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고을 광한루는 1419년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되어 왔을 때 ‘광통루’란 작은 누각을 지어 산수를 즐기던 곳입니다. 그후 세종 26년(1444)에 하동 부원군 정인지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 속의 '광한청허부'를 본따 '광한루'라 바꿔 부르게 되었습니다. 광한은 ‘달나라 궁전’을 뜻합니다. 춘향과 이몽룡도 바로 이곳에서 처음 만나 오작교를 거닐며 사랑을 맺게 되었습니다. <춘향전>의 사랑의 무대입니다.
또한 인월면 성산리에는 <박첨지설화>가, 아영면 성리에는 <춘보설화>가 전해집니다. 성산리는 흥부의 출생지, 성리는 흥부의 발복지(發福地)로 알려져, 모두 흥부마을이 됐습니다. <흥부전>의 탄생 배경입니다.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의 8월, 제88강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고전소설 <춘향전>과 <흥부전>의 산실이자 빼어난 남도 풍광을 보여주며 역사유적들도 즐비한, 전라북도 남원고을로 향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88강은 2022년 8월 28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출발합니다. 제88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남원IC-금지면(환봉서원)-수지면(몽심재/죽산박씨종가)-남원시(남원향교/만인의총/남원읍성/용성관/관왕묘/사직단/광한루원)-점심식사-운봉읍(운봉향교)-인월면(황산대첩비지/동편제탯자리)-아영면(흥부마을)-서울의 순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88강 답사지인 남원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명산 지리산 자락에 기대어
남원의 지형은 남동부의 지리산군, 서부의 평야, 그 사이의 분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리산군의 서부 주능선의 봉우리와 삼정산(1,156m)을 분수계로 하여 달궁계곡과 만수천이 깊은 계곡을 이루어 거의 일직선상으로 감입곡류하며 산내면에 이릅니다. 천황봉은 산동면과 보절면의 경계에 있으며, 덕유산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와 장수군 수분리에서 나뉘어 한줄기는 지리산군에, 다른 한줄기는 천황산에 이릅니다.
구릉지는 산지 주변과 남원평야와 운봉평야 주변에 주로 분포되어 있으며 평야는 요천 유역의 남원평야, 율천 유역의 보절평야, 운봉분지의 운봉평야, 아영·인월평야입니다.
남원의 물줄기는 백두대간 상의 섬진강과 낙동강의 분수계가 됩니다. 남원의 섬진강 수계는 섬진강과 요천, 오수천 그리고 34개의 지방하천, 낙동강 수계는 5개의 지방하천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섬진강 수계인 요천은 남원의 중앙을 북, 동에서 남, 서로 흐르며 가장 넓은 유역을 차지하며 오수천은 임실군 지사면과 남원시 덕과면의 경계를 기점으로 임실군 오수면에서 섬진강과 합류하는 순창군 적성면까지 흐릅니다. 대강면에서는 수홍천과 옥택천이 서쪽 산지를 횡으로 자르며 섬진강에 유입되고, 송대천이 남쪽으로 흘러 섬진강에 유입됩니다. 이후 섬진강은 구례를 지나 전남과 경남의 경계가 되어 남해로 유입됩니다.
낙동강 수계는 운봉읍, 아영면, 인월면 그리고 산내면으로 나뉘는데 운봉분지에는 낙동강의 제3지류인 남천이 흐릅니다. 남천은 황산과 덕두산 사이의 좁은 협곡을 통해 인월로 흘러갑니다. 이 남천은 덕두산 동쪽의 좁은 협곡을 통과하여 산내로 흐릅니다. 산내면을 지난 남천은 전북과 경남의 도계에서 다시 좁은 협곡을 통과하여 임천이 되며 임천은 남강, 남강은 낙동강이 됩니다.
남원은 동쪽은 경남 함양군 마천면과 접하며 서쪽은 전남 곡성군 옥과면과 접하면서 전북 순창군과의 분점이 됩니다. 남쪽은 전남 곡성읍과 접하며 북쪽은 장수군 번암면과 접합니다. 동쪽과 남쪽은 지리산군, 북쪽은 오수분지와 진안고원, 서쪽은 섬진강과 오수천에 의해 경계를 이룹니다. 또한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고, 섬진강의 물길을 통해 남해와 통하므로 예로부터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남원은 국가지정문화재 38점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춘향전>과 <흥부전>, <동편제>를 낳은 문화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가야와 백제를 이어주는 기문국의 왕릉이 있습니다.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은 가야 서부지역의 유력한 세력이었던 기문국의 왕과 지배층 묘역입니다. 고분군이 있는 아영분지는 신라에서 백제로 넘어가는 육로에 해당하고 대가야 등 가야 북부지방에서 서해안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는 5세기부터 6세기 후반까지 40여 기의 봉토분이 들어섰는데 왕릉으로 추정되는 대형분은 능선의 최정상에 군집해서 들어서고, 그 주변과 아래 능선에는 중소형 봉토분이 배치되어 있어 고분군 배치를 통해 계층적 신분질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분군은 백제와 가야 지역을 지리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연결해주는 가야 중·후기 아영분지에 자리잡은 기문국을 대표하는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원의 역사는 삼한시대 마한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남원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역에 속하였으며, 지리산을 경계로 진한과 변한의 국경 지역에 위치한 군사상의 요충지였습니다. 이와 관련해 마한이 달궁 지방에 별궁을 두고 정장군과 황장군을 파견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백제 16년(온조 34)에 고룡군이라 하였다가 196년(초고왕 31)에 대방군으로 개칭하였으나 평안도 지방에 한사군의 대방군이 설치되자 220년(구수왕 7)에 남대방군으로 바뀌었습니다. 660년(무열왕 7)에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백제가 멸망하자, 이 지방에 대방도독부를 두고 당나라 장수 유인궤를 검교대방주자사 겸 도독으로 삼았습니다. 685년(신문왕 5) 전국에 5소경을 설치할 때 그 중 하나인 남원경이 설치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 대방을 남원이라 고쳤습니다.
고려시대는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뒤 940년(태조 23) 남원부로 개칭하였고, 현종 때 지방제도 정비를 거쳐 임실, 순창 등 2개의 속군과 장계, 적성, 거령, 구고, 운봉, 장수, 구례 등 7개의 속현을 관할하는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명종 때에는 공주에서 망이가 난을 일으키자 남원, 완주 등 호남 일대에서 이에 호응했는데, 그 때 윤위는 남원지방의 반란군을 평정한 공으로 남원부백이 되었으며, 그가 남원윤씨의 시조입니다. 1310년(충선왕 2) 대방군으로 환원했다가 1360년(공민왕 9) 다시 남원부로 복구되었습니다. 1379년(우왕 5) 왜구가 경상도 지방을 노략한 뒤 함양을 거쳐 운봉의 인월리에 주둔하였는데 그 때 삼도순찰사이던 이성계는 이지란과 함께 운봉 황산에서 왜장 아지발도를 사살하는 등 황산대첩을 거두었습니다.
조선시대는 1410년(태종 10) 대복사 부근에 남원향교가 창건되었으며 1413년(태종 13) 남원도호부로 되어 1군 18현을 관할하였습니다. 1418년 황희가 세자 책봉에 이견이 있어 남원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때 광통루를 세웠으며, 1444년(세종 26) 전라도관찰사였던 정인지에 의해서 광한루로 개칭되었습니다. 세조 때 진관체제가 성립됨에 따라 남원에도 진관이 설치되었으며, 남원부사가 첨절제사를 겸임해 담양, 순창 등을 거느렸습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쳐들어오자 의병장 양대박은 운암에서, 조경남은 운봉의 팔량치에서 각각 왜군을 대파하였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중에 변사정은 교룡산성의 수성장이 되어 산성을 크게 수축하였습니다. 정유재란 때에는 남원성이 함락되었으며, 그 때 용성관, 향교, 만복사, 광한루 등이 모두 불탔습니다. 1654년(효종 5) 남원에 전라좌영을 설치했으며, 1739년(영조 15) 양찬규의 반란으로 인해 일신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50년 다시 남원부로 복구되었습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김개남은 남원성을 점령하고 교룡산성을 거점으로 활약하다가 여원치에서 관군에게 패했습니다. 1896년 지방관제 개편 때에 전남과 전북으로 개편되었는데, 그 때 전라남도의 관찰부를 남원에 두었으나 이듬해 전라북도에 편입됨에 따라 관찰부는 광주로 옮겨졌습니다. 1914년 남원도호부가 폐지되었고 운봉군을 통합해 남원군이 되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4월 3일 이석기의 영도 하에 많은 면민들이 만세 운동에 참가했으며, 5월까지 19차례의 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1931년 남원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듬해 전주에서 남원간의 철도가 개통되었습니다.
1956년 왕치면이 남원읍에 폐합되었으며, 1981년 남원읍이 시로 승격되었고 남원군과 분리되어 별도의 행정 구역을 이루었습니다. 1995년 도농 통합에 따라 남원군과 남원시가 통합되어 새로운 남원시가 되었으며, 같은 해 3월에 운봉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98년 동면이 인월면으로 개칭되었습니다.
호남과 영남이 통하는 요충지에 산성이 있습니다.
교룡산성은 험준한 교룡산(518m)을 에워싼 석성으로 둘레는 3.1km 가량 됩니다. 산 중턱에 성벽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으며, 동쪽에 계곡이 있어 그곳에 반월 출입문을 두었습니다. 성을 처음 쌓은 내력은 분명치 않으나, 그 터와 형식으로 보아 백제시대에 쌓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임진왜란 때 승병대장 처영이 고쳐 쌓았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하였습니다. 성 안에는 우물이 99개나 있었고 밀덕봉과 복덕봉 등 산세가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유사시 인근 주민이 대피하기 좋은 천혜의 요새지였습니다.
아막성은 아영고원 줄기에 자리한 산봉우리를 에워싼 석성으로 둘레는 633m 가량 됩니다. 이곳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 사이에 격렬한 영토 쟁탈전이 벌어진 곳으로, 신라에서는 모산이라고 불렀습니다. 성터는 대체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북쪽의 성벽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는데, 네모반듯하게 다듬은 돌을 가지런하게 쌓아 정교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북문 터 부근에는 직경 1.5m의 돌로 쌓은 둥근 우물터가 있으며 성 안에는 삼국시대의 기와조각, 백제시대의 토기조각 등이 쌓여 있습니다.
척문리산성은 남원 서북쪽의 요천강과 이 강으로 흘러드는 지류가 만나는 지점에 솟아있는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으며, 둘레는 567m 가량 됩니다. 성벽은 거의 허물어졌으며 성터는 뱃전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상류 쪽으로 산동 대평리산성에, 동쪽으로 운봉 장교리산성에 이어지며, 서쪽으로는 남원, 북으로는 임실군 오수면과 가깝기 때문에 백제시대의 주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보입니다. 성 안에는 우물터 한 곳이 있으며, 산봉우리에는 백제시대의 토기와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습니다.
비홍산성은 삼국시대에 비홍산에 축성된 포곡식 산성으로, 적당히 치석한 가공석을 이용하여 성벽의 내, 외면을 맞추고 그 안쪽에는 할석을 채웠습니다. 내탁법으로 쌓아올린 성벽 중 6m 정도의 높이가 남아 있는 곳도 있으며, 윗면의 폭은 약 4.7m 내외입니다. 성 안에는 망루터, 건물 유구 그리고 기와조각과 토기조각이 다량으로 출토되었습니다. 성벽의 축조 방식과 출토 유물 등을 고려해 볼 때, 남원에서 확인된 척문리산성, 교룡산성, 아막성 등 삼국시대 산성과 비교할 수 있는 자료로 판단됩니다. 이 산성과 관련되어 전해오는 이야기는 이씨 성을 가진 할머니가 고려 때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치마폭으로 돌을 가져다 쌓은 성이라서 ‘할미성’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합니다. 또한 군대 식량으로 쓰일 군량미를 창고에 모으고 합하여 둔 곳이라는 의미에서 합미성이 할미성으로 와전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읍치구역에는 읍성, 사직단, 관왕묘, 객사, 향교 등이 있습니다.
용성관지는 조선후기의 객사 터로 그 규모가 웅장하여 남원에서는 광한루, 관왕묘와 더불어 고대 건물의 삼걸로 불렀습니다. 용성관의 건립 시기는 691년(신문왕 11)인데, 용성관을 휼민관이라고도 하였습니다. 휼민관은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위험에 처하자 병마사 이복남이 이를 그대로 두면 태조의 전패가 왜적에게 욕을 당할 것을 염려하여 소각하였습니다. 그 후 1620년(광해군 12)에 남원부사 최여립이 휼민관을 재건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실되고 남쪽의 중문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 후 1680년(숙종 6) 남원부사 정동설이 재건에 착수하여 1690년(숙종 16)에 남원부사 정협 때 대청을 완성하여 건축물이 완공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전소되었습니다. 지금은 용성초등학교 본관 계단으로 사용하는 돌계단 1기와 용성관 기단 70여 미터만 남아 있습니다.
남원읍성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남원에 설치된 지방행정중심인 소경의 성곽이었습니다. 조선 초기에 중국식 읍성을 본 따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성을 고쳐 쌓았는데 규모는 3.4km 가량의 둘레에 높이 4m 정도였으며 사방에 문을 두었고 성 안에는 71개의 우물과 샘이 있었습니다. 정유재란 때 이곳에서 민관군이 합세하여 오만 육천여 왜군의 포위 공격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성은 함락되고 거의 만 명에 달하는 성안의 주민과 관군이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전투 중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고 민가 몇 채만 남았다 하니 당시의 참화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 남원성은 동학혁명과 전라선 철도개설 등으로 많이 허물어졌는데 최근에 일부를 복원하였습니다.
사직단은 토지신인 ‘사’와 곡식신인 ‘직’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입니다. 농경국가에서 토지와 곡식은 나라 살림의 근본이기에 사직은 곧 국가의 수호신을 뜻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1394년(태조 3) 한양에 사직단을 세우자 전국 각지의 행정중심지에도 사직단을 세웠습니다. 남원 사직단은 역시 그 무렵에 설치했다고 하는데, 해마다 정월이면 남원부사가 몸소 이곳에 나와 사직에 제사를 올리고 그 해의 풍년과 고장의 평안을 기원하였습니다.
남원 석돈은 남원성의 수호신을 섬기는 제단으로, 이곳에 우체국을 지으면서 일부 파괴되었던 것을 근래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습니다. 원래 석돈은 용성관의 뒷편에 거대한 돌무더기로 쌓여 있었습니다. 뒷날 시내에 여러 관공서를 지으면서 석돈의 돌을 빼내어 사용하고 그 흙을 골라 평지로 만들자, 남원시가 쇠퇴하고 인재가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현재의 석돈은 받침부에 80×40cm 크기의 돌을, 중간부와 상부에 30×20cm 크기의 자연석을 쌓아서 네모난 단을 만들었습니다.
남원향교는 조선 태종 때 성안 서쪽 골짜기에 처음 세웠다가 얼마 후 요천 건너편으로 옮겼는데, 요천이 범람할 때마다 학생들이 통학하기 어려워 1443년(세종 25)에 지금의 자리로 다시 이사했다고 전합니다. 그 후 정유재란 때 향교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으나, 1599년(선조 32)에 지방의 유지 유인옥이 대성전을 다시 지었습니다.
운봉향교는 태종 때 처음 세워 선조 때 가산리로 옮겼으며 그 후 1640년(인조 18)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영조 때 건물을 크게 늘려 지었습니다.
관왕묘는 관운장을 모신 사당입니다. 1599년(선조 3)에 남원부 동문 밖에다 처음 세웠던 것을 숙종 때 성안으로 옮겼으며 영조 때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습니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 지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대의 영향을 받아 관운장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군사 요충지로 전적 유산이 남아 있습니다.
황산대첩비지는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입니다. 금강 어귀에서 퇴로가 막힌 왜구는 이곳에 주둔하면서 장차 바다로 달아나려 하였는데 고려군은 이성계를 최고지휘관으로 삼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아지발도의 투구를 떨어트리고 뒤이어 이두란이 쏜 화살이 그의 머리를 맞혔습니다. 이에 지휘자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왜구를 완전히 섬멸하였습니다. 선조 때 왕명을 받아 김귀영의 글, 송인의 글씨로 대첩비를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부수었는데 광복 후 옛 비석을 복구하였다가 1972년 신석호가 한글로 글을 지어 새롭게 세웠습니다.
만인의총은 정유재란 때 왜적을 맞아 남원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민·관·군의 합장묘입니다. 남원은 호남 곡창의 관문이자 서울로 통하는 길목으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호남 점령의 실패가 임진왜란의 패인이라 판단한 왜적은 11만 대군으로 1597년 전라도를 침공하기 위하여 우군은 전주성을, 좌군 5만6천은 남원성을 공격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사수하기 위하여 전라병마사 이복남 장군이 이끄는 1천여의 군사와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천 병사로 하여금 남원성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적은 8월 12일 남원에 당도하여 성을 겹겹이 포위하였으며, 13일부터 16일 밤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성민 6천여 명을 포함한 1만여 의사들은 혈전 분투하다가 장렬하게 모두 순절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피난에서 돌아온 성민들이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1612년(광해군 4) 사당을 건립하여 전라병마사 이복남 등 7충신을 모셨으며 1653(효종 4)에는 충렬사액이 있었고, 1675년(숙종 원년)에 남원역 뒤 동충동으로 이건한 뒤 1836년(헌종 2) 사헌부지평 오흥업을 추배하니 8충신이 되었습니다. 1871년(고종8년) 사우 훼철령에 의거 사당이 철폐되어 제단을 설치하고 춘추로 향사하여 왔으나 일제가 제단을 파괴, 재산을 압수하고 제사마저 금지하였습니다. 그러다 광복과 더불어 다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모셔오다가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사대부의 별서와 정자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광한루원은 견우와 직녀가 칠월칠석날 은하수 오작교를 건너 만나는 사연을 담은 정원입니다. 전라도 관찰사로 있던 정철이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들여 은하수를 뜻하는 연못을 파고 반월형 교각 네 개를 이어 오작교를 세웠습니다. 연못 안에는 도교에선 신선이 사는 곳으로 일컫는 세 개의 섬을 만들었습니다. 봉래(蓬萊), 방장(方丈) 두 섬에는 각각 백일홍과 대나무를 심고, 영주(瀛洲)섬에는 작은 정자를 세웠습니다. <춘향전>이 이곳을 배경으로 삼은 이래로 정원 안에 춘향과 관련된 여러 유적이 들어섰습니다.
광한루는 조선 세종 때 명정승인 황희가 처음 세워 1626년(인조 4)에 다시 지은 것으로, 원래 이름은 광통루였으나 후에 정인지가 그 수려한 경치에 감탄해 전설상의 달나라 궁궐 <광한청허부>와 닮았다고 하여 광한루라 고쳐 불렀습니다. 건물 북쪽 중앙에 층계가 붙어있는데 이것은 점점 기우는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 고종 때 만든 것입니다. 건물 앞에 연못을 만들고 그 위를 가로질러 오작교라는 반월형 교각의 다리를 놓았습니다.
몽심재는 지리산 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시대 후기의 집으로 박연당(1753∼1830)이 세웠다고 합니다. 집은 트인 ㅁ자형으로 경사진 곳에 사랑채와 중문채의 높이를 서로 다르게 하여 배치하였습니다. 솟을대문이 우뚝 선 대문채는 서쪽 칸에 마루를 깔았고, 동쪽에는 방 2칸과 마루 1칸이 있습니다. 대문간채의 동쪽에는 연당이 있고, 북쪽에는 4칸의 행랑채가 있습니다.
행랑채의 북쪽, 높이 쌓은 대 위에 사랑채가 있는데 서쪽부터 4칸은 방이고 다섯째 칸은 마루방이며, 둘째 칸에는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셋째 칸에는 ‘몽심재’라는 현판이 걸려있으며, 기둥은 팔각형으로 다듬었습니다. 셋째와 넷째 칸에서 기둥 밖으로 쪽마루를 연장시킨 것이 특이합니다. 사랑채의 동쪽에는 3칸의 중문채가 있는데 가운데 칸에 문이 달려있고, 문 앞에 돌층계가 설치되어 있다.
안채는 사랑채의 북쪽에 있으며 방과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2칸의 부엌이 있는데 1칸은 방이고 방의 서쪽에는 1칸의 툇마루가 있습니다. 이 부분이 서쪽 날개에 해당되고 동쪽 날개에는 2칸의 대청이 있으며, 그 옆으로 마루를 깐 방이 있고, 그 아래 방이 1칸 있습니다. 맨 밑에는 아궁이가 있는 아랫층과 다락처럼 구성한 2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대청 앞쪽에는 문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을 통해서 이 지역에도 대청 앞쪽을 폐쇄하는 유형이 분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되는 건물입니다.
죽산박씨 종가는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데 박문수(朴門壽)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집입니다. 박문수는 고려 말 충신으로 정몽주, 이색과 더불어 삼로(三老)로 불리었으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반대하여 두문동에 은둔하였는데 조선이 건국되자 그는 가족들을 이곳 호곡리로 내려 보냈습니다. 그 후 그의 후손들은 줄곧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되었으며, 안채 동북쪽에는 박문수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고 ㄷ자형의 안채는 1841년(현종 7)에 지었으며, 사랑채는 18세기 말에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관서당 남성재는 광한루 뒷편에 자리하고 있는데 1875년에 세운 것으로 관리들의 자제들이 수학하던 학당입니다. 원래 이름은 <성남재>였으나, 광복 이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남원에는 예전에 남성재, 성동재, 운봉관서당 등 세 개의 관서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성재만이 남아 있습니다. 남원에 살고 있는 강화 노씨와 영천 이씨, 그리고 옥천 조씨 등 세 집안에서 장학회를 조직하고 학생들을 후원하여 남성재가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사계정사는 남양 방씨의 선조 방응현이 조선 중기에 처음 세운 정자입니다. 정자 옆에 흐르는 냇물은 모래내 즉 사계(沙溪)라고 불립니다. 임진왜란 때 건물이 불탄 후 후손들이 여러 번 다시 지었습니다. 방응현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닦으면서 일생을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이항, 노수신, 조식, 노진 등 유명인사와 가깝게 지냈으며, 정자 안에는 그들의 글이 여러 편 걸려있습니다. 건물 가운데 한 칸의 방을 두고 사방에 마루를 둔 구조로서, 일반적인 호남지방 정자의 양식을 따랐습니다.
금남재는 조선 예종 때 오응이 지은 별장으로, 그는 나라에서 금남군이란 칭호를 받았습니다. 오응은 세조 때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서 예종 때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그의 할아버지 오상덕은 황희의 자형이자 고려말 충신으로,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반대하여 두문동에 은둔한 인물입니다. 오상덕의 묘소가 이곳에 있기에, 오응이 여기에 별장을 짓고서 말년을 보냈습니다. 건물은 평면 모양이 ‘ㄷ’자형이고 네모난 기둥을 썼습니다.
퇴수정은 조선 후기에 벼슬을 지낸 박치기가 1870년에 세운 정자입니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이 정자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정자 이름을 퇴수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자 앞으로는 시냇물이 흐르고 뒤에는 암석이 높게 솟아 있는 곳에 사각형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원형기둥을 세워 이층 건물을 지었습니다. 건물 안에는 방 한 칸을 들였습니다. 정자 왼쪽에 있는 관선재라는 사당은 후손들이 세운 것입이다.
최락당은 조선 중종 때 김익기가 세우고 그의 아들 유가 고쳤습니다. 원래 이름은 <야은당> 혹은 <쌍백당>이었는데, 익기의 증손 선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최락당으로 고쳤습니다. 천장에 있는 <최락당>이란 글씨도 선이 썼으며, 앞의 은행나무도 그가 심은 것입니다. 이곳은 또한 이 지역 유림들의 모임처로 이용되었는데, 유림들의 모임인 문회계의 전통은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곳을 방문했던 여러 시인 묵객들이 남긴 글이 현판으로 남아 있습니다.
귀화한 중국인 천만리 장군을 배향한 서원도 있습니다.
환봉서원은 천만리 장군과 그의 아들 천상과 천희를 배향한 서원입니다. 한반도의 영양 천씨 중시조가 되는 ‘천만리’ 장군은 14세기 중원 지역에서 주원장과 함께 명나라를 세운 장수 천암의 손자가 됩니다. 천씨는 본래 영양 천씨 단본인데 영양은 중국 노나라의 지명으로, 천암이 시조로 후손들은 대대로 영양에 살았습니다. 천만리는 일찍이 중국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명나라 조정의 무신으로 있다가 임진왜란 때 영량사(지금의 군수사령관) 및 총독장으로 그의 아들 천상, 천희와 함께 참전하여 평양 및 곽산 등지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정유재란 때에는 양호, 마귀 등과 함께 세 부자가 다시 조선에 나와 직산. 울산 등 여러 곳에서 큰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명군이 철수할 때 그대로 머물러 조선에 귀화하니 조정에서 그를 화산군에 봉하고 훗날 충장공이라 시호를 내렸습니다. 숙종 때 조정에서 그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창덕궁 후원에 대보단을 설치하여 종향하였고 순조 때 고성의 호암서원, 헌종 때 청도의 황강서원, 고종 때는 문경의 노양각, 진주의 만첨각, 안동의 동산서원에 각각 봉안하였으며 1896년(고종 33)에는 이곳 금지면에 환봉사를 세웠습니다.
창주서원은 조선 중기의 관리 노진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으로, 선조 때 남원 금지면에 세웠다가, 195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1600년(선조 33)에 왕이 이름을 지어주고 재정을 후원해 주는 사액서원이 되었는데, 처음 서원의 이름은 ‘고룡서원’이었습니다. 노진은 충청도관찰사, 전주부윤, 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많은 유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경내에는 사당인 명덕사와 강당, 그리고 고직사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강당은 최근에 지은 건물입니다.
유천서원은 방사량을 비롯하여 방귀온, 안탁, 방응현, 안창국 등 이 지방 유림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온 다섯 분을 모신 곳입니다. 1830년(순조 30)에 세웠으며 ‘오현사’라고도 부릅니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모두 헐렸으며 지금은 서원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비석과 몇몇 건물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비석은 후손들이 조상의 덕을 기리기 위해 최근에 세웠습니다.
풍계서원은 황희, 오상덕, 황위 등 청렴과 절개, 학문으로 유명한 분들을 모신 서원입니다. 청백리로 유명한 황희는 개경 출신이지만, 남원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그의 선조가 대대로 남원에 살았을 뿐 아니라, 황희 역시 조선 태종 때 세자 책봉문제로 인해 남원으로 유배를 왔습니다. 이곳 남원에서 그는 광통루를 짓고 은거하였습니다. 황희의 자형인 오상덕은 고려말 충신으로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반대하여 두문동에 은둔하였습니다. 황위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순국한 황진의 후예로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지냈으며, 시문에 능하였고 후학들의 교육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습니다.
용장서원은 고려시대의 충신 양능양과 양주운, 고려 말기의 성리학자 김구용, 그리고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의병장 양대복 등을 배향한 서원입니다. 1402년(태종 2)에 처음 세웠으나, 1863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렸다가 그 후 다시 세웠습니다.
십노사는 조선 초기의 관리 이윤철, 안정, 김박, 한승유, 설산옥, 설존의, 오유경, 신말주, 조윤옥, 장조평 등 모두 열 분을 모신 사당입니다. 이들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충신들입니다. 1862년(철종 13)에 후손들이 세웠으며, 10분의 충절을 모셨기에 <십노사>라 이름 하였습니다.
고려시대 사찰인 만복사지와 유물들이 전해져 옵니다.
만복사지는 고려 문종 때 처음 세운 만복사가 자리했던 곳입니다. 처음 지었을 때 경내에는 동으로 만든 거대한 불상을 모신 이층법당과 오층목탑이 있었다고 합니다. 근래의 발굴조사에 의하면, 가운데에 목탑을 세우고 동, 서, 북쪽에 각각 법당을 배치한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였습니다. 이 사찰은 김시습의 소설 <금오신화> 에 실린 <만복사저포기>의 무대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중기까지 번창하던 만복사는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습니다. 오랜 세월을 버터 온 석탑과 돌 유물 몇 개가 절터를 지키고 있어 일면이나마 웅장했던 옛 사찰의 모습을 짐작케 합니다. 경내에는 오층석탑(보물 제30호), 석좌(보물 제31호), 당간지주(보물 제32호), 석불입상(보물 제43호)등이 남아 있습니다.
석조여래입상은 고려 초기 만복사를 지으면서 함께 만든 것으로 바위에 부처의 서 있는 모습을 조각한 작품입니다. 부처 바깥쪽에는 몸에서 발하는 빛을 묘사한 광배를 조각했는데 위쪽 일부가 없어졌습니다. 받침으로는 팔각형의 납작한 돌을 놓고 그 위에 연꽃으로 장식한 둥근 돌을 얹었습니다. 머리의 윤곽은 뚜렷하고 고수머리는 간략하게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에 미소를 머금어 마치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어깨로부터 부드럽게 흘러내린 옷자락과 원만한 굴곡을 이루는 몸매가 어우러져 자연스럽고 우아한 느낌을 자아내며 광배 뒷면에는 부처의 앉아 있는 모습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오층석탑은 고려 초기에 세운 것으로, 높은 받침부 위에 5층의 몸체와 지붕을 얹었습니다. 윗부분이 떨어져 나갔으며 1968년 탑을 수리하던 중 1층 몸체에서 사리 보관함을 발견하였습니다. 층마다 몸체와 지붕은 각각 별개의 돌로 만들었는데, 첫 번째 층이 유달리 높습니다. 각층 몸체의 귀퉁이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고, 지붕마다 귀퉁이 아래를 약간 치켜 올렸습니다.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으로 단순한 구조이지만, 2층부터 지붕과 몸체 사이에 넓은 돌 판을 끼워 넣은 점은 특이합니다.
당간지주는 당(幢)을 바치는 버팀기둥입니다. 당은 절에서 행사를 치를 때 문 앞에 내걸던 일종의 깃발로, 거기에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커다란 돌을 아무런 꾸밈없이 거칠게 다듬어 육중하면서도 소박한 멋을 풍깁니다.
국경의 요충지답게 마애불상이 많습니다.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은 절벽을 이루는 바위에 여러 부처의 모습을 돋을새김 한 열두 불상을 말합니다. 가장 큰 불상은 높이가 4m로 조각 솜씨도 뛰어나 으뜸으로 모셔진 것이라 여겨지며 타원형의 얼굴, 다소 과장된 큼직한 코, 간략하게 처리한 옷주름, 듬직한 체구 등에서 고려시대 유행하던 불상의 특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불상 아래에 ‘명월지불(明月智佛)’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어 진리의 화신인 비로자나불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1∼2m 크기의 작은 불상들 역시 비슷한 양식으로 모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신계리 마애여래좌상은 자연 암석의 한 면을 다듬어 거기에 부처의 앉은 모습을 돋을새김한 마애불입니다. 도선스님이 하룻밤만에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몸 둘레에 서린 빛을 줄에 꿴 구슬로 둥글게 감싸서 표현한 것은 희귀한 예이며 왼쪽 어깨에 걸친 옷은 단순한 선으로 간략하게 처리하였습니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이목구비를 비교적 생동감 있게 조각하였으며 넓은 어깨, 불룩한 가슴, 통통한 팔·다리에도 입체감이 실려 있어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불상은 뚜렷한 입체감과 생동감을 보여주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불입니다.
여원치 마애불은 여원치 정상 부근 바위에 새긴 불상으로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입니다. 불상 옆에는 운봉현감 박귀진이 지은 글을 새겼습니다. 가슴 아래 부분이 아직 땅 속에 묻혀 있기는 하지만 머리 부분을 제외하고는 보존 상태가 비교적 좋은 편이며, 조각수법이 평면적이어서 역동감은 없지만 넓은 어깨와 큰귀, 또렷한 코는 시원한 느낌을 줍니다. 예전에는 불상의 보호각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 태조 이성계의 꿈에 한 노파가 나타나 이성계가 황산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이 불상은 그 노파에게 감사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노적봉 마애여래좌상은 거대한 바위에 새긴 마애불로 미래에 태어날 미륵부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활짝 핀 연꽃을 두 손으로 받들고 명상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은 차분한 느낌을 줍니다. 옷은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지만, 기다란 눈, 도톰한 코, 작은 입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제적으로 새김이 얕아 조각이라기보다는 그림과 같은 평면적인 느낌을 줍니다. 불상 앞에는 예전에는 ‘호성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데, 호성사는 어느 도승이 호랑이에게 물려간 한 아이를 구해주고 그 아이의 부모로부터 시주를 받아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견두산 마애여래입상은 저부조의 선각에 가까운 조각기법과 장대한 신체표현, 수인 형태, 비만한 듯한 얼굴에 꽉 다문 입 등의 얼굴 표정이 여원치 마애불상 등 남원 지역 마애불과 친연성을 보여주며 제작연대는 고려시대 전반에서 중반 경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이 지역의 마애불의 한 형식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동편제 소리의 발상지이기도 합니다.
동편제는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편 지역, 즉, 운봉, 순창, 구례, 흥덕 지방 등이며, 웅건하고 청담하며 호령조가 많은 것이 특징입니다. 소리의 들거나 뉘는 것도 제에 따라 다른데, 동편제에서는 꼬리를 드는 경우가 많고 동편제는 서편제보다 음을 높게 들어내는 발성이 많아서 흔히 ‘들고 나가는 소리’라 합니다. 또한 동편제는 서편제에 비해 우조나 평조를 많이 쓰며, 비교적 빠른 장단을 사용합니다.
동편제 소리는 송흥록의 법제를 표준으로 하여 전승되어 왔으며 송흥록의 소리제는 그의 아우 송광록과 송흥록의 수제자인 박만순에게 전승되었습니다. 다시 송광록의 소리제는 그의 아들 송우룡에게 이어졌고, 송우룡의 소리제는 송만갑, 전도성, 유성준, 이선유, 송업봉에게 전승되었습니다.
송만갑은 송씨 가문의 소리제를 이어 받았으나 정창업의 소리제를 듣고 자신의 소리를 바꾸어 불렀기 때문에 송우룡에 의해 가문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송만갑의 소리제는 그의 제자 장판개, 박중근, 박봉래, 김정문 등 수많은 제자에게 전승되었으며 박록주, 김초향, 김연수, 박초월, 김소희도 한때 송만갑에게 소리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흥부마을 이야기
<흥부전>에 나오는 흥부는 이야기 속의 허구적 인물이 아니라 흥부의 모델이 됐던 사람이 실제로 있었으며 그 실존인물의 구체적 삶을 바탕으로 여기에 갖가지 얘기들이 보태져 작품화됐다는 것입니다.
<흥부전>이 남원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문헌을 통해 확인됩니다. 18세기 중반부터 판소리로 불리기 시작한 뒤 19세기 중반 소설로 정리 된 <흥부전>은 ‘판소리계 소설’로서 판소리는 광대들의 작품입니다. 광대들은 공연을 위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흥부의 모델을 직접 만났거나 또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작품화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월면(옛 동면) 성산리의 <박첨지설화>
“옛날 박첨지라는 부자가 살았다. 그는 원래 가난해 품팔이를 하며 어렵게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나그네가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다. 가난한 박첨지는 식량을 꾸어 나그네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다음날 나그네는 ”수수와 박을 많이 심으면 부자가 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박첨지는 부지런히 수수와 박을 심었다. 수수는 양식으로 쓰고 박은 바가지로 만들어 내다 팔면서 박첨지의 생활이 피기 시작했고 점점 논밭을 늘리고 가축도 길러 큰 부자가 됐다. 성품이 훌륭한 박첨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적선을 아끼지 않았고 마을을 지나는 나그네들에게도 친절히 대했다. 그러나 몇 해 뒤 마을에 괴질이 돌아 박첨지네 가족이 모두 죽었다. 세월이 흘러 마을을 지나던 나그네들이 이 소식을 듣고 돈을 모아 마을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면서 박첨지 가족의 묘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나그네들의 정성에 감동한 마을사람들도 제사 비용을 댈 제답을 마련해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삼월 삼짓날이면 박첨지 가족묘에서 제사를 지냈다.”
성산리 주민들은 요즘도 삼월삼짇날이 되면 마을 건너편 야산에 있는 박첨지 가족묘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결국 박첨지가 흥부의 모델이고 성산리는 흥부마을이며 놀부는 <흥부전>이 작품화되면서 극적 재미를 위해 곁들여진 인물이라는 게 동면 주민들의 주장입니다.
이에 아영면의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선 복덕촌 문제와 관련해 아영면 주민들은 복덕촌은 인월면 성산리가 아니라 성산리에서 약 7km 떨어진 아영면 성리라는 주장을 제기했습니다.
아영면 성리의 <춘보설화>
“옛날 박춘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하도 가난했다. 춘보가 어느 날 허기져 마을 고개에서 쓰러졌다. 이때 마을사람이 춘보를 업어다 흰죽을 먹여 구완해 주었다. 춘보는 그 뒤 도승이 잡아준 집터로 옮겨 큰 부자가 되었다. 부자가 된 춘보는 전에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게 보답으로 논 아홉 마지기를 사주고 이웃들에게 선덕을 베풀었다. 마을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매년 정월 초삼일이 되면 춘보를 기리는 망제를 지내왔다.”
성리 주민들은 한동안 중단됐던 망제를 지난 1992년 부활시켰습니다.
이처럼 인월면과 아영면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자 남원시의 의뢰로 경희대 민속학연구소가 1992년 7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흥부전> 발상지 고증작업을 벌였습니다. 민속학연구소는 이 기간 동안 문헌조사와 현지조사를 거쳐 아영면의 손을 들어주었다.
“박첨지는 놀부 같은 인물이고 춘보가 흥부 같은 인물로 두 사람은 형제다. 욕심 많은 형 박첨지는 춘보를 성산리 고향 집에서 쫓아냈고 춘보는 유랑 끝에 성리의 복덕촌에 정착한다. 춘보는 그 뒤 다시 성리의 고둔 터로 이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자가 되었으며 이웃 주민들에게 선덕을 많이 베풀었다. 반면 욕심 많은 박첨지는 괴질로 죽은 게 아니고 민란이 일어나 가족 전체가 몰살당한 것이다. 형의 참변 소식을 전해들은 춘보가 성리로 찾아와 형의 장례를 치러주고 마을사람들에게 돈을 주며 해마다 제사를 지내줄 것을 부탁했다.”
박첨지를 흥부의 원형으로 생각하고 흥부마을에 산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온 인월면 주민들이 민속학연구소의 조사 결과를 받아들일 리 없습니다. 이에 따라 남원시는 지난 1995년 양시론을 내놓았는데 아예 놀부를 배제한 채 성산리는 흥부의 출생지, 성리는 흥부의 발복지(發福地)로 정했습니다. 둘 다 흥부마을이 된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카페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고을학교 기사(8월)를 확인 바랍니다.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자는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최종 백신접종을 완료하시고, 항상 마스크를 착용하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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