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88강, 2023년 2월 답사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끈질기게 항전하다가 결국은 삼전도로 내려와 인조는 청 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의 예를 갖추는데 그 역사의 회한이 서린 남한산성을 샅샅이 둘러봅니다.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최종 백신접종을 완료하시고, 항상 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학교 제88강(제5기 제10강)은 2023년 2월 12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남한산성 로터리주차장(버스종점)에서 모입니다.
*찾아가는 길은 경기도남한산성세계문화유산센터 홈페이지에서 <남한산성 소개>의 <오시는 길>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지하철 8호선 산성역에서 하차 후 2번 출구로 나와 52, 9-1(휴일), 9(우회)번 버스 승차(26-43분 소요), 남한산성(종점) 하차 바랍니다. 문의 : 경기도 콜센터 031-120).
*집합장소가 서울 외곽이므로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행궁-침괘정-숭렬전-연주봉옹성-우익문-청량당-수어장대-매바위-지화문-점심식사-전승문-옥정사터-외성문-봉암성-동장대터-신지옹성-장경사-좌익문-수구문-지수당-연무관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답사 도중 함께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남한산성, 자상한 일주>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화를 부르다
16세기 말 동북아 질서는 임진왜란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한 명나라는 국력이 소모되어 쇠퇴한 틈을 타서 여진은 만주를 장악하고 중원을 넘볼 정도로 강대해졌습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명에 대한 사대 행태는 ‘어버이의 나라’로 받들 정도로 극에 이르러 마침내 한 시대를 지배하는 명분이요 이념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조선의 명에 대한 사대 망상의 폐해는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른 청에 대한 멸시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패망의 길로 들어선 명에 대한 의리 사이에서 재편되는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다가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두 번에 걸친 여진의 침략을 받게 됩니다.
조선은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때 훗날 청(淸)으로 이름을 바꾼 후금(後金)과 ‘형제의 나라’로 맹약을 하였으나 후금이 명을 친다는 명분으로 지나친 요구를 해오던 중, 마침내 국호를 청이라 정하고 왕(王)을 제(帝)라 칭하며 사신이 와서 이를 통보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이들을 만나주지 않자 청 태종이 직접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침략해 온 것이 병자호란입니다.
1636년 12월 12일 조정에서 청의 2차 침공 사실을 알고는 13일에 강화도로 파천하기로 하고 먼저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비롯한 비빈과 종실은 강화로 피난하였고, 14일 임금의 수레도 강화도로 향했으나 홍제원에 이미 적들이 막고 있어서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후로,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세자와 함께 청의(靑衣)를 입고 서문으로 나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 조아리는 예[三拜九叩頭禮]로서 굴욕적으로 항복을 하고 한양의 궁궐로 돌아가기까지 청과 맞서 전쟁을 치렀던 회한이 서린 곳이 바로 남한산성입니다.
싸우지 않아도 이기지 않을 수 없는 땅
산성이란 도성이나 읍성과는 달리 전란과 같은 위급상황이 닥쳤을 때 임금을 비롯한 권력의 중심이 이동하여 적과 대치하며 항전을 하였던 곳으로, 그곳에는 억울한 죽음과 고통스러운 삶이 어우러진 많은 회한의 사연들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을 것입니다.
남한산성의 입지적 특성에 대하여 심상규가 쓴 <좌승당기>에는 “한산의 성은 예부터 백제 온조의 도읍지로 일컬어져 왔는데 서북쪽은 깎아지른 듯한 협곡과 한수로 막혀 있고 동남쪽은 영, 호남을 제어하고 경사를 막아낼 정도로, 하늘이 만들어낸 산은 장자의 기상이요 잔교와 검각과 같이 험한 형세는 앉아서 싸우지 않아도 이기지 않을 수 없는 땅”이라고 하였듯이 남한산성은 지형적으로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청나라 군사가 처음 왔을 때 병기라고는 날[刀]도 대보지 못했고 병자호란 때에도 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식량이 고갈되고 강화가 함락되었기 때문이다”고 한 것처럼 성 자체는 최적의 방어요건을 갖춘 요새였습니다.
남한산성은 한성백제의 남쪽 외성으로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부여에서 떨어져 나와 남쪽으로 내려와,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비류백제를, 온조는 한강 유역에 한성백제의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나 비류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나라가 없어져 그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한성백제로 합쳐졌습니다.
삼국 초기의 도읍의 형태는 고구려가 그랬듯이 ‘이성 도읍’ 체제였는데 한성백제도 그 방식을 따라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을 두 개의 도성으로 삼고 동서남북에 도성을 외호하는 산성을 두어, 북쪽으로는 한강 건너 아차산성, 서쪽으로는 수도산에 삼성리토성, 동쪽으로는 광주에 이성산성, 남쪽으로는 남한산성을 구축하였습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백제 개로왕이 아차산성에서 전사하자 백제는 남쪽으로 공주까지 내려가 도읍을 정하여 웅진백제를 열었고, 이후 한강 유역과 남한산성 일대는 60여 년간 고구려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를 크게 무찌르고 성왕까지 죽인 진흥왕의 영토 확장정책으로 한강 유역이 신라의 땅이 되어 한산주라 하고 특히 북쪽을 북한산주, 남쪽을 남한산주라 불렀고 당나라의 군사를 막기 위해 지금의 남한산성의 동봉에 산성을 구축하여 일장성(日長城) 또는 주장성(晝長城)이라 하였습니다.
한강과 남한산성 차지하면 강국 된다
남한산성은 남한산(460m)의 고원지대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요새지에 쌓은 평균 높이 7.5m 둘레 약 9.5km에 이르는 산성입니다. 2000년대 행궁 터의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시대 주거지 8기와 수혈유구가 확인되었고 정면 12칸이 넘고 길이가 50m에 이르는 통일신라시대 대형 건물터와 한 장의 무게가 18kg이나 되는 암키와가 대량 출토되어 신라 문무왕 때 쌓았다는 주장성이 존재하였음을 입증하게 되었습니다.
삼국이 길항하던 시기에는 한강 유역과 남한산성을 차지하는 나라가 강국으로 성장하였는데 최종적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그 이전의 주인이었던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고 삼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고려 시대에는 1231년과 1232년 두 차례에 걸친 몽골군의 침입 때 광주성에서 몽골군을 물리쳤습니다.
남한산성이 속해 있는 광주는 고려시대에는 전국의 12목 중 하나인 광주목으로 승격하였고 이후 12목을 8목으로 줄일 때에도 광주목은 그대로 남았을 정도로 남한산성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도읍지 한양을 외호하기 위하여 사방에 보를 두었는데 이른바 근기사진(近畿四鎭)이 그것으로 광주가 좌보, 원주가 우보, 수원이 전보, 양주가 후보로서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행주산성과 수원의 독성산성에서 일본군에 승리하자 조정에서는 산성의 효능에 대해 크게 고무되면서 고성이나 옛 성터를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한 결과 수원 독성산성은 수축하였고 파주의 마산고성, 양주의 검암산고루, 여주의 파사성, 죽산의 죽주고성은 개축하였습니다.
임란 후 다시 주목 받은 남한산성
이때 남한산성은 한양을 방어하고 유사시 거점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요충지로서 다시 주목받게 됩니다. 임진왜란 이듬해에 서애 유성룡이 남한산성 수어책을 주장하였고 그로부터 3년 뒤 사명대사의 승군 60여 명으로 산성을 수비하게 하였습니다. 광해군 때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인조의 집권 2년 만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전국 팔도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축성공사를 재개하여 공사 개시 2년 만에 남한산성의 개축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1624년 팔도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남한산성 축성공사를 진행할 때 조정에서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에 이어 판선교도총섭에 올라 봉은사에 머무는 벽암각성 선사에게 공사 책임을 맡겼습니다만 동원된 승려들이 묵을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한산성 내에 신라 시대의 고찰인 장경사 뒤쪽에 있는 망월사, 북문 안 남쪽 기슭에 있는 옥정사 외에 동문 북쪽에 장경사, 서문 안에 국청사, 지수당 옆에 개원사, 개원사 동쪽 기슭에 한흥사, 서장대 아래에 천주사, 벌봉 아래에 동림사, 사단 오른쪽에 남단사 등 7곳의 사찰을 더 짓고 개원사에는 승도청을 두어 도총섭이 머물며 승군을 총괄했습니다.
개원사는 승군 대장인 도총섭이 주석하는 본부이고 다른 승군들은 나머지 8개 사찰에 분산 배치되었는데 이들 사찰에는 병기창과 화약고 그리고 군량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는 군막사찰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9개의 사찰 중에 망월사, 개원사, 장경사 국청사 는 복원되어 전해지고 있으나 천주사, 남단사, 한흥사, 동림사, 옥정사 등 다섯 곳은 아직 복원되지 않고 주춧돌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석물들만 폐사지에 남아 있습니다.
당시 팔도에서 소집된 승군의 규모는 자세히는 알 수는 없으나 <중정 남한지>에 나오는 축성 이후 승군의 편제를 보면 총섭 1명, 승중군 1명, 교련관 1명, 초관 3명, 기패관 1명, 산성에 거주하는 승려인 원거승군 138명, 지방의 향승을 차출한 의승 356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 승군은 조석으로 예불과 간경을 하며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낮에는 군모를 쓰고 훈련을 받으면서 유사시에 대비하였습니다.
남한산성의 방위책임은 초기에는 도성 밖을 지키는 총융청 소속이었으나 남한산성을 새롭게 축성하고 나서 수어청을 두어, 도성 밖 북쪽은 기존의 총융청이 맡고 남쪽은 새롭게 신설된 수어청에서 맡았습니다. 수어청에는 전, 좌, 중, 우, 후의 오영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은 남장대, 중영장은 북장대, 후영장은 동장대, 우영장은 서장대, 그리고 좌영장도 동장대에 머물렀습니다만 지금은 서장대만 남아 있습니다.
1711년 북한산성을 완성하고 이곳에도 총융청 소속의 승군 본영을 중흥사에 두고 산성 방어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현지의 승려로 충당하였으나 1714년 승번제를 실시하여 372명의 승군이 태고사, 중흥사, 보국사, 진국사, 보왕사, 국녕사, 보광사, 원각사 용암사, 상운사, 서암사 등 11개 사찰에 배치하여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남, 북한산성의 승군은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할당되어 상번한 승려들과 산성 내의 상주 승려들로 구성되어 일 년에 2개월씩 6회의 윤번으로 복무했으며 전체 인원은 707∽728명이었고 여행경비와 장비는 각자 부담했기에 승군을 보내는 사찰은 그 폐해가 무척 컸습니다. 남, 북한산성의 승군들은 1894년 갑오경장으로 승번제가 폐지될 때까지 270여 년간 산성의 수비를 맡았습니다.
내성과 외성의 독특한 형식인 산성
남한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된 독특한 형식의 산성으로 주봉인 청량산(483m)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연주봉옹성과 동쪽의 신지옹성을 둘러쳐 내성을 이루고 외성은 동쪽으로 봉암성과 한봉성까지, 남쪽으로는 신남성까지 이어집니다.
외성이란 내성을 보호하기 위한 보조 산성으로, 봉암성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 병사들이 봉암성의 정상인 벌봉에서 성안의 동태를 살폈기 때문에 내성의 보강 차원에서 동장대 부근에서 동북쪽 산줄기를 따라 벌봉 일대를 포괄하여 성을 쌓았습니다.
한봉성은 봉암성의 동남쪽에서 한봉의 정상까지 구축한 외성으로,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한봉 정상에 포대를 설치하여 성안 곳곳에 포탄을 쏘아대며 성안을 유린하였기에 이러한 요충지를 적으로부터 미리 차단하기 위해 폐곡선을 이루지 않고 일직선으로 연결된 독특한 형태로 성을 쌓았습니다.
신남성은 제7암문에서 남쪽으로 1.5km 지점에 있는 검단산 정상에 세워진 성으로, 내성과 마주 보고 있어 대봉이라고 부르며 이곳에는 두 개의 돈대를 설치하여 뛰어난 조망의 전략적 요충지로 적의 척후 활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쌓은 성입니다.
남한산성에는 남문인 지화문, 북문인 전승문, 동문인 좌익문, 서문인 우익문의 사대문이 있고 장대는 동서남북 네 곳과 봉암성의 외동장대를 합하여 다섯 곳에 있었으나, 현재는 서장대인 수어장대만 남한산성의 주봉인 청량산 정상에 본래의 모습으로 우뚝 서 있고 나머지 네 곳은 그 터와 주춧돌만 남아 있습니다.
임금은 배북남면하여 통치하기 때문에 궁궐의 좌향은 남향일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동쪽은 왼쪽이라 좌익문(左翼門), 서쪽은 오른쪽이라 우익문(右翼門)이라 하였으며 북문은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기를 바라며 전승문(全勝門), 정문인 남문은 빨리 평화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지화문(至和門)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성문 밖으로 또 한 겹의 성벽을 쌓은 것을 옹성이라 하는데, 남쪽에 제1, 2, 3옹성의 세 곳, 동쪽에 신지옹성, 북쪽에 연주봉옹성 등 모두 다섯 곳에 설치하였습니다. 남쪽에 많은 옹성을 설치한 이유는 북, 동, 서쪽에 비해 남쪽이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취약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포루는 대포를 쏠 수 있는 시설로서 제1남옹성에 8개, 제2남옹성에 9개, 제3남옹성에 5개, 장경사 부근의 내성에 2개, 신지옹성에 2개, 연주봉옹성에 2개, 봉암성에 2개 등 모두 30개의 포루가 있었으나 연주봉옹성의 포루 2개는 파괴되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어 현재 28개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치(雉)는 성곽의 일부를 돌출시켜 성벽에 가까이 접근한 적을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구조물인데 제1남옹성, 제3남옹성, 연주봉옹성 세 곳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누각이 없는 문을 암문(暗門)이라 하는데 주로 군인들의 비밀통로 사용되었고 남한산성에는 16곳에 암문이 있었습니다. 홍예문과 같은 아치형으로 된 것이 열 곳, 네모난 우물 정(井)자 형태로 된 것이 여섯 곳에 있으며 암문의 번호는 최근에 동문에서 북문으로 차례로 붙여진 것입니다.
분지 형태의 남한산성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했습니다. 성내에는 국청사, 천주사, 개원사, 옥정사로부터 흘러내린 네 개의 계곡물이 지수당 부근에서 합류하여 서고동저의 지형적 특성 때문에 동쪽으로 흘러가 동문인 좌익문 옆 성벽에 구축된 수구문을 지나 성 밖으로 흘러갑니다. 그리고 봉수대도 두 곳에 있습니다.
47일간의 처절한 격론의 현장, 행궁의 구조
조선의 행궁은 수원, 강화, 전주, 의주, 양주, 부안, 온양, 낙생, 광주에 있었으며 남한산성에 있는 광주행궁은 남한행궁이라고도 부릅니다. 남한행궁은 1624년 남한산성 축성 때 함께 세웠으며 임금이 여주에 있는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과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을 참배하러 오갈 때 임시 머물던 곳이기도 합니다.
남한행궁은 상궐과 하궐로 구분되며 전국 20여 곳의 행궁 중에 유일하게 종묘에 해당하는 좌전(左殿)과 사직단에 해당하는 우실(右室)이 설치되어 도성의 격식을 제대로 갖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입니다. 그리고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를 원래 있던 외삼문 위에 누각으로 높이 세웠고 객관인 인화관과 재덕당, 좌승당, 일장각 등의 부속건물도 설치하였습니다. 임금이 머무는 상궐은 내행전으로 73칸 규모이며 서쪽 담장 문을 통하여 좌승당으로 연결되어 있고 154칸 규모의 하궐은 외행전으로 상궐의 삼문 밖에 있으며 서쪽 담장 문을 통하여 일장각과 통하게 되어 있고 남쪽과 북쪽에 각각 행각을 설치하였습니다.
이곳 행궁은 병자호란의 중심에서 조선의 운명을 결정해야만 하는 주전파와 주화파의 격론과, 지방 수령과 군졸들의 이탈 상황에 대한 장계와, 산성을 지키며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죽어가는 병졸들에 대한 보고가 이루어졌던 곳입니다. 12월 14일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인조를 비롯한 1만 2천여 명의 신하와 군졸과 양민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었으며 1월 중순에 이르자 양식이 떨어져서 새벽에는 닭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상황에 처한 인조의 처절한 심정이 기록에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새벽에 망궐례를 마친 인조가 때마침 내리는 눈비에 젖은 군졸들을 보며 “군민이 다 죽겠구나” 하며 한탄한 후 행궁 뜰에 나와 거적을 깔고 향을 피우고 네 번 절을 한 다음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날이 저물도록 하늘에 빌었다고 합니다. “고립된 이 성에 들어와서 믿는 것은 하늘인데 이처럼 눈이 내려 장차 얼어 죽을 형세이니 내 한 몸은 아까울 것 없으나 백관, 만민이 하늘에 무슨 죄가 있습니까. 조금 개게 하여 우리 군사와 백성을 살리소서.” 이렇듯 인조의 처절하고 비참한 회한이 어려 있는 행궁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은 수시로 찾아와서 머무르며 남한산성의 군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군사훈련과 무과시험을 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행궁에서는 주전파와 주화파의 격한 논쟁도 벌어졌는데 어전회의 때 인조 앞에서 화친을 청하는 최명길의 국서를 김상헌이 찢고 통곡하면 최명길은 그것을 주워 다시 맞추며 “국서를 찢는 사람이 없어서도 안 되지만 국서를 주워 맞추는 사람도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라고 아뢰었습니다. 결국 화친의 결정이 나라를 구했고 백성을 살렸습니다. 모두가 최명길이 열어젖힌 문을 통해 살아남았으나 살아남은 모두는 그를 비난했습니다. 특히 주전파 김상헌과 비교되면서 나라를 팔아먹은 자, 진회보다 더한 간신, 삼한을 오랑캐로 만든 자, 소인 등으로 불리며 혹독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후 주전파 김상헌은 공신록에 올랐고 여러 사당에도 배향되었으나 최명길은 공신록에도 빠졌고 배향한 사당조차 없었습니다. 더욱이 김상헌의 자손들은 노론의 주축이 되어 조선말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조선의 멸망을 앞당기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명분과 실리, 또는 화친과 척화, 나라가 위기에 놓여 있을 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날 다시금 성찰할 기회를 주는 화두인 것 같습니다.
행궁 터에서는 백제시대의 주거지와 8기의 수혈유구가 확인되었고 하궐 동쪽에는 정면 12칸이 넘고 길이 50m에 이르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형 건물터와 한 장의 무게가 18kg이나 되는 암키와가 대량으로 출토되었습니다.
남한산성 세 곳의 사당
남한산성에는 숭렬전, 청량당, 현절사 등 세 곳에 사당이 있습니다. 숭렬전(崇烈殿)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을 모신 사당으로, 처음에는 ‘온조왕 묘(廟)’로 건립되었는데 조선 초기에는 직산에 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남한산성에 몽진 온 인조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적의 침입을 알려줘 무찌르자 남한산성으로 옮겨 세웠다고 합니다. 조선은 이전 시대 왕조의 시조왕 사당을 지어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단군과 기자 그리고 동명왕을 함께 모신 숭령전을 평양에, 수로왕의 숭선전을 김해에, 온조의 숭렬전을 남한산성에, 박혁거세의 숭덕전을 경주에, 왕건의 숭의전을 연천에 세웠습니다.
청량당(淸涼堂)은 산성을 쌓은 팔도도총섭 벽암각성과 동남쪽의 공사 책임을 맡았으나 그를 시기한 무리의 모함으로 처형된 이회와, 남편을 따라 강물에 투신자살한 그의 부인 송씨의 위패를 함께 모셨습니다. 이회가 참수당할 때 그의 목에서 매 한 마리가 날아 나와 부근의 바위에 앉았다가 날아가기에 이를 기이하게 여겨 이회가 공사를 한 부분을 다시 조사해 보니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어 있어 무고였음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현절사(顯節祠)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계속 항쟁할 것을 주장한 주전파로서 인조의 항복 이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과 함께 심양에 끌려가서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 처형당한 오달제, 윤집, 홍익한 등 삼학사를 모셔 오다가 이후에 좌의정 김상헌과 이조참판 정온의 위패도 함께 모셨는데 삼학사란 명칭은 1671년 송시열이 <삼학사전>을 지으면서 이들에게 붙여졌습니다.
침괘정(枕戈亭)은 예로부터 백제 온조왕의 왕궁지로 전해지고 있으나 고증할만한 자료는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산성을 수축할 당시 수어사인 이서가 건물터를 발견하였는데 1751년(영조 27) 광주유수 이기진이 중수하고 침괘정이라 명명하였습니다. 건물 오른쪽에 군기고가 있어 명나라 사신 정룡이 ‘총융무고(摠戎武庫)’라 이름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당시 부근에 무기고 또는 무기제작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연무관(演武館)은 군사들이 무예를 연마하던 곳으로 그중에 무예가 뛰어난 사람은 한양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연무당이라 부르던 것을 숙종 때 ‘연병관’이란 편액을 내렸으며 정조 때는 수어영이라 개칭하였으나 지금은 연병관 또는 연무관이라 부릅니다. 전면에는 원기둥을 세우고 주련을 새겼는데 군사훈련 하는 내용을 적어놓았습니다.
만길 높은 산에 옥처럼 단단한 보루와 철벽같은 산성(玉壘金城萬인山)
바람과 구름, 용과 호랑이 기이한 힘을 발한다.(風雲龍虎生奇力)
각우궁상 음악소리 계림(연무관)에 진동하고(角羽宮商動界林)
은밀히 파뿌리를 전하자 삼본이 텅 비었네.(密傳蔥本公三本)
지수당(池水堂)은 1672년(현종 13) 광주 부윤 이세화가 엄고개에 주정소를 새로 지으면서 폐목재를 옮겨와서 건립하였는데 정자를 가운데 두고 앞뒤로 연못이 3개가 있었으나 정자와 연못 2개는 남아 있고 연못 하나는 밭으로 변했으며, 남학명이 지은 <지수당기>에 “백성을 포용하고 기른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서울학교 기사(2월)를 확인 바랍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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