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85강, 11월 답사는 만추의 계절에 궁궐 나들이입니다. 한양도성의 좌청룡 산줄기에 솟아있는 응봉이 부려놓은 창덕궁, 창경궁, 종묘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와신상담하며 왕권의 회복을 꿈꾼 운현궁을 둘러봅니다.
서울학교 제85강(제5기 제7강)은 2022년 11월 13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8시 50분까지 창덕궁 정문(돈화문) 왼쪽 매표소 앞에 모입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창덕궁(돈화문-금천교-궐내각사-인정전-선정전-희정당-대조전/경훈각-성정각-관물헌-중희당터-낙선재)-창경궁(자경전터-통명전-양화당-영춘헌/집복헌-환경전-경춘전-함인정-문정전-명정전/숭문당-성종태실-춘당지-홍화문-월근문)-경모궁-점심식사 겸 뒤풀이-종묘-익선동한옥마을-운현궁(양관-수직사-노안당-노락당-이로당-박물관)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만추의 궁궐 나들이 : 창덕궁·창경궁·종묘·운현궁>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또 하나의 정궁, 창덕궁
한양도성은 좌청룡의 산세가 우백호에 비하여 몹시 약한데, 다행히도 산세가 허약한 좌청룡 산줄기에 예사롭지 않은 봉우리가 하나 솟아 있으니 이를 매봉우리, 즉 응봉(鷹峯)이라고 합니다. 응봉의 산세는 도성 안쪽인 남쪽으로 힘차게 뻗음을 이어가면서 동궐인 창덕궁, 창경궁과 국립대학인 성균관, 그리고 역대왕의 위패를 모신 종묘를 품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지금의 응봉 정상에는 군부대가 들어서 있습니다.
궁궐은 그 역할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는데, 임금이 상주하면서 통치행위를 하는 곳을 정궁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는 양궐 체제로,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북궐인 경복궁이, 그 이후에는 동궐인 창덕궁이 정궁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이후에 세워진 것이 아니고, 조선 초기에 태종 이방원에 의해 이궁으로 작게 건립된 궁궐입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경복궁을 세우고 마침내 한양으로 천도하여 힘찬 첫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하지만 이방원에 의해 자행된 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의 두 아들 방번과 방석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던 개국공신 정도전 등을 참살되는 비극이 벌어지자, 태조는 둘째 아들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의 자리로 물러납니다.
왕위에 오른 정종은 피비린내 나는 경복궁이 싫어서 개경 근처에 있는 생모 신의왕후의 묘를 참배하고는 그대로 개경에 눌러 앉았습니다. 개경환도가 된 것입니다. 이방원은 경쟁관계에 있던 형 방간을 제거하는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스스로 세자가 됨으로써 실질적으로 모든 권력을 장악합니다. 그리고 정종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은 다음 바로 한양천도를 단행합니다.
그런데 경복궁으로 가지 않고 새롭게 이궁을 하나 더 지어 창덕궁이라 명명하고 그곳으로 이어하였습니다. 한양에 이미 경복궁이 있는데 굳이 새 이궁을 짓는 것은 태종이 경복궁에 머물기 싫다는 의미였습니다. 1405년(태종 5) 한양으로 돌아온 이래 태종은 1418년(태종 18)에 세종에게 양위할 때까지 주로 창덕궁에서 거처했습니다. 태종은 자신이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곳이라 그런지 경복궁을 기피했습니다. 다만, 국가 중요행사들은 주로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경회루 등에서 열었습니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이러한 양궐 체제의 두 궁 사이를 오가며 번갈아가며 거주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파란만장한 창덕궁의 역사
창덕궁은 이궁으로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의 정궁으로서 역할을 하였으며, 격변하는 역사의 중심에 서서 사육신의 참변, 연산군과 광해군의 패륜, 인조반정, 임오군란, 갑신정변 그리고 조선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를 묵묵히 지켜보았습니다.
같은 정궁이지만 경복궁과 창덕궁은 그 전각의 배치가 확연히 다릅니다. 경복궁이 중국의 법식에 맞게 정문, 중문, 정전, 편전, 침전이 남북 직선 축 상에 대칭으로 자리 잡은 인위적인 공간 배치인 반면에, 창덕궁은 모든 전각들이 지형 조건에 맞게 비대칭으로 자리 잡은 자연스러운 공간배치입니다.
창덕궁은 처음에는 대부분 주거 및 편전 등 실용적으로 필요한 건물들 위주로 지어져서 창건 당시 규모는 외전 74칸, 내전 118칸 규모로 궁궐로서의 기본적인 기능들만 일단 다 갖춘 상태였지만, 완공한 이후에도 창덕궁 증축 공사를 계속하여 1412년(태종 12)에는 정문인 돈화문을 세웠습니다.
의례를 봉행하는 건물인 정전을 비롯한 외전 역시 매우 조촐하여 완공 당시 정전인 인정전은 고작 3칸 규모였는데 태종은 1418년(태종 18)에 세종에게 양위하기로 결심한 직후 아들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창덕궁 정전 일대를 개축하는 공사를 단행했습니다. 이 공사는 세종이 즉위하고 난 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때 인정전이 5칸으로 규모가 커졌고 정전 일대가 정비되어 비로소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세종이 집권 후반기에 줄곧 경복궁에 머무르면서 창덕궁의 비중이 줄어드는 듯 했으나, 문종 이후 조선 전기 동안 여러 왕들은 창덕궁을 애용했습니다. 우선 세종 이후 바로 단종 대에 인정전 및 그 일대를 다시 증, 개축하였고 세조는 후원을 크게 확장하였으며 이때 민가 73채를 철거하기도 했습니다. 세조를 거치면서 창덕궁 후원 규모는 태종 때보다 3배 더 커졌으며 성종 때는 창덕궁 옆에 있던 수강궁을 개축하여 창경궁이라 명했습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선조가 한양을 떠나 파천하면서 궁을 버리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은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1593년(선조 26)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의 저택을 개수한 정릉동 행궁에 기거했습니다. 전란이 끝난 후 선조는 경복궁을 중건하는데 너무 많은 비용과 물자가 소모될 것으로 예측되자 경복궁 중건을 포기하고 창덕궁을 먼저 중건하도록 결정하여 1605년(선조 38)부터 창덕궁 중건공사를 시작했습니다만 완공을 보지 못하고 3년 후에 죽고 말았습니다.
창덕궁 중건 공사는 광해군 즉위 후인 1609년(광해군 1)에 마무리되었으나 중건 직후 광해군은 바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고 보수공사를 명했으며, 1년 후인 1610년(광해군 2)에야 창덕궁으로 옮겼습니다.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은 인정전을 제외하고 상당부분, 특히 서쪽 궁역이 완전히 불탔고 창경궁은 비교적 무사했으나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역시 내전 구역이 완전히 불타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인조 때의 창덕궁 중건 공사는 매우 서서히 진행되어 1647년(인조 25)에야 공사가 끝났습니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인조반정의 주요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이 지나치게 궁궐 공사를 벌여 민생을 파탄에 빠뜨렸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며 또 광해군이 남기고 간 인경궁과 경희궁이 기존의 창덕궁과 창경궁보다 더 큰 규모였기 때문에 인조는 이들 새 궁전을 이용할 수 있었고 실제로 경희궁에 주로 거처했습니다.
비록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의 ‘궁궐 병’이었지만, 재위 초기 창덕궁과 창경궁의 가치와 권위로 인해 이들 궁전을 복원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큰 이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대신들은 자신들의 반정 명분을 위해서 인경궁과 경희궁을 다시 헐어낼 것을 주장했고, 다른 대신들은 실리적인 견지에서 애써 지은 인경궁과 경희궁을 사용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차후에 복구하는 쪽에 무게를 실었습니다.
인경궁의 처리 및 창덕궁, 창경궁의 중건을 놓고 조정에서도 오랜 정쟁이 있었지만, 1632년(인조 10) 마침내 인조는 인경궁을 헐어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면서 인경궁은 해체되었고, 남은 전각들도 모두 헐렸습니다.
창덕궁 건물 대부분은 인경궁을 헐어다가 중건한 것이었기 때문에 청기와 건물도 많았고 화려했다고 전해지나 순조 때 화재로 청기와 건물은 선정전을 제외하고 전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창덕궁은 정궁의 지위를 상실했으나 그 후로도 고종과 왕실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거주하는 등 여전히 창덕궁을 중요한 궁으로 인식하고 활용했으며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당시에는 청군의 공격으로 전쟁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897년(건양 2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한 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경운궁을 황궁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헤이그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폐위시키고, 1907년 황세자인 순종으로 하여금 황위를 잇게 했으며 즉위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39년 만에 다시 정궁이자 황궁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임금이 머문 것만을 기준으로 하면, 1894년(고종 31년) 이후 13년 만입니다.
1910년(융희 4) 경술국치 이후에는 구 대한제국 황실이 창덕궁을 소유하여 거주했습니다. 전 황제였던 순종은 이왕(李王)으로 강등 당했고, 창덕궁은 순종의 궁호로도 쓰였습니다. 1912년 일제는 후원 및 인정전 등 창덕궁 주요 전각을 일반에 공개했으며 1917년의 화재로 내전 일곽이 전소해 조선총독부에서 경복궁의 전각을 옮겨다 재건하기도 했습니다.
일제가 패망한 후 1947년에는 미군정에서 몰수하여 정부 소유가 되었고 그 후 대한민국 정부의 소유가 되었지만, 정부의 배려로 1960년대 이후 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 덕혜옹주 등 구 황실 일족이 낙선재 등 일부 전각에서 거주하다가 1989년 4월에 이방자 여사의 별세를 끝으로 완전히 구 대한제국 황실과의 인연이 끊어졌습니다.
창덕궁, 8개의 문
돈화문(敦化門)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고 다음 해인 1413년(태종 13)에 무게 1만 5천근의 동종을 걸어 시간을 알리게 했습니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07년(선조 40)에 복구를 시작해 1609년(광해군 원년)에 완공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본래는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정궁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면서 점차 규모가 커졌습니다. 1997년, 일제강점기에 파묻혔던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돈화문 앞에 있던 월대를 복원했습니다. 굳이 5칸으로 지어놓고 양 옆의 2칸을 막아놓은 것은 황제국이 5문을 사용하고 제후국이 3문을 사용한다는 규정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은 것이라고 합니다.
금호문(金虎門)은 창덕궁 궁문 중 하나로 돈화문 서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정문인 돈화문이 주로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에 이용되었기에 사헌부 대사헌을 제외한 승정원, 홍문관 같은 궁내 관서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창덕궁으로 들어올 때 금호문을 이용했습니다. 건립 이후 성종 이전까지 명칭이 없었으나 1475년(성종 6)에 좌찬성이었던 서거정이 각기 2개의 액호를 지었고 이때 성종이 금호라는 액호를 낙점해 지금까지 쓰이고 있습니다.
단봉문(丹鳳門)은 창덕궁의 궁문 중 하나로 돈화문 동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본래는 남장문이라고 불렸으나 금호문과 마찬가지로 성종 때 개명된 것이며 당나라 장안성 대명궁의 남문인 단봉문에서 따왔습니다. 금호문과 마찬가지로 돈화문을 사사로이 드나들 수 없는 왕족과 그 친인척 그리고 상궁들의 전용문이었습니다.
요금문(曜金門)은 창덕궁 서북쪽에 위치한 궁문으로 내시와 궁녀들이 병들거나 늙어서 내관, 궁녀 생활을 마감하고 퇴궐시킬 때 나간 문입니다. 현재는 근처에 주택들이 들어서 폐쇄된 상태며 근처 담장까지 가옥이나 상가의 담벼락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경추문(景秋門)은 금호문과 함께 서쪽에 위치한 문으로 평소에는 닫혀 있다가 군사를 동원할 때나 출정 명령을 받은 무관이 나오는 데에 이용되었습니다.
진선문(進善門)은 창덕궁의 중문으로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 너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창덕궁 창건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1908년 탁지부 건축사무소에서 시행되었던 인정전 개수공사 때 헐렸다가 1996년에 복원 공사를 착수 1999년에 완공되었습니다. 태종 때 신문고가 설치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숙장문(肅章門)은 진선문과 마찬가지로 창덕궁의 중문으로 내전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금호문과 마찬가지로 1475년(성종 6)에 좌찬성 서거정이 지어 올린 이름 중 하나를 성종이 낙점하면서 사용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헐렸다가 1996년 시작된 복원 공사를 통해 재건되었습니다.
인정문(仁政門)은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1405년(태종 5)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다가 광해군 즉위 초 재건되었으나 1744년(영조 20)에 인접한 승정원의 화재로 또 소실, 복구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인정문을 포함한 20여 칸의 월랑이 행각으로 대대적으로 개조되어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되었으나 1991년에 배수로 보수 도중 발견된 석조기단과 각종 문헌을 통해 조선시대의 모습인 월랑으로 1995년까지 복원한 것이 지금의 모습입니다.
정전은 인정전, 편전은 선정전과 희정당, 침전은 대조전
인정전(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용마루에는 다섯 개의 이화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1405년(태종 5)에 건립되어 세종 원년에 고쳐 지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습니다. 이후 선조 때 복구공사를 시작해 광해군 원년에 재건되어, 황폐화된 경복궁의 근정전을 대신해 이곳에서 국가적인 대례를 행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대한제국 시기 순종황제가 즉위하면서 1908년(융희 2) 창호를 황색으로 칠하고 내부엔 노란색 천으로 장식한 천과 커튼 등이 설치되었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 당시 앞마당의 박석이 걷어지고 화초가 심어지는 등 대대적으로 훼손되었다가 1994년 앞의 잔디를 걷어내고 박석을 다시 설치했으며 인정전 주변의 외행각은 1991년 이후에 복원했습니다.
선정전(宣政殿)은 창덕궁의 편전으로 궁궐의 전각 중 유일하게 청기와를 하고 있습니다. 건립 당시 조계청이었으나, 1461년(세조 7)에 선정전으로 개명되었습니다. 이후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되다가 1647년(인조 25) 광해군 때 청기와를 얹어 호화롭게 지은 인경궁의 편전인 광정전을 헐어 재건하였습니다. 이후 편전의 기능이 희정당과 중희당으로 넘어가자 빈전, 혼전 등 왕실 장례기능을 수행하는 곳으로 변모되었고 복도각이 증설되었습니다. 근대화 시기에 인정전처럼 내부에 전기시설이 들어섰고 일제강점기에 복도각이 헐어지는 등의 훼손을 겪다가 1997년에 복도각이 복원되었습니다.
희정당(熙政堂)은 창덕궁의 편전으로 건립 당시에는 숭문당이라는 이름의 침전이었으나 1496년(연산군 2) 희정당으로 개칭했습니다. 임진왜란 등의 병화로 여러 차례에 걸쳐 소실, 재건을 거치면서 선정전의 편전 기능을 이어 받았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에 일제에 의해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 그 자재로 재건되었습니다. 외양은 한식건물에 서양식 실내장식을 하고 있으며 남행각 현관의 경우 서구식 현관에 일본식이 가미되었고, 내부는 쪽마루에 카펫이 깔리고 창문에는 유리가 끼워졌으며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설치되는 등 전형적인 서양식 실내장식을 하고 있는데다가 외관의 남행각에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현관이 설치되었습니다.
대조전(大造殿)은 왕비의 침전으로 1405년(태종 5)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을 포함해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다가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1917년 경의실에서 일어난 대화재로 소실되어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 얻은 자재로 1920년에 복원하였으나 내부가 일부 서양식 실내로 바뀌어졌습니다. 그 결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경훈각을 비롯한 전각들이 행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1926년 순종황제가 대조전의 부속 전각인 흥복헌에서 붕어했으며, 내부에는 순정효황후 윤씨가 사용한 침대를 비롯한 근대 시기의 고가구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경훈각(景薰閣)은 대조전 북쪽에 있는 중층 전각인데 대비 등 왕실의 여성들의 생활공간으로 대조전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461년(세조 7)에 2층을 징광루, 1층은 광세전이라 불렀던 기록이 있었습니다. 후에 광세전은 지금의 명칭인 경훈각으로 개명되었습니다. 역시 1917년의 화재로 소실되어 경복궁 만경전을 헐어 얻은 자재로 1920년 지금과 같은 모습의 단층 전각으로 재건되었습니다. 지금은 선정전만이 청기와를 쓴 유일한 건물이지만, 동궐도를 보면 징광루 역시 청기와를 사용한 건축물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궁에는 중희당 없어지고 부속건물들만 남아
중희당(重熙堂) 터는 성정각을 나와 후원으로 가기 전에 너른 공터가 있는데, 이 터가 정조 8년 문효세자를 위해 지은 동궁 중희당입니다. 문효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 동궁으로 쓰이기보다는 왕의 정무를 보는 편전이나 별당 용도로 많이 쓰였습니다. 중희당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당시 으뜸 되는 정당(正堂)으로 사용했으며, 헌종, 철종, 고종까지도 자주 사용했습니다.
특히 고종 때는 명성황후와의 궁중가례절차를 중희당에서 치렀고, 기타의 궁중행사도 중희당에서 많이 개최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1880년경 경복궁 화재로 중건공사를 다시 벌이는 과정에 중희당을 경복궁으로 옮겨 지어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기록 이후에는 건물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고 터로만 남아있습니다. 다만 중희당의 현판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있는데 정조의 친필입니다.
중희당 일대에 있는 승화루, 삼삼와, 칠분서는 중희당의 부속건물들로 중희당의 본채는 없어졌으나 이 부속건물들은 현재까지 남아 있습니다. 칠분서는 중희당에서 삼삼와, 승화루로 넘어가는 연결 복도였고 삼삼와는 육각정 형태의 건물이며, 승화루는 주로 도서를 소장하고 독서하는 곳으로 쓰였던 공간입니다.
성정각(誠正閣)은 동궁에 속한 전각으로 성정은 <대학>에서 학문을 대하는 정성과 올바른 마음가짐을 뜻하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이라는 말에서 따왔으며 현판은 정조의 어필이라고 전해집니다. 정면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누마루가 있는데, 누마루의 남쪽에는 희우루, 동쪽에는 보춘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성정각은 본래 왕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었으나, 1917년 창덕궁 대화재 당시 순종이 이곳으로 일시 피난처로 쓰였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을 내의원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관물헌(觀物軒)은 동궁에 속한 전각으로 성정각 뒤쪽에 있으며 여기에 걸린 '집희/즙희(緝熙)'라는 편액은 고종이 12-13세 때 쓴 것입니다. 왕의 편전 중 하나로 흥선대원군이 집권 당시 이용한 것으로 보이며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의 본거지로 활용되었습니다. 순종이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며,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생모 복녕당 귀인 양씨와 거주하기도 했습니다.
궐내각사는 서쪽 영역만 복원
현재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인정전의 서쪽 궐내각사만 복원되어 있으나, 원래는 선정전의 앞뜰에도 승정원, 사간원, 선전관청, 사옹원, 대전장방 등 빽빽한 건물 군으로 궐내각사가 유지되었습니다.
규장각 이문원(摛文院)은 본래 오위도총부가 위치한 곳으로 규장각이란 편액 때문에 규장각으로도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후원에 있는 주합루만으로는 많은 분량의 서책들을 감당할 수 없자 1781년(정조 5)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여 검서청, 책고, 봉모당과 함께 내각이라 불렀습니다. 정조 사후 기능이 도서관으로 영락하여 이름만 존재하고 있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규장각이라는 관청 자체가 혁파된 후 빈 전각으로 남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다른 궐내각사의 전각들과 헐렸으며 1991년 복원 공사를 거쳐 2005년 일반에 개방하고 있습니다.
검서청(檢書廳)은 규장각에 둔 관직인 검서관이 사관을 도와 서적의 교정과 서사 일을 본 곳으로 역대 임금이 지은 글과 옥새를 보관하고 서적의 수집과 출판을 담당했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규장각이 혁파되면서 빈 전각이 되었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 다른 내각의 전각들과 함께 훼철되었다가 1991년 복원 공사를 거쳐 2005년 일반에 개방되었습니다.
봉모당(奉謨堂)은 역대 임금들의 어진과 유품인 보책과 인장들을 보관했습니다. 원래 부용정 뒤편 언덕에 있었으나 1781년(정조 5) 많은 분량의 서책과 유품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이중에 어제, 어필, 어화, 고명, 유고, 밀교 및 선보, 세보, 보감, 지장 등을 열무정으로 옮겨 보관하였는데 열무정이 곧 봉모당입니다. 1857년(철종 8) 봉모당에서 규장각 이문원의 부속 전각인 지금의 대유재로 옮겨졌습니다. 이후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규장각이 혁파되었다가 1908년 규장각의 기구가 새로 마련되어 전모과에서 관할했고 일제강점기인 1911년 전각을 헐어낸 뒤 일본식 전각을 세워 보첩류를 제외한 왕실 자료가 보관되었습니다. 1968년 일본식 전각을 철거하고 서적은 창경궁서각으로 옮겨졌습니다.
봉모당의 앞마당에 커다란 향나무가 있는데 나무의 수령이 700년 이상으로 창덕궁의 창건 전부터 있던 유서 깊은 나무입니다. 2010년 태풍 곤파스의 강풍으로 치솟은 향나무의 윗부분이 반 정도 꺾여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700년 된 향나무는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책고(冊庫)는 봉모당 뒤인 금천 변에 위치한 전각으로 일직선으로 길게 늘어진 형태를 하고 있느데 이름 그대로 책을 보관하는 창고로 하나의 전각이 아닌 여러 전각으로 되어 있으며 봉모당 뒤쪽과 측면에 각각 한 채 그리고 앞서 언급된 봉모당 뒤편의 책고 등 3개의 전각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문관(藝文館)은 제찬과 사명(임금의 말이나 명령)에 관한 일을 관장했던 예문관(예조 산하)의 관사로, 국조오례에 의한 각종 궁중의식의 규율을 관장하고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업무도 담당하였습니다.
홍문관(弘文館)은 본래 액호 대로 옥당(玉堂)이라 불려야 하지만 궁중의 경서와 사적의 관리, 문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홍문관의 관사였기에 홍문관으로도 불려졌습니다.
내의원(內醫院)은 액호는 약방이지만 내의원이 있던 곳이기에 내의원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내의원이 있던 곳이기에 궁중의 진료를 담당했으나 1920년 창덕궁의 대화재로 궁궐 내의 전각들이 불에 타 일제에 의해 변형되면서 동궁이었던 성정각에 내의원이 기능을 뺏기고 헐렸으나 1991년에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한 복원공사를 시작해 2005년에 일반에 개방되었습니다.
억석루(憶昔樓)는 구 선원전 앞과 내의원 뒷 행각에 속해 있으며 액호인 억석은 옛날을 생각한다는 의미를 하고 있지만, 다른 의미로는 최초로 약초를 발견한 고대 중국의 신농씨를 기리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창경궁의 슬픈 역사, 궁궐에서 유원지로
창경궁은 원래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곳입니다. 1484년(성종 15)에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하여 수강궁을 확장하여 세운 별궁으로, 이때 정전인 명정전, 편전인 문정전, 침전인 수령전, 그리고 환경전, 경춘전, 인양전, 통명전, 양화당, 여휘당, 사성각 등이 건립되었습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탔으나 광해군 때 중건하였고, 다시 인조 때 이괄의 난으로 대부분의 전각들이 불탔으나 인경궁 전각들의 목재를 활용하여 다시 지었습니다. 창경궁은 잦은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기를 반복하였는데, 인조 때와 순조 때에 큰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하고 나서 급속히 변형되기 시작하여 일제 강점기에 결정적으로 훼손되었는데 1909년 일본이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마음을 달랜다는 이유로 강제로 창경궁 내부 궁문, 담장, 많은 전각들을 훼손하고 궁 안에 일본식 건물을 세우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유원지로 조성하였습니다.
통명전 뒤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으며 남아있는 건물들도 개조하여 박물관의 진열실로 만들었습니다. 1911년에는 자경전 터에 2층 규모의 박물관을 세우고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하였으며, 1915년에는 문정전 남서쪽 언덕 위에 장서각을 건립하였고, 1922년에는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벚꽃 숲을 만드는가 하면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열었습니다.
또한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가르는 도로는 1912년 일제가 계획하였으나, 종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 순종이 반대하여 건설이 미루어졌고,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공사가 강행되어 1932년에 도로가 났는데 지금의 율곡로이며 최근 원형복구 공사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의 발굴, 복원 공사로 명정전, 문정전 일곽만이 복구되었습니다.
창경궁에서도 여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숙종 대에는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갈등과 반목의 현장이었습니다. 낙선재 부근에 있던 취선당은 장희빈이 왕비인 인현왕후를 저주하던 곳이었습니다. 영조 대에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비극의 현장도 바로 창경궁인데,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8일간의 지옥 같은 고통을 겪었던 곳은 문정전 앞뜰입니다. 조선 후기 헌종 때 건립된 낙선재는 본래 창경궁의 일부였습니다만 새로이 담장을 쌓아 창덕궁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창경궁은 고종대까지는 본래의 모습을 유지해왔으나,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궁궐 전체를 공원화하였습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바꾸고, 일본산 사꾸라를 심고, 심지어는 동물원까지 조성하여 유원지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창덕궁 후원의 일부였던 춘당지는 크게 확장되면서 창경궁에 속한 뱃놀이 공간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창경궁 6개의 문
홍화문(弘化門)은 정문으로. 1484년(성종 15년)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616년(광해군 8년)에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추정됩니다.
월근문(月覲門)은 홍화문 북쪽에 있는 문으로 정조가 친부 사도세자의 묘(廟)인 경모궁에 수시로 참배하기 위하여 1779년(정조 3년)에 건립했습니다. 정조가 매달 초하루 경모궁에 참배하러 거둥할 때에는 반드시 이 문을 경유했기 때문에 월근문이라 하였습니다.
선인문(宣仁門)은 홍화문 남쪽에 있는 문으로 1484년(성종 15년)에 초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7년(광해군 8년)에 재건했는데 1857년(철종 8년)에 다시 소실되어 1877년(고종 14년)에 복원했습니다.
집춘문(集春門)은 동북쪽에 있는 문으로, 문묘가 마주 바라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이 문은 후원의 동문으로, 태학(太學) 서쪽 반교(泮橋)와 제일 가까워 역대 임금들이 태학으로 나갈 때에는 이 문을 경유했습니다. 현재는 이 문 외부 지역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어 출입문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명정문(明政門)은 명정전의 정문으로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선상에 정확히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m 벗어나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 재건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빈양문(賓陽門)은 명정전을 돌아 나와 만날 수 있는 명정전의 후문이자 창경궁의 내전 권역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중앙간의 지붕이 솟아있는 솟을지붕 형식입니다. 명정전 후면에 설치된 가설툇마루부터 빈양문까지 복도각이 쭉 연결되어 날씨가 궂을 때도 간편히 행차를 할 수 있게 배려했습니다.
정전인 명정전과 2개의 편전, 6개의 침전
명정전(明政殿)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현존하는 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입니다. 창덕궁의 정전과는 달리 남향이 아닌 동향인데, 이는 창경궁의 지세에 따랐기 때문입니다. 1484년(성종 15년)에 창경궁이 조성되고 그 정전으로서 세워졌으나 1592년(선조 25년)에 발생한 임진왜란 당시 불타버려 1616년(광해군 8년)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릅니다.
문정전(文政殿)은 편전으로 창경궁 창건 당시 세워져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 명정전과 함께 중건했습니다. 중건 당시 문정전이 남향인 것을 광해군이 문제로 삼아 동향으로 바꾸었습니다. 훗날 위패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사용됨에 따라 전각 앞에 월랑(月廊)이 지어졌는데 이는 동궐도를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나 복원되지 않았습니다. 문정전이 혼전으로 사용된 것은 신정왕후 조씨가 세상을 떠난 1891년(고종 28년)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이곳의 뜰은 임오화변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합니다.
숭문당(崇文堂)은 경종 때 건립되었으며, 1830년(순조 30년)에 큰 불로 소실된 것을 그해 가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릅니다. 명정전 뒤쪽에 있는 빈양문의 남쪽에 맞닿은 전각으로 현판과 내부에 걸린 일감재자(日監在玆)라 쓴 게판은 영조의 어필이며 학문을 숭상한다는 뜻답게 영조 당시 학문을 숭상하고 인재를 양성했는데, 이곳에서 친히 태학생을 접견하여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연을 베풀어 그들을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경춘전(景春殿)은 침전 중의 하나로 1484년(성종 15년)에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다가 1616년(광해군 8년)에 재건했으나, 순조 30년에 불탄 것을 1834년(순조 34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릅니다. 경춘전은 소혜왕후 한씨와 인현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난 곳이자 정조와 헌종이 탄생한 곳이며, 현판은 순조의 어필입니다.
환경전(歡慶殿)은 침전 중 하나로 1484년(성종 1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년)에 중건했습니다. 1830년(순조 30년)의 큰 불로 소실되었던 것을 동왕 34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릅니다. 중종과 소현세자가 이곳에서 승하했고, 효명세자가 승하했을 때는 관을 모시는 빈궁으로 사용되었다가 화재가 발생해 재궁을 불속에서 가까스로 꺼내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통명전(通明殿)은 침전 중 하나로 창경궁 창건 때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이 되고, 다시 이괄의 난과 정조 때 화재를 입었습니다. 지금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년)에 중건된 것입니다. 통명전 서쪽에 있는 연못에는 석재 수통이 있는데 성종 때 구리 수통을 설치했다가 사치라는 신하들의 반발에 돌로 바꾼 것입니다만, 정작 설치 비용은 석재 수통이 더 비쌌다고 합니다.
양화당(養和堂)은 침전 중 하나로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했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한 일이 있으며, 고종 15년(1878년) 철종 비 철인왕후 김씨가 이곳에서 승하했습니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입니다.
영춘헌(迎春軒)은 북쪽에 있는 침전입니다. 정조의 서재였으며 이후 왕들도 서재로 사용했습니다. 정조는 이곳에서 승하했습니다. 1830년(순조 30년) 환경전에서 시작된 화재로 함께 소실되었습니다. 현존하는 영춘헌은 1834년(순조 34년)에 중건된 건물로, 영춘헌을 다시 지으면서 이전과 달리 영춘헌과 집복헌이 이어져 유기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집복헌(集福軒)은 영춘헌의 부속 건물로 1735년(영조 11년)에 이곳에서 사도세자가 태어났고 1790년(정조 14년) 6월에는 순조가 태어났으며 정조는 영춘헌에서 재위 24년인 1800년 6월 승하했습니다.
사랑방 같은 함인정, 활터인 관덕정
함인정(涵仁亭)은 창경궁의 정자 중 하나로 환경전 남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빈양문을 지나 나오면 바로 만날 수 있으며 내밀한 내전 권역으로 가기 전에 거쳐 갈 수밖에 없는 건물로, 사랑방 같은 역할의 정자라 할 수 있습니다.
관덕정(觀德亭)은 춘당지 동북쪽 야산 기슭에 있는 사정(射亭)입니다. 공혜왕후 한씨가 잠례를 거행하던 장소에 1642년(인조 20년) 취미정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나 1664년(현종 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했습니다.
정조의 효심이 스며있는 경모궁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을 마주보고 있는 서울대학교병원 언덕배기는 함춘원(含春苑)이 있던 곳입니다. 함춘원이란 궁궐에 인접해 있는 작은 언덕으로, 궁궐에 딸린 나라의 동산을 말합니다. 이곳에 울타리를 두르고 백성들의 출입을 금하고 나무를 심고 가꾸었습니다. 궁궐 가까이에 있는 동산에 오르면 궁궐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므로, 이를 막기 위해 취한 조치입니다.
이러한 함춘원은 창경궁의 동쪽인 지금의 서울대학교병원 자리, 창덕궁 서쪽이면서 경복궁 동쪽인 지금의 북촌 일대의 언덕배기, 경희궁 남쪽이면서 경운궁 서쪽인 러시아공사관 자리의 세 곳에 있었습니다.
북촌 일대는 일제강점기 때 조그마한 한옥을 다닥다닥 지어서 그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러시아공사관 자리는 상림원이라는 이름으로 맨션 단지가 들어서 있으며, 서울대학교병원 자리는 함춘회관이라는 건물 이름으로 그 내력이 지금까지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이곳 함춘원에는 경모궁(景慕宮)이라는 또 다른 사적이 하나 남아 있는데, 정조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사당입니다. 정조는 창덕궁과 창경궁에 머물면서 경모궁에 지름길로 가기 위해 경모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새로 문을 내고, 매달 찾아뵙는다는 마음을 담아 문 이름을 월근문이라 지었습니다.
1900년 고종은 경모궁에 모신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위패를 종묘에 함께 봉안하고, 경모궁 터에 목멱산 자락에 있던 영희전(永禧殿)을 옮겨왔습니다. 영희전은 몰락하는 대한제국의 위엄을 나타내려는 의도였는지, 그 규모가 창덕궁 선원전을 능가하였습니다. 중심부에는 어진을 모신 36칸의 정전이 있고, 위패와 영정을 임시로 보관하는 이안청이 있었습니다. 또 왕과 세자의 임시거처인 어재실과 예재실을 비롯해 다수의 부속건물을 두었습니다.
각 건물들은 별도의 담장을 두었는데 정전의 출입구인 신문을 포함해 모두 5개의 대문이 있었습니다. 경성제대 의학부와 부속건물이 건립되면서 정전 등 일부 건물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됐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조선왕실의 신주를 모신 사당 종묘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의 남쪽 담장 너머로 조선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왕과 추존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사당인 종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종묘가 한울타리 안에서 문을 통하여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만, 일제강점기 때 궁궐을 훼손하기 위해 종묘와 동궐 사이에 신작로를 내면서 단절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도로 위로 놓인 일본식 구름다리를 통해서만 왕래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차가 다니는 도로를 터널로 덮고 그 위에 나무를 심어 동궐과 종묘를 잇는 복원사업이 최근에 마무리 되었습니다.
종묘에는 신주를 모시는 곳이 두 곳인데, 정전(正殿)과 별묘인 영녕전(永寧殿)입니다. 정전에는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 등 49위를, 영녕전에는 16위의 왕과 18위의 왕후 등 34위의 신주를 모시고 있습니다. 폐위되었다가 숙종 때 복위된 단종의 신주는 영녕전에 모셨으나,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종묘에 봉안되지 않았습니다.
종묘의 정문은 외대문으로 창엽문(蒼葉門)으로 불립니다. 북문은 창덕궁의 동남 협문과 통하도록 하였습니다.
종묘 안에는 신주를 모신 건물 외에도 제사를 준비하는 많은 시설물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제례 때 임금이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는 망묘루, 향축과 폐와 제물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대기하던 향대청, 제례를 올리기 전에 임금이 목욕재계하는 어숙실, 제례 때 사용하는 제물과 제기 그리고 운반기구 등을 보관하고 음식을 장만하던 전사청, 제사를 담당하던 관원과 노비들이 거처하던 수복방, 제례 때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악기를 준비하고 대기하던 악공청, 음식을 차리기 전에 제물을 심사하던 찬막단, 제례 때 사용할 물을 긷던 제정, 제례 때 사용한 축(祝)과 폐(幣)를 불사르는 망료위 등입니다.
그리고 조선의 임금과 왕비가 아닌 다른 대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도 있습니다. 역대 왕들의 배향공신 83위를 모신 공신당과 춘하추동 네 계절을 주관하는 신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칠사당,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민왕을 제사 지내는 공민왕 신당이 그곳입니다.
고종이 태어난 흥선대원군의 사저, 운현궁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은 그의 아들 고종이 출생하여 12세까지 성장한 곳입니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임금의 잠저라는 이유로 ‘궁’의 명칭을 받게 되어 운현궁이라 불렸습니다. 구름재라는 뜻의 운현(雲峴)은 조선시대 서운관(나중에 관상감으로 개칭됨) 앞의 고개를 가리키는데, 서운관이 있던 지금의 계동 현대사옥 앞 언덕배기가 구름재입니다.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 대원군의 할아버지 은신군과 아버지 남연군의 사당, 고종이 창덕궁에서 운현궁을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경근문,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이 있었으나 모두 헐려 없어지고, 사랑채인 노안당, 안채인 노락당, 별당채인 이로당만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운현궁 동쪽에는 양관도 있는데, 본래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의 저택이었습니다. 1912년 무렵에 건립되었으나, 1917년 이준이 죽은 뒤 순종의 아우인 의친왕의 둘째아들 이우가 이어받았다가, 지금은 덕성여자대학교 건물의 일부로 쓰이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서울학교 기사(11월)를 확인 바랍니다.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자는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최종 백신접종을 완료하시고, 항상 실내 마스크를 착용하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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