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가시밭에 핀 꽃은 더 아름답고, 소중한 법 아니겠는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가시밭에 핀 꽃은 더 아름답고, 소중한 법 아니겠는가"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 17. 노촌 선생, 마이크 잡다  ①

김구학회(대표 한동우)의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의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는 김구, 조봉암 등 선열들이 오늘의 시대 상황을 직시하며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겨레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독백 형식의 글이다. 모든 글은 선열들이 남긴 기록들, 행적들, 역사적 사실들 등을 토대로 하여 필자의 의견을 가미했다.

네이버 블로그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에는 2020년 7월 이후의 모든 연재 글(25편)을 볼 수 있다.(☞ 바로 가기)

노촌 이구영, 그는 누구인가? 남파공작원 출신의 장기수인가? 우리 시대 마지막선비인가? 우리는 그를 무엇으로 불러야 하는가? 간첩죄로 22년 만에 감옥을 나왔지만 고향에 가서야 출옥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전기가 들어오고 라디오 텔레비전이 보급되었다는 게 제일 신기했고, 고향산천을 다시 바라보게 된 것이 제일 기뻤다.

▲ 노촌(老村) 이구영 선생. ⓒ이승혁 

집안은 3대 대제학과 부자 대제학을 배출한 바 있기에 자연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이를 실천하는 선조들이 많았지만 그 체화된 선비정신이란 인의예지일 것이었고, 그 모두는 수신지침이었기에 '의(義)'라 해서 불의를 참지 말라보다 자기 잘못을 광구(匡求)하잔 강조였다.

남아가 죽을지언정 불의에 굽혀서는 안 된다(不可以不義屈), 선비는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한다(先天下之憂而憂) 등이 선비의 덕목으론 거론되기는 하지만, 꼭 궁행(躬行)이 권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일제 침략을 당하여 우리 집안 어른들이 다수 의병에 가담하여 간고한 세월을 보내게 된 일은 자랑이라면 자랑이고 불가사의라면 또 그렇기도 하려니와, 그러나 자연 왜놈이라면 치를 떠는 집안 분위기에서 나는 처음부터 학교와는 거리가 먼 사서삼경이었다.

3.1 운동 이듬해에 태어난 내가 열여섯에 결혼하고 상투에 갓을 쓴 채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처음 서울 구경을 왔다. 허나 오히려 큰 구경거리가 됐었다. 다시 내려가 2 년 동안 한문을 배우다가 우연치 않게 학교 선생을 만나 세상 물정 돌아가는 얘기를 자세히 듣고 부모 몰래 상경하여 YMCA 중등반에 입학한다. 민족이 처한 현실에 눈뜨면서 자연 피 끓는 청년들과 교유하게 되었고, 또 우연치 않게 접한 '인류사회 발전사'를 통해서 사회주의에 심취하게 된다.

동지들과 어울려 당 외곽에서 공작원으로 활동하다 해방을 맞는다. 탄압이 심해지자 공작을 중단하고 한의학원 설립을 지원하면서 연구에 몰두한다. 6.25가 터지자 다시 세상 만난 듯 신바람을 일으키다 월북하게 된다. 그리고는 38세, 당명에 의하여 남파된다. 북에도 처자가 있는 현실. 아내가 울고 특히 노모가 눈물로 간청할 때 가슴은 찢어졌으나 전향은 어려웠다.

꼭 명문이어서 망국의 치욕을 견딜 수 없었을까. 아니면 덕행의 서목(庶目)이었던 의사(義死)가 때를 만나 분출(憤出)하는 것일까. 또 아니면 의병이 그리 봉기(蜂起)하고, 군자금 심지어는 수천 억 재산을 팔아 무관학교를 세웠겠는가. 또 아니면 양명학을 눈치 챈 경주이씨요 진화론에 빠져든 고성이씨가 일냈단 말인가. 항일을 숙명이라 했지만 학자의 길이 내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보다 더 보장된 부귀영화를 포기한 인사가 어디 한둘인가.

그러나 일을 해가다 보면 결코 사람은 집안의 내력이나 외관만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당로자의 투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살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걸 여러 번 체감하게 된다. 조상이 무얼 했는지 형제가 무얼 하는지는 그저 참고일 뿐이었다. 단순히 식민지 청년들의 고민을 나누는 선에서 출발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래 어느 듯 속셈은 사회주의로 달렸지만 출발선에서 보여준 동지들의 강한 의지가 끝까지 동행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 2004년 7월 9일 방송된 KBS <인물현대사> '찬 겨울 매화향기에 마음을 씻고'의 한 장면. 한학자 노촌 이구영 선생은 신영복 성공회대 명예교수의 '옥중 스승'이다. 

가야만 하는 길(노촌 자서전, 269~271쪽, 1998)

출옥을 한 뒤로 어느덧 1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나는 지금 집사람과 둘째 딸, 그리고 손자 손녀들과 함께 살고 있다. 두 딸에게서 난 일곱 명의 손자 손녀들도 벌써 이십대의 젊은이들이 되었다. 이 정도면 그래도 복 받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꽃피고 새가 운다고 해도 마음 한 구석이 시린 것은 여전하다. 남쪽에 있는 가족들과 서로 간에 따뜻한 정을 느끼며 오순도순 살면 살수록 북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생각도 간절해진다.

내가 남으로 내려올 때 북에 두고 온 아들은 네 살, 딸은 갓난아기였다. 감옥에 들어간 뒤 처음 한 10년 동안은 거의 날마다 그 쪽 가족들을 생가하다시피 했다. 꿈에도 많이 나타났다. 북에 있는 아내에게 잘못했다는 생각과 함께 그와 비례해 나는 집사람에 대한 죄책감도 컸다. 집사람은 북에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대를 이을 자손이 있다고 즐거워했지만 마음의 가책은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은 북에 있는 가족들의 얼굴조차 희미하다. 일생에 두 번이나 양쪽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어 못할 노릇을 많이 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제 내가 바라는 꿈이라면 남북통일밖에 없다.

내 나이 이제 여든이 가까웠으니 살 만큼은 살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금 더 살 수 있다면 하고 바란다. 돈도 명예도 어느 것 한 가지 가지지 않았었건만, 굳이 그 모진 시절에도 연연하지 않던 목숨에 욕심을 내는 것은 언제고 통일이 되는 날을 맞고 싶기 때문이다. 그날이 오면 북의 가족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버리지 않고 있다.

뒤돌아보면 굽이굽이 풍파도 심했다. 그것은 내가 유별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가 그만큼 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조 봉건사회, 일제 식민사회, 6.25전쟁. 남북의 이념 대립, 사회주의 사회와 22년간의 감옥살이, 그리고 지금 1990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었다. 수도 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고.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마음고생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렇지만 지금도 후회는 없다. 그것 때문에 인생을 버렸다거나 내 젊음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모른 채 덮어놓고 돈만 벌다 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좋아했던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는 부잣집 출신이면서도 진보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에 비해 같은 시대를 살았던 고리키는 정신이 깬 사람이었다. 민중과 함께 호흡했던 고리키의 정신을 나는 높이 평가한다. 그와 같은 삶을 살려고 내 나름대로는 노력했다.

지금은 무슨 '주의'니 하는 이념을 떠나서 사람은 고루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리고 세상을 안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알아야 변화도 시킬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고, 무엇보다도 내가 남에게 죄 짓지 않고 조금이라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이바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얼마 전에 지하철역에 붙어 있는 글을 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읽을 만한 글들을 액자 형식으로 만들어 걸어둔 것을 우연히 읽게 된 것이다. 그 글에는 프로스트의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라는 시가 몇 구절 인용되어 있었다.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기만 한데

내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몇 십리 길이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몇 십리 길이….

시라는 것이 다 그렇듯이 읽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느낌이나 생각이 다 제각각이겠지만, 그날따라 내게는 그렇게 마음에 와 닿을 수가 없었다. 시인이 본래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 시의 구절이 내 인생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내가 지나온 길을 다시 한 번 차근차근 더듬어 보던 무렵이라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지금 앉아있는 자리가 아무리 안락할지라도, 그리고 떠나야 할 길이 아무리 춥고 어두울지라도 가야 할 길이라면 가는 것이다. 사람들 다 잠든 밤중에라도 깨어 일어나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세상을 알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잘 살 수 있어야 옳은 세상이라고 믿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나는 스스로에게 약속을 한 셈이다. 내가 알고 느낀 만큼 세상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약속을.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애써 온 지난날들에 대해 아무런 후회도 없다. 오히려 지금 생각해보면 가시밭길 가운데서 행복을 느꼈다고도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가시밭에 핀 꽃은 더 아름답고, 소중한 법이 아니겠는가.

백범 인품에 감복(노촌 자서전, 104~111쪽 요약)

노촌 선생((25세)은 1945년 말 백범 김구 선생(69세)을 찾아뵙는다. 집안 의병 내력을 말씀드리니 아주 반가워하시면서 황해도 어딘가에서 유인석 장군의 종사관이셨던 선생의 숙부님을 만난 듯하다시며, "형편이 펴이면 사당이나 기념관 정도는 꼭 해드리려는 분이야" 하셨다. '정권을 쥐면' 안 하시는 것을 듣고 남달리 권력에 대한 욕심이 많지 않은 분이란 걸 느꼈다. 백범은 나를 성실한 젊은이로 받아드리시고 자주 들리라고 말씀하셨다.

산업을 발전시켜야 하기 때문에 진보적으로 살아야 할 때라 하시면서 노동문제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라고 하셨다. 자주 찾아오라 하시면서 여기서 열리는 토론회에도 꼭 참석하라 하신다. 다만 요즘 청년들이 잘못 나데는데 행여 그런데는 휩쓸리지는 말라하시니 가슴이 뜨끔하기도 했다. 이어서 영국같이 왕정을 하잔 얘긴 아니지만, 그렇다고 옛것을 아주 버려서는 안 된다시며 온고지신을 여러 번 강조하셨다.

알고 보면 이 박사는 당시의 인지도나 인기 면에서 대통령이 될 수 없었는데, 공산당이 백범과 한민당을 갈라놓는 바람에 어부지리를 얻은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백범이나 우사가 되었더라면 좋은 일을 많이 했을지도 모르지만 누가 돼도 어려운 때였다고 생각한다. 백범이 피격 당했을 때 '대장부란 변방에서 죽어 말가죽에 싸여 돌아와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정치인은 살아서 잘할 수 없으면 차라리 잘 죽는 이만 못하단 생각을 했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