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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이 전쟁범죄로 처벌 받을 조건은 단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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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이 전쟁범죄로 처벌 받을 조건은 단 하나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 전범 단죄, 무엇이 문제인가

전쟁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기 어렵다면, 적어도 전쟁범죄가 없는 세상이 바람직하다. 전쟁범죄를 제대로 처벌해 본보기를 삼지 않으면 지구촌 평화는 없다. 지금 이 시각에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비롯한 여러 유혈 분쟁지역에서 크고 작은 전쟁범죄가 알게 모르게 벌어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국제사회의 대응은 미약하기만 하다. 전쟁에 관한 국제법을 어긴 강대국의 지도자들은 처벌을 비껴왔다. 지금껏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전쟁범죄자로 기소된 이들은 아프리카 같은 제3세계 약소국의 지도자들뿐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가. 보다 근본적으로, 전쟁범죄는 왜 그치질 않고 일어나는가. 전쟁범죄는 막을 수 없는 ‘전쟁의 필요악’인가. 전쟁범죄자들은 어떤 논리로 그들의 범행을 합리화하는가. 이런 문제의식 아래 앞으로 1년 동안 매주 토요일에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를 싣는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 주요 분쟁지역들을 취재 보도해온 필자는 전쟁범죄를 둘러싼 여러 문제점들을 비판적으로 짚어볼 계획이다. <프레시안>은 이 연재를 통해 지구촌 평화의 소중함을 독자들과 함께 되새기고자 한다.

가장 위험한 동물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이 무엇일까. 사자나 표범은 아무 때나 마구잡이로 다른 약한 동물을 죽이지 않는다.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최소한의 살육을 벌일 뿐이다. 맹수들은 필요 이상으로 먹잇감을 쌓아놓질 않는다. 하지만 탐욕스런 인간들은 다르다. 잉여와 저축의 개념을 지녔기에 배가 불러도 곳간을 더 채우려 싸움을 벌인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이다. 그 과정에서 '필요악'처럼 전쟁범죄들이 저질러진다.

우리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라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성을 뒷전으로 몰아내는 탐욕과 증오, 복수의 광기를 지닌 전쟁으로 수천 년 동안 많은 피를 흘려왔다. ‘인류역사는 피의 역사’라는 표현이 그래서 나온다. 멀리 갈 것 없이 최근 몇 년 사이로 좁혀 봐도 전쟁으로 많은 이들이 희생됐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해마다 펴내는 <군비 군축 국제안보 연감>에 따르면, 1년에 사망자 1천명 이상을 낸 유혈분쟁은 2018년 15개, 2019년 18개, 2020년 18개, 2021년 19개가 벌어졌다. 사망자 규모는 해마다 다르지만 10만 명 안팎이다. 아프가니스탄, 예멘은 3년 연속 해마다 1만 명 넘는 사망자를 냈다. 그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전쟁범죄들로 알게 모르게 생목숨을 잃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유력무죄 무력유죄(有力無罪 無力有罪)

문제는 제대로 된 처벌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전쟁을 벌이면서 쌍방이 서로 비슷한 정도의 범죄를 저질렀어도, 전범재판은 패자 또는 약자를 피고석에 앉혔다. 그렇기에 "전범재판은 승자의 재판"이란 말이 생겨났다. 제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그랬고 도쿄재판이 그랬다. 2003년 터무니없는 이유를 내세워 이라크를 침공해, 전쟁에 관한 국제법을 어겼던 미국의 전쟁 지도부는 국제형사재판소(ICC) 피고석 근처에도 가질 않았다.

힘을 지닌 국가의 지도자는 전쟁범죄로부터 자유롭다. 형사재판에서 부자들은 전관 변호사를 고용하는 등 돈의 힘으로 법망을 빠져나가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없는 죄도 뒤집어쓰는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를 한탄하면서 눈물을 흘리기 일쑤다. 이 용어를 국제정치 판에 적용한다면, 유력무죄 무력유죄(有力無罪 無力有罪)다.

ICC에 전쟁범죄자로 기소되는 이들은 하나같이 권력에서 밀려나거나 패전국 또는 아프리카 같은 약소국의 지도자들이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선 ICC가 ‘선별적 정의’를 추구하는 ‘국제백인재판소’(International Caucasian Court)라고 비난하면서 ICC를 탈퇴하자는 움직임조차 보일 정도다(이 주제에 대해선 다시 살펴본 예정이다). 이와는 달리, 강대국 지도자들은 전쟁범죄 비판을 받으면 부인하거나 ‘실수’였다고 발뺌하곤 해왔다. 중동의 군사강국이자 미국과 강력한 동맹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이 한 보기다.

시몬 페레스의 변명

"불행하게도 전쟁에는 실수가 있다(In war, there are mistakes unfortunately)"

2006년 7월31일 시몬 페레스(전 이스라엘 총리)가 미국의 대외 관련 싱크탱크인 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에 초청 연사로 나왔을 때 했던 말이다. 그 무렵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공해 엄청난 피해를 입혔고 그 때문에 전세계로부터 비난을 받던 참이었다. 레바논의 반이스라엘 정치군사조직인 헤즈볼라에게 납치된 2명의 이스라엘 병사를 구해내겠다는 게 침공 명분이었다. 하지만 레바논 전역에 걸쳐 민간인 주거지역에 대한 무차별 공습과 파괴행위로 많은 논란을 낳았다.

레바논 피난민들이 타고 있던 민간인 버스가 폭파되는 등 2006년 여름 한 달 동안의 전쟁에서 생겨난 1100명의 사망자 대부분은 민간인들이었다. 유니세프(국제아동기금) 자료에 따르면, 희생자의 3분의 1이 어린이였다. 베이루트에서 30km 떨어진, 레바논에서 가장 큰 화력 발전소인 지예 발전소가 폭격을 받아 새나간 3만5000톤의 기름이 130km에 걸쳐 지중해변을 더럽히기도 했다.

바로 그 무렵 레바논 취재를 갔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전쟁범죄의 흔적들을 잇달아 볼 수 있었다. 베이루트 남부 베이르 알아베드는 이슬람 시아파인 헤즈볼라 지지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그곳에 가보니 고층 아파트가 폭격을 받아 칼에 두부가 잘리듯 위에서 아래까지 건물 귀퉁이가 무너져 내려 있었다. 그곳 가까이엔 10m 깊이의 거대한 웅덩이가 보였다. 헤즈볼라 간부의 설명에 따르면, 콘크리트 벙커를 부수는 대형 폭탄인 벙커 버스터와 열화 우라늄탄(DU)를 퍼부어 생겨난 웅덩이였다. 시내 중심가를 지나는 고가도로가 공습으로 반 토막 난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댄 베이루트 남부로 가보니, 34일 동안의 전쟁 막바지에 이스라엘이 대량으로 살포한 불발 집속탄이 지역 주민들에게 끔찍한 공포로 남아 있었다. 이스라엘군이 뿌린 집속탄은 미국제 M42, M77과 이스라엘제 M85였다. 민간 주거지역을 겨냥한 집속탄 살포는 전쟁의 일반적인 규범을 어기는 범죄행위다. 샛노란 나비 모양의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생겨 호기심 많은 아이들을 다치게 하던 소형 폭탄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 2006년 이스라엘 군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레바논 남부 빈트 즈바일 마을. ⓒ김재명

실수냐 전쟁범죄냐

국제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는 이스라엘 군의 공격 패턴과 범위,도로와 연료 저장소 등 인프라 피해 등을 볼 때 민간인 희생은 군사 작전에 따른 ‘부수적 피해’라기 보다는 고의적인 것이라 비판했다. 한 마디로 전쟁범죄라는 지적이다. 그런 흉흉한 분위기 속에 미국 뉴욕의 외교협회 본부 건물로 들어섰던 페레스(당시 이스라엘 부총리)는 이스라엘에 대한 따가운 눈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군의 레바논 공격이 전쟁범죄가 아닌 ‘실수’라 주장했다. 1회성 오폭이 아닌, 되풀이된 살육과 파괴행위가 페레스의 말 그대로 실수일까.

같은 자리에서 페레스는 1999년 5월 나토군이 발칸반도의 코소보 내전에 개입해 세르비아에 대한 공습을 벌이면서 생겨났던 나토의 ‘실수’를 끄집어냈다. 벨그라드 주재 중국대사관에 미사일이 떨어져 중국기자 3명과 세르비아인 14명이 사망한 오폭 사건을 들먹이며, 전쟁에는 ‘실수’가 따르기 마련이라고 강변했다. 친이스라엘 성향의 미 외교협회가 우호적으로 마련한 자리였지만, 이스라엘 총리를 지냈고 외무장관이었을 때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상을 일궈내 노벨평화상(1994년)까지 받았던 정치거물 페레스로선 편치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민간인 인명피해 규모 및 예측가능 정도에 따라 지휘통제 계통에 있는 이스라엘 군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전쟁범죄의 책임을 지울 수도 있다."

이스라엘의 전쟁범죄를 감싸던 페레스의 외교협회 강연보다 딱 열흘 앞서, 루이스 아버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이 기자들에게 공개적으로 했던 말이다. 그는 국제인권법은 분쟁 당사자들에게 민간인 보호를 최고의 의무로 강제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이를 어기고 전쟁범죄를 저지른다면 국제형사법에 따라 처벌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범 재판 비껴가는 이스라엘과 미국

문제는 이스라엘의 전쟁 지도부가 레바논이나 팔레스타인에서 지금껏 숱하게 저질러온 전쟁범죄에 대해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해마다 38억 달러 어치의 군수물자를 공짜로 건네주며 강력한 후원자 노릇을 하는 미국의 힘이 작용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스라엘뿐 아니다. 역사적으로 강대국의 정치 지도자나 군부장성이 국제 전범재판소에서 처벌받은 사례가 없다. 특히 미국이 그러하다. 현실적으로 미국은 전쟁범죄 재판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남아왔다. 미국의 정치군사 지도자들이 21세기 들어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지에서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벌인다면서 저질렀던 전쟁범죄의 목록은 결코 짧지 않다.

전쟁포로들을 전리품처럼 여기고 노예로 팔아넘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옛날과는 달리, 전쟁범죄 방지와 관련한 현대의 국제법 체계는 그런대로 잘 잡혀 있다. 헤이그협약(1899년), 제네바협약(1949년)과 추가의정서(1977년), ICC의 법적 바탕인 로마규정(1998년)에 이르기까지 전쟁과 관련한 여러 법안들이 잇달아 나왔다. 그러면서 "전쟁범죄를 저지르면 안 된다"는 인식만큼은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지켜지질 않고, 어길 경우 책임자를 처벌하기가 쉽지 않은 게 문제다.

▲ 2006년 이스라엘 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파괴된 베이루트 시내 아파트 건물과 폭탄으로 생겨난 커다란 웅덩이. ⓒ김재명

푸틴이 전쟁범죄로 처벌 받을 조건

러시아의 권력자 블라디미르 푸틴만 해도 그렇다. 시리아 전쟁 개입과 관련, 그가 저질렀던 전쟁범죄 책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아랍의 봄바람이 밀려온 시리아에서 2011년부터 민주화를 둘러싼 내전이 벌어졌을 때 많은 정부군 병사들이 탈영해 시민군에 합류했었다. 시리아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는 위기로 내몰렸다. 2011년 리비아 반군에게 붙잡혀 정육점에 시신이 전시됐던 무하마르 카다피처럼 비참한 죽음을 떠올리며 몸서리쳤을지도 모른다.

아사드에겐 다행히도 푸틴이란 구원자가 있었다. 2015년부터 시리아내전에 개입한 러시아 공군은 민간인 주거지역에 대한 무차별 공습으로 내전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푸틴의 전쟁범죄 행위는 ICC에서 이미 수집해놓은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지금껏 기소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제 곧 1년을 맞이하게 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전쟁범죄의 붉은 피로 물들어 있다. 2022년 3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마을인 부차에서 저질렀던 민간인 학살이 대표적인 보기다. 우크라이나 정부 쪽에선 어린이들을 포함해 적어도 4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총상, 방화, 고문 등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고 러시아 쪽에선 '우크라이나의 자작극'이라 우겼다.

ICC는 부차 학살을 비롯해 러시아가 지난 1년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저질렀던 전쟁범죄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크렘린에 똬리를 튼 푸틴이 쿠데타로든 뭐로든 권좌에서 밀려나는 날이 온다면 모를까, ICC 법정에 설 가능성은 현재로선 없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전 유고연방 대통령)가 1990년대 발칸반도(보스니아, 코소보)에서 저질러졌던 전쟁범죄로 ICC 법정에 선 것도 권좌에서 밀려난 뒤인 2002년의 일이다. 현직 권력자를 ICC 법정 피고석에 세우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알브라이트, "힘의 법이 아니라 법의 힘으로"

강대국 지도자들이라 하더라도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면, 재판에 붙여져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현실은 힘의 논리가 법을 누르는 약육강식의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다. 이스라엘처럼 전쟁범죄를 저지르고도 '실수'라고 우기거나, 일본처럼 위안부 납치나 난징 학살 따윈 없었다며 지난날의 전쟁범죄를 아예 부정하기 일쑤다.

끝으로 다시 묻는다. 전쟁범죄 처벌은 왜 필요한가. 1997년 헤이그의 유고전범재판소(ICTY)를 방문했던 매들린 알브라이트(당시 미 국무장관)의 답변으로 마무리한다.

"정의는 법의 지배를 강화하는 데 필수적이다. 전쟁범죄자들을 단죄하는 것은 전쟁범죄 희생자 가족들의 비통함을 달래줄 뿐만 아니라, 어느 날엔가 다시 폭력이 일어날 것이란 걱정 없이 우리 병력(나토 평화유지군)이 보스니아를 떠날 수 있도록 해준다. 전범재판은 힘의 법이 아니라 법의 힘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하나의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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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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