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 제94강은 조선시대에 경상감영이 있었고 조선 중기의 3대 시장 중의 하나인 대구장이 열린, 명실상부한 경상도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던 대구고을로 갑니다. 대구는 광역시가 되면서 그 행정구역이 넓어져 역사유적을 하루에 둘러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므로, 이번 답사는 대구읍성과 경상감영이 있었던 중구를 중심으로 진행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94강은 2023년 2월 26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94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서대구IC-달성공원(달성/달성서씨유허비/관풍루/망경루/이상화비/왕산허유순국비/석주이상룡구국기념비/최제우동상)-경상감영공원(하마비/선화당/측우대/징청각/비림)-우옥터-좌옥터-점심식사 겸 뒤풀이(따로국밥집)-대구근대역사관-사직단-이상화·서상돈고택-옛구암서원-국채보상운동기념관-대구향교-영남제일관-구암서원-북대구IC-서울의 순입니다.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최종 백신접종을 완료하시고,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94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팔공산과 주변 산지들이 둘러싼 분지
대구의 지형은 북쪽으로 팔공산(1,192m), 환성산(809m)이, 동쪽으로 용암산(379m), 초례봉(636m)이, 남쪽으로 대덕산(660m), 비슬산(1,084m), 최정산(915m)이, 서쪽으로 와룡산(660m) 등이 연봉을 이뤄 형성된 분지입니다. 지형 구조는 팔공산과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상 산지가 뻗어있는 북부 산지와, 낙동강 좌안의 다사, 화원, 옥포, 논공, 현풍지역의 서부 평야와, 신천 범람원의 중앙 저지대와 신천 범람원 양편의 해발 100m 미만의 구릉지로 구분됩니다.
대구의 물줄기는 신천 등 중소 하천들이 주변 산지에서 발원하여 짧은 유로로 급류천을 형성하여 금호강과 낙동강에 합류합니다. 금호강은 포항에서 발원하여 영천, 경산을 지나 대구 도심을 동에서 서로 관통하여 낙동강에 합류하고, 낙동강은 태백산에서 발원하여 안동, 구미, 왜관을 지나 대구의 동서로 흐르는 금호강과 합류하여 밀양을 지나 부산 사하구에서 남해로 흘러듭니다.
기원전 1세기 달구벌국이 있었다
대구는 금호강과 신천으로 둘러싸인 기름진 들판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살기 좋은 자연적 조건을 갖추어 이 고장의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대구에는 지금의 달성 토성을 중심으로 한 달구벌국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첨해이사금 15년(261)에 달벌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에 속한 큰 읍으로 발전했을 것입니다.
4세기경이 되면 삼국이 정립하게 되고, 지금은 주택가가 들어서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비산동과 내당동 일대에는 87기의 삼국시대 고분들이 일제강점기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이 고분에서는 경주와 유사한 양식의 금동관, 금제 귀걸이 등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어 대구지역 중심집단의 무덤인 것으로 보이며, 이 밖에도 불로동 고분군, 구암동 고분군, 성산리 고분군 등이 존재해 신라에 통합되기 전 대구지역에 여러 정치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경주에서 달구벌로 천도 움직임도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689년(신문왕 9)에 신라의 도읍을 경주에서 달구벌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을 만큼 대구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신라의 오악 가운데 팔공산을 중악으로 숭배했던 점 등으로 보아도 그 당시 대구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행정체계인 군현체제 아래서 대구는 위화군과 달구화현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757년(경덕왕 16)에는 위화현이 수성군으로, 달구화현이 대구현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대구(大丘)'라는 지명이 기록에 나타나게 됩니다.
후삼국시대에는 왕건과 견훤이 수도 경주를 차지하기 위해 팔공산에서 접전을 벌인 ‘공산전투’가 일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이는 대구가 신라 말까지도 왕경인 경주와 지방을 연결하는 군사, 교통의 요충지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려 초기의 대구지역은 수성군, 대구현, 해안현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대구현은 수성군에, 해안현은 장산군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후 1143년(인종 21) 대구현에 현령관이 파견되면서 점차 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무신정권기에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났을 때 대구가 그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고, 몽골 침입기에는 부인사에 소장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었으며 전란을 피하여 팔공산 공산성에서는 항쟁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는 1419년(세종 1) 대구현이 대구군으로 승격되었으며, 1448년(세종 30)에는 복지제도인 사창(社倉)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설치되어 시범 운영되기도 하였습니다. 1466년(세조 12)에는 도호부가 설치되어 군사적 중심지로서 그 역할이 높아지게 되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대구에서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대구 객사 주변에 약재시장 개설되면서 약령시의 효시
1601년(선조 34)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어 해안현, 하양현, 경산현, 수성현, 화원현, 하빈현을 거느렸습니다. 1658년(효종 9)에는 대구 객사 주변에 약재시장이 개설되면서 약령시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이후 1895년 지방제도의 개혁으로 8도에서 23부로 개편됨에 따라 대구관찰부가 설치되어 예하 23개 군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듬해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대구부는 대구군으로 개칭되는데, 부청 소재지로서 그 관할구역과 지위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을사늑약으로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1906년 대구 이사청이 설치되는 등 일제의 국권 침탈은 가속화되었고 1910년 이사청을 폐지하면서 대구군은 다시 대구부로 바뀌게 되며, 부제는 1945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항일투쟁의 거점, 4·19혁명의 도화선
1907년 대구의 서상돈, 김광제 등이 중심이 되어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금연, 금주로 되찾으려는 평화적이고 자발적인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여 전국적인 호응을 받았습니다. 또한 1915년 서상일 등은 영남지역의 독립투사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대구지역의 3·1만세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1927년에는 신간회 대구지회가 결성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의열단원 장진홍에 의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을 비롯하여 1930년대 이후에도 학생들의 비밀결사 운동이 계속되었고,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위한 지속적인 항일투쟁이 전개되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이듬해 지방자치법에 따라 대구부는 대구시로 개칭되었으며, 1960년 이승만 정부의 독재가 계속되자, 대구지역 학생들은 2월 28일 독재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였는데 2·28민주운동은 이후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와 더불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1981년에는 달성군의 월배읍, 성서읍, 공산면, 칠곡군의 칠곡읍, 경산군의 안심읍, 고산면을 편입하여 대구직할시로 승격하였고 1995년에는 달성군을 편입하여 대구광역시가 되었습니다.
달구벌의 중심은 달성
달성(達城)은 평지의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삼국시대의 성곽입니다. 높이는 일정치 않으나 4m 정도이며, 둘레는 약 1,300m입니다. 성벽의 아랫부분에서 초기 철기시대의 조개더미와 각종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지방의 유력세력이 성장하여 초기적 국가 형태를 이루면서 쌓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경주의 월성처럼 평지에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것으로 보아 달성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초기 성곽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쌓았고, 성벽 윗부분에는 큰 돌덩어리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어 후대에 수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안에는 조선시대 전기까지 군수창고와 우물, 연못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의 서남쪽으로 연결된 구릉지대에는 돌방무덤(석실분)이 많이 흩어져 있고, 무덤에서 금동관을 비롯한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달성 토성과 더불어 공원 내 주요시설로는 향토역사관, 달성서씨 유허비, 이상화 시비, 왕산 허위 순국기념비, 석주 이상룡 구국기념비, 최제우 동상 등이 있습니다.
왕산 허위는 구한말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정미의병 당시 '서울진공작전'을 주도하였는데 일제의 사전 봉쇄로 작전은 실패했지만, 당시 진격했던 동대문에서 청량리 구간은 1966년 이후 그의 호를 따 왕산로로 불리고 있습니다. 1908년 일제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옥사 이후 구미 임은동의 허씨 일족은 일제의 핍박을 피해, 만주로 이주했고 현재 국내를 비롯하여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질녀는 시인 이육사의 부인입니다.
석주 이상룡은 안동 태생으로 청년 교육과 독립군 양성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입니다.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였으나 사상적 대립과 파쟁으로 사임하고 서간도에서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통합운동을 지도하다 1932년 5월 길림성에서 사망했습니다.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의 대명단
대명단 터는 명나라 장수로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이 살았던 동네에 단을 쌓고 명나라 천자에게 예를 올렸던 대명단이 있었던 곳입니다.
두사충(杜師忠)은 중국 두릉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함께 원군의 일원으로 조선에 와서 지세를 살펴 군진을 펴는 일을 주요 임무로 삼았던 장수입니다. 임진왜란이 평정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매부인 진린과 함께 다시 조선으로 건너온 후 정유재란이 평정되자 매부 진린을 압록강까지 배웅한 후 “차라리 남아서 조선사람이 될지언정 오랑캐(청나라)의 신하는 될 수 없다”라고 하며 조선에 귀화했습니다.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정에서는 그에게 현 경상감영공원 일대를 식읍으로 주고 거기서 살도록 했습니다. 이곳에 경상감영이 옮겨 오게 되자 그는 계산동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때부터 계산동 일대가 두씨의 세거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두사충은 이후 조선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였지만 두고 온 고국의 처자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거처를 다시 최정산(현 대덕산) 밑으로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이라 짓고 단을 쌓아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명나라 천자를 향해 예를 올렸다고 하는데 대명단은 여기서 유래된 것으로 지금은 ’대명동‘이란 행정동 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모명재(慕明齋)는 두사충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세운 재실로 그의 호인 '그리워할 모(慕)' '명나라 이름 명(明)'자를 써서 ”명나라를 그리워 한다“는 의미입니다. 대구를 방문하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 재정비 사업을 통해 새롭게 단장되었습니다.
대구읍성은 일제가 훼철
대구읍성은 1590년(선조 23)에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쌓은 토성으로, 청도, 영천, 안동, 상주, 부산, 동래, 진주 등의 읍성과 같이 만들어졌고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으며, 1736년(영조 12) 석성으로 다시 축성되었습니다.
성의 둘레는 약 2,650m, 성곽의 폭은 약 8.7m, 여첩 819개, 높이는 서남쪽 18척(약 3.8m), 동북쪽 17척(약 3.5m)입니다. 남문인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서문인 달서문(達西門), 동문인 진동문(鎭東門), 북문인 공북문(拱北門)과 동소문과 서소문 등 총 6개의 문을 두었으며, 네 모퉁이에는 동장대인 정해루(定海樓), 서장대인 주승루(籌勝樓), 남장대인 선은루(宣恩樓), 북장대인 망경루(望京樓)의 4개의 장대를 세워 경계 기능을 담당하였습니다.
공사 기간은 약 6개월이며, 동원된 인원은 78,534명, 성이 완성된 뒤에는 여러 장수들을 모아 활쏘기 대회를 열었고, 영남제일관 앞에서 큰 연회를 열어 공로에 따라 시상하였다고 합니다. 1906년 읍성이 철거될 때 성문들도 함께 철거되었으나 유일하게 영남제일관만 동구에 있는 망우공원에 복원되어 있습니다.
1904년 12월 27일 경부철도 완공과 더불어 1905년 1월 1일 대구역이 개업하면서 북문과 동문 바깥에 터전을 잡고 있던 일본인 상인들은 중심부로 상권을 넓히기 위해 성벽이 성의 내외를 나누어 교통이 불편하고 도시 성장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주장하며 읍성의 철거를 요구하였습니다.
일본인 상인들과 일본군 수비대들은 읍성의 허술해진 부분부터 철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구 군수 겸 관찰사 서리였던 박중양과 일본거류민단은 “읍성의 철거를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조정의 통지가 도착하기도 전에 성벽을 거의 철거해버렸습니다.
북성로에는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상점이 많았습니다. 대구 최초의 백화점 미나카이가 들어섰고, 장신구점, 석유점, 철물점, 양복점, 목욕탕 등 다양한 상점이 문을 열었습니다. 대구역과 가까웠기 때문에 물류들이 모이고 빠져나가는 대형 창고들이 들어섰고, 도매상들은 북성로 일대에 밀집해 있었습니다.
철거된 읍성 자리에는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의 도로가 만들어졌습니다.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북부와 동부 지역은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조선인들이 살고 있던 남부와 서부는 기존의 모습에서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북문과 태평로 및 동문 밖 일대에 격자형 가로망이 새롭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동, 북쪽의 신시가지와 남, 서쪽의 구시가지 사이에는 경관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대구읍성이 철거된 이후 폭 9~10m의 신작로가 들어섰습니다.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읍성 밖 땅값이 폭등했고, 십자 대로(지금의 중부경찰서 네거리)를 따라 행정관청이 들어섰으며, 주변으로는 일본인 상권이 크게 발달했습니다. 중앙로에는 극장, 여관, 양복점, 잡화점 등의 상점들이 많이 들어섰습니다.
대구장은 조선 중기 3대 장터의 하나
달서문 밖에는 서문시장이 있었는데 옛 이름은 ‘대구장’으로, ‘평양장’ ‘강경장’과 더불어 조선 중기 전국 3대 장터 중 하나였습니다. 1920년 서남쪽에 있던 성황당 못을 매립하여 오늘의 위치로 옮겼습니다.
연한 팥색을 띠는 읍성의 성돌은 습지 매립이나 건축물의 초석으로 이용되었으며 가정과 식당의 정원과 계단에서도 대구읍성 성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재 ‘성돌 모으기 운동’을 통해 400여 개의 성돌을 모았으며, 역사의 품으로 되돌려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경상감영 터엔 선화당, 측우대, 징청각 남아 있어
대구읍성 안 북동쪽에는 경상도의 정치, 행정, 군사의 중심이 되었던 경상감영이, 북서쪽에는 관리들이 머물던 객사인 달성관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읍성 남서부와 동남부를 중심으로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각 도에 관찰사를 파견하여 지방 통치를 맡게 하였는데, 대구 경상감영은 조선 후기 경상도를 다스리던 지방관청으로 관찰사가 거처하던 곳이었습니다. 경상도에는 조선 태종대부터 조선 전기까지는 별도의 감영이 없이 관찰사가 도내를 순력하였으며, 1601년(선조 34) 대구에 감영이 설치되면서 이곳에서 정무를 보았습니다.
경상감영은 조선 초 경주에 있다가 상주로 옮겨 임진왜란 때까지 유지됐습니다. 당시 감영은 감사가 순찰 도중에 머무는 정도의 시설만 있을 뿐이었으며 신구 감사가 교대하는 장소도 감영이 아니라 도 경계인 조령이었습니다. 경주에 있던 감영을 상주로 옮긴 것도 문경 새재와 가깝다는 지리적 여건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상주에 있던 경상감영은 임진왜란으로 지리, 군사, 경제 측면에서 대구의 중요성이 부각되자 1601년 현재의 자리에 정착했습니다.
대구에 자리 잡은 경상감영 건물은 세 번의 큰 화재를 겪었는데 특히 1806년 화재는 징청각 23칸, 선화당 36칸, 여수각 12칸, 내아 36칸, 연초당 13칸, 좌우 익랑 36칸, 공고(公庫) 28칸 등 모두 184칸을 전소시켰습니다. 화재 이후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선화당, 징청각, 관풍루 정도입니다. 선화당과 징창각은 1807년 순조 34년에 중건하여 1970년 보수하였고 관풍루는 1906년 대구읍성이 헐리면서 달성공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경상감영지에는 경상감영의 중심건물인 선화당과 징청각이 본래 위치에 잘 보존되어 있고 발굴조사 결과 감영지로 확인됨에 따라 임진왜란 이후 8도의 관아 구성을 잘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달성관(達城館)은 객사로 국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한 정전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숙박하는 건물을 합친 시설을 말합니다. 관찰사는 초하루와 보름,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달을 보면서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리는 한편,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하였습니다.
선화당(宣化堂)은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최상위 관직자인 종2품 관찰사가 파견된 경상도 감영의 정당으로 이름에는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한다(宣上德而化下民)”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1807년에 중건된 이후 몇 차례의 수리를 거치면서 다소 규모의 변화가 보이나 대체로 건립 당시의 건축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공포와 부재 가공기법은 전반적으로 1807년 중건 시기를 잘 반영하고 있어 조선 후기 지방 관아건축의 형식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1807년 중수공사 당시 자재 조달을 다룬 문서가 뒷받침되어 중건의 실상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문화재 가치 높은 선화당 측우대
선화당 측우대는 대구 경상감영의 선화당에 있던 측우대를 말합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땅속에 스며들거나 웅덩이에 고인 물을 통해 강우량을 재던 그때까지의 부정확한 측정 방법을 대신하여, 측우기를 만들어 측우대에 설치하여 강우량을 측정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영조 46년에 세종조의 옛 제도에 따라 측우기를 만들어 창덕궁과 경희궁, 8도와 양도에 설치하여 비의 양을 측정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측우기는 7기가, 측우대는 4기가 남아 있었다고 1917년의 <조선고대 관측기록보고>에 보고되었는데 현재 측우기는 1837년에 제작된 금영측우기(국보) 1기만 남아 있고 측우대는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국보), 경상감영 선화당 측우대(국보), 관상감 측우대(보물), 통영 측우대(보물) 등 4기가 남아 있습니다.
선화당 측우대는 화강암 기둥으로 가운데 직경 16cm, 길이 4.3cm의 구멍이 있고, 앞면 한가운데에는 측우대, 뒷면에는 '건륭경인오월조'라 새겨져 있어 조선 영조 46년에 제작된 측우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유물은 한국전쟁 때 총격으로 몇 군데의 총탄 자국이 있지만, 제작연대가 확실하고 특히 <영조실록>의 기록과 부합되는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징청각(澄淸閣)은 경상도 관찰사가 살림채로 쓰던 건물입니다. 1601년(선조 34)에 선화당, 응향당 등 여러 건물과 함께 지었으며 여러 차례 소실된 것을 1807년(순조 7)에 다시 지었고 1970년 공원 조성 때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규모는 앞면 8칸, 옆면 4칸으로 넓이가 무려 227㎡나 되며 선화당과 함께 대구 시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관아건물입니다. ‘징청(澄淸)’은 ‘깨끗한 정치를 행한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관풍루(觀風樓)는 경상감영의 정문인 외삼문의 2층 누각인데 1906년 읍성이 철거될 때 지금의 달성공원으로 관풍루와 망경루 건물을 옮겼으며, 지금의 관풍루는 1970년 해체 복원된 것입니다. 관풍루는 감영과 민가의 경계에 위치하며 큰북, 종, 피리, 나팔 등의 기구를 갖추어 놓고 매일 밤 10시에 문을 닫고 새벽 5시에 문을 여는 풍악을 울렸다고 합니다. ‘관풍’은 ‘누각 위에서 백성들의 삶을 살핀다(觀風世俗)’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외삼문(外三門)은 경상감영의 정문인 포정문(布政門)으로 조선시대 감영의 진입공간은 외삼문, 중삼문, 내삼문으로 구성되는 3문 구성이 일반적입니다. 경상감영의 경우에는 중삼문에 대한 기록이 없어 2문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경상감영의 외삼문은 중층 누각으로 2층의 누각을 관풍루라 하였습니다.
내삼문(內三門)은 선화당과 직선 축으로 외삼문과 함께 2문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906년 십자 도로 건설 당시 내삼문 뒤로 동문로, 서문로가 신설되면서 경상감영은 선화당 공간과 외삼문, 내삼문 공간의 남북으로 분리되었고 1920년 헌병대본부(현 병무청)가 들어서면서 내삼문은 철거되었습니다.
경상감영의 옥사는 좌옥과 우옥 2개가 있었는데 좌옥은 중죄인과 사상범이 수용된 곳으로 북장대(망경루) 남쪽(현 서문로교회 일대)이며, 우옥은 경죄인과 잡범, 재판 중인 죄인이 수용된 곳으로 대구읍성 북문인 공북문 남쪽(현 대안성당)에 위치하였습니다. 대안성당 앞 옛 형구 돌 앞에는 경상감영의 옥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최제우가 갇혔던 옥사는 경상감영 내 좌옥의 별실인데 원형옥으로, 위치는 종로초등학교 야외 화장실 근처로 추정되며 종로초등학교 앞에 있는 회화나무는 수령 400년으로 수운 최제우 나무라고 부릅니다. 서산 해미읍성 원형옥과 상주 옛 원형옥 터 주변에도 회화나무가 있습니다.
대구읍성 밖에 있는 사직단과 향교
사직단은 토지신[社]과 곡식신[稷]에게 제사를 지냈던 곳입니다. 임자년에 창건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사직단은 <경상도읍지>가 편찬된 1832년(순조 32) 이전에 건축되었습니다. 따라서 1832년 바로 앞의 임자년인 1772년(정조 16)에 건축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경상감영이 임진왜란(1592) 이후 대구에 설치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사직단의 건축 연대는 1712년 또는 1652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대구에는 평리동과 현풍, 경산 등 세 곳에 사직단이 있었습니다.
대구향교는 1398년(태조 7)에 교동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599년(선조 32) 달성공원 부근에 새로 지었다가 1605년에 교동으로 다시 옮겼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향교를 중심으로 지방 유생들의 독립운동이 전개될 것을 두려워한 일제는 대구 시가지를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지금의 남산동 자리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경내에는 대성전, 명륜당을 비롯하여 동무, 서무, 동재, 서재, 낙육재, 양사재, 유림회관, 외삼문, 동관, 서관 등이 있습니다. 토담이 길게 가로 놓여 있어 앞, 뒤뜰이 분명하게 구분되는데, 앞뜰에는 명륜당, 낙육재 등 비교적 최근에 지은 건물과 경상도 관찰사들의 공덕비가 즐비하게 서 있으며 뒤뜰에는 대성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서침 등 달성서씨 배향한 구암서원
구암서원(龜巖書院)은 1675년(숙종 1)에 서침(徐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연구산(連龜山) 기슭에 창건하여 1718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면서 서거정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741년에는 서성, 1757년에 서해를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4년 유림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1943년에 숭현사와 강당을 중수하고 1974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서침(徐沈)은 본관은 달성, 자는 성묵, 호는 구계로 정몽주를 따라 학문을 배웠고, 고려 말 조선 초의 변혁기에 향리에서 은거하여 학문연구에 노력하였습니다. 세종대에 서씨 일문의 근거지였던 달성을 경상도의 요새로 삼고 성을 쌓기 위해 서침의 땅과 바꾸려 하자 이에 협조하여 포상을 받게 되었는데, 서침은 포상 대신에 환자의 모곡(耗穀)을 감하여줄 것을 건의하여 허락받아 인근 주민의 추앙을 받았으며 남산의 역 터와 연신지, 신지 등이 하사되었습니다.
민족시인 이상화, 민족운동가 서상돈의 옛집
이상화 고택은 1999년부터 고택을 보존하자는 시민운동을 시작으로 군인공제회에서 인근 주상복합아파트를 건립하면서 고택을 매입해 지난 2005년 10월 27일 대구시에 기부하였습니다. 대구시는 그동안 고택을 보수하고 고택보존 시민운동본부에서 모금한 재원으로 고택 내 전시물 설치를 하였습니다.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일제에 저항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정신을 기리고,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상화는 21세에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를 만나 홍사용, 나도향, 박영희 등과 함께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고 3·1만세운동 때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 학생봉기를 주도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습니다. 1925년 김기진 등과 ‘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학 연구단체에 가담하였으며, 그해 8월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고 1927년에는 의열단 이종암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였습니다. 1937년 독립운동가인 형 이상정을 만나러 중국에 갔다 와서 구금되었다가 석방된 후 3년간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다가 43세에 위암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서상돈 고택은 2008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복원되어, 이상화 고택과 함께 중요한 거점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서상돈은 조선 고종 때의 민족운동가입니다.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민권 보장 및 참정권 획득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07년 대구의 광문사의 부사장으로 재직 중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고 국채보상 취지서를 작성 발표하는 등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였으며 모인 자금은 그 뒤 민립대학 설립 운동에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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