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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은밀하게, 과감하게! 그들은 이곳에서 이렇게 불태웠다

[2023년 3월 서울학교는 <3.1만세운동의 현장>]

3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89강은 기미년 3.1만세운동이 은밀히 준비되어 비폭력 만세운동이 펼쳐지고, 나아가서 한성임시정부가 수립된 서울의 역사적인 현장을 찾아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최종 백신접종을 완료하시고, 항상 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축을 빌미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던 천도교 중앙대교당Ⓒ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학교 제89강(제5기 제11강)은 2023년 3월 12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8시 50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모입니다(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로 나와 북쪽(진행) 방향으로 100m/시내버스 109, 151, 162, 171, 172, 272, 7025번 타고 돈화문(비원) 또는 종로경찰서 앞에서 하차).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헌법재판소-손병희집터-현상윤집터-중앙고등학교(3.1만세운동기념비/숙직실)-김성수서울주택-만해당(유심사터)-대각사-탑골공원-이종일집터-천도교중앙교당-점심식사-승동교회-태화관터-기독교회관-종루-보성사터(이종일동상)-한성오집터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답사 도중 함께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합니다.

▲3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3.1만세운동의 현장>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1919년 3.1만세운동은 이전까지의 여러 민족운동의 흐름이 하나로 합류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크게 보아 동학농민혁명운동, 천도교민족운동의 흐름과 갑신정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애국계몽운동 등 개화파 민족운동의 흐름에 위정척사파의 의병운동 흐름도 합류한, 독립쟁취를 위한 민족대연합전선을 형성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민족운동 과정을 거치면서 민중들은 혁명의식이 고취되었고, 때맞춰 발생한 ‘조선왕조의 멸망’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주창이 ‘민족자주독립국가’에 대한 민중들의 간절한 열망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송진우, 현상윤 등과 최린이 모의를 했던 중앙학교 숙직실Ⓒ서울학교

3.1만세운동의 모태, 상해 신한청년당

1918년 8월 20일 상해에서 여운형, 장덕수, 김철, 선우혁, 조용은, 한진교 등 청년독립운동가들이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때마침 미국이 특사 크레인을 중국에 파견하여 제1차세계대전 후의 파리평화회담에 대하여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는데 그 내용은 “전후의 식민지 처리는 피압박민족의 의사와 민족자결의 원칙을 존중하여 처리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신한청년당은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여 한국 민족의 독립 의사를 발표하고 민족자결주의를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인 한반도에도 적용할 것을 요구하기로 하였습니다.

1918년 11월 28일 신한청년당 대표 여운형의 이름으로 <한국독립에 관한 진정서> 2통을 작성하여 미국 대통령 윌슨과 파리평화회의 의장에게 전달해 줄 것을 크레인에게 의뢰하였고 김규식을 신한청년단 대표 겸 한국민족대표로 파리평화회의에 파견하였으며 선우혁은 국내로, 장덕수와 조용은은 일본으로, 여운형은 만주와 러시아로 떠나, 국내는 물론 해외동포까지 일제히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습니다.

재미동포들은 1918년 12월 1일 <재미한인전체대표자회의>를 열고 파리강화회의에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 등 3인을 한국대표로 보내기로 결의하였으나 미국정부가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아 실현되지는 못했습니다. 뒤이어 재일본조선유학생학우회도 <조선독립청년단>을 구성하여 1919년 <2.8독립선언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러한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의 움직임은 <기독교청년회>와 미국선교사들에 의해 국내에 알려졌으며,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독립운동의 당위성에 고무되어 있던 차에, 건강했던 고종황제가 1919년 1월 21일 중병에 걸려 그 이튿날 붕어했다는 일본당국의 발표에 대하여 ‘일제의 고종독살설’이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가면서 마침내 3.1만세운동이 일어날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입니다.

국내 3.1운동은 천도교·중앙학교 중심으로 기획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극심한 탄압 속에서 제3세 교조에 오른 의암 손병희는 1905년 교명을 ‘천도교’로 개명하고 망명지 일본에서 1906년 귀국하였으나 이미 국운은 기울어 1910년 한일합병의 비운을 맞게 되자 민족구원을 위한 다양한 준비를 주도면밀하게 추진하여 마침내 3.1만세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손병희는 우선 천도교 교단 내에 민주적인 의사원제도를 실시하여 지방대표를 중앙에 상주시켜 유사시에 대비하고, 비밀리에 중앙대교당 신축안을 내놓아 교당신축 기금모금운동 명목으로 독립자금을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우이동에 봉황각 수도원을 짓고 그곳에서 지방대표 483명을 선발하여 7차례에 걸쳐 49일간씩 수행을 통해 정신적인 준비를 하게 하고, 전국의 교도에게 1919년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간 연성기도회(煉性祈禱會)를 여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한 다음 전 민족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에 대한 방략을 세웠습니다.

▲한용운이 머물렀던 <유심>지 편집실Ⓒ서울학교

천도교는 손병희와 최린, 중앙학교는 송진우와 현상윤

3.1만세운동은 초기에는 종교단체와 학생들이 각각 독자적으로 추진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한 천도교는 손병희를 중심으로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이 합류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합의를 보고 1월 하순 경 독립운동의 3대 원칙으로 대중화할 것, 일원화할 것, 비폭력으로 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2월 초에는 최린이 중앙학교의 송진우, 현상윤과 상의한 결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국민적인 여론을 모아서 일본 정부와 양원 및 조선총독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고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국제여론을 일으켜 일본에 압력을 가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천도교에서 주도한 3.1만세운동의 최초 계획은 각 종교단체와 대한제국 시대의 저명인사들을 민족대표로 내세우는 것이었는데, 박영효, 한규설, 윤용구, 김윤식, 윤치호 등을 교섭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한편 기독교는 평북 정주에 있던 이승훈을 교섭한 결과 2월 11일 이승훈이 상경하여 송진우, 신익희 등과 협의하여 천도교와 기독교가 원칙적으로 함께하기로 하였고, 최린이 평소 친분이 있었던 만해 한용운을 만나 불교도 함께 하기로 하였으며, 유림 측은 곽종석에게 참여를 권유했으나 교섭에 실패하였습니다.

하나 아쉬운 것은 3.1만세운동 당시에 심산 김창숙이 성태영에게 독립운동에 대하여 전해 들었으나 부모님의 병환으로 바로 상경하지 못하여 민족대표로 참여하는데 시기를 놓친 것입니다. 민족대표에 유림이 참여하지 못한 것을 통탄하며 김창숙은 유림 대표 137명이 서명한 독립진정서인 <파리장서(長書)>를 작성한 후 파리로 향했으나 파리로 떠나지는 못하고 상해에서 <파리장서>를 영어로 번역해서 파리강화회의와 해외 각국, 그리고 고국에도 보냈습니다.

기독교계는 이승훈 중심으로 박희도, 함태영이 주도

기독교의 움직임은 이승훈이 천도교와 함께하기로 원칙적으로 합의하였으나 그때 이미 기독교는 독자적으로 평안도의 장로교 계통과 서울의 감리교 계통의 두 갈래로 운동이 추진되고 있었습니다.

서울의 기독교계는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로 있던 박희도와 함태영이 감리교 계통의 인사들과 청년 학생들을 규합하였고, 이승훈은 평안도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각자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가 마침내 2월 21일 세브란스병원 내에 있는 이갑성의 숙소에서 기독교계 간부들의 동의를 얻어 24일 천도교 측에 통보하였습니다.

▲학생대표들이 모여 회의를 했던 승동예배당Ⓒ서울학교

불교계는 한용운과 중앙학림 학생들이 주도

불교는 만해 한용운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기에 만해가 주석하며 불교대중계몽지인 <유심(惟心)>을 1918년 9월부터 제3호까지 발행한 계동에 있는 유심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1911년 종로구 봉익동에 대각사를 개창하고 대각교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백용성을 2월 25일경 대각사로 직접 찾아가, 지금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각 종교계가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하려 한다고 하니, 백용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의기투합하게 됩니다.

한편 1918년부터 중앙학림(동국대 전신)의 강사로 재직하고 있던 한용운은 1919년 2월 28일 1만 장의 <독립선언서>를 인수받고 그날 밤 평소 자신을 따르던 중앙학림 학생들을 자신의 계동 집인 유심사로 모이게 하고 이들에게 <독립선언서>를 건네주며 3월 1일 오후 2시 이후에 시내 일원에 배포하도록 당부하였는데 이때 학생들은 김봉신, 신상완, 백성욱, 김상헌, 정병헌, 김대용, 오택언, 김법린, 박민오 등입니다.

만해에게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은 중앙학림 학생들은 사태가 시급함을 느끼고 인사동에 있던 범어사 포교당으로 자리를 옮겨 긴급회의를 하여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협의한 결과, 가장 연장자인 신상완을 총참모로 추대하였고, 백성욱과 박민오는 참모로 중앙에 남아서 연락책을 겸하여 진두지휘하게 하였으며 나머지 학생들은 각자 연고가 있는 지역의 사찰로 내려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는 이들 중앙학림 학생들에 의해서 마련되었는데 김법린과 김상헌은 동래 범어사를, 오택언은 양산 통도사를, 김봉신은 합천 해인사를, 김대용은 대구 동화사를, 정병헌은 구례 화엄사를 책임지고 만세운동을 주도해 나갔기 때문입니다.

서울 시내를 담당한 학생들은 3월 1일 새벽 3시에 각각 회의장을 떠나 시내 포교당과 서울 근교의 사찰을 돌아다니며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지방을 담당한 학생들은 3월 1일에 있은 서울 시내의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제각기 지방 사찰로 향하여 지역별 만세시위운동을 지도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중앙학림은 3.1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강제 폐교까지 당하게 됩니다.

학생운동은 보성전문 강기덕, 연희전문 김원벽이 주도

한편 학생들의 움직임은 기독교 측의 박희도가 주동이 되어 보성전문학교 졸업생 주익과 재학생 강기덕, 연희전문학교 김원벽과 윤화정, 경성전수학교 윤자영, 세브란스의전 이용설, 경성공전 주종의, 경성의전 김형기 등 8명을 관수동 대관원(大觀園)에 초대하여 대체적인 합의를 보았습니다.

이후 각자의 학교와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을 규합하기로 하고 주익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려던 차에 종교계의 통합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에 학생들도 합류하기로 하고 그 원고를 김원벽이 승동예배당에서 불태워버리고 마침내 종교계와 학생들이 참여한 3.1만세운동의 지도부가 형성되었습니다.

▲밤새워 독립선언문을 인쇄한 보성사 사장 이종일 동상Ⓒ서울학교

최남선의 <독립선언문>에 한용운 <공약삼장>을 추가

지도부가 구성되자 제일 먼저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의 선정 작업에 들어갔는데, 천도교 측에서는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이종일, 박준승, 나인협, 임예환, 이종훈, 권병덕, 양한묵, 김완규, 홍기조, 홍병기, 나용환 등 15명, 기독교 측에서는 이승훈, 양순백, 이명룡, 유여대, 김병조, 길선주, 신홍식, 박희도, 오화영, 정춘수, 이갑성, 최성모, 김창준, 이필주, 박동완, 신석구 등 16명, 불교 측에서는 한용운, 백용성 등 2명으로 민족대표 33인이 결정되었습니다.

최남선에게 의뢰해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 위해 민족대표 33인이 모인 자리에서 천도교 손병희 교주, 기독교장로회 길선주 목사, 기독교감리회 이필주 목사, 불교계 백용성 스님이 차례로 서명한 뒤 남은 대표들은 이름의 가나다순으로 배열하여 날인하였습니다.

지도부에 속했으나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과 개인 사정과 거사 이후 독립운동을 추진해 나갈 인물들은 <독립선언서>의 서명에 빠졌는데, 중앙학교의 송진우와 현상윤, 정노식, 김도태, 최남선, 임규, 박인호, 노헌용, 김홍규, 이경섭, 함태영, 안세환, 김세환, 김지환, 강기덕, 김원벽 등 16명이었습니다.

특히 최남선은 학자로서 일생을 마치고 싶다며 독립운동의 전면에는 나서지 않고 <독립선언서>만 작성하겠다고 하자 최린과 현상윤이 이에 찬성하여 최남선은 민족대표에서는 빠지고 <독립선언서>만 작성하여 최린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이에 한용운이 독립운동을 책임지지 않을 사람이 선언문을 작성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다시 쓰겠다고 하였으나 이미 탈고된 상태여서 할 수 없이 <독립선언서> 마지막에 만세운동의 행동 지침인 <공약삼장(公約三章)>의 내용을 한용운이 첨가하였습니다.

인쇄소 사장 이종일은 밤새워 인쇄

완성된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普成社)에서 27일 공장장 김홍규가 채자(採字)하고 사장 이종일이 교정을 본 후 2만1천 부를 인쇄하여 경운동 이종일의 집에 보관해 두었다가 28일 아침, 지도부 학생들이 승동예배당에 모여 종로 이북은 불교 학생이, 종로 이남은 기독교 학생이, 남대문 밖은 천도교 학생이 맡아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기로 하였습니다.

보성사는 1910년 말 창신사와 보성학원 소속 보성사인쇄소를 합병하여 만든 천도교 계통의 인쇄소로서, 종로구에 있는 조계사 경내에 있었으며 기념비와 이종일의 동상은 현재 조계사 후문 맞은편 근린공원에 세워져 있습니다.

거사일은 고종황제의 국장일인 3월 3일로 하려고 했으나 국장일에 거사하는 것은 불경이라 하여 하루 전날로 당기려 하니 기독교 측에서 그날은 일요일이므로 피하자고 하여 결국 3월 1일로 정해졌습니다.

2월 28일 밤에 33인 대표 중에 20여 명이 재동에 있는 손병희 집에서 거사 계획에 대한 최종 검토를 한 결과, 33인 대표가 아님에도 모임에 참석한 함태영이 제안하여, 3월 1일 오후 2시에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을 선언하기로 한 최초의 계획을 인사동에 있는 명월관 분점인 태화관에서 거행하기로 수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학생과 민중이 많이 모여 일본 경찰과 무력 충돌이 염려되어 지도부만 따로 모이기로 하였습니다.

▲학생과 대중이 운집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탑골공원 팔각정Ⓒ서울학교

거사일은 국장일과 일요일을 피해 3월 1일로 결정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는 보성전문학교 강기덕과 연희전문학교 김원벽이 미리 연락하여 오전 수업만 마치고 학교별로 모여든 4, 5천 명의 학생들이 팔각정에 태극기를 내걸고 오후 2시가 되기를 기다렸으나 탑골공원으로 합류하기로 한 민족대표들이 예정을 바꾸어 현장에 나오지 않자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습니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世界萬邦)에 고(告)하야 인류평등(人類平等)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고(誥)하야 민족자존(民族自存)의 정권(政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

한편 정오에 명월관의 지점인 태화관에서는 민족대표 33인 중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 등 4인이 빠진 29명이 모여 점심식사 후, 오후 2시가 되자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최린이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있노라고 총독부에 전화를 걸게 하여 모두 경찰에 연행되어 갔습니다.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마친 학생과 군중들은 가두시위 행진을 하였는데 때마침 국장(國葬)으로 전국에서 올라온 민중들이 합류하여 수십만 명이 서울 시내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행진하다가 날이 저물 때쯤에는 교외로 퍼져나갔습니다. 오후 8시경에는 마포 전차종점 부근에서, 밤 11시쯤에는 연희전문학교 부근에서 만세운동이 이어졌으며 <공약삼장(公約三章)>에서 밝힌 바와 같이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으로 시위하여 단 한 건의 폭력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참가자 106만여 명, 사망자 7,509명, 구속자 46,948명

일제는 이러한 비폭력 평화적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경찰과 헌병 이외에도 용산에 주둔한 보병 3개중대와 기병 1개소대를 동원하였으나 결사적으로 행진하는 시위대에 의해 저지선이 뚫려 할 수 없이 주동자로 보이는 학생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시위가 과격한 양상으로 발전하여 시위대가 일본 경찰파출소를 투석 습격하게 되고 이에 일제의 군경은 시위대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기에 이릅니다. 일제 군경의 발포로 말미암아 4월에 접어들면서 시위가 현저히 줄어들고 표면적인 시위운동에서 비밀결사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산발적으로 약 3개월 정도 시위가 계속됩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기록에는 집회 참여인원이 106만여 명이고 그중 사망자 7,509명, 체포 구속자가 46,948명이었고 47개의 교회당과 2개의 한국인 학교, 715채의 민가가 일제에 의해 소각당했습니다. 박은식이 1920년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1,524회의 집회가 있었으며 당시 1,700만 동포 중에 연인원 202만 3천여 명이 시위에 나선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대체로 50명 이상의 집회만 계산한 것으로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참가하였습니다.

3.1만세운동은 단순한 시위운동에 그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지식인들의 대중선전투쟁, 상인들의 철시투쟁,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동맹휴학으로 이어졌습니다.

▲한성임시정부 선포식이 열렸던 종루Ⓒ서울학교

3.1만세운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을 촉발

이후 3.1만세운동은 지도부가 대부분 투옥되어, 통일적인 항쟁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새로운 조직체가 요구되었으므로 이에 부응하여 국내에서는 4월 23일에 한성임시정부가, 상해에서는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러시아에서는 3월 17일에 대한국민의회가 수립되었고 간도에는 군정부(軍政府)가 조직되었습니다.

국내 조직인 한성임시정부는 해외의 다른 조직보다는 늦게 구성되었지만, 전국 13도 대표의 국민대회 명의로 수립된 것으로 3.1운동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한성임시정부의 계획은 3월 17일경에 한남수, 홍면희, 이규갑, 김사국 등이 내자동 한성오의 집에 모여 논의하였는데 한성오는 당시 현직 검사로, 전직 검사출신 변호사 홍면희와 친분이 있어 자신의 집을 모임 장소로 제공했습니다.

이때 결정 사항은 각 독립운동단체를 망라하여 국민대회를 통해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기로 하고 천도교 안상덕, 기독교 박용희, 장붕, 이규갑, 유교 김규, 불교 이종욱을 대표로 선정하여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자대회를 열어 한성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추진단계에서 계획이 수정되어 날짜는 4월 23일, 장소는 서울 시내 서린동에 있는 중국음식점인 봉춘관(奉春館)에서 ‘국민대회’를 열기로 하였으며, 마침내 4월 23일 봉춘관에 13도 대표 24명이 모여 <임시정부 선포문>과 <국민대회 취지서>, 결의사항, 각원 명단과 파리강화회의 대표, 그리고 6개 조로 된 약법(約法)과 임시정부령 제1, 2호를 발표하였습니다.

이후 가까이에 있는 종루에 모여 선포식을 거행하여 비로소 명실상부한 한성임시정부가 탄생하였는데 이미 수립된 상해임시정부와 연해주 대한국민의회가 있어 3개의 임시정부가 생겨났습니다. 임시정부의 이러한 난맥상을 극복하기 위해 국내, 미주, 중국, 러시아의 교포 대표자들이 상해에 모여 논의한 결과 3.1만세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법통은 한성임시정부를 계승하고 위치는 상해에 둔다고 결의하여 비로소 단일대오로서 상해임시정부가 1919년 9월 15일에 탄생하였습니다.

특히 한성임시정부의 <선포문>과 당시 <국민대회 취지서> 및 약법의 원본은 1986년 4월 서울 종로구 이화장(梨花莊)에 있는 이승만의 유품 속에서 처음으로 발견 공개되어, 한성임시정부의 수립과 선포를 문헌으로 뒷받침하는 귀중한 사료가 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서울학교 기사(3월)를 확인 바랍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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