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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탑의 살인>, 본격 미스터리에 바치는 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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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탑의 살인>, 본격 미스터리에 바치는 경배

[프레시안 books] <유리탑의 살인>

흰 눈이 소복이 쌓이는 한 겨울 설원에 홀로 우뚝 솟은 유리탑. 저명한 의학자이자 못 말리는 미스터리 애호가가 '명'탐정과 형사, 미스터리 잡지 편집자, 영능력자, 미스터리 작가 등을 불러 모은다. 세상을 놀라게 할 깜짝 발표를 선언한 그는 식순 직전 주검으로 발견된다.

이어 본격 미스터리의 정석적인 플롯이 펼쳐진다. 유리탑은 폭설로 인해 고립된다. 연쇄 살인이 일어난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모두 밀실이었음이 확인된다. 이제 남은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계속될 참극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사건을 추리하기 시작한다.

<유리탑의 살인>(치넨 미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리드비)은 지난해 일본을 뒤흔든 본격 미스터리 소설이다. 현직 의사인 작가가 주로 쓰던 의학 미스터리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본격 미스터리를 다뤘다'고 해서 더 화제가 됐다. 작가는 데뷔 10년을 기념해 본격 미스터리의 팬으로서 쓰고 싶었던 작품을 썼다고 밝혔다.

세계적으로 큰 시장인 일본 미스터리계는 영미권의 그것과 조금 다른 흐름을 보여준다. 아직 본격 미스터리가 시장에서 주류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미스터리의 역사를 논할 때 항상 등장하는 이름들이 있다. 미스터리의 시조격인 에드거 앨런 포를 위시해 코난 도일, 애거서 크리스티, S. S. 밴 다인 등이 역사에 남을 명탐정과 '명범인'들을 기상천외한 트릭으로 세상에 소개했다. 이 시기를 미스터리의 황금기라고 흔히들 말한다.

이후 미스터리 작풍은 192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한 하드보일드를 지나 오늘날 영미권에서는 주로 스릴러의 하부 갈래가 유행하는 흐름으로 전개되고 있다. 최근에는 여성주의 경향이 스릴러와 맞물리며 도메스틱 스릴러가 장기간 주류적 흐름을 띈다.

일본도 이 같은 흐름을 이어갈 '뻔했다.' 일찌감치 거장 에도가와 란포(에드거 앨런 포를 오마주한 필명)가 탐정소설 시대를 연 후 (한국에서는 소년탐정 김전일의 할아버지로 알려진 긴다이치 코스케가 명탐정으로 활약하는) 요코미조 세이시 등의 작가가 그 뒤를 따랐다.

1950년대 들어 일본에서는 이른바 '사회파 추리'가 붐을 이루기 시작한다. 마쓰모토 세이초, 모리무라 세이치 등의 거장은 전후 급변하는 일본 사회의 어둠을 미스터리에 접목했다. 이 흐름은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쳐 오늘날 일본 미스터리계를 대표하는 이름의 하나인 미야베 미유키에게까지 이어졌다.

이 흐름에 반기를 든 작풍이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에서 시작됐다. 이어 아야츠지 유키토가 1987년 <십각관의 살인>을 필두로 '관 시리즈'를 연이어 내보였고 동시대에 1960년대생들인 우타노 쇼고, 노리즈키 린타로, 아비코 다케마루, 아리스가와 아리스, 오리하라 이치 등이 연달아 미스터리 황금기의 '본격' 정신을 내세운 흐름을 형성했다. 오늘날 신본격의 거장들로 불리는 이들이 젊은 시절 동시에 폭발하듯 내보인 작품들이 오직 범인찾기와 트릭에 집중한 황금기 미스터리를 재현해 일본 장르소설계 주류를 형성했다.

이제 일본의 신본격-곧 본격 추리 경향은 아시아 전역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홍콩과 타이완 등에서 리보칭(李柏靑), 찬호께이(陳浩基) 등 '시마다 소지의 아이들'이라 할 만한 젊은 작가군이 최근 들어 뛰어난 작품을 연이어 내보이고 있고, 중국에서는 사회파 미스터리 흐름이 무시 못할 수준으로 형성되고 있다.

미스터리 팬이라면 익숙한 설명이겠으나-사회파 소설이 '와이더닛(whydunit)', 즉 미스터리의 원인을 조명하는 데 집중하는 반면, 본격 추리물은 전통적인 후더닛(whodunit)과 하우더닛(howdunit), 즉 사건의 범인 찾기와 트릭 풀이에 집중한다. 따라서 전통적인 문학소설 독자에게 이들 소설은 경멸의 대상이 되기 쉽다.

특히나 최근 일본 본격 미스터리는 특수설정 등을 접목하거나 보다 만화적인 작법에 집중하는 데, 따라서 셜록 홈스 이후로는 본격 미스터리물을 접해보지 않은 독자라면 당황하기 십상이다. 예를 들어 이마무라 마사히로는 <시인장의 살인>과 <마안갑의 살인> 등에서 좀비물과 생체실험 등을 본격 트릭과 결합했고, 이전 세대인 니시자와 야스히코는 <인격전이의 살인>, <일곱 번 죽은 남자> 등에서 만화적인 허무맹랑한 상황을 상정한 후 이를 본격 추리로 풀어내는 재기를 선보였다.

<유리탑의 살인>은 앞서 언급된 이 모든 방대한 미스터리의 세계에 바치는 일종의 경배다. 미스터리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팬으로 설정된 이 소설의 '명탐정'은 문제 풀이에 집중하다가도 틈만 나면 미스터리사에 관한 경의를 표하는 길로 새버리는 못 말리는 미스터리 마니아다. 아예 소설은 본문에서 이 작품이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에 바치는 헌사임을 직접 표현하기도 한다.

경의의 작품을 잘못 만들면 뻔한 스토리의 뻔하고 재미없는 이야기가 되기 십상이다. 책은 이를 일부 변칙적인 흐름으로 돌파하려는 기세를 보인다. 사건의 범인이 소설 초반부터 등장하는 데 이어, 아예 사건풀이의 주역으로 가담한다. 범인이 이미 등장한 마당에 사건풀이가 시작되는 셈이다. 이때부터 책은 종전의 미스터리와 똑같은 궤를 밟으면서 다른 결론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후반부, 모든 황금시대 미스터리가 그러하듯, 작가는 엘러리 퀸처럼 독자에게 정면 승부수를 던지며 사건을 풀어보라 명한다. 그리고 밝혀지는 결말. 그런데 아직 페이지가 한참 남았다? 이때부터 소설은 두 번째 파도를 타고 질풍처럼 마지막을 향해 달려간다. 책을 덮은 독자에게 뿌듯한 성취감을 안겨주려는 듯. 단언컨대 <유리탑의 살인>은 근래 나온 본격 미스터리물 중에서도 최고 수준에 이른 작품이다.

본격 미스터리 장르는 일본식 진화를 거듭하며 기존 문학팬은 다가가기 힘든 세계로 점차 나아가고 있다. 특수설정이 유행을 타는 데 이어 이제는 라노벨과 결합한 장르가 나오는 지경이다. 이는 한정된 아이디어로 승부해야 하는 이 장르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사람의 아이디어는 한정됐는데 독자를 계속해서 새로운 발상으로 속이고 현혹시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장르가 가진 힘은 <유리탑의 살인>이 바치는 경의에서 보듯 여전하다. 지금도 세계의 많은 청춘이 미스터리 동호회 등을 통해 '작가와 정면승부'를 즐기듯, 이 장르가 가진 풀이의 재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십각관의 살인> 첫머리에서 호기롭게 밝혔듯, 본래 이것이야 말로 미스터리의 재미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추리소설이란 단지 지적(知的)인 놀이의 하나일 뿐이야. 소설이라는 형식을 사용한 독자 대 명탐정, 독자 대 작가의 자극적인 논리 게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 그러므로 한때 일본을 풍미했던 '사회파'식의 리얼리즘은 이젠 고리타분해. 원룸 아파트에서 아가씨가 살해된다, 형사는 발이 닳도록 용의자를 추적한다, 드디어 형사는 아가씨의 회사 상사를 체포한다, 이런 이야기는 좀 그만두었으면 좋겠어. 뇌물과 정계의 내막과 현대사회의 왜곡이 낳은 비극 따위는 이제 보기도 싫어. 시대착오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역시 미스터리에 걸맞은 것은 명탐정, 대저택, 괴이한 사람들, 피비린내 나는 참극, 불가능 범죄의 실현, 깜짝 놀랄 트릭……, 이런 가공의 이야기가 좋아. 요컨대 그 세계 속에서 즐길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거지. 단, 지적으로 말씀이야." <십각관의 살인> 일부

▲<유리탑의 살인>(치넨 미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리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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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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