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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바로 곁에 ‘불멸의 섬’, 그 곁에 ‘연산군 최후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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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그대 바로 곁에 ‘불멸의 섬’, 그 곁에 ‘연산군 최후의 섬’

[2022년 11월 섬학교 제99강은 <강화도와 교동도>]

세계 최강 몽골제국의 군대와 나폴레옹의 프랑스제국, 미국 함대의 공격에서도 끝끝내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은 ‘불멸의 섬’ 강화도. 그 역사의 현장 갑곶돈대에서 초지진까지 내내 바다를 따라 걸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너무 가까워서(수도권 기준) 우리가 모르고 지나쳤던 길. <강화 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강화군에는 총 20개 코스 310.5km 이르는 트레일인 <나들길>이 있는데 이 길들 중에서 단 한 코스만 꼽으라 하면 단연 이 길입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길이 바로 곁에 있지만 대부분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간다.Ⓒ섬학교

17km 내내 강화 바다와 갯벌, 들판, 농수로, 갈대밭, 숲길 등 시시각각 변화하는 풍경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게다가 트레일 중간중간에 서 있는 보와 진, 돈대들은 강화의 아픈 역사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 길은 힐링 로드인 동시에 역사공부길이기도 합니다.

11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연구소장) 제99강은 이 길을 온전히 걸으러 갑니다. 또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폭군 연산군이 유배형에 처해졌다가 숨을 거둔 섬이 교동도입니다. 고려와 조선시대 왕족들의 유배지였던 교동도도 함께 갑니다. 11월 5(토)-6(일)일, 1박2일 일정입니다. 늦가을 역사의 섬으로 떠나 깊고 멀리 걸으실 분들을 초대합니다.

▲길은 내내 소금강(염하)을 따라 이어진다.Ⓒ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0월의 답사지인 <강화도> 나들길 2코스와 <교동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강화도]

몽골과 나폴레옹3세, 미국 함대의 공격에서도 살아남은 ‘불멸의 섬’

나들길 2코스 : 내내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는 보석 같은 길

강화는 ‘불멸의 섬’이다. 세계 최강 몽골제국의 군대와 나폴레옹3세의 프랑스제국, 미국의 침략에서도 끝끝내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은 섬이다. 하지만 강화 사람들은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 안아야 했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 왕성이 옮겨 오면서 왕궁과 성벽 건설 등의 노역에 시달렸고 조선시대 말에는 프랑스, 미국 등 서구열강의 침략 전쟁으로 전란의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강화군에는 총 20개 코스 310.5km 이르는 <나들길>이 있다. 강화 본섬에 16개, 교동도, 석모도, 볼음도, 주문도 등의 관할 섬에 4곳이 있다. 모든 코스가 아름답고 의미 있지만 강화 본섬의 코스 중에서 한 코스만 꼽으라 하면 단연 <2코스 호국돈대길>이다. 갑곶돈대에서 초지진에 이르는 17km의 트레일은 내내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는 보석 같은 길이다. 길은 오르막이 거의 없는 평지다. 시멘트 포장길이 많다는 점이 아쉽지만 가는 내내 바다와 갯벌, 들판, 농수로, 갈대밭, 숲길 등 시시각각 변화하는 풍경이 고단하거나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게다가 트레일 중간중간에 서 있는 보와 진, 돈대들은 강화의 아픈 역사를 몸으로 체험해 볼 수 있게 해준다. 이 길은 힐링 로드인 동시에 역사공부길이기도 하다.

▲조선수군과 천주교신자, 학살된 양민의 원혼이 깃든 갑곶돈대Ⓒ강화군

갑곶돈대, 전투와 순교와 양민학살 그 슬픔의 무대

2코스 시작점 갑곶돈대는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 가운데 하나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동안 쌓아서 완성했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갑곶돈대는 망해돈대·제승돈대·염주돈대와 함께 제물진의 관할 하에 있었다. 갑곶은 외부에서 강화로 들어오는 관문이라 중요한 돈대였다. 본래의 갑곶돈대는 옛 강화대교 입구의 북쪽 언덕에 있었다. 지금 사적으로 지정된 갑곶돈대는 제물진과 강화 외성의 일부다. 갑곶돈대 부근은 1232년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이후 1270년까지 몽골과의 항전 중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고 조선시대에는 병인양요, 신미양요의 격전지였다.

갑곶돈대 지역은 조선시대 천주교인들이 학살당한 순교성지이기도 하다. 신미양요 당시 천주교인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 3인이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갑곶돈대에서 효수되었다. 이를 기념해 천주교단에서는 2000년에 기념성당과 순교자 삼위비 등의 기념비, 각종 조형물을 세우고 순교성지로 꾸며 잘 기리고 있다. 그런데 갑곶은 월곶, 철산포구 등과 함께 한국전쟁 당시 대규모 양민학살이 자행된 곳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군경은 강화특공대에 무기를 지원하면서 준군사조직으로 인정했는데 이 강화특공대에 의해 430명 이상의 강화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이유는 인민군 지배 시 부역 혐의였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신원을 확인한 139명 중에는 단지 부역 혐의자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한 이가 83명이나 된다. 이중 여성이 42명, 10대 미만이 14명이었다. 1살짜리 아기도 있었고 70살 넘은 할머니도 있었다. 죄 없는 무고한 희생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을 기리는 것은 화려한 천주교 순교성지 한 구석,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후미진 곳에 정부나 지자체도 아니고 강화양민학살희생자유족회가 세운 초라한 안내판 하나가 전부다. 간판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미어진다. 종교보다 못한 국가. 이래서 사람들이 나라보다 종교에 더 기대는 것일까? 그저 묵념이나 하고 돌아서야 하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겁다.

▲나들길을 따라 이어진 강화 외성의 일부Ⓒ섬학교

나폴레옹3세의 침략을 막아낸 강화도

1866년 병인박해 때 프랑스인 신부가 처형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가 조선의 강화도를 공격한 사건을 병인양요다. 조선은 1866년 2월 천주교를 불법으로 규정하고[禁壓令] 신도와 신부 등 관련자들을 체포하였다. 1871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해 남종삼(南鍾三)·정의배(丁義培) 등 한국인 천주교도 8천여 명을 처형시켰다. 이 사건이 병인박해다. 프랑스는 프랑스인 신부 처형을 군사 문제로 규정했고 나폴레옹3세(Napoléon III)의 칙령으로 조선 침략을 감행했다. 명분은 프랑스 신부 학살책임자 처벌과 통상수호조약 체결이었다.

1866년 10월 11일 중국 톈진(天津)에 주둔 중이던 프랑스 함대사령관 피에르 로즈는 군함 7척과 병사 1,520명을 이끌고 즈푸에서 출항하여 조선으로 출병했다. 강화도의 갑곶진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해 10월 15-16일 조선군과 프랑스군이 강화성 동문, 남문 등지에서 충돌해 프랑스군에게 강화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강화성 일대를 수색해 20만 프랑에 달하는 은괴 19상자, 서적, 무기 등과 외규장각(外奎章閣)의 각종 서적과 귀중품들을 약탈해 갔다. 이후 프랑스군은 김포의 문수산성도 점령했으나 11월 9일 정족산성에서 패배한 뒤 11월 10일 강화성을 불태우고 갑곶진으로 물러나 21일에는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프랑스군 퇴각 후 조선은 군비 증강에 주력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통상수교 거부를 천명하였고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도 강화했다. 병인양요는 조선이 서구 열강과 싸워 처음으로 물리친 사건이었지만 이로 인한 자신감은 조선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외세들의 침략을 온몸으로 막아냈던 손돌목돈대Ⓒ섬학교

1871년(고종 8) 미국 군함이 강화도를 공격한 사건이 신미양요다. 1866년, 대동강에 출현한 미국의 무역선 제너럴셔먼호 선원들이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의 관리를 납치하고 민간인을 죽이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분노한 평양 주민들이 제너럴셔먼호를 대동강에서 불태워버렸다. 셔먼호 사건 후 미국 정부는 이를 징벌하는 동시에 강제로 통상조약을 맺기 위해 북경 주재 미국공사 로(F. Law)에게 미국의 아시아함대를 출동케 했다. 로 공사는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J. Rodgers)와 함께 기함 콜로라도호 등 5척의 군함에 병력 1,230명을 태우고 1871년 4월 3일 경기도 남양(南陽) 앞바다에 도착, 조선 정부에 통상을 요구했으나 바로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미국의 소함정 4척은 강화해협을 측량하기 위해 강화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廣城鎭) 앞으로 들어섰다. 이에 강화수군들이 맹렬한 포격을 퍼붓자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이후 미군은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하여 포대를 점령한 다음, 광성진을 공격했다. 이 전투로 조선군은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 등 53명이 전사했고 미군 측도 매키(McKee) 해군 중위 이하 3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했다. 다음날에는 첨사(僉使) 이염(李濂)이 초지진을 야습하여 미군 선박을 물리치자 미군은 음력 5월 16일(양력 7월 3일) 침략 40여 일 만에 퇴각했다. 신미양요 후 대원군은 척양척화(斥洋斥和)에 더 큰 자신감을 갖고 온 나라 안에 척화비를 세우는 등 쇄국정책을 강화했다. 이는 조선의 몰락을 재촉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강화도에는 5개의 진(鎭)과 7개의 보(堡) 등 모두 12개의 진보가 있었다. 진은 한 지역을 지키는 군대의 진영이고 보는 그보다 작은 진영이다. 강화 5진은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덕진진, 초지진이고 7보는 인화보, 승천보, 철곶보, 정포보, 장곶보, 선두보, 광성보이다. 진과 보는 규모에 따라 첨사(종3품), 만호(종4품), 별장(종9품)이 지휘했다. 5보 중 월곶진만 첨사가 지휘했고 나머지 4개의 진은 모두 만호가 지휘했다. 7보 중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인화보만 만호가, 나머지 6개의 보는 별장이 지휘했다. 이들 12개의 진보는 각각 3-5개씩의 돈대를 관할했다.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돌이나 흙으로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했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쳤다. 강화에는 총 53개의 돈대가 있었다.

김포시와 강화군 사이 바다가 강화해협이다. 강화 남쪽 초지리에서 북쪽 월곶리까지 길이 20km다. 강화, 김포 두 지역 사이 바다는 폭이 좁아 여울의 형태를 이룬다. 폭이 200-1,000m에 불과할 정도로 좁고 조석 간만의 차도 9m나 된다. 폭이 좁고 조석 간만의 차가 심하니 물살이 험하다. 밀물 때 조류 속도가 시속 11-13km에 이른다.

▲호국돈대길의 종착지 초지진Ⓒ강화군

뱃사공 손돌의 한이 서린 손돌목

강화해협은 염하(salt river)라고도 하는데 병인양요 때 강화를 침략했던 프랑스 군인들이 소금강이라 부른 것을 일본이 한자로 번역해 쓰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강화해협은 임진강과 합류되는 한강 하구 구간인 조강과 이어져 있다. 강화해협 중에서도 김포 덕포진과 강화 광성보 사이 바다는 특히 폭이 좁고 조류가 빠르기로 유명하다. 이 바다가 손몰목이다. <나들길 2코스> 중간 광성보에 있는 돈대의 이름이 손돌목돈대인 것은 그 때문이다.

손돌목에는 뱃사공 손돌의 가슴 아픈 전설이 깃들어 있다.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략을 피해 강화로 도망치던 왕이 이곳에서 바다를 건널 때 뱃사공이 손돌(孫乭)이었다. 손돌은 아직 바람이 자지 않았으니 쉬었다 건너자고 했지만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건너게 됐다. 그런데 왕이 보니 노를 젓던 손돌이 급류 쪽으로 배를 몰았다. 자신을 해치려는 것으로 생각한 왕은 위협을 느끼자 손돌을 죽이려 했다. 손돌은 죽기 전 왕에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바다에 바가지를 띄우십시오, 그 바가지가 가는 대로 배를 몰면 안전할 것입니다.”

결국 손돌은 죽임을 당했고 급한 조류에 전진하지 못하고 난파의 위협을 느낀 왕은 손돌의 말이 생각나 바다에 바가지를 띄우게 해 바가지가 가는 대로 노를 젓게 했다. 결국 나룻배는 무사히 바다를 건넜다. 강화에 도착한 왕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손돌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제사를 성대히 지내주었다. 손돌의 제삿날이 음력 10월20일 경인데 이때는 북서풍이 강하게 불고 본격적인 겨울 추위가 시작된다. 손돌의 죽음 이후 김포 망덕진과 강화 광성보 용두돈대 사이 바다를 손돌목이라 이름했으며 이때 부는 바람은 손돌풍(孫乭風)이라고 부르게 됐다. 손돌의 전설이 더욱 슬픈 것은 몽골과의 전쟁 중이었지만 고려 백성인 손돌이 몽골군이 아니라 자신의 나라 고려의 왕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손돌의 전설은 당시 백성들에게는 몽골군이나 고려 지배층이나 똑같은 폭압자였을 뿐임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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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지지>에는 “손돌목은 돌다리가 굳세게 뻗어 있어서 물밑이 마치 문지방과 같다. 중앙이 약간 오목하여 조수가 들고 날 때 수세가 매우 급하다. 또한 물밑 돌부리가 마치 깊은 낭떠러지 같으며 파도가 굽이치며 흐르는데 여울과 같이 빠르게 흐르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광성보에는 신미 순의총이 있다. 신미양요 때 광성보 일대에서 미군과 전투 중 전사한 용사들을 모신 묘소이다. 당시 중군 어재연 장군과 아우 재순을 비롯한 군관, 사졸 53인이 전사했다. 이중 어재연 형제는 고향인 충북 음성군에 안장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분별할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다.

[교동도]

폭군 연산군과 왕족들의 유배지

왜구들이 한때 소작까지 하던 섬

예전에는 강화도 창후리에서 교동도의 월선포 사이에 뱃길이 있었다. 느린 배로 건너도 20분 거리지만 항해 시간은 물때에 따라 차이가 컸다. 간조 때는 평소의 두 배가 넘는 50분이 걸렸다. 간조 때면 썰물은 두 섬 사이의 바다를 개울처럼 얕게 만들어 직항로를 끊어 놓곤 했다. 바로 앞에 목적지를 두고도 여객선은 길게 돌아갔다. 강화 본섬 해안을 따라 남하하던 여객선이 석모도 섬돌모루 부근에서 급히 뱃머리를 돌려 북진한 뒤 교동도로 들어갔다. 가깝지만 멀기만 했던 섬. 교동도는 이제 더 이상 그런 불편이 없다. 2014년 7월 1일, 교동도와 강화도 사이에 교동대교가 개통됐기 때문이다.

교동도는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안의 섬이다. 휴전선을 기점으로 남북이 각각 2킬로미터씩 뒤로 물러난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안의 지역이 비무장지대이다. 민통선은 비무장 지대 남방한계선에서 다시 남쪽으로 5-20킬로미터 사이에 그려져 있다. 민통선은 1954년 2월, 미 육군 8군사령관이 직권으로 그어놓은 선이다. 미국 군인이 한국 땅에 임의로 그어놓은 선에 불과하지만 한국인들에게 민통선은 법보다 무서운 강제력을 가진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전장(戰場)에서 무력은 법보다 우위에 있다.

▲교동은 "깊고 넓으며 한없이 크다."Ⓒ강화군

교동은 북의 황해도 연백과 강화도를 사이에 두고 드넓다. 연백과는 불과 5킬로미터 거리. <택리지>에서 "깊고 넓으며 한없이 크다"고 한 곳이 바로 교동과 강화 일대다.

"교동도와 강화도 두 개의 큰 섬이 바다 가운데 일자로 가로 뻗어 남쪽으로는 바다를 막았고, 북쪽으로는 한강 하류를 담아, 은연중에 앞산 너머를 둘러싸서 깊고 넓으며 한없이 크다. 동월(董越)이 '평양과 비교하여 더욱 짜임새 있다'고 한 곳이 바로 여기다."(<택리지> '산수')

지금은 면단위 행정관청이 있는 한적한 섬이 되었지만 오랜 세월 교동은 군사적 요충지였다. 조선 시대에는 교동에 경기, 황해, 충청의 수군을 관할하는 해군사령부, 삼도통어영까지 있었다. 교동과 강화는 오랜 세월 고려의 도읍지인 송도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관문 역할을 했다. 왕성의 관문이었던 교동은 강화와 함께 서남해의 어느 섬보다 왜구의 극심한 노략질에 시달려야 했다. 남부지방에서 올라오는 상선과 세곡선의 길목이었던 때문이다.

1360년 왜구는 강화에서 백성들 300여 명을 살해하고 쌀 4만여 석을 약탈해 갔고 1371년에는 고려의 병선 40여 척을 불태우는 등 끊임없이 약탈과 살륙을 자행했다. 왜구의 침략에도 기울어 가던 고려의 조정은 무능했다. 정규군이 맞섰지만 제대로 전투 한 번 치러보지 못하고 전멸되거나 도주하기 일쑤였다. <교동군지>에 따르면 심지어 왜구들이 교동도에 장기간 주둔하며 주민들의 토지를 강탈해 소작을 주고 소작료를 받아가기까지 했다 한다. 고려 왕성을 코앞에 두고 왜구들이 섬을 직접 통치한 것이다.

▲실향민들이 만들고 명맥을 이어온 교동도 대룡시장Ⓒ섬학교

연산군 그리고 왕족의 유배지

교동도는 연산군의 유배지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아니더라도 유독 많은 왕족들의 유배지이기도 했다. 교동이 왕족 전용 유배지가 된 것은 늘 대규모 군대가 주둔해 있고 왕도인 송도나 한양과 가까운 섬이었기 때문이다. 특급 유형수들을 감시하기에 교동만한 곳이 없었을 것이다.

1221년 고려 무신정권 하에서 21대 왕 희종이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발각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조선 시대 들어서는 세종의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안평대군이 그의 아들 우직과 함께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살해됐다. 광해군의 형이었던 임해군 또한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교동으로 이배된 뒤 죽임을 당했다.

광해군 7년에는 인조의 동생인 능창대군이 교동으로 유배된 뒤 불태워져 죽었다. 그 외에도 광해군의 왕비였던 유씨와 왕족이었던 은언군, 익평군, 영선군 등이 교동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온 조부 은언군을 따라왔던 철종도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교동도에 살았다.

하지만 이 땅 어느 곳처럼 교동 또한 역사유적은 거의 자취도 없다. 과거 관청이 있었던 읍내리에는 교동읍성 성문 한 곳의 홍예문만이 간신히 남아 있다. 이 읍내리에 조선 10대 왕 연산군의 유배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연산군이 교동으로 유배된 것은 중종반정 직후인 1506년 9월이었다. 연산군은 교동에서 불과 두 달 남짓 유배생활을 하다 급사했다.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학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대신(大臣)·대간(臺諫)·시종(侍從)을 거의 다 주살(誅殺)하되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있었다. 드디어 폐위하고 교동(喬桐)에 옮기고 연산군으로 봉하였는데, 두어 달 살다가 병으로 죽으니, 나이 31세이며, 재위 12년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총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중종의 <실록>은 연산군 폐위부터 유배, 사망까지의 일들을 속보로 전한다. 반정의 순간까지 기미도 못 채고 주지육림에 빠져 있던 연산의 처신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왕위를 뺏기고도 목숨을 살려준 중종의 성은에 그저 감읍할 뿐이었다. 온갖 호사와 권력을 다 누려본 자라도 삶에 대한 미련은 쉽게 버릴 수가 없는 것인가.

"전왕을 교동(喬桐)에 안치(安置)하였다. 밤 2고(鼓)에 봉사(奉事) 안윤국(安潤國)이 와서 아뢰기를, ‘폐주는 갓[笠]을 쓰고 분홍 옷에 띠를 띠지 않고 나와서, 땅에 엎드려 가마에 타며 말하기를, 내가 큰 죄가 있는데, 특별히 상의 덕을 입어 무사하게 간다’ 했으며....."( 중종 1년, 1506년 9월 2일)

반정의 핵심 인물 박원종은 연산군의 큰어머니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의 동생이었다. 연산군은 큰어머니 박씨 부인을 겁탈했고 박씨 부인은 목을 매 자결했다. 박씨 부인의 동생 박원종이 집안에 치욕을 준 '왕'을 폐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박원종 등이 의논하여, 전왕을 봉하여 연산군으로 삼았다."(9월 3일)

<실록>의 기사는 연산군이 교동에 유폐되는 순간과 유배지의 풍경을 스틸 사진처럼 정교하게 전한다. 유배지 교동에서도 연산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겨운지 연신 감격한다.

"폐왕이 말을 전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 수고하였다. 고맙고 고맙다’라고 하였다."(9월 7일)

새 임금은 '패악'한 전 왕에 대해 혈육의 정마저 끊기 어려웠던가 보다. 물품을 보내고 가시 울타리를 3미터쯤 뒤로 물리게 하는 성은을 베푼다. 하지만 중종 또한 머지않아 조카들을 죽인 패악한 왕이 될 터였다. 패악한 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제권력의 속성이 패악한 것이다. 삼촌은 우환거리를 없애기 위해 조카들을 몰살시킨다.

"폐세자 이황·창녕대군 이성(李誠)·양평군 이인(李仁) 및 이돈수(李敦壽) 등을 아울러 사사(賜死)하였다."(9월 24일)

연산군의 외가였던 고을과 왕후 신씨의 고향 마을은 반정의 피해를 입고 강등 당하고 연산군이 좋아하던 물품의 교역도 금지된다. 연산군은 스스로의 목숨을 그토록 귀히 여겼으나 유배지에서 목숨의 보전은 쉽지 않았다. 교동 유배 두어 달 만에 죽음을 맞이하자 왕은 왕자의 예로 장례를 치러준다.

면 소재지에서 작은 언덕을 넘어가면 고구리 마을이다. 마을은 교동의 너른 들에 물을 대는 저수지가 있다. 교동은 강화에서 논이 가장 많은 면이다. 가구당 평균 경작 면적이 2만여 평에 이른다.

▲대룡시장 내 줄을 서는 꽈배기집Ⓒ섬학교

400살 우주목 물푸레나무

고구리 저수지를 지나 마을 숲으로 들어선 것은 물푸레나무를 만나기 위해서다. 어디선가 천년목이라는 소문을 들었던 터였다. 확인해보니 물푸레나무는 400여 년 수령의 보호수다. 천년목이 아니어도 물푸레나무는 신령스런 숲의 주인이다. 이 땅에서는 물푸레나무가 당산나무로 모셔지는 경우가 드물지만 북유럽 신화의 이그라드실 물푸레나무는 '하늘과 땅, 지구의 중심까지 삼계를 이어주는 우주목'이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주신인 오딘까지도 물푸레나무에게 지혜를 얻어가곤 했다.

불과 백 년을 살기 어려운 인간에게도 세월의 경륜이 쌓이면 지혜가 생기고 혜안이 열리는데 하물며 수천 년을 사는 나무들에게 어찌 신령이 깃들지 않을 까닭이 있겠는가.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는 우주목 신화가 널려 있다. 중국의 <산해경>에도 우주목이 등장한다.

"건목(建木)이 있는데 태로가 하늘을 오르내렸고 황제가 가꾸고 지켰던 나무다."(<산해경> '해내경')

오에 겐자부로는 그의 소설을 통해 어려서 들었던 <나의 나무>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을의 숲에는 사람들마다 '나의 나무'가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은 뿌리를 통해 모두 '나의 나무'에게로 돌아간다. 사람은 세속에 있으나 나무는 신령한 세계에 속한다.

한국의 우주목 신앙은 마을마다 산재해 있었다. 지혜 깊은 이 땅의 당산나무는 오랜 세월 마을의 안녕과 사람의 안전을 보살피는 신목이었다. 하지만 유일신교의 유입 이후 당산 신앙을 비롯한 이 땅의 토착신앙은 초토화되었다. 당집이 헐리고 당산나무가 베어진 것은 이 땅의 정신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우주목이나 당산나무 신앙 등의 토착신앙은 결코 미신이 아니다. 그것을 미신이라 배척한다면 세상에 배척당하지 않을 종교는 없다. 본디 미신 아닌 종교는 없기 때문이다.

삼한시대 교동과 강화는 마한의 옛 땅이었다. 후일 백제에 점령되었다가 광개토대왕 대에는 고구려의 점령지가 됐다. 고구려 때 처음으로 현(縣)이 설치되어 중앙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그때의 이름이 고목근현(高木根縣))이었고 고구려 멸망 후 신라에 점령된 뒤에는 교동현이 되었다. 조선조 말엽까지도 교동은 다섯 개의 면을 거느린 군이었다.

본래 교동도는 화개산, 수정산, 율두산을 중심으로 한 세 개의 각기 다른 섬이 간척공사를 통해 하나의 섬으로 연결되었다. 교동을 비롯한 인근의 강화도나 석모도 등에 유난히 '떠내려 온 섬'에 대한 전설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산기슭에서 발견되는 화석이나 조개껍질 등은 교동의 옛 지형을 말해 주는 증거이다. 조선 개국 초에는 개성의 왕씨들을 다른 섬으로 이주시킨다고 속여 교동 앞바다에 수장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곳이 청지펄이다.

선정의 유일한 증거는 선정비 세우지 않는 것

읍내리 교동향교로 가는 길목에 비석들이 군집해 있다. 조선시대, 교동을 다스리던 통치자들을 기리는 비석들이다. 안내판은 이 비석들을 "조선 시대 선정을 펼친 교동 지역의 목민관인 수군절도사 겸 도호부사 방어사 등의 영세불망비, 선정비인데 교동 각지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 자리에 모아 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직도 선정비가 선정을 베푼 자들을 기리는 비석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선정을 베푼 관리들이 저리도 많은데 어찌 백성들의 삶은 온통 고통뿐이었을까.

▲선정의 유일한 증거는 선정비 세우지 않는 것Ⓒ섬학교

많은 비석들이 수령들이 떠나기도 전에 서둘러 세워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은 거의 소실되고 없지만 예전에는 교동 전 지역에 비석거리가 있었다고 한다. 가소롭게도 교동의 통치자들 대부분이 '자신의 손'으로 선정비나 영세불망비를 남긴 것이다. 선정비는 실상 통치자들이 자신의 악정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이용한 경우가 많다. 선정비를 세우지 않은 것만이 유일한 선정의 증거다. 하지만 못된 전통은 현대에 와서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어느 섬에는 현직 군수였던 이가 세운 동상까지 있다.

읍내리 비석군에서 직진하면 화개산 중턱에 화개사가 있고 교동향교는 그 오른쪽 끝자락 산기슭에 자리해 있다. 교동향교는 이 땅에서 최초로 공자의 초상화가 봉안된 향교로 알려져 있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서 귀국 도중 교동향교에 공자의 초상화를 봉안했다. 향교는 문이 굳게 잠겨 있고 향교 안 마당에는 태극기만 나부낀다. 향교 대성전 건물 서쪽에는 성전약수가 있다. 약수터 물이든 샘물이든 땡볕에 바가지로 땀을 쏟은 나그네에게는 모두가 감로수이고 약수이다. 안내판에는 “위장병 환자가 마시면 단기간에 완쾌된다고 전해진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학전(學田)이었을까. 향교 입구 논에서는 벼가 막 피기 시작했다. 향교 서쪽에는 논에 물을 대는 물방죽이 있다. 방죽에서 논으로 고무호스가 연결되어 있다. 예부터 향교에 딸린 논에 물을 대던 저수지였을 것이다. 양반 유생들이 공부하던 향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지만 유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노비와 농민들이 농사짓던 논이나 땀 흘려 판 방죽은 아무런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다. 향교는 죽은 교육기관이지만 논과 방죽은 여전히 살아있는 유물이다. 실상 저런 방죽이나 논이야말로 이 땅 농업문화의 귀중한 유적이고 문화재가 아닌가. 저 논이 사라지면 저 작은 방죽도 순식간에 매워지고 말 것이다. 그렇게 가뭇없이 사라져간 이 땅의 문화유산이 얼마나 많은가.

2022년 11월 5(토)-6(일)일, 섬학교 제99강 <강화도> ‘나들길 2코스’와 <교동도> 답사는

11월 5일(토) 09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11월의 섬학교 <강화도와 교동도> 답사지도Ⓒ섬학교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카페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섬학교 기사(11월)를 확인 바랍니다.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자는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최종 백신접종을 완료하시고,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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