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는 우리 사회의 저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숙제들을 드러냈다. 대부분의 선진국보다 성공적이었던 초기 방역이 '저력'이라면, 노동시장에서 나타난 실업의 급증와 불안정 노동 문제 부각, 그리고 이에 대응해야 할 사회보장제도의 빈틈은 '숙제'에 해당한다. 그리고 '아픈 노동자'가 불편한 몸을 끌고 꾸역꾸역 직장으로 향했던 상황 역시 이 숙제 중 하나였다.
OECD에서 단 둘 뿐인 상병수당 없는 국가
한국의 복지제도는 지난 십수 년간 괄목할만한 발전을 해왔다. GDP 대비 복지비 지출은 여전히 주요 선진국에 크게 못 미치지만 그 상승폭은 눈에 띄게 컸다. 여기에 2000년대 후반부터 노인장기요양보험과 근로장려금 도입, 보편적 보육지원 확대와 아동수당 도입, 한국형 실업부조인 국민취업지원제도 도입 등이 이루어져 이제 주요 선진국에 있는 어지간한 복지제도는 모두 갖추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도의 도입만으로 해결되는 사회 문제는 없지만, 적어도 제도 자체가 없어서 생기는 문제는 이제 크지 않다.
그러나 '상병수당'은 다르다. 상병수당은 노동자가 질병이나 부상 등으로 노동을 중단할 때 발생하는 소득의 손실을 보전하는 제도다. 산재보험이 업무상 재해나 질병에 대해서만 소득보장을 제공하는 것과 달리 상병수당은 업무와 무관한 건강상 문제에도 소득을 지원한다. 물론 회사로부터 유급병가를 받을 수 있는 노동자라면 사회보장제도의 지원 없이도 소득을 유지할 수 있지만, 2020년에 고용노동부에서 발주한 연구용역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유급병가를 도입한 사업장은 약 21% 정도에 불과했다. 아픈 노동자가 맘 편히 쉴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제도가 비어 있는 것이다.
OECD 국가 중 상병수당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 않은 국가는 한국과 미국 둘 뿐이다. 이에 따라 상병수당은 한국의 사회보장체계를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퍼즐로 불려왔다. 그리고 코로나19를 배경으로 '아픈 노동자' 문제가 부각되었다. 감염병 상황에서도 감염의 우려를 무릅쓰고 일터로 나가는 노동자들이 주목받은 이후에야 상병수당 도입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어쨌든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상병수당 도입을 위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한국형 상병수당 시범사업
일련의 연구와 자문을 거쳐 한국형 상병수당의 1단계 시범사업이 6개 기초자치단체(서울 종로구, 경기 부천시, 충남 천안시, 전남 순천시, 경북 포항시, 경남 창원시)에서 지난 7월부터 시작되었다. 1단계 시범사업은 3개의 서로 다른 모형으로 구성되는데 각 모형의 차이는 급여지급 사유, 대기기간(상병 확인 후 급여지급까지의 유예기간), 최대보장기간(상병수당이 지급되는 최대기간)에 있다. 아래 표에 제시된 것처럼 모형1은 입원여부와 관계없이 근로활동 불가기간 동안 급여를 지급하는데, 대기기간은 7일이며 최대보장기간은 90일이다. 모형2는 지급 조건은 모형1과 동일하지만 대기기간(14일)과 최대보장기간(120일)이 모두 모형 1보다 길다. 모형3은 입원을 조건으로 의료이용일수동안 급여를 지급하며, 대기기간은 3일 최대보장기간은 90일로 설정되었다. 지급금액은 세 모형 모두에서 동일한데, 정액으로 최저임금의 60%인 1일 4만3960원을 지급한다.
비록 시범사업이라고는 하지만 시범사업의 성과를 바탕으로 본사업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시업사업의 설계를 통해 본사업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점은 자산조사를 거쳐서 급여를 지급하는 모형을 설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정부가 상병수당의 방향을 보편주의적 제도로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파서 일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소득중단은 소득수준과 무관하게 모든 일 하는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사회적 위험이라는 점에서 이는 적절한 접근이다. 또 한 가지 긍정적인 부분은 임금노동자 뿐 아니라 특고나 자영업자를 포괄하는 모든 취업자를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드러난 노동시장 약자의 다수가 비임금근로자 지위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게 도입되는 상병수당이 모든 취업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반면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 무엇보다 급여 수준이 정액인데다가 너무 낮다. 최저임금의 60%로 설정된 급여수준은 3가지 모형 모두에서 차이가 없어 본 사업에서도 유사하게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실업급여의 최저선인 최저임금의 80% 보다 낮을 뿐 아니라 정액으로 지급하는 방식이라 아픈 노동자의 가구 구성이나 아프기 전 소득을 고려하지 않는다. 대개의 선진국에서 상병수당이 사회보험 방식으로 재원을 조달하고 이전 소득의 일정 비율을 보장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처럼 급여수준도 낮고 근로자의 이전 소득도 고려하지 않은 상병수당이 과연 노동자가 '아프면 쉴 권리'를 제대로 보장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여기에 급여 수준 역시 90일~120일로 설정되어 이보다 긴 상병기간을 요하는 질병의 경우 여전히 소득보장의 사각지대에 남게 되는 것 역시 우려할 부분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만
ILO에서는 공적 상병수당에 대해 경제활동인구의 75% 이상을 대상으로 하여 최저 52주 이상의 기간 동안 이전 소득의 60% 이상을 보장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한국형 상병수당 시범사업의 급여수준과 기간과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물론 한국의 상병수당 제도는 이제 도입하는 단계로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시범사업 단계에서 상병수당의 소요재원을 조세로 조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액급여로 운영하는 것에 나름의 타당성도 있다. 상병수당은 의료적 진단 절차 마련, 유급병가, 실업급여 등 타 제도와의 중복 문제 해결, 도덕적 해이 우려 등 고려할 것이 많은 복잡한 제도다. 게다가 한국형 상병수당은 '모든 취업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기에 이전의 소득을 고려한 급여를 설정하기 위해 다양한 고용형태에 대한 소득파악이라는 산을 넘어야 한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지금의 제도 설계가 1단계 시범사업이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2단계, 3단계 시범사업을 거쳐 최종적으로 제도의 모양이 어떻게 갖추어질지 기다려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시범사업이 됐든 본 사업이 됐든 그 제도의 원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안을 설계하는 것은 중요하다. 상병수당의 목적이 일하는 사람이 아플 때 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데 있다고 보면, 최저임금의 60%라는 급여수준이 특히 부양가족이 있는 가구의 노동자가 쉴 수 있는 보장수준인지 의문이다. 한국형 상병수당에 대한 이와 같은 우려는 '한국형 실업부조'라는 이름으로 도입된 국민취업지원제도가 낮은 급여수준과 급여기간으로 인해 실업자 생계지원이라기보다는 취업 프로그램 참여 인센티브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상황과 겹쳐진다. 모쪼록 2단계, 3단계 시범사업을 거쳐 제도화될 한국형 상병수당이 이런 우려를 불식시켜, 더 이상 “한국형”이라는 수식어가 제도의 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최소주의적 사회정책을 상징하는 용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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