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사는 것이 더 행복한 것으로 너무 인식돼 있는 것 같다."
지난 15일 한국방송(KBS)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나경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부위원장은 문화방송(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를 언급하며 이같이 말했다.
나 부위원장은 해당 인터뷰에서 "정책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인식"이라며 "아이를 낳는 것이 더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드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가 먼저인지, 비혼 및 비출산 인구의 증가 현상이 먼저인지 따져보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해당 발언에는 좀 더 중요한 정치적 함의가 있다.
정책과 사회적 인식은 선후를 바꿔가며 서로를 견인한다. 그리고 나 부위원장은 저출산·고령사회 문제를 책임지는 정책 설계자의 위치에 서 있다. 나 부위원장의 발언에서 시민은 '혼자 사는 것이 더 행복하면 안 된다'는 국가적인 시그널을 읽는다. '남녀가 결혼해 출산하는 것이 곧 행복이고 정상'이라는 시그널이다. 개인 삶의 형태와 개인 간의 관계를 국가가 나서서 교정하려 하는 셈이다.
지난 9월 30일 서울 합정동 <프레시안> 본사를 찾은 김순남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에 따르면, 사실 이는 아주 오래된 기획이다.
즉 국가는 오랫동안 "개개인을 폐쇄적인 가족 형태 안에서만 생존할 수 있도록 정책을 설계해 놓고, 그 정책으로 인한 불평등에 대해서는 '가족을 갖지 못한 너의 문제'라고 말해왔다." 김 대표는 지난 9월 펴낸 책 <가족을 구성할 권리>에서 이를 "국가의 정상시민 만들기 프로젝트"라 지칭한 바 있다.
'가족'이란 언어를 "차별의 언어가 아닌 저항의 언어로 다시 쓰자"며 펼쳐낸 이 책에서 김 대표는 "가족을 매개로 강제돼온 삶의 방식과 관계의 방식, 가족을 매개로 부여돼온 '이상적인 시민의 자격'을 해체"하는 것이 평등의 기본 조건이라 역설한다.
결혼·출산하지 않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단어, '그 가족'
나 부위원장이 정책의 한계를 시사한 점은 흥미롭게 읽힌다. 어쩌면 그는 '이성애 결혼 및 출산 중심 정책'이 이미 포화상태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성애 남녀의 결혼과 출산을 통해 이루어지는 가족관계를 소위 '정상가족'이라 부른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동성 부부, 비혼 공동체, 1인가구 등 '다른 가족관계'를 비정상적이거나 불완전한 관계로 규정한다.
결혼을 했지만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동성부부 이야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가령 동성결혼 6년차의 소성욱, 김용민 부부는 지난해 2월부터 "실질적 혼인관계임에도 동성 배우자라는 이유만으로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는 동성부부의 현실을 지적하며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다.
가족 간의 피부양자 자격조차 논란거리가 된 해당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인식뿐만 아니라 실제 법령과 정책 등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자연스럽게 '비정상' 가족들은 제도와 지원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김 대표는 이러한 정책적 경향성을 "국가가 개인 간의 관계에 개입하는 것"이라고 봤다. 결혼정책이 대표적이다.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를 가리지 않고 '결혼친화도시' 선포(인천), '미혼 남녀 중매' 사업(진주), '결혼장려팀' 구성(대구) 등과 같은 결혼 장려 정책을 실행"하면서 "결혼이 정책 수혜를 입기위한 필수조건으로 자리"하게 된다.
가령 "주민등록법상 한 세대로 함께 거주하고 있더라도 혈연가족이 아니면 주택임대차보호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동성부부의 경우 배우자의 죽음에도 "시신 인수, 시신 확인서 등의 각종 증명성 발급과 금융거래 확인 등 관공서를 상대하는 일 등에서 파트너로서, 삶의 동반자로서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주거 혜택, 보험금 납부 등 조세 관계, 장례 및 응급 수술에 있어서의 자격 등이 모두 '폐쇄적인 가족주의' 속에서만 주어지는 꼴"이다.
"결국 혜택을 받고 싶다면, 정책상의 차별을 당하기 싫다면 (남녀간의) 결혼을 해라. '정상' 가족을 이뤄 '정상' 시민이 돼라. 국가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다만 김 대표는 책에서 '정상가족'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대신 '그 가족'이라는 대명사 지칭을 사용했다. "정상가족이란 표현 자체가 국가의 정책이 어떻게 가족 개념을 만들어왔는지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긴 하지만, 그럼에도 "정상가족이란 말을 쓰고 싶지 않았다." 가족에 대한 사유의 경로 자체를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상가족이란 용어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가족 담론을 '정상(가족) 대 위기(가족)'의 구도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없이 다양한 관계를 오로지 주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들죠.
이 분절된 사유 속에서 시민 개개인도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됩니다. '이성애 비장애인 시민'이라는 모델이 하나의 정상 모델로 내재화됩니다. 저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상가족이란 말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이유는 저를 지배해왔던 그 내재화를 경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가로막는 삶 … "시민 삶은 변했는데, 정책은 변하지 않는다"
예능 프로그램이 저출산·고령사회 경향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이란 정치적 판단은 매 시대마다 "가족의 위기"를 호소해온 국가의 태도와도 상통한다. 김 대표는 특히 "외환위기 이후 '남성 생계부양자 가족 모델'이 해체 및 재구성됐고, 이때부터 국가는 계속해서 '가족의 위기', '가족의 해체' 등을 피력해왔다"고 강조했다.
다만 이는 "사실은 가족의 위기가 아니라, 유일한 가족 형태라고 상상돼왔던 한 가지 모델의 위기일 뿐"이라는 게 김 대표의 주장이다.
"시민들은 새로운 삶의 형태, 가족의 형태를 만들며 상호의존망 관계를 확장해 왔"는데 "오히려 국가만 이미 실패한 국가주도의 인구·가족 정책 모델만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구권 국가들은 물론 일본에서도 동성혼이나 비혼출산이 인정되는 등 "코로나 이후로 더욱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는 세계적인 흐름에서도 벗어난 길"이다.
"사회는 여전히 결혼과 출산을 여성의 일차적인 역할로 생각하지만, 현실 속 개인들의 삶의 변화 속도는 사뭇 빠르고 극적이다. … <2020년 사회조사 보고서>(통계청)에 따르면, 미혼남성의 40.8%는 결혼이 필수라고 생각한 반면, 미혼여성은 22.4%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결혼하지 않고 같이 살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전체 응답자 중 59.7%가 그렇다고 답했는데, 이는 같은 응답이 2012년 45.9%, 2014년 46.6%, 2016년 48.0%, 2018년 56.4%였던 것을 참고하면 꾸준히 증가해온 것임을 알 수 있다.
…
비혼동거에 대한 인식 변화는 여성가족부가 주관하는 조사로는 최초로 전국 만 19세 이상 ~ 만 69세 이하 국민 중 현재 남녀가 동거하고 있거나 과거 동거 경험이 있는 300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비혼동거 실태조사를 통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응답자들은 동거사유로 '별다른 이유 없이 자연스럽게'를 가장 많이 꼽았는데(38.6%), 이는 동거가 더 이상 특별한 이유 또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삶의 '당연한 선택' 혹은 '가능한 선택지'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책 <가족을 구성할 권리>, 26~27쪽
"시민들의 유대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포착하고, 그에 맞는 정책적 변화를 꾀하는 것은" 정부의 역할이다. '정부가 그 책임을 방기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질문에 김 대표는 "아주 간단하다. 사람들의 삶이 어려워진다"고 답했다. 국가가 정해놓은 '정상성'의 길에서 벗어난 이들이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만다"는 뜻이다.
"가령 대표적인 '(정상)가족 밖 존재들'인 성소수자들의 경우, 원가족과의 불화로 지원 없이 일찍 독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성소수자 개인의 고립과 빈곤으로 이어지죠. 그런데 지금의 정책구조상 이 개인은 고립을 극복하기 위한 '시민적 유대'를 이루기도 힘듭니다. 개인이 유대를 이루어도 그 유대를 지원하고 보호하는 장치가 없으니까요.
결혼·출산을 중심으로 한 '특정 관계맺음'이 성립할 때에 보상처럼 주어지는 정책 틀(현재의 주거, 결혼, 혹은 사회적 보장제도 등)을 벗어나 모든 이들을 포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책'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이나 '차별금지법' 제정 이슈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시민적 유대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보편적' 노력들이죠."
'가족' 뒤에 숨어있는 건? "국가의 정상시민 만들기 프로젝트"
시민 개인들 간의 자유로운 유대를 방해하는 정책 틀, 즉 정상가족 시스템은 결국 "시민과 시민을 분할하는" 시스템이다. '정상' 이외의 것들을 '위기'로 낙인찍으며 "시민을 구분하고 시민의 자격을 나누는 장치"다.
김 대표가 기존의 가족중심 정책을 가리켜 "국가의 정상시민 만들기 프로젝트"라 명명한 이유도 여기서 나온다.
김 대표는 "시민을 인구로 보는 태도가 우리 사회에 '위기가족'들을 만들어내는 주체"라며 혼자 사는 사람들, 이성애 결혼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 출산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몸을 가진 사람들 등을 "국가로부터 문제적 존재로 구분된 이들"의 예로 들었다.
"이성애 규범적인 가족제도는 그러한 가족질서의 경계를 넘는 존재들을 끊임없이 '근본없는 존재들'로 간주하며 이들의 관계를 '위기가족'으로 낙인찍는다. 이들(위기가족)은 미혼모, 성소수자, 그리고 언제나 가족에게 의존하는 존재로 간주되는 장애인들이었고, 나아가 결혼하지 않는 독신여성, 또한 출산을 기피하는 이기적인 존재로서 문제화되어 왔다."
-책 <가족을 구성할 권리>, 93쪽
가족구성권연구소를 포함해 시민사회의 여성·성소수자·인권단체 등이 전부터 "건강가정기본법 제3조 1항의 삭제"를 요구하고 있는 핵심적인 이유다. 가정법상 '가족'의 범위를 정의하고 있는 해당 조항은 가족을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뤄진 사회의 기본단위"로 협소하게 규정하고 있다.
이 배타적인 가족 규정을 전제로, 가정법은 다시 "모든 국민은 가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복지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제4조 2항)해야 하며 "혼인과 출산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제8조)고 규정한다. 특정 형태만으로 인정되는 '가족' 개념이 "개인의 삶을 국가와 사회(인구증가)를 위해 동원"하는 동력원으로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혼자 사는 것'이 더 불행하길 바라는 이들
김 대표가 가족구성권 연구소를 개소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때가 2006년이다. 비혼 인구나 성소수자 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관계맺음'의 권리운동은 그 전인 2000년대 초반부터 이어져왔다.
20년 가까운 요구 끝에, 얼마간은 변화가 보이는 듯도 했다. 지난 2020년엔 남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현행 가정법상 '가족의 정의' 규정을 삭제하는 것을 골자로 한 가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어 지난해 4월엔 여성가족부가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결혼을 하지 않은 동거 커플이나 아동학대 등으로 인한 위탁가족도 법적 가족으로 인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어렵게 만든 변화는 쉽게도 허물어졌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김현숙 여가부 장관 체제로 새로 출발한 여성가족부는 지난 9월 23일 정경희 국민의힘 의원실을 통해 '건강가정기본법은 현행유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프레시안>이 김 대표를 만나기 1주일 전의 일이었다.
여가부는 "여성부는 '가족'의 법적 개념 정의에 대한 소모적 논쟁이 아니라 실질적 지원에 방점을 두겠다"라고 단서를 달았지만, 이에 김 대표는 "실질적 지원의 핵심은 삶을 인정하는 것"이라며 "삶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실질 지원이 가능한가"라고 되물었다. 실제로 당시 정 의원은 "(가족) 정의 규정이 사라지면서 법적 '가족'의 의미가 모호해지면 동성혼 등이 합법화 될 수 있다"며 여가부 입장을 환영한 바 있다.
누군가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 담당 부처의 입장,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나지 않아 나온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부위원장의 '나혼산' 발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뜬금없는 '예능 때리기'라며 웃고 넘어갈 수 있을까.
혹시 그의 발언 순간이야말로 "사람들의 삶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김 대표의 전망이 정치권의 입을 통해 확인된 순간은 아니었을까. <나 혼자 산다>가 '혼자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주장하려 만든 프로그램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사는 것이 더 불행'하길 바라는 이들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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