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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했으나 불운했던 정치인 고르바초프, 세상을 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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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했으나 불운했던 정치인 고르바초프, 세상을 뜨다

소련의 최초이자 마지막 대통령, 고르바초프의 정치 역정

냉전을 종식시켜 인류의 핵전쟁의 위기에 구해냈으나 정작 자신의 조국 소련의 해체를 막지 못한, 위대했으나 불운했던 정치인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가 30일 91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소련의 최초이자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고르바초프는 30일 밤 모스크바 시내 중앙의료병원에서 영면했다고 타스 통신이 보도했다. 타스 보도에 따르면, 고르바초프는 코로나19 초기인 2020년부터 입원 치료 중이었으며 "심각하고 오래된 질병"에 의해 사망했다.

고르바초프는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지난 1999년 별세한 부인 라이사가 있는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지난 1985년 54세의 젊은 나이로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고르바초프는 아프간의 소련군 철수를 시작으로 미국과의 집중적인 핵군축 협상을 통해 중거리 핵무기 폐기조약(INF)을 이끌어내는 등 2차 대전 이후 45년간 지속된 냉전을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또한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주의 전환과 독일의 통일을 허용했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는 서방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1991년 8월 공산당 강경파의 쿠데타 시도로 그의 권력은 약화됐고 그해 12월 소련은 해체됐으며, 이후 러시아의 실권은 보리스 옐친에게 넘어갔다. 특히 독일 통일 당시 미국 등이 그에게 약속한 나토 동진 금지 약속이 파기되면서 미국과 러시아는 냉전 종식 33년만인 올해 2월 우크라이나를 놓고 위험천만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역사의 슬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위대했으나 불운했던 고르바초프의 정치 역정을 되돌아본다.

▲소련의 최초이자 마지막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그리고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 민간기업의 허용

1931년 러시아 남부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고르바초프는 10대 때 집단농장에서 곡물수확용 콤바인 기사로 일했다. 로모노소프모스크바국립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대학생 시절 공산당에 입당했고, 이후 고속 승진을 통해 1985년 유리 안드로포프에 이어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에 오르면서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됐다.

당초 고르바초프는 과도한 국방비와 부정부패, 비효율 등으로 침체에 빠진 소련 경제를 되살리려 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곧 국가 전체의 정치 및 사회구조에까지 미쳤다.

1986년 발표된 '페레스트로이카(개혁)'는 소련 경제를 새롭게 개조하려는 것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에는 정치적 요소까지 가미돼 중앙 정부의 각 부처와 국영기업에 자율성을 부여했다. 또한 시장경제도 도입했다. 1988년 고르바초프는 민간기업의 창업을 허용했는데, 이는 1920년대 레닌의 '신경제(New Economic Policy)' 도입 이후 최초의 시도였다.

고르바초프 개혁의 또 다른 축은 '글라스노스트(개방)'였다. 그는 사회의 개방성을 높이려 했다. 이를 위해 언론에 대한 공산당의 통제를 완화하고, 정치범들을 석방했다. 이는 급진적 개혁이었다. 공적 발언에 대한 통제는 소련 정권의 핵심적 요소였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는 또한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제와 국민의 의사를 정치에 대변할 수 있는 의회(Congress of People's Deputies) 제도를 도입했다. 부분 경선을 통해 소련 최초의 국회의원(2,250명)이 탄생했고, 1990년 3월 15일 이들의 투표를 통해 고르바초프는 소련 최초(이자 마지막)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니까 소련(러시아)의 시장경제 및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이미 1980년대 말 고르바초프에 의한 시작된 것이다. 반면 소련 해체 이후 옐친이 추진한 충격요법에 의한 시장경제 전환은 러시아를 2차 대전 때보다도 더 가혹한 경제 위기로 몰아넣었고(1998년 금융위기로 정점을 찍음), 이때의 고통은 이후 러시아의 반서방 정서를 만들어냈다.

아프간 철수와 냉전 종식

대외정책에서도 '노븨 무이슬리(새로운 사고)'라는 이름의 개혁을 통해 서방과의 관계를 개선했고 결국 냉전을 종식시켰다.

1986년 그는 (1979년부터 계속된) 아프간 전쟁에서 철수를 발표했고 3년 후 철수를 완료했다. 소련은 아프간 침공으로 서방의 집중적 비판을 받았으며, 1만 5천명 이상의 사상자들로 인해 경제 및 사회 부문에서 커다란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는 서방과의 집중적 협상을 추진해 1980년대 초반 이후 유럽 대륙을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중거리핵무기의 완전 폐기 조약(INF)을 이끌어냈고(1987년, 2017년 미국 트럼프 행정부에 의해 파기됨) 부시와의 정상회담에서 전략핵무기의 3분의 1 감축에 합의했다(레이건과의 레이캬비크 정상회담에서 모든 핵무기의 완전 철폐에 근접했으나 미국 측 관료들의 반대로 무산). 또한 소련은 고르바초프 집권 이후 일방적으로 모든 핵무기 실험을 중단했다.

동유럽 위성국가들과의 관계도 급진적으로 변화했다. 이전까지 소련은 브레즈네프의 제한주권론에 따라 동유럽 국가들의 체제 전환을 무력으로 저지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동유럽 국가들의 민족 자결을 허용했다. 이른바 '시나트라 독트린(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 '마이 웨이'에서 유래)'에 의해 헝가리, 폴란드, 체코 등 동유럽 국가들이 평화적으로 자본주의로 전환했고 동독과 서독의 통일도 이루어졌다.

이처럼 냉전을 평화적으로 종식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고르바초프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당시 노벨위원회는 고르바초프의 수상 이유에 대해 국제적인 평화 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베를린장벽 붕괴

고르바초프는 동서 분단과 대립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9년 서독을 방문한 고르바초프는 모든 민족은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체제를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모스크바는 "이러한 모든 민족의 자결의 권리를 존중할 것"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결국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시민들에 의해 철거됐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새로운 시대의-냉전과 동서 대립의 종식-도래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1990년 독일 통일의 시발점이었다.

소련의 해체

고르바초프에 의한 소련 사회의 부분적 민주화는 소련을 이루는 15개 공화국의 대부분에서 민족주의와 반러시아 정서의 분출을 초래했다. 각 공화국의 독립 추구는 때로는 폭력적이었다. 소련 중앙 정부는 폭력 시위와 독립 추구에 군사력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으며, 폭력의 악순환은 심화됐다.

소련 내부의 점증하는 갈등을 고르바초프는 새로운 연방 조약으로 해결하려 했다. 이에 대해 공산당 내의 일부 강경분자들은 이른바 "국가비상사태 대응을 위한 국가위원회"를 결성해 고르바초프를 제거하고 신연방조약 조인을 무산시키기 위한 쿠데타를 시도했다(1991년 8월 9일).

쿠데타는 저지됐으나(당시 러시아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의 주도), 고르바초프의 권위는 실추됐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해체하고 당 총서기에서 물러났으며, 모든 국가기관에 배치돼 있던 공산당 조직을 해산했다. 1917년 혁명 이후 소련을 지배했던 중심적 정치세력이었던 공산당이 무력해진 것인 동시에 고르바초프의 권력 기반이 사라진 것이다.

이후 각 지역 공화국들이 잇달아 독립을 선언하면서 소비에트연방(소련)은 쿠데타 시도 불과 4개월여 만에 해체되고 만다. 1991년 12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대통령들이 벨라루스의 브레스트라는 도시에 모여 소련의 해체 및 이를 대신하는 독립국가연합(CIS)의 성립을 선포하는 벨라베자협약에 서명한 것이다.

당초 고르바초프는 이 협약이 불법이라고 항의했으나 결국 12월 25일 CIS 성립을 인정하고 소련 대통력 직에서 물러났다.

고르바초프를 둘러싼 논란

고르바초프는 서방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반면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논쟁적인 인물로 남아 있다. 미소 핵군비 경쟁 종식을 위한 노력, 독일의 통일, 냉전의 종식, 특히 동유럽 국가들에게 민족 자결을 허용한 것 등은 그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조국 러시아에서는 그의 정책들이 소련 및 그후 러시아의 약화를 초래했으며 소련의 붕괴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일부 비판자들은 그가 때로는 일방적으로 핵군비 축소를 추진함으로써 소련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약화시켰고, 나토의 동진을 저지하지 못함으로써 마침내 나토가 러시아 국경까지 이르게 되는 치명적 사태를 맞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1989년 6월 톈안먼시위를 무력으로 잔인하게 진압한 중국이 이후 비약적 경제성장을 이룩한 반면, 민주화와 시장경제를 동시에 이루려 했던 고르바초프의 실험이 비참한 실패로 끝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인 동시에 세계의 패권국가로서 미국이 항상 주장해온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대통령 퇴임 이후 고르바초프는 '사회경제 및 정치 연구를 위한 국제 비정부재단(고르바초프 재단)'을 설립해 국제 인도주의 사업을 주도해 왔다. 고르바초프재단에서 발행하는 책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소신을 표명했다.

"나는 인민에 대한 도덕과 책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왔다. 그것은 내 인생 최고의 원칙이다. 이제 우리들은 권력자들의 탐욕과 오만함에 종지부를 찍어야만 한다. 나는 적지 않은 실패를 겪었으나 나의 접근방식에 잘못이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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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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