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 제92강은 철 생산지와 고분 등 가야유적이 즐비하게 남아 있고 논개를 비롯한 의인을 많이 배출한 백두대간의 서쪽 자락에 안겨있는 전북 <장수고을>을 둘러보며 다사다난했던 임인년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92강은 2022년 12월 18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장계면(백장유적지/월강사/정충신영정각)-계남면(흥학당/화산사/근수루)-천천면(타루비)-장수읍(창계서원/장수향교/의암송/논개사당)-산서면(압계서원/지금당/권희문가옥/정상윤가옥)-서울의 순입니다.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최종 백신접종을 완료하시고,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92강 답사지인 <장수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선사시대부터 고대 가야왕국까지 유적의 보고
장수의 산줄기는 동쪽으로는 시루봉(1,162m), 남덕유산(1,507m), 기태봉(1,015m), 백운산(1,279m), 봉화산(920m) 등이 함양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천반산(647m), 성수산(1,060m), 팔공산(1,151m) 등이 진안과 경계를 이룹니다. 육십령(734m)은 백두대간 넘어 함양과 통하는 고개입니다.
물줄기는 장안산, 수분령, 공산을 잇는 산줄기가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계를 이루면서 금강은 장수읍 수분리의 수분령(530m)에서 발원하여 장수읍을 지나면서 북류 하다가 장안산에서 발원한 장계천과 천천면에서 합류하고, 수분령 남쪽은 섬진강 수계로 장안산 서쪽에서 발원한 용림천과 백운산에서 발원한 백운천이 번암면에서 합류하여 요천을 이루어 남원시로 흐릅니다. 이러한 지형의 영향으로 수분령 남쪽의 섬진강 지류인 오수천 유역의 산서면과 요천 유역의 번암면은 인접한 장수읍보다 거리가 먼 남원시와 교류가 더욱 활발합니다.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으로 둘러싸인 장수는 예로부터 육십령, 방아재, 치재, 집재 등 주요 고갯길을 따라 교통로가 발달되었습니다. 특히 백두대간으로 따라 확인되는 철 생산유적들은 장수군이 고대 산업경제의 중심지임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장수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천천면 남양리와 월곡리에서 확인되었으며, 본격적으로 농경문화가 시작되는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고인돌은 금강의 지류인 장수천과 장계천, 섬진강의 지류인 오수천을 중심으로 20여 개소, 140여 기가 확인되었습니다.
청동기시대 이후 삼한시대의 유적은 남양리에서 초기 철기시대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기원 전·후 장수의 철기문화를 살필 수 있는 중요 유적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천천면 삼고리에서는 수백 점의 가야 토기들이 출토되었는데 조사를 통해 백제의 변방 지역으로 인식되었던 장수가 고대 가야왕국이 자리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후 지속적인 조사를 통해 240기의 왕릉급 고총과 22개소의 봉수 유적, 4개소의 고대산성, 70개소의 철 생산유적이 확인되었으며, 2019년 장수군 최초로 동촌리 고분군이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장수의 역사적 발자취
장수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때 장계면에 백해군, 장수읍에 우평현이 설치되었고 이후 660년 백제가 신라에 멸망하자 신라에 편입되었습니다. 757년 백해군을 벽계군으로 고쳐 진안과 고택을 영현으로 두었고, 우평현은 고택현으로 고쳐 벽계군의 영현이 되었으며 776년에는 벽계군과 고택현은 백해군, 우평현으로 바뀌었습니다. 1018년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우평현은 장수현으로, 백해군은 장계현으로 바뀌었고 이때부터 문헌에 장수와 장계라는 지명이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계북면 양악리에 있던 양악소, 천천면 남양리 일대에 두었던 이방소, 천천면 와룡리 일대로 비정되는 천잠소, 장수읍 대성리 일대로 추정되는 복흥소 등과 함께 모두 남원부에 속하는 속현이 되었습니다. 1391년 장수현과 장계현이 감무관으로 독립되었고, 그 부근의 양악소 등이 두 현의 관내로 이관되었습니다. 1392년 장계현은 장수현의 직촌으로 통합되었고 장수현은 1413년 감무가 현감으로 바뀌고 조선 말까지 별다른 변동이 없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남원 계수관의 관할이었고, 1466년 이후의 진관제에서는 남원 진관에 속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별도로 신설된 진영제로 전라도 좌영에 속했습니다.
가야 세력, 백두대간 넘어 장수까지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호령하던 시절, 낙동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던 작은 연맹왕국이었습니다. 낙동강 유역의 기름진 평야와 질 좋은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여 비록 단일국가로 성장하지 못했지만, 왜와 교류하며 삼국을 견제하여 고대사의 한 축에 빠질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경상도 지역에 7개 국가(금관·대·소·비화·아라·고령·성산)가 있었다고 알려졌지만, 장수를 중심으로 많은 가야유물이 발굴되면서 학계에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전북 동부지역에서만 가야의 옛날 무덤 400개와 100개소의 봉수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가야가 왜 전북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는지에 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가야는 신라와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낙동강 유역을 잃었습니다. 이때 고구려로부터 수도를 빼앗긴 백제가 혼란을 겪고 있는 정세를 틈타 섬진강 유역과 금남정맥 너머 완주까지 세력을 넓혔다고 합니다.
가야의 철기문화는 다른 나라를 위협할 만큼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비록 신라와 고구려부터 기름진 김해평야를 빼앗겨 큰 타격을 받았지만, 품질 좋은 철제 무기를 바탕으로 근처 섬진강 유역으로 세력을 넓혔습니다. 국정 운영에는 기름진 평야와 농업 기술이 필수였으며, 가야는 자신들의 철제 농기구와 무기를 통해 국정 위기를 극복했다고 말하는 건 과언이 아닙니다. 실제 장수지역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제철 유적을 포함해서 120여 곳이 발견되었습니다.
동촌리·삼봉리에 고분군, 대적리에 제철 유적
동촌리 고분군은 장수읍에 있는 5~6세기 가야의 고분군으로, 지름 20~30m 내외의 중대형 무덤을 포함한 83기의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북지역에 있는 가야의 고분군 중 단일유적으로는 최대 규모입니다. 돌로 만든 곽 안에 시체와 부장품을 매장하는 구덩식 돌 덧널(수혈식 석관) 방식으로 축조되었으며, 하나의 무덤 안에는 시체를 매장한 주곽과 부장품을 넣은 부곽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무덤의 평면 형태는 타원형으로 이루어져 있고, 무덤의 주변에 호석을 두르지 않았습니다.
2015년 발굴조사에서 가야계 고분 중에서는 처음으로 징이 박힌 편자가 말뼈와 함께 출토되었고, 2017년에는 고령, 합천, 함안 지역의 지배층 무덤에서 발굴된 것과 같은 마구류인 재갈이 나왔습니다. 그 외에도 둥근 고리자루 칼, 은제 귀걸이, 휴대용 화살통 등 대가야와 소가야계 지배계급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유물들이 발견되어 동촌리 고분이 가야 시대 지배계급의 무덤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가야계 토기와 백제계 토기가 함께 발견되어 가야와 백제의 교류사 및 역학 관계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삼봉리 가야 고분군은 금남호남정맥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의 정상부와 돌출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장계면과 계남면 일원입니다. 인접하여 월강리, 장계리, 호덕리 고분군이 있으며, 약 20여 기의 중대형 고분군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2003년부터 2015년까지 3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주곽과 부곽이 있는 전형적인 가야계 석곽묘로 확인되었으며, 내부에서 광구장경호, 기대, 등 가야계 토기와 마구류, 무기류, 꺽쇠 등 철제유물과 옥, 금제이식 등 최상급 가야유물이 다양하게 출토되었습니다. 이는 이 지역에서 확인되는 봉수 유적, 제철 유적, 산성 유적 등과 더불어 백두대간 서쪽 지역에서 유일하게 확인되는 강력한 가야 세력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유적으로 고고학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대적골 제철 유적지는 백두대간의 장수 덕유산에서 서남쪽의 골짜기에 있는데 이곳은 제련시설이 갖춰져야 할 원료인 철광석, 연료인 나무, 식혀 주는 물의 조건이 적합한 곳입니다. 이 계곡 약 2km에 걸쳐 철을 만들고 난 후 생기는 부산물인 슬래그(slag) 즉 쇠똥이 다량 발견되었으며 계곡 양쪽의 평평한 부위에서는 철 생산 후 버렸던 철재와 노백편 등이 산을 이루듯 쌓여 있었다고 합니다. 유물은 삼국시대에서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발견되었으며 제철과 관련된 건물지로 추정되는 유적도 발견되었습니다. 현재 이곳은 가, 나, 다, 라, 마 지역으로 나누어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철제 동종이 발견되었습니다.
삼국시대에 가야가 쌓은 성들
합미산성은 금남호남정맥의 고봉인 팔공산(1147.6m) 남쪽 능선 중턱에 있으며 축성연대는 백제 중엽으로 보이며 성의 둘레는 430m 내외이고 계곡부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 석성으로 활석을 잘 다듬은 견치석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습니다. ‘합미’라는 이름은 후백제 때 성에 주둔한 군사들이 군량미를 모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그동안의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 가야유물 등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처음 쌓은 시기는 삼국시대 가야에 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산성의 성벽은 견고하고 잘 다듬어졌으며 그 보존상태가 양호합니다.
거녕산성은 장수와 남원의 경계를 이루는 성산(400m)의 정상에 있으며, 이 일대는 백제 때 거녕현으로 신라 때에 거사물정을 두어 백제 옛 땅의 지방 군제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장수의 합미성, 남쪽으로 남원의 척문리산성, 서쪽으로 순창의 적산산성이 있습니다. 성벽의 내부 벽은 장방형의 깬돌을 이용하여 쌓았고 높이는 6m 내외이며, 길이는 350m 정도 잔존하고 있습니다. 성의 내부에는 여러 기의 민묘와 성은정사가 중앙에는 영월암이 있습니다.
침령산성은 삼국시대 가야 세력이 처음 축성하여 후백제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의 구조는 포곡식으로 정상 주변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성의 길이는 상부를 기준으로 약 530m이며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약 6m 내외입니다. 성내 주요시설은 북문지, 치성, 집수정 등이 있으며 망대로 추정되는 시설도 있습니다.
교육 시설 많이 남아 있어
장수향교는 1407년(태종 7)에 장수면 선창리에 창건하였으나 1686년(숙종 12)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1877년(고종 14)에 현감 홍우정이 중수하였고 1935년에 다시 중수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도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어 조선 전기 향교의 형태를 잘 알 수 있는 전학후묘의 배치입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사마재, 양사재, 고사, 부강문, 정충복비각 등이 있습니다.
구조적인 특징은 배향공간에 동무와 서무를 건립하지 않았는데 1691년에 세운 ‘이전사적비’에 동무와 서무를 옮겼다는 기록이 없어 처음부터 건립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강학공간은 강당이 앞에 있고, 재사가 뒤에 있는 전당후재의 특이한 배치입니다. 또한 평지에 세워진 향교인 성균관, 전주향교, 나주향교, 경주향교에서 볼 수 있듯이 전묘후학의 배치가 일반적이나 장수향교는 펑지면서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을 취하였는데 본래 경사지에 있던 건물을 평지로 이건하면서 본래의 배치형식을 따랐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장수향교 대성전은 낮은 석축 기단 위에 세운 맞배집으로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공자와 4성을 비롯하여 공문 10철, 송조 6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정충복비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장수향교에 침입하려 하자 원노인 정경손이 교복을 입고 문묘 앞에 꿇어앉아 경서를 외우며 말하기를, “만약 향교에 들어오려거든 먼저 내 목을 베고 들라”고 한 데 연유합니다. 왜군은 그의 기개에 감복하여 ‘본성역물범(本聖域勿犯)’이라는 쪽지를 주고 물러가 왜군 후속부대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는 1846년(헌종 12)에 세웠습니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를 비롯한 열읍의 향교가 거의 소실되었으나 오직 장수향교만 전화를 입지 않고 보존된 것은 정경손의 공로였습니다.
창계서원은 1695년(숙종 21)에 황희, 황수신, 유호인, 장응두를 배향하기 위해 창계사로 창건되었다가 1815년(순조 15)에 중건하여 창계서원으로 확대 복설되었습니다.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55년에 복원하였으며 1968년에 강백진을 추가 배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경내에는 창계사, 신문, 상현재, 묘정비가 있고 유물로는 황희의 영정 등이 있습니다.
황희는 정승으로 24년간 있으면서 19년을 영의정으로 봉직하였으며, 청백리로서 중용의 도를 실천한 명재상으로서 한때 양녕대군의 폐출에 반대하여 장수군 장계면 월강리로 유배당하면서도 그 뜻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압계서원은 1789년(정조 13)에 창건하여 육려, 임옥산, 박이항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1798년(정조 22) 박이겸, 1799년에 전설을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후손들이 유허지에 제단을 마련하고 향사를 계속해 왔습니다. 1958년 복원되었으나, 전설은 향사에서 제외되었고 1960년대 육홍진을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경내에는 외삼문, 압계사사적비, 울흥재, 성경재, 내삼문인 상의문 그리고 압계사가 있습니다.
도암서원은 1815년(순조 15) 창건하여 이경광, 이성구, 유심춘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3년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경내에는 사우와 강당이 있으며, 강당의 중앙에는 마루가 있고 양쪽에는 협실이 있습니다.
용암서원은 1818년(순조 18) 안성, 양성린, 김영갑, 한인기를 추모하기 위해 용암사로 창건하였습니다.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5년 복원되었으며, 1977년 양석하를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경내에는 사우, 신문, 경현재, 협문, 고사 등이 있습니다.
흥학당은 임진왜란으로 왜적의 침입을 받고 난 뒤 자녀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이 지방의 사족들인 연안송씨, 남원양씨, 보성오씨, 문화유씨, 충주박씨, 전주최씨, 전주박씨, 동래정씨, 금계한씨, 안음서문씨, 청주한씨 등 11성이 뜻을 모아 1597년(선조 30)에 세웠습니다. 이 학당에서 소대항, 오득량, 정국신, 여선덕 등 4명의 문과 급제자와 온표 등 10여 명의 생원, 진사 합격자가 배출되어 명문학당으로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지금당은 1602년(선조 35) 학자였던 정유헌, 이대유, 정념 등이 서당을 설립하여 유생들을 가르쳐 많은 인물을 과거에 급제시켰는데 장수군에서 흥학당에 이어 두 번째로 창건된 학당으로 지금서당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현재의 지금당 건물은 창원정씨, 삭녕최씨, 제주양씨, 김해김씨, 경주이씨들이 ‘지금당계’를 조직하면서 선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1900년대 초반에 건립한 것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폐교가 된 계월초등학교 자리에 있었습니다. 1955년 계월초등학교가 개교를 하면서 교실 등으로 사용했으며 폐교가 된 후 장수군의 향토자료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벽에 걸린 편액 중에 ‘藍田遺約’이라는 현판이 있어 ‘지금당계’의 면모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근수루는 1658년(효종 9)에 오서규(보성오씨), 양하조(남원양씨), 박재강(전주박씨) 등이 자녀교육을 위해 창건한 서당입니다. 처음에 고백이골에 건립되었다가 1694년(숙종 20) 이곳에 거주하던 남씨, 한씨, 송씨, 곽씨, 유씨, 권씨, 이씨, 정씨, 황씨 문중을 영입하여 새로운 계를 조직한 후 현 위치로 이전하였고, 조선 말기에 이르러 다시 김씨, 최씨 문중을 영입하였는데 이 지역에서 근수루 출신이 아니면 행세를 할 수 없다 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던 학당이었습니다. 1929년 신명의숙으로 전환하여 근대교육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는데 학생들이 많이 모여들자 일제가 민족교육을 시킨다는 이유로 강제 해산시켰습니다. 1936년 장안간이학교(장안초등학교)가 설립되면서 근수루의 건물들이 모두 교사로 사용되었고 1970년 학교의 교사를 증축하면서 근수루 건물은 학교 뒤편 소나무가 울창한 야산 비탈진 자리로 이건되었는데 현재의 건물은 1916년에 중건된 건물로 추정됩니다.
성은정사는 거녕산성 안에 있으며 조선 후기 유학자 정석후가 만년에 은거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창건한 건물로서 1709년 중수하였고 현 건물은 1911년 재건하였습니다. 3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구조가 건실하고 평면구성이 특색 있으며 이곳에서 바라본 경치도 으뜸입니다.
고택과 정자도 많이 남아 있어
권희문가옥은 안채를 비롯해 사랑채·문간채·부속사 등 5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안채는 1853년에, 사랑채는 1773년에 건립되었습니다. ㄱ자 모양의 안채 전면에 一자형 사랑채가 있고 안채 서쪽에 별채가 직각으로 배치되어 안마당은 ㅁ자형을 이룹니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작은방과 찬방(도장방)이 있으며, 사랑채는 4칸 규모의 一자형으로 60cm 높이의 잡석 기단 위에 세웠으며, 사랑채 동편에는 중문과 외양간, 창고로 이용하는 바깥채가 있습니다.
장재영가옥은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양반집입니다. 상량문에 기록으로 보아 1856년(철종 7)에 건립된 건물입니다. 안채는 왼쪽 맨 끝이 부엌이고, 앞쪽으로 찬방이 있습니다. 사랑채는 왼쪽 첫 칸의 지붕이 다른 것보다 휠씬 낮은데 이것은 후에 단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랑채는 공기가 잘 통하도록 지표면으로부터 40㎝ 높이에 바닥을 널빤지로 깔았습니다. 문간채는 솟을대문과 왼쪽에는 변소와 헛간이 있고 오른쪽에 문간방이 있습니다. 본래 문간채 오른쪽으로 곳간채가 보이는 정면에 솟을대문 형식의 중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의 중간에 동서로 길게 자리 잡은 곳간채가 있습니다.
정상윤가옥은 농촌 부호의 가옥으로 1856년 건립되었으며, 현재 안채, 사랑채, 곡간채, 대문, 중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교적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서 당시의 건축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심원정(천연대)은 논개사당으로 들어가는 저수지 옆에 있으며, 정자 안에는 모두 11개의 현판이 있는데 ‘심원정기’는 최병심이 썼으며, ‘천연대 팔경원운’은 유일수가 썼습니다. 천연대 8경은 장판횡교(壯板橫橋), 월곡만하(月谷晩霞), 장포어화(長浦漁火), 송탄귀범(松灘歸帆), 신사모종(新寺暮鍾), 삼고초적(三顧樵笛), 남양춘초(南陽春艸), 왕홍낙조(王興落照) 등으로서 이곳에서 바라보는 장수읍과 천천면의 풍경을 머금고 있습니다.
용연정은 양촌 정존성이 소요하던 곳으로 그의 손자 정기수가 세웠습니다. 정자에는 송병선의 기문과 최병심의 제액이 벽면에 걸려 있습니다. 양악댐 바로 아래에 있으며 옆에는 양악리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용연은 덕유산 계류가 흐르면서 층암을 타고 폭포를 이루고, 양변 절벽 아래 떨어져 소를 이루며, 이 소의 언덕 위에는 날아갈 듯 세워진 용연정이 있습니다.
반계정은 안택이 자손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대성산 아래 절벽 끝에 특이한 축조법으로 육각의 정자를 세웠습니다. 절벽에 암반과 자연석들 옥수가 흐르는 시냇물을 상징하는 뜻으로 반계정이라 하였습니다. 그는 제세구휼하는 일을 평생 몸소 실천하고 만인적덕이라는 칭송이 구전되어 오면서 전국 각지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습니다.
충신과 의인의 사당들
정충신 영정각은 후손인 정백흥이 1811년(순조 11)에 지었으며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꾸몄습니다.
정충신의 본관은 금성이며 시호는 충무입니다.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진무공신 1등에 책록되어 금남군이라는 군호를 받았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7세로 광주 목사 권율의 휘하에 들어가 종군하였고, 후에 이항복 밑에서 학문을 배워 무관으로 성장했으며, 27세 되던 때에는 명나라에 다녀왔습니다. 이때 그는 북방에서 세력을 급속히 확장하는 여진족의 정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1617년에는 임진왜란 때 끌려간 포로를 데려오기 위해 오윤겸의 수행 군관으로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정충신은 부원수가 되었지만, 이미 동북아시아 세력을 재편해버릴 정도로 커져 버린 청나라와의 전쟁은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화의를 주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당진으로 유배까지 갔으나 1636년 병자년 3월에 청을 배척하는 주전론이 득세하여 청과 단교를 하였으며 이해 5월에 정충신은 사망했으나 그가 걱정했던 대로 같은 해 12월 청나라는 조선을 침범하였고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2개월 정도를 버티다가 결국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타루비는 장판리 앞의 장척애(長尺崖)에 있는 순의리의 비입니다. 순의리는 당시 현감 조종면의 수하에 있던 통인이었으나 그 성명은 전하지 않아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1678년(숙종 4) 조종면은 현의 서쪽 천천면으로 민정 시찰을 나섰는데 장척애의 길을 지나다가 풀숲의 꿩이 소리치며 날아오르는 소리에 말이 놀라 벼랑 밑의 깊은 소의 물결 속으로 말과 함께 떨어져 빠져 죽었습니다. 이때 현감을 배행하던 통인은 상전이 죽었으니 혼자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의 손가락을 깨물어 벼랑 위에 꿩과 말의 그림을 그리고 ‘墮淚’라는 두 글자를 쓰고 소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습니다. 1802년(순조 2) 현감 최수형이 주인을 따라 죽어 의리를 지키고 충성을 다한 통인의 절의를 추모, 타루비를 세워 제사를 지냈습니다. 훗날 군민들에 의하여 주논개, 정경손과 더불어 장수 삼절로 받들어져 추앙되고 있습니다.
월강사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 장수 현감으로 의병장이 된 일휴당 최경회가 전라도 동북 방면의 방어 임무를 띠고 들어와 창의소를 차리고 의병을 모집하여 훈련시키면서 장대를 세운 곳입니다. 1828년(순조 28) 사림의 장계에 의하여 예조의 허가를 받아 사당을 세우고, 이 지방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친 정신재 백장, 퇴휴재 송보산, 손재 김남택, 일휴당 최경회, 퇴거재 김남중, 삼락당 송수산, 경재 백여옥 등 일곱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48년 장수 유림의 추진으로 복원되었습니다.
최경회는 자가 선우이고 호는 삼계 또는 일휴당으로 화순 출신입니다. 1561(명종 6) 진사가 되고, 1567년(선조 원년) 문과에 급제하여 장수, 무장의 현감과 영해 부사 등을 거친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의병을 규합하여 금산, 무주, 창원, 성주 등지에서 대첩을 거두고, 진주성에서 왜병과 싸우다 순국하였습니다.
백장 유적지에는 무덤과 신도비, 사당이 있습니다. 백장의 호는 정신재, 자는 명윤, 시호는 충숙, 휘는 장, 관향은 수원입니다. 고려 말기인 1342년에 태어났고, 포은 정몽주에게 학문을 익혀 삼은에 버금가는 성리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민왕 때 광정대부이부전서보문각대제학을 지냈으며 조선에서는 태조와 태종으로부터 이조판서집현전대제학을 제수받았으나, 조선의 건국에 참여할 수 없다고 사양하여 장계면 삼봉리로 유배되어 1418년(태종 18)에 생을 마쳤습니다. 비명은 당성 홍직필이 썼습니다.
화산사(華山祠)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파은 박수기, 눌재 박상, 충암 김정, 안재 박지견, 사암 박순, 육유정 박지효 등의 절의와 충정을 받들고자 1961년에 세운 사당입니다. 건물은 외삼문, 안락재, 사당문, 화산사가, 사당 뒤에는 박지견의 묘가 있습니다.
박수기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박상은 시호가 문간으로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사간원 헌납, 담양부사, 나주목사를 지냈고 저서에 <눌재집>이 있습니다. 김정은 시호는 문간으로 성균관 박사, 사간원 정언, 대사성, 형조판서 등을 지냈고 저서로 <충암집>이 있습니다. 박지견은 박수기의 3남으로 천문예습독을 지냈습니다. 사암 박순은 시호가 문충으로 박상의 조카이며 이조참의, 대제학, 영의정을 지냈고 저서에 <사암집>이 있습니다. 육유정 박지효는 박순의 조카로 사헌부감찰, 장예원 사평을 지냈습니다.
사동사는 1847년(현종 13) 창건되었다가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던 것을 1957년 복설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이 지역에 거주하던 김해 김씨의 선조 동창 김준손, 매헌 김기손, 탁영 김일손, 삼족당 김대유, 도연정 김치삼, 만회당 김정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가 복설하면서 모암 김극일을 추배하고,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점필재 김종직도 추배하고 김극일을 주벽으로 하였습니다.
의암사는 논개사당으로, 현감 정주석이 논개의 충절을 선양하고 장수 태생임을 기리기 위하여 1846년 ‘논개생장향수명비’를 세운 후 1955년 군민들의 성금으로 남산에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1974년에 현 위치에 의암사가 이건되고 의암사가 원래 있던 자리에는 의암루가 건립되었습니다. ‘義巖祠’라고 쓴 현판은 당시 부통령이던 함태영의 친필입니다. 경내에는 생장향수명비각, 기념관, 외삼문, 내삼문, 충의문, 영정각이 있습니다.
의암송은 장수군청 청사 앞에 있으며 논개가 장수 현감 부실이었을 때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수령은 약 4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8m, 가슴높이의 둘레는 3.2m입니다. 이 나무는 원줄기가 외줄기로 되어 있는데, 지상으로부터 1m쯤 되는 곳에서 시계방향으로 뒤틀어져 있습니다.
논개의 호는 의암, 성은 주씨, 본관은 신안이며 장수군 장계면 주촌마을에서 서당 훈장인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논개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사주를 보고 지었는데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즉 개해, 개일, 개시에 태어났다고 해서 논개라 하였습니다. 논개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갈 곳이 없어지자 당시 장수 현감이던 최경회의 배려로 장수 관아에서 잔 심부름을 하면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경회는 부인인 김씨의 사망 후 담양 부사로 재직할 때 논개와 부부의 예를 올렸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모친 상중이었던 최경회는 전라우도 의병장이 되어 의병들이 모집하고 500여 명의 정예부대를 편성하여 무주 우지치 전투의 대승을 비롯하여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특히 1차 진주성 전투의 승리 때 큰 공을 세워 1593년 4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영전되어 진주성으로 입성했습니다. 논개 또한 남편의 뒤를 따라 진주성으로 향했으나 6월 19일에 왜군이 10만여 대군으로 침공하여 11일간의 전투 끝에 진주성은 무너지고 7만에 가까운 민관군이 사망하였습니다. 남편이 순국한 후 논개는 남편의 나라를 지키자고 하는 뜻을 따라 기생으로 위장해서 촉석루에서 열린 일본군의 승전잔치에 들어가 왜장 케야무라 로쿠스케를 유인해서 촉석루 아래 남강에 있는 바위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 순국하였습니다. 그 후 논개가 투신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지고 논개의 호가 의암이 되었습니다.
양성지 별묘는 원래 산서면 봉서리에 있던 월곡사에 봉안되어 오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월곡사는 성종 때 남원군 양성지를 배향한 사당이었으나 고종 때 전국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후손들이 이곳에 건물을 새로 지어 위패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양성지는 본관이 남원. 자는 순부, 호는 눌재 또는 송파이며 1415년(태종 15)에 태어나 1482년(성종 13)에 사망했습니다. 세종에서 성종까지 6조에 걸쳐 문신으로서 실학을 중시하여 농업, 인구, 노비, 등에 관한 정책을 폈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홍문관 대제학을 역임한 훈구파 정치가였습니다. <고려사> 개찬, <세종실록> <예종실록> 편수, <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도> 편찬에 참여하였고 정예병 육성, 무묘 설치, 무관 예우 등 국방력 강화방안을 비롯해 도·군·현에 의료기관을 설치하는 민생 안정 방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책을 제기한 탁월한 경세가였습니다. 중국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우리의 것을 보존하고 중흥시켜야 한다는 주체적 자세도 뛰어났는데 세조는 양성지를 ‘해동의 제갈량’이라고 하였습니다. <눌재집> <행동성씨록> <농잠서> 등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백용성 조사 탄생성지는 독립운동가이며 근대불교의 선승인 백용성이 태어나 살던 곳입니다. 백용성 조사는 16세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화월 화상을 은사로 혜조 율사를 계사로 수행정진하였습니다. 합방 후에는 불법으로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선농 불교의 대각사상을 바탕으로 민중 계몽운동에 힘썼습니다. 1919년에는 독립선언서에 불교계 대표로 서명날인하고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3·1독립만세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에는 불교 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전념하였습니다. 1927년 백운산에 화과원을 설립하고 선농일치 운동을 통한 민족구제 및 사원 경제의 자립 운동을 전개하면서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보내는 기지로 활용하였습니다. 1940년 세수 77세, 법랍 61세에 입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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