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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불행히도 현재 진행형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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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불행히도 현재 진행형 문제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복지 설계, 어떻게 하느냐에 한 사람 삶 무너질 수도 있다"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의 실업급여와 고용서비스 체계의 문제점을 고발한 영화다. 성실하게 일해 온 목수였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장질환으로 기존의 일자리에서 일하기 어렵게 되었고, 장애급여를 신청한다. 그러나 다니엘은 복잡하고 비전문적인 장애급여 수급자격 확인 과정에서 탈락하고, 어쩔 수 없이 구직의무 등의 조건이 부과되는 실업급여를 신청한다. 전산화된 자격 관리 절차에 어려움을 겪던 그는 결국 건강상태 문제로 수급조건을 이행하지 못해 실업급여마저 정지된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기본적인 사회권조차 보장받을 수 없게 된 다니엘 블레이크는 행정소송에 임하지만, 결과가 채 나오기 전에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난다.

비록 가상의 인물이지만 다니엘 블레이크의 삶은 복지제도의 설계가 어떻게 성실하게 살아온 한 사람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다니엘 블레이크의 비극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현재 진행형의 문제다.

▲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실업급여와 '도덕적 해이’

실업급여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다른 소득보장제도에 비해 늦게 도입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실업이 ‘개인의 나태’로 인해 발생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업이라는 사회적 위험은 고령이나 장애와 같은 다른 사회적 위험과 달리 실업자 개인이 취업하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하여 발생한다는 의심을 받아왔다. 이른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의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거의 모든 발전된 국가들이 실업급여 제도를 갖추고 있다. 이는 수차례의 경제위기와 반복되는 경기순환을 경험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업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서구 복지국가에서 실업보험은 경기침체나 경제위기 이후 도입되었다. 우리나라의 고용보험은 경제위기 이전인 1990년대 중반에 도입됐지만 그 적용범위가 급속하게 확대된 것은 1990년대 후반 경제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언제나 도적적 해이와 결부되는 실업이라는 사회적 위험의 특성은 이 제도가 다른 제도와는 상이한 규칙들을 갖게 하였다. 많은 국가에서 실업급여는 수급기간이 제한되어 있으며, 수급자에게 구직활동, 적절한 일자리의 수용, 직업훈련 참여와 같은 의무가 부과된다. 이는 실업급여가 사회보험 제도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인데, 사회보험은 보험료 납부를 통해 수급권이 획득된 것이라고 보아 급여 지급 사유가 지속되는 한 계속 지급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일단 수급연령에 도달하면 사망할 때까지 급여를 지급하는 연금제도가 대표적이다. 실업이라는 사회적 위험의 특성이 제도 설계에서 고려된 것이다.

1990년대의 '활성화 전환(activation turn)'

많은 고소득 국가들이 경기침체와 신자유주의 시대를 겪은 1970~80년대 이래 유럽의 복지국가들에서 실업급여를 포함한 복지제도에 대해 다양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실업률과 실업기간이 동반 증가하는 위기에 놓인 실업급여에는 수급기간과 급여수준의 삭감, 수급자의 구직의무와 위반 시 제재(sanction) 강화, 고용서비스와 직업훈련을 통한 재취업 촉진 등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흔히 실업급여와 같은 소득보장을 소극적 노동시장 정책(passive labor market policy)이라고 하고 고용서비스나 직업훈련 등 재취업을 위한 활동을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active labor market policy)이라고 하는데, 80~90년대 이래의 실업급여 개혁 방향은 후자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활성화 전환(activation turn)으로 불린다.

활성화를 위한 정책은 실업자의 재취업과 노동 연령대 인구의 고용률 제고를 목표로 한다는 공통적점이 있지만 정책수단별로 성격에 차이가 있다. 실업급여의 수급기간, 급여수준 축소나 수급자의 구직의무 강화는 실업급여를 축소함으로써 수급자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부정적 활성화(negative activation)로 불린다. 이와 달리 고용서비스나 직업훈련에 대한 투자를 통해 구직자의 취업가능성 및 취업기회를 확대하는 접근은 긍정적 활성화(positive activation)로 불린다.

철학적으로 보면 부정적 활성화는 실업급여 수급자의 의지와 노력, 적극성이 부족해서 취업하지 못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실업이라는 사회적 위험의 '도덕적 해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적극적 활성화는 이와 달리 구직자에게 충분한 취업기회와 취업을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에 초점을 둔다. 경기침체나 경제위기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거나 노동시장에서 양질의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을 경우 부정적 활성화는 단지 실업자의 사회적 권리를 침식하거나 이들을 열악한 일자리로 밀어내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긍정적 활성화는 실업자들의 재취업을 위해 이들의 사회적 권리를 쥐어 짜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기회와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실제로는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긍정적·부정적 활성화 정책이 동시에 활용되었다. 그러나 그 정도에는 차이가 있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고향인 영국의 경우 주로 부정적 활성화에 초점을 맞춘 활성화 전환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저임금 노동, 근로빈곤, 반복실업 등의 문제를 피하지 못했다. 유연안정성 모델로 유명한 덴마크의 '황금삼각형(golden triangle)’은 유연한 노동시장을 두터운 실업급여와 잘 설계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으로 뒷받침했다. 실업급여 삭감이 없었던 것을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긍정적 활성화에 초점을 둔 정책 조합이다.

긍정적 활성화와 부정적 활성화 중 어느 쪽에 좀 더 초점을 둘지는 각 국가의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긍정적 활성화의 정책수단인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에 관한 연구들은 고용서비스와 직업훈련이 대체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보고한다. 특히 고용서비스의 경우 잘 운영될 경우 부정적 활성화를 최소화하면서 도덕적 해이도 줄일 수 있다. 만약 원래 실업급여제도가 너무 관대해서 도덕적 해이가 심각했다면 부정적 활성화도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재정절감이나 단기적인 수급자 감소가 주된 목표가 아니라면, 부정적 활성화는 적어도 긍정적 활성화와 결합되어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실업자의 사회적 권리를 지나치게 침식하지 않는다.

정부의 고용서비스 고도화 방안과 '부정적 활성화’

고용노동부가 지난달 27일 고용서비스 고도화 방안을 발표했다. 이 방안은 그간 우리나라의 노동시장 정책이 지나치게 현금급여 중심이었다고 지적하고,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중심으로의 방향전환을 제시하였다. 이를 위한 정책들로 고용센터의 전문성을 높이고 구직자를 위한 고용-복지 연계 및 역량지원 서비스를 강화하는 '긍정적’ 접근과 구직의무 및 관련 제재를 강화하고, 반복수급자의 급여를 삭감하는 등의 '부정적’ 접근을 모두 나열하였다. 이 방안에 담기지는 않았지만 부정적 활성화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 현재 최저임금의 80%인 구직급여의 하한액을 더 낮출 예정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표면적으로 고용서비스 고도화 방안에는 긍정적 접근과 부정적 접근이 함께 제시됐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과연 양자의 균형이 맞는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 고용서비스의 전문성을 높인다는 방향은 제시했지만, 이를 위해 필수적인 과제인 인력과 인프라 강화는 외면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보고서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GDP 대비 고용서비스 지출은 0.05%로 OECD 평균인 0.13%에 비해 현저히 낮다. 공공고용서비스 지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인력과 인프라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를 확대하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경제활동인구 대비 공공고용서비스 인력은 독일의 12분의 1, 프랑스의 11분의 1, 일본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인력의 전문화도 중요하지만, 인력이 이렇게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좋은 서비스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사실 인력과 인프라 문제는 오랫동안 관련 영역의 전문가들이 지적해왔음에도 이번 방안에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는데, 공공부문 인력 줄이기에 열성인 현 정부의 정책방향과 맞지 않기 때문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이번 방안에서 공공고용서비스 고도화를 위해 제시된 다른 방안들인 고용-복지의 연계 강화, 경력설계 및 역량 지원, 디지털 기반 업무 효율화, 상담 인력 교육, 민간 고용서비스와의 협업 강화 등은 모두 필요한 과제인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에도 늘 이야기되어 온 새롭지 않은 해법이다. 공공고용서비스 인력과 인프라의 확대 없이 이런 방안들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을지, 실질적인 고용서비스 고도화로 이어질지 우려된다.

이렇게 보면 결국 이번 방안에 제시된 새로운 접근은 실업급여의 수급자 관리와 관련된 제재를 강화하고, 실업급여 반복수급을 제한하며, 어쩌면 급여수준까지 낮출지도 모르는 부정적 활성화에 있다. 정책당국은 기본적으로 실업급여 수급자의 도덕적 해이가 취업률이 더 높아지지 않는 핵심 원인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OECD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의 장기실업률은 낮고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높다. 실업자들이 실업 상태에 오래 머물기보다는 저임금 일자리라도 빨리 취업하는 것을 선택하고 있다는 의미다. 물론 여기에는 고용보험의 사각지대, 너무 짧은 실업급여 수급기간 등의 문제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개인의 '도덕적 해이’에 의한 실업의 장기화 가능성이 우리의 고용정책이 개선해야 할 최우선 과제인지는 의문이다.

한국의 ‘다니엘 블레이크’?

어떤 복지제도에서나 부정수급, 도덕적 해이 문제는 발생하기에 이를 관리하는 것은 제도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중요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리가 수급자의 권리를 침식할 가능성과 그에 대한 대안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을 경우 부작용도 크다. 부정적 활성화는 노동시장 정책 영역에서 수급자의 권리를 침식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긍정적 활성화 정책이 충분히 갖추어져야 하는 데 현재 제시된 정부 방안은 표면적 선언과 달리 실제 그런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의 기존 실업급여 정책이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 장기실업률도 높지 않다는 점, 최근 경제상황이 좋지 않아 취업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등을 고려하면 한국에서의 ‘활성화 전환'은 긍정적 활성화에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정부의 고용서비스 고도화 방안을 두고 "한국의 다니엘 블레이크를 발생시킬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영국 복지국가에 대한 지나친 폄훼이자, 한국 복지국가에 대한 과도한 상찬이다. 영국이 다른 유럽 주요국에 비해 복지제도가 두텁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GDP 대비 복지지출은 우리의 1.5배가 넘는다(2021년 기준). 또한 우리의 복지제도 중 많은 수는 엄격한 자산조사 등의 원인으로 한국의 다니엘 블레이크들을 발생시키고 있다. 따라서 공정한 표현은 이 방안이 "가장 권리적인 제도인 사회보험 영역에서도 다니엘 블레이크를 증가시킬 것"이라는 우려일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하나의 '방안'이 제시되었을 뿐이다. 정부가 이 글의 우려와는 다른 정책들을 실현하여 우려를 기우로 만들기를 기대해 본다.

*내가만드는복지국가는 의제별 연대 활동을 통해 풀뿌리 시민의 복지 주체 형성을 도모하는 복지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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