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프라이부르크 시의회 1층에 유권자단체 '영 프라이부르크'(Young freiburg) 사무실이 있다. 이곳에는 맥주가 궤짝째로 쌓여있다.
아무리 맥주를 사랑하는 독일이라지만, 의회 사무실에 맥주를 쌓아놓고 마시는 이들의 모습은 낯설었다. 엄격하고 딱딱한 한국 정치문화에 너무 익숙해져서일까,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선진' 정치문화 혹은 맥주문화에 당황하지 않은 척 태연하게 의자에 앉았다. 인터뷰 주인공인 27세 청년 정치인 세르지오 팍스(Sergio Pax) 씨가 맥주 대신 콜라를 꺼내왔다. 독일에서는 코카콜라보다 많이 마신다는 '프리츠 콜라'였다.
자몽맛 콜라를 마시며 영 프라이부르크 사무실을 둘러봤다. 햇빛이 사무실로 가득 들어왔다. 사무실 벽 곳곳에는 웃고 있는 당원들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책상에는 정돈이 안 된 서류가 나뒹굴었다. 어디에 쓰이는지 모르겠는 베개들이 사무실 군데군데 놓여있었다. 의회 사무실이라기보다는 동아리방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어울렸다.
1층이라 그런지 창문 바로 앞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지나가는 이들의 표정까지 훤히 보일 정도로 거리와 가깝다. 시민들과 가까이 서있겠다는 정치인들의 주장을 말 그대로 실현한 공간이 이런 곳일까. 지나가던 한 주민이 사무실 창문 바로 앞에서 자전거를 묶고 있는 모습이 생생히 보였다. 프라이부르크 주민들에게 자전거는 주된 자가용이다. 팍스 씨도 인터뷰 장소인 의회까지 날렵해 보이는 자전거를 타고 왔다.
팍스 씨는 최근 네 쌍둥이의 아빠가 되었다. 한국은 물론 독일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라 지역신문 <Badische Zeitung>에 크게 소개됐다. 팍스 씨와의 인터뷰 전날 만난 한 시의원은 "팍스는 요즘 육아하느라 바쁠 텐데 인터뷰할 수 있으려나"라며 걱정했다. 팍스 씨는 다행히 인터뷰 장소에 예정대로 나왔다.
팍스 씨는 대학에서 IT를 전공하고 있는 학생이다. 동시에 '영 프라이부르크' 소속 프라이부르크 시의원이다. 21살에 시의원으로 처음 당선됐다. 이후 재선에 성공했으니 벌써 7년차 베테랑 시의원이다.
태어난 지역의 대학에 진학하고, 지역에서 가정을 꾸리고, 시의원으로서 의정활동까지 하는 그에게 지역과 지역정치는 어떤 의미일까. "지역정당 소속 청년 시의원", <프레시안>은 한국에서는 본 적 없는 생소한 정치이력을 가진 그의 이야기를 지난 8월 24일 들었다.
정당은 필요없다…유권자들이 직접 추천하는 지역의원
팍스 씨가 처음 정치권에 발을 들인 때 나이는 18세다. 당시 고등학교 총학생회장이었다. 영 프라이부르크가 그에게 먼저 지역의원 출마를 제안했다. 늙은 의회를 깨부수자는 제안이었다.
당시만 해도 프라이부르크 시의회는 "늙었다". 프라이부르크 시의원 월급은 1150유로, 한화로 약 160만 원이다. 다른 직업과 겸직하지 않으면 시의원 월급만으로는 생활을 지속하기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 시의원은 법조인 출신 은퇴자나 어느 정도 사회에 자리를 잡은 중년 남성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의 지방의회 모습과 비슷하다. 한국은 50대 이상 지역의원 비율이 광역의회 73.2%, 기초의회 70%에 달한다. 팍스 씨는 '50대 성인 남성' 위주 의회에 균열을 내고 싶었다.
영 프라이부르크는 팍스 씨와 같은 생각을 하는 청년들이 만든 유권자단체다. 독일은 정당법상 정당이 아니더라도 일정 수 이상 유권자의 지지를 얻은 단체는 지방선거에 후보를 출마시킬 수 있다. 영 프라이부르크처럼 정당은 아니지만 지방선거에 참여하는 조직을 유권자단체라고 부른다.
마음이 맞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면 얼마든지 단체의 이름을 걸고 출마할 수 있다. 법적인 정당은 아니지만 오직 지역의 의제를 고민하며 선거에 나선다는 점에서 '지역정당'과 유사하다. 어느 선거에서든 엄격한 조건을 통과한 정당만이 후보자를 공천할 수 있는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청년' 의제를 중심으로 지역 청년들이 뭉친 영 프라이부르크가 선거 때만 '반짝' 활동하는 단체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조직이 되기 위한 방안도 마련했다.
먼저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 프라이부르크 소속으로 당선된 시의원은 월급 일부를 단체에 기부하기로 했다. 또 시에서 주는 지원금을 받기 위해 다른 유권자단체와 선거 이후 연합체를 구성했다. 프라이부르크에서는 3명 이상 시의원이 배출된 조직만 운영자금 일부를 지원받을 수 있다. 원래대로라면 2석을 차지한 영 프라이부르크는 지원금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영 프라이부르크는 선거가 끝날 때마다 다른 지역 유권자단체와 연합체를 구성하고 있다. 매 선거 결과에 따라 연합체 구성원이 바꾼다. 지난 선거 이후 영 프라이부르크는 도시 계획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도시 프라이부르크'(Urban freiburg)와 지역 내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지적하는 '참여와 포함'(Participation and Inclusion list) 등 지역 내 의제 중심 조직들과 '유피'(JUPI)라는 연합체를 구성했다. 연합체 덕분에 함께 활동하는 의원도 2명에서 5명으로 늘었다.
다른 유권자단체와 연합을 구성하는 것에도 원칙이 있다. 단순히 지원금을 받기 위한 의석 수 늘리기가 아니라, 서로 힘을 합쳤을 때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단체들과 연합을 추진한다고 팍스 씨는 강조했다.
시의회를 더 젊게, 27살 넘으면 OUT!
2016년을 시작으로 영 프라이부르크 소속으로 벌써 2번째 시의원 임기를 시작한 팍스 씨지만 내년에는 의원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지지율 때문이 아니다. 영 프라이부르크의 고유한 규칙 때문이다.
영 프라이부르크 회원은 지방선거 피선거권이 생기는 만 18세부터 단체 후보로 출마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다. 그러나 만 27세가 되면 후보 출마 자격이 사라진다. '젊은 청년'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늙었다는 이유다. 만 27세가 넘은 회원은 연간 20유로의 회비를 내면서 조용히 응원만 하는 '원로' 역할로 남는다. 만 45세 중년도 청년 정치인이라고 부르는 한국 거대양당 기준과는 18년이 차이난다.
팍스 씨는 의원 자리를 내려놓는 게 아쉽지 않다고 말했다. 애초에 그의 목표는 '정치인' 자체가 아니라 지역 문제 해결이었다고 덧붙였다. 더 젊은 청년들을 위해 자리를 내려놓고 청년정치의 후원자로서 남겠다고 27살의 '원로 정치인'이 말했다.
프라이부르크 청년들은 영 프라이부르크 등장을 환영했다. 학생들과 청소년들은 지금껏 시의회에서 본 적 없는 청년 정치인들에게 표를 주기 시작했다. 프라이부르크가 있는 바덴뷔르텐베르크주의 지방선거 선거연령이 만 16세로 다른 지역보다 낮은 사실도 영 프라이부르크 약진에 도움이 되었다.
그 결과 영 프라이부르크는 꾸준히 의회에서 1~2석을 차지하고 있다. 20대 청년들이 의회에 진입하기 시작하자 다른 정당들도 부랴부랴 청년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팍스 씨는 덧붙였다.
지역에 자리 잡고 사는 청년의 관점으로
영 프라이부르크는 팍스 씨가 말한 것처럼 다양한 사안에서 청년의 관점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표적인 게 문화공간이다. 팍스 씨는 "젊은이들이 머물면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을 최우선 의정목표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청년과 청소년의 관점에서만 보이는 사각지대를 찾기 위해서도 영 프라이부르크는 노력한다. 프라이부르크도 서울과 마찬가지로 임대료 수준이 높다. 특히 월 1000유로(약 140만 원)에 달하는 시의 평균 임대료는 학생들이 쉽게 부담할 수 없는 수준이다. 시와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학생들을 위해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저렴한 기숙사를 운영하지만 만18세부터 입주할 수 있다.
팍스 씨는 이런 기숙사는 만 18세 미만 청소년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직업훈련을 받으러 이곳으로 오는 상당수의 청소년들은 만 16세가 대부분인데, 이들은 지원 대상에서 소외됐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끊임없이 젊은 관점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지역 청소년과 소통하는 영 프라이부르크 소속 시의원이기에 발견할 수 있었던 사각지대였다.
'다양성' 확보한 의회를 위해서는 더 많은 지역 정치 조직 필요
앞으로 의정 활동의 목표를 묻자 팍스 씨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무실 한켠의 벽으로 향했다. 벽에는 프라이부르크 시의회 의원들의 얼굴이 달린 자석들이 붙어있었다. 팍스 씨는 자석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여성 의원의 수를 세었다. 18명이었다. 그는 도시 시민의 구성이 의회에 100%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방의회 구성원의 '다양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팍스 씨는 그 방법 중 하나로 "더 많은 지역 정치 조직"을 제안했다. 영 프라이부르크라는 지역 청년 유권자단체가 시의회에 진출한 것처럼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더 많은 의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조직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지방선거에서 선거 연령이 만 16세로 낮아지자 청년 의원들의 지지율이 높아질 수 있었던 것처럼 제도적인 변화가 함께 한다면 도시 구성을 100% 반영하는 의회가 나올 수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의원 임기가 끝나면 무슨 일을 할 것이냐고 물었다. 팍스 씨는 웃으며 "아직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많은 청년들이 대학 졸업 후 프라이부르크를 떠나지만 팍스 씨는 고향인 프라이부르크를 떠날 생각이 없다고 한다. 지역단체 소속 시의원이자 대학생, 그리고 이제는 네 쌍둥이의 부모가 된 팍스 씨는 인터뷰를 마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나갔다. 자전거와 함께였다.
(통역=박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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