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입니다. 오늘부터 16일 동안, 전 세계에선 여성폭력 추방을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제안되고 실천됩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에선 '여성가족부 폐지 반대'라는 말로 이 기간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더 나아가기는커녕 더 나빠지는 것을 막기 위한 시간입니다. 안타깝고, 분노합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여성가족부 폐지를 둘러싼 정치권 논의의 본격화가 예고된 가운데, 여성들은 "성평등은 정치거래의 대상이 아니다"라 말하며 국회의 각성을 촉구했다.
800여개 시민사회단체의 연대체 '여성가족부 폐지 저지와 성평등 정책 강화를 위한 범시민사회 전국행동'은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더불어민주당·국민의힘 정책협의체 구성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이 같은 입장을 밝혔다.
앞서 지난 23일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양당의 정책위의장, 원내 수석부대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간사 각 3인을 차출해 정책협의체를 구성했다. 정부조직법 개정과 공공기관장 임기 문제 등이 협의체의 주요 논의 사항으로 제시됐다.
이날 단체들은 "거대양당이 정책협의체에서 정부조직법을 논의하겠다는 것은 이 후퇴 법안을 공론화시키는데 일조하는 격"이라며 "국회는 성평등 전담 기구의 강화라는 국제사회의 흐름에 역행하는 입법 논의를 해서는 안 된다"고 이를 비판했다.
실제로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두 건의 정부조직 개편안은 모두 '여성가족부 폐지'를 골자로 하고 있다.
지난 5월 6일 발의된 권성동안의 경우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여가부가 담당하던 청소년 및 가족 관련 업무는 보건복지부로 이전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지난 10월 7일 발의된 주호영안의 경우 여성정책, 권익증진 업무 등을 추가로 보건복지부 산하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에 이관하며 여성노동 업무는 고용노동부로 이관한다는 디테일을 더했다.
단체들은 두 안 모두 '논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박수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위원장은 먼저 "성평등 정책 추진을 위한 주요 기능은 반드시 정부조직법에 그 담당부처가 명문화돼야 한다"며 "여성정책과 권익증진 업무가 어느 부처로 이관되는지조차 담고 있지 않은" 권성동안을 비판했다.
여가부의 여성정책 업무는 주무부처로서 여성정책을 기획하고 부처 간 정책을 조정·총괄하는 업무를 포괄한다. 성평등 관련 정책을 조정·기획하는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의 핵심으로 꼽힌다. 권익증진 업무에는 성폭력 피해자 지원 등 '구조적 차별'에 대응하는 직접적인 업무 사항들이 포함된다.
박 위원장은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의 신설을 통한 업무 이관 내용을 명시하고 있는 주호영안에 대해서도 "독립부처 장관과 그에 따른 예산으로도 하지 못한 성평등 정책 총괄기능을, 의안제출권이나 심의의결권도 없는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장이 더 잘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성평등 정책의 효과적인 기획 및 조정을 위해선 전담부처 형태의 독립기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게 박 위원장의 지적이다.
특히 박 위원장은 "2020년 기준 전 세계 194개국에 성평등 전담기구가 설치돼 있으며, 160개국이 (여가부와 같은) 독립부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며 "모든 정책의 집행 과정에 성평등 관점을 반영하는" 성평등 추진체계 정비를 위해선 "독립부처 형태의 성평등 전담기구가 가장 효율적"이라고 강조했다.
2015년 제70차 유엔 정기총회에서 채택한 '지속가능 발전 목표'는 2030년까지 '지속가능의 발전 이념 실현'을 달성하기 위한 17개 목표 중 하나로 성평등의 실현을 명시하고 있다. 성평등 추진 체계 정비는 이를 위한 기본 요건으로, 총회 당시 한국 역시 '양성평등 정책 추진 체계 강화'를 정책 과제로 설정한 바 있다.
단체들은 국민의힘과 정책협의체를 구성한 더불어민주당에도 비판의 날을 세웠다. 정부조직 개편안 논의를 위한 정책협의회의 구성이 '여가부 폐지를 중심으로 한 정치거래의 현장일 수 있다'는 우려다. 민주당 측은 지난 3월부터 여러 차례 여성가족부 폐지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혀왔지만 "이를 공식 당론으로 채택하진 않고 있다"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장예정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은 "문제점이 기본적으로 국민의힘 측에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서도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활동 당시에도 (더불어민주)당 책임자들은 여러 우려 지점이 있다면서 (차별금지법 당론 채택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지금은 어떤가" 되물었다. 지난 2007년을 시작으로 15년을 이어온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운동은 지난 5월에도 결국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마무리됐다. 당시 민주당 측에선 박주민, 권인숙 민주당 의원 등 개별 의원들이 연대의 뜻을 밝히기도 했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을 당론으로 채택해야 한다'는 일부 의견은 무산됐다.
장 사무국장은 "성평등 정책을 강화하겠다는 민주당 측은 지금도 '여성가족부 폐지 반대'를 당론으로 채택하란 요구에 확답을 주지 않고, 책임 있는 약속을 하지 않고 있다"며 "당내 의원들마저 설득할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정치를 그만둬 달라"고 지적했다.
한편 이날 25일은 1999년 유엔(UN)이 지정한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이다. 이에 지난 24일엔 여가부 또한 "11월 25일부터 12월 1일까지 일주일 간 제3회 '여성폭력추방주간'을 운영"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그러나 이날 단체들은 정부가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면서도, 성폭력·가정폭력·성매매·데이트 폭력·스토킹 디지털 기반 성폭력 등의 피해자를 보호하겠다고 말하고 있다"며 이는 "국가적 책임을 방기하고 피해자를 기만하는 말"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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