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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동원용 기차시간표 때문에 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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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동원용 기차시간표 때문에 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프레시안 books] <기차시간표 전쟁- 세계1차 대전의 기원>, A.J.P. 테일러 지음, 페이퍼로드

어리석음이 세상을 지배할 때 인간은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 독창적이면서 치밀한 작가로 알려진 영국 역사학자 A,J,P 테일러Alan John Percivale Taylor 의 새 번역서가 <기차시간표 전쟁>이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War by Time-Table;How the First World War Began이 원제로 1969년 출간 후 53년이 지났지만 이 책은 2022년을 사는 사람들을 위해 쓰인 것처럼 보인다.

한국어판 책 제목만 보고는 철도와 현대 전쟁의 관계를 다룬 내용으로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물론 저자는 이미 짜인 전시 동원용 기차시간표를 거스를 수 없어 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는 도발적 주장을 한다. 하지만 철도에 대한 내용은 상징적으로만 언급됐고 분량도 매우 적다. 대신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전 관련 국가들의 정치인, 군인, 언론들이 얼마나 무지하고 무책임했는지 세세히 보여준다.

강대국 간의 대규모 전쟁인 1차 세계대전의 리허설은 조선에서 열렸다. 테일러는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이 참호전, 무의미한 살상, 자질 미달의 지휘, 전쟁의 신이 되어버린 기독교 신, 패전국에서의 혁명까지 훗날 1차 세계대전의 특징이 된 모습이 이 전쟁에서 등장했다고 말한다. 여러 나라의 특파원과 참관인이 파견됐고 일반참모들은 묵직한 연구보고서를 내놓았지만 가치 있는 교훈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도 저자는 밝힌다. 이를테면 기관총에 맞서 기병을 돌격시키는 것이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유럽에는 6개의 강대국이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프랑스, 독일,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 였다. 이 여섯 나라는 서로 또는 주변의 여러 나라들과 이런저런 동맹을 맺고 있었다. 동맹 관계와 무관하게 영국과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서 두 국가의 위협에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독일이 강해지면 바로 자국의 이익이 침해될 것으로 여겼다. 복잡하게 얽힌 국제관계 속에 국가안보의 중요성이 부각됐고 만일에 대비한 국가동원체제가 필요했다. 정부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동원령을 발동하면 공공장소의 게시판에 소집명령을 담은 현수막이 설치된다. 예비군은 통지서에 표시된 집결지로 가서 배속부대에 편성된다.

작전참모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대규모 병력과 장비를 가장 효율적으로 이동 시킬 수 있는 열차시간표의 작성이었다. 프랑스의 모든 철도 화차에는 "사람 40명 또는 말8마리"라는 문구가 오랫동안 적혀 있었다고 한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는 전쟁에 대비해 삼백만의 병력과 4,278대의 열차 이동 게획을 세웠고 이는 정교하게 계획된 대로 차질 없이 진행될 것으로 장담했다. 독일 역시 철도 수송에 절대적인 신뢰를 부여해 만약의 사태에 대한 대비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군은 평소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수송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중요한 방해 요소인 적은 고려하지 않았다. 적은 수송체계에 가장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대상이었음에도 그렇다. 저자는 재미난 우화를 소개한다. 크림 전쟁이 끝났을 때 영국군의 의료체계가 붕괴되었다는 비판에 영국군 의무감은 "군의 의료체계는 사상자가 생기지 않았다면 완벽하게 돌아갔을 겁니다."라고 답했다. 이런 황당한 사고체계가 어쩌면 군의 속성인지도 모른다.

유럽 각국은 적의 침공에 대비해 가상 작전 계획을 세우고 훈련을 했다. 참모부는 이 작전계획을 실행할 동원 시간표와 군대의 이동 계획을 세우는데 몰두해 적이 무엇을 할지는 신경쓰지 않았다. 장군과 장교들은 하루 두 번 식사 시간이 포함된 각본에 따라 기동훈련을 했다. 만약 누군가 각본에 없는 행동으로 가상 훈련에서 이기면 검은 표식을 붙이는 벌칙까지 주었다. 아군이 승리하는 약속대련이 훈련의 전부였다. 전쟁이 터지자 연습과는 완전히 다른 악몽이 시작되는 것은 당연했다.

테일러는 전쟁으로 가는데 기여한 세력들은 대체로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이 말은 지금도 마찬가지인듯하다. 전투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지각없는 나이 많은 장군들, 국가적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는 요구를 받아온 자기들 세계에 갇힌 외교관들, 호전적 애국주의를 조장하는 글 하나로 푼돈을 벌어들이는 데 골몰하는 언론인들이다.

1차 세계대전의 트리거는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보스니아의 고등학생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호엔베르크 공작 부인 조피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암살범 프린치프는 세르비아계였다. 오스트리아 조사관들은 세르비아가 연루되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증거는 무의미 했다. 오스트리아의 눈에는 세르비아의 존재 자체가 죄였다. 유럽 전체가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무력 행사를 예측을 하는 가운데 얽히고 설킨 동맹국들은 이 국제적 불씨가 자국의 운명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의 끝에서 마주한 것은 전쟁이었다.

전쟁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독일 황제 빌헬름2세는 자신의 재상인 베트만 홀베크가 승인해야만 참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베트만 홀베크가 빌헬름2세에게 한 말은 "지금 하지 않으면 영영 못하게 된다"는 전쟁 독려였다. 저자는 매우 부강한 자신들의 나라가 곧 망하기 직전이라고 여기는 게 정치가들 특유의 질병인데 베트만 홀베크는 이 병이 특히 심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독일의 전쟁 준비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전쟁준비를 가속화 했다. 독일 외교관들은 독일이 강력한 전쟁 의지를 보이면 러시아가 나중엔 물러나리라 확신했다. 이제 국경을 맞댄 많은 나라들이 벼랑 끝에 서서 "할테면 하라고 부추키는 일"이 벌어졌다.

오스트리아 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용감한지 보여주겠다며 독일이 말릴 수 있으면 말려보라고 하프라인 넘어 공을 차보냈고 독일은 독일 대로 오스트리안인들은 물러나고 싶으면 물러서라며 서로에게 전쟁의지가 드높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문제는 두 나라의 수도 어느 곳에서도 전면전의 가능성을 심각하게 따져보는 사람이 없었다. 포츠담에서 중대 논의를 가진 빌헬름 2세와 장군들은 전쟁을 이야기 했지만 전쟁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경험한 것은 잘 짜인 각본에 의해 승리하는 기동연습 훈련이 전부였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의 정치인들은 전면적 대결보다는 오스트리아-세르비아 사이의 국지전을 원했다. 그러나 전쟁의 신은 알고 있었다. 무지가 공포를 낳고 공포는 더 큰 공포로 연결되어 결국 전쟁으로 폭발하고 말 것 임을. 전쟁 발발 직전 상대에 대한 몰이해와 상대 의도에 대한 억측은 결국 더 큰 손실을 보기 전에 선제 공격을 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모아진다. 러시아는 동원령을 독일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생각했지만 독일은 전면전의 신호로 읽었다.

이제 이 책의 제목 기차시간표 전쟁과 만날 때다. 유럽 각국은 전시 동원 체제를 전쟁 상황에 따라 부분 동원령과 전체 동원령으로 구분해 준비했다. 그런데 임박해오는 전쟁 상황에서 군부는 딜레마에 빠진다. 부분 동원령을 선포해 그에 따른 열차 운행을 시작하게 되면 전체 동원령에 따른 열차시간표는 적용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만약 총력전의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면 부분 동원령으로는 이에 대응할 수 없고 전쟁에 패배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니 전쟁 상황이 어떻든 전체 동원령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다. 전체 동원령이 발동되는 것을 본 이웃 나라들도 도미노처럼 강력한 동원체제를 발동한다. 모든 국가들은 이미 계획된 전시 동원 열차시간표에 따라 움직이게 됐다. 결과는 4년간의 무의미한 학살극이었다.

테일러의 말을 들어보자. "여러 나라의 작전 수행은 의도한 대로 신속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오지 못했다. 프랑스의 계획은 거의 재앙을 가져왔다. 독일인들이 아니라 프랑스인들에게 말이다. 프랑스군은 대단히 효율적으로 동원되어 국경에 집결했다. 그리고 나서는 독일군 방어선을 따라 어느 곳보다 단단히 방비를 갖춘 진지들을 향해 돌진했다." 돌격 신호에 뛰쳐나온 프랑스 젊은이들은 비처럼 쏟아지는 기관총탄에 살육당했다. 연습 때와 실전이 완전히 다른 것이 전쟁이다.

레마르크는 1차 세계대전이 배경인 그의 작품 <서부전선이상없다>에서 애국심을 고취하며 늘 승리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군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파괴하는지 고발하고 있다. 사실 사회가 가장 주의해서 들어야 할 것이 군부의 주장이다. "초전에 적을 박살 낼 자신이 있다", "전쟁이 시작되면 그 순간 적의 지휘부는 소멸된다", "강력한 우리 군은 적의 도발을 단숨에 분쇄할 것이다." 같은 말들은 결의를 다지는 수사로 간주해야 한다. 진실이 아니다. 세계 전쟁사에서 전쟁을 앞둔 군인들의 호언장담대로 진행된 전쟁은 없다. 한국전쟁 발발 전에도 국군은 북한이 도발하면 바로 응징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고 장담했지만 속절없이 밀려났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세계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대만, 남과 북이 그 어느 때보다 강 대 강 대결 구도로 치닫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정치인들과 군인들이 해야 할 일은 적을 혼내주겠다는 떠벌림이 아니라 전쟁위험을 낮추는 일이다.

선제타격으로 적을 궤멸시킬 수 없다. 북한 핵무기를 무력화시키겠다는 킬체인은 한 번도 실행된 적이 없다. 킬체인 전술은 시도되는 순간 반드시 성공해야하는 도박이다. 성공 확률이 없는 선제타격이 무산되면 남한은 고스란히 핵폭탄의 위협 아래 놓이게 된다. 설사 핵전쟁이 아닌 재래식 전쟁이나 국지전이 일어난다 해도 남과 북의 피해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될 수 있다. 북한이 남한에 대응하거나 남한이 북한에 대응하는 전술은 실전에서는 온갖 변수와 오류와 이상으로 엉켜버리게 된다. 그게 전쟁의 속성이다.

언론의 역할도 중요하다. 요즘 밀리터리 분야 붐이 일어나 일방적이고 호전적인 기사들이 양산되고 있다. 기사 제목들도 요란하다. <김정은이 두려워하는 무기....> 본인이 밝힌 사실이 없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북한이 벌벌 떠는....> 국가가 인격체가 되어 떠는 모습은 아이들 낙서에나 등장할 모습이 아닐까? 각종 무기 소개 기사는 첨단 성능으로 단숨에 적을 초토화 시키고 승리를 장담한다. 제원이나 성능을 자랑하듯 밝히는 기사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전쟁에 대한 허상이 키워진다. 끊임없이 새로운 무기를 도입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군사분야 전문기자들은 당장이라도 첨단 무기가 사용될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런가운데 혐오스러운 적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들이 눈처럼 쌓인다. 세계 1차 대전 발발 전야처럼 어느새 전쟁의 불순한 공기는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다.

전쟁은 잘 다려진 제복을 입고 총을 든 채 행진하는 군인들의 늠름한 모습이 아니다. 쥐들이 들끓는 진흙 덩이 참호속에서 굶주림과 공포 속에 버티다가 눈앞에 있는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일이다. 중부 시베리아에서 자동차를 정비하던 젊은이가 평생 한 번 만나볼 일이 없었던 키이우 출신 요리사 였던 병사를 향해 폭탄을 던져야 하는 일이다. 우연히 마주쳤다면 친구가 되었을 사람들이, 살인을 하게 만드는 일을 열심히 독려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기차시간표 전쟁>이 주는 교훈이다.

▲기차시간표 전쟁 ⓒ페이퍼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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