도네시아 독립투쟁을 벌이다가 1949년 네델란드 군에게 총살됐다. 30년 뒤인 1975년 인도네시아 '독립영웅'으로 추서된 양칠성은 한국-일본-인도네시아를 넘나들었던 이른바 '경계인'이었다. 1940년대 격동과 혼란의 시대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짧지만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스러진 '무명의 경계인'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을 일컬어 역사의 희생자라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다음 주 글 미리보기: 1948년 도쿄재판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됐던 A급 전범자들은 30년만인 1978년 ‘쇼와 순난자’(昭和殉難者)란 이름 아래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졌다. 일본쪽 용어로는 ‘합사’(合祀)됐다. 문제는 한반도 출신 전몰자들이 2만 명 넘게 야스쿠니 신사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살아선 히로히토에 충성 바치라고 강요당했고, 죽어선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A급 전범자들의 볼모로 잡혀 있는 모습이다. 유족들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이름을 빼달라고 요구했지만, “살아 있었을 땐 일본인이었다”며 야스쿠니는 콧방귀를 뀔 뿐이다. 이런 야스쿠니의 문제점을 다음 주에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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