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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노동자와 함께 야간열차를 타고, 베트남 남북을 종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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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노동자와 함께 야간열차를 타고, 베트남 남북을 종단하다

[베트남 종단열차①] 하노이, 베트남의 자긍심을 엿보다

2019년 5월 <프레시안>은 조합원들과 함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습니다. 덜컹거리는 열차를 타고, 끝없이 이어지는 자작나무 숲, 황량한 대지 위에 빛나는 태양과 해가 진 뒤 떠오른 수많은 별들을 함께 보았습니다. (관련기사 : 최초 여성 공산주의자 김알렉산드라를 따라 걷다) 코로나로, 또 전쟁으로 열리지 못하고 있는 러시아 철길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번엔 베트남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프레시안>이 철도노동자들과 함께 베트남의 남북을, 열차로 종단하고 온 이야기를 전합니다. 곧 <프레시안>의 조합원들과 함께 떠날 날을 그려봅니다.

베트남의 역사는 외국 세력의 지배에 저항하여 독립 국가를 세우기 위한 전쟁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베트남은 중국의 식민지로 1,000여 년, 프랑스의 식민지로 100여 년을 보냈다. 1945년 태평양 전쟁 중에 프랑스를 밀어내고 들어온 일본의 지배를 받다가, 그해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운명을 겪기 시작한다.

분할 점령을 시도하는 연합군과 베트남을 되찾으려는 프랑스에 대항하여 호찌민이 이끄는 비엣민을 중심으로 저항하다가, 마침내 하노이에서 공산주의 정권인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수립된다. 이후로 인도차이나 전쟁이라 불리는 독립 전쟁이 이어지고 마침내 1954년에 프랑스를 완전히 몰아낸다.

그리고 북위 17도 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베트남 민주공화국 남쪽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베트남공화국으로 나뉘게 된다. 베트남 전쟁, 혹은 미국 전쟁이라고 불리는 그 전쟁은 1964년에 발발하여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으로 종결된다. 이듬해인 1976년 통일된 베트남사회주의 공화국이 세워진다.

미국에 이주한 베트남인의 시선으로 베트남 전쟁을 다룬 논픽션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2019, 더봄)를 옮긴 부희령 씨가 요약한 베트남의 역사다. 부 씨도 말했듯,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베트남의 역사가 한국과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분단 국가의 설움도,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 시도도 비슷하다. 하지만 베트남은 모든 외부 세력의 침략을 이겨냈고, 한국은 그러지 못했다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 도서관에서 베트남에 대한 서적을 뒤적거렸다. 베트남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서가를 '다문화실'이라고 부르며 베트남어로 된 동화책뿐 아니라 사회과학 서적의 양이 상당하다는 점에 놀랐다. 그 서가에서 한국의 자녀이면서, 베트남의 자녀인 아이들이 책을 고르고 있는 손길에도 눈이 갔다.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전집에는 베트남을 '자부심이 강한 나라'라고 소개했다.

베트남이 외세의 침략을 계속 이겨내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졌다. 또 비슷하면서도 다른 역사를 가진 베트남이란 거울을 통해 한국의 현재를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호 아저씨의 나무 책상과 목조 가옥

'Bác Hồ' 베트남 사람들은 '통일의 아버지'인 호치민을 호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또 그 자신도 그렇게 불려지길 원했다고 한다. 그런 친근한 모습 때문일까. 혹은 베트남 여행 내내 화폐에 그려진 호치민의 얼굴이 익숙해져서 일까. (베트남 화폐 모든 권종에는 호치민 초상화가 그려져있다) 하노이에서 들렀던 그의 묘역과 그가 죽기 전까지 10여년간 살았던 목조가옥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

▲호치민 관저 내 박물관에 걸려있던 호치민의 생전 사진. ⓒ프레시안(박정연)
▲호치민의 목조 가옥. 단촐한 나무 책상과 나무 침대가 눈에 띈다. ⓒ박흥수 철도노동자

4년간 정치부 출입을 했던 기자는 우리나라의 정당 대표, 혹은 대선 후보 등 정치 지도자들의 자택 근처에 취재를 간 적이 있다. (정치 지도자들은 자택에 대기하다 선거 결과의 윤곽이 나오면 승패에 대한 소감을 밝히기 위해 나오는데, 보통 취재진들은 그 근처에서 몇 시간씩 대기를 하곤 한다.) 서울 중심에 있는 유명 브랜드 아파트들 혹은 자동문이 달린 주차장이 있는 전원 주택에서 그들을 기다려본 경험이 있다. '국부'였던 호치민의 목조가옥은 그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하노이가 해방된 후에도 총독부로 사용되던 관저 건물을 마다하고 소박한 목조 건물에서 일생을 살았던 호치민. 평생을 독신으로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살았던 그의 유품은 작은 나무 책상과 침대, 책과 시계 등이 전부였다. 맹호부대 육균 장교로 베트남 전쟁에 참가했던 김진선 씨는 자신의 참전 수기를 담은 <산자의 전쟁 죽은 자의 전쟁>에서 호치민에 대해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호치민의 마음은 어린아이같이 순수하고 깨끗했다. 전쟁 중에도 아이들과 연못가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으며 무척 검소했다. 오직 베트남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며 일생을 살았으며 빈털터리로 세상을 떠났다. ... 그는 겸손했으며, 평민으로 생각하고 오직 희생과 봉사와 사랑만을 실천했다.

적군의 수장이자 '베트콩'의 정신적 지주였던 호치민에 대해 이렇게 찬사를 쏟아낼 수 있었을까. 북베트남은 물론 남베트남 시민들에게도 많은 지지를 받은 지도자인 호치민. 한국에 대입해보면 남한에서는 김일성을, 북한에서는 이승만을 지지한다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니 새삼 호치민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호치민의 무덤. 두 명의 군인이 무덤 앞을 지키고 있다. ⓒ 박흥수 철도노동자
▲호치민 관저 내 박물관에 있던 호치민의 동상. ⓒ프레시안(박정연)

호치민은 자신을 화장해서 베트남 각지에 묻어 달라고 유언 했지만, 그 뜻은 지켜지지 않았고 방부 처리된 그의 시신은 바딘 광장에 있는 거대한 석조 건물에 안치되어 있었다. 비록 호치민 본인은 이러한 우상화를 달가워하지 않을 듯 보이지만, 석조건 물의 아우라와 그 앞을 흔들림 없이 지키는 군인들을 보니 '호 아저씨'가 영원히 존재하길 바라는 베트남인들의 염원이 느껴졌다.

호수에 '빠져있던' B-52기…베트남 참전 파일럿과의 조우

하노이에는 기막힌 공간이 있다. 그 곳은 주민들이 이용하는 평범한 호수처럼 보인다. 실제로 몇몇 주민들은 그 곳에서 메기를 낚아 팔기도 한다. 하지만 그 호수가 다른 곳들과 다른 이유는 전투기가 물에 빠진 채로 있기 때문이다. 다른 어떠한 설명도 없이 그저 전투기가 호수에 '빠져있다'.

바로 추락한 미 공군 B-52기의 잔해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미국은 북베트남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하노이에 그야말로 '융단 폭격'을 가했다. B-52기가 폭탄을 투하하면 마을 전체가 잿더미가 됐다.

▲B-52기의 잔해가 호수에 빠진 채로 보존되어 있다. ⓒ프레시안(박정연)

뜨악한 표정으로 저수지에 빠진 B-52기를 보며 걷고 있을 때, 범상치 않은 포스의 남성을 조우했다. 그는 자신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던 파일럿이라고 소개했다. Nguyen Hong My라는 이름의 남성은 1972년 미국 전투기를 격추한 최초의 베트남 조종사였다.

▲B-52 호수에서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던 파일럿을 조우했다. ⓒ박흥수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던 Nguyen Hong My의 과거 사진 ⓒNguyen Hong My
▲B-52 호수에서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던 파일럿을 조우했다. ⓒ홍인기 철도노동자

그는 그 저수지 앞에서 "자신이 미 공군을 격추시킨 첫 파일럿이며, 이후 미국에 초청을 받아 미국 공군들로부터 사과를 받기도 했다"고 설명했다.실제로 자신의 파일럿 자격증을 보여주었고, 구글에서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 그 사실들을 기사로 확인시켜주기까지 했다. (참고 기사 : RECONCILIATION OF FORMER COMBATANTS INSPIRES, HEALS)

그야말로 우연히 '살아있는 역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책으로만 배웠던 베트남 전쟁이, 얼마 되지 않은 동시대의 일이라는 걸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

후에로 가는 야간열차

레닌광장, 호아로 감옥, 롱비엔 철교 등 하노이의 구석구석을 다니다 보니 어느새 다음 목적지인 후에로 갈 때가 됐다. 베트남에서의 이동은 <프레시안> 조합원들과의 지난 시베리아 기차여행(참고기사 :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고 가던 중 김정은이 눈 앞에!) 과 마찬가지로 야간 열차를 타고 베트남을 남북으로 종단한다. 이번엔 철도노동자들도 함께했다.

1번 승강장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하노이발 후에행 SE1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는 생각보다 훨씬 쾌적했다. 러시아의 횡단열차, 인도의 SL칸과 비교할 바가 안 되었다. 객차 안으로 들어가니 탁자 위 귀여운 꽃장식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침대 위 가지런히 놓여있는 깔끔한 시트와 베개, 그리고 객실 안에서 신을 수 있는 슬리퍼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하노이역 승강장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후에행 야간열차 ⓒ한송이 철도노동자
▲깔끔하게 정리된 베트남 야간열차. 책상 위 꽃이 우릴 반겨주었다. ⓒ한송이 철도노동자

생각보다 좋은 객실 상태에 모두 감탄하고 있을 때 쯤, 하노이 거리의 불빛들이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열차 복도 창문으로 보이는 하노이의 스쿠터들이었다. 열차는 시속 50~70 km/h의 속도로 달려 하노이의 불빛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낼 수 있었다. 차창에 기대어 불빛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2002, 마이클 매클리어)을 번역한 유경찬 씨는 "호치민 사후 6년 동안 그의 '단결'이라는 유언은 전 국민의 가슴에 비명처럼 새겨졌고, 이후 정치국원들은 추호의 흔들림 없는 자세로 전쟁을 수행했다. 베트남을 독립시킨 것은 호치민이 아니라 민중들과 함께 했던 청렴과 희생이라는 '호치민 정신'이었다"고 평가했다. 스쿠터를 탄 하노이 시민들은 답례로 손을 흔들어주며 차창 밖으로 차츰 멀어져갔다.

▲야간 열차의 차창 밖으로 보이던 하노이 시내의 불빛들 ⓒ박흥수 철도노동자

어느새 어둑해진 차창을 바라보며 같은 객실에 우연히 모인 사람들끼리 이야기 꽃을 피우는 건 야간열차 여행자의 특권이자 숙명이다. 약 15시간의 열차 여행을 버티는 동력이기도 하다. 이번 여행에 함께 하게 된 철도노동자들의 화제는 단연코 '열차'였다.

이들은 열차가 부드럽게 정차하지 못하는 것을 두고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오래된 차량이라 충격을 흡수하지 못한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이음새가 잘 맞지 않아 흔들리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다 어떤 베테랑 운전사가 "사실은 기관사가 운전을 제대로 해야 하는 문제인데!"라고 말하자 철도노동자들은 모두 웃음이 터졌다.

철도 노동자들은 이외에도 기차역을 보며, 선로를 보며, 기차의 부품을 보며 자신들의 분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여행을 떠나도 자신의 일과 관련해 저마다 의견을 내고, 애정을 기울이는 이들의 눈빛에는 긍지가 보였다. 그렇게 베트남 야간 열차의 밤은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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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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