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8월 기행은 한양의 중앙을 관통하는 물줄기인 청계천의 발원지와 물길의 합류지점들,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들에 얽힌 사연을 비롯, 청계천 주변에 기대어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갔던 도성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원래 서울학교 개강일인 8월 둘째 일요일인 14일이 연휴가 겹치는 휴가철이라 한 주 늦춰서 셋째 일요일인 8월 21일에 진행함을 알려드립니다.
서울학교 제82강(제5기 제4강)은 2022년 8월 21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8시 50분까지 서울 청운동 248 자하문고개(윤동주문학관) 버스정류장의 최규식경무관동상 앞에서 모입니다.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하문고개버스정류장 최규식경무관동상 앞-백운동천발원지-대은암천발원지-청풍계천발원지-옥류동천발원지(수성동계곡)-백운동천과 옥류동천 합류지점-대은암천과 경복궁금천의 합류지점-점심식사-대은암천과 삼청동천 합류지점-백운동천과 삼청동천의 청계천 합류지점-모전교-광통교-장통교-수표교-오간수문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교통 안내>
*자하문고개를 경유하는 시내버스는 서울 도심 기준으로 1020, 7022, 7212번입니다.
1020번은 KT광화문지사(세종문화회관 건너편), 경복궁역(3호선 3번출구)을 경유하고,
7022번은 서울역환승센터, 조계사, 경복궁역을 경유하며,
7212번은 종로3가, 종로1가, KT광화문지사, 경복궁역을 경유하여 자하문고개로 갑니다.
*경복궁역에서 자하문고개까지는 5정류장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청계천 이야기>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청계천의 원래 이름은 ‘개천(開川)’
청계천은 경복궁 서북쪽의 백운동에서 발원한 청풍계천(淸風溪川)을 본류로 하여, 도성 안의 백악, 인왕산, 목멱산, 낙산 등의 여러 물줄기를 모아서 한양도성의 중심부를 관류하여 오간수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나간 후 도성 밖 물줄기인 성북천과 정릉천을 받아 안고 살곶이다리 앞에서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입니다.
도성 안에서 청계천과 합류하는 큰 물줄기는 인왕산에서 발원한 옥류동천, 백악의 작은 샘에서 발원한 백운동천, 대은암에서 발원한 대은암천과 백악의 촛대바위에서 발원한 삼청동천, 목멱산에서 발원한 청학동천, 응봉에서 발원한 쌍계동천, 응봉 아래 흥덕사 터에서 발원한 흥덕동천입니다.
청계천이란 명칭은 근래에 붙여진 이름이며 본래의 명칭은 아닙니다. 원래는 도성 안에 흐르는 하천을 지칭하여 '천거(川渠)'라고만 불렀는데, 1412년(태종 12) 하천의 바닥을 파내고 하폭을 넓히고 제방을 쌓는 공사를 한 이후부터는 문자 그대로 '개천(開川)'이란 이름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총 길이는 13.7km이고 천변에는 상인, 중인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어 이곳을 ‘위항(委巷)’, ‘여항(閭巷)’이라고 하였습니다. 청계천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평소에는 아녀자들이 빨래하는 장소로, 명절 때에는 편싸움[石戰], 연날리기, 다리밟기, 연등놀이를 하던 한양주민의 휴식공간이었습니다.
준천(濬川) 이야기
준천은 청계천에 오물과 모래, 돌 등이 쌓여 수로가 막히고 악취를 풍기는 것을 막고 궁극적으로는 수해 방지를 위해 국가적으로 벌이는 개천의 청소 및 보수 작업을 말합니다. 1760년(영조 36) 2월 18일부터 준천을 시작하여 57일 뒤인 4월 15일에 완료하였습니다. 공사는 먼저 도성의 수문 바깥부터 시작되었는데 오간수문에서 영도교까지 5개소로 나누어 준설을 진행하였습니다. 수문 바깥의 준천은 3월 4일 이전에 마쳤고, 3월 4일부터는 수문 안쪽의 준천을 시작하였습니다.
준천 과정에서 파낸 흙은 도성 내 큰 거리의 우묵한 곳, 거리의 진흙이 어려 있는 곳에 쌓아두게 하였습니다. 준천공사가 완료된 이튿날인 4월 16일 영조는 창덕궁의 후원에 있는 춘당대에서 공사에 참여한 관리들과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어 노고를 치하하였고 이 과정에서 준천사라는 기구가 설치되었습니다.
준천사에서는 두 곳에 있는 철문을 개수하는 작업, 양안의 제방 일부를 석축으로 바꾸는 작업, 새로운 다리를 축조하는 작업 등을 수행하였습니다. 이는 고종 연간에도 마찬가지여서 준천사가 중심이 되어 주기적으로 개천 바닥을 파내는 작업을 계속하였으며 석축공사를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실하게 공사를 한 결과 홍수 피해가 컸습니다. 이에 정부에서는 관리감독을 강화하였으며 1898년에는 마차회사가 도성 내 준천사업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청계천 준설공사를 마친 뒤 영조는 준설 과정과 재원, 인력충원 방법 등을 자세하게 적은 <준천사실>과 <준천소좌목>도 편찬하도록 하였는데 그 책자는 준천소 관원의 명단과 거기에 동원된 인력에 관한 사항까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청계천 준설공사에는 연인원 21만 5천 3백 80명의 노동력이 동원되었으며 돈 3만 5천여 냥과 쌀 2천 3백여 석이 소용되었습니다. 당시 한양인구가 20여만 명임을 감안하면 한양 주민 모두가 동원된 셈입니다. 일반요역과 달리 그들 중 6만여 명은 일당을 받는 이른바 일용직 노동자였다고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청계천 준설공사는 도시 빈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일종의 ‘조선판 뉴딜정책’이었던 셈입니다.
청계천의 다리들
전통사회에서 다리는 단순히 물을 건너기 위한 수단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마땅한 공공장소가 없었던 시절, 다리는 약속과 모임의 장소였고, 길 가던 사람들이 쉬어가는 쉼터이기도 했습니다. 다리가 있음으로 인하여 동네 이름이 생겨나기도 하였고 반대로 부근 동네 이름을 따서 다리에 붙이기도 하였습니다.
다리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놀이가 생겨났으며, 웃음과 지혜가 담겨있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겨나기도 하였습니다. 청계천의 옛 다리들은 도성의 다른 곳에 놓여 있던 다리보다 비교적 크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습니다. 그런 만큼 청계천의 옛 다리들은 저마다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으며, 청계천의 중요한 문화적 유산이 되었습니다.
옛 서울지도를 살펴보면 물길과 도로가 만나는 곳곳에 다리가 있습니다. 비교적 다리가 풍부하게 표시된 <수선총도>에는 약 190여 개의 다리가 있고 이중에서 명칭과 위치가 확인되는 것만 약 80개 정도이며, 1760년 영조의 준천 당시에 청계천 본류에는 모전교, 광통교, 장통교, 수표교, 하량교, 효경교, 마전교, 오간수문, 영도교 등 9개의 다리가 있었습니다.
모전교(毛廛橋)는 모전 부근에 있는 다리로서 모전은 각종 과일을 파는 가게인데, 큰 길 모퉁이에 설치하였기 때문에 우전(隅廛)이라고도 합니다. 광통교는 육조거리-운종가-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간선도로로 주변에 시전이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였습니다. 장통교는 중부 장통방에 있었으므로 장통교라고 하였는데 청계천 본류와 목멱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만나는 지점에 있었습니다. 수표교는 광통교와 함께 가장 유명한 다리로서 당시 이곳에 마전이 있어서 마전교라 불렀으나,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는 수표석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습니다.
하랑교는 부근에 하랑위의 집이 있었기에 하랑교라 하였는데 현재 청계3가 센츄럴호텔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효경교는 부근에 소경이 많이 살았다 하여 '맹교' '소경다리'라고도 불렀으며 마전교는 다리 부근에 우마를 매매하는 마전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청계5가 사거리 동쪽 방산시장 앞으로 추정됩니다. 오간수문은 청계천 물이 성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성벽 아래에 설치한 수문으로, 성벽을 지키거나 수문을 관리하기 위해 그 앞에 긴 돌을 놓아 다리의 기능을 병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영도교는 성종 때 승려가 놓았다고 전하는데 흥인지문 밖에 있는 동묘와 왕십리를 연결하는 통로였으나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헐어다가 석재로 사용하였습니다.
다리에 얽힌 이야기
광통교(廣通橋)는 지금의 광교 자리에 있었던 조선 시대의 다리인데, 광통방에 있는 큰 다리였으므로 처음에는 대광통교라 하였습니다. 특히 예부터 한양에서 큰 다리로 알려져 정월 대보름이 되면 도성의 많은 남녀가 이곳에 모여 답교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하였습니다. 광통교는 육조거리-운종가-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간선도로였으며, 주변에 시전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였습니다.
광통교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는 많은 상가들이 있었는데 닭과 계란을 파는 가게, 갓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대나무를 파는 가게, 갓을 파는 가게, 부인의 머리 장식을 파는 가게, 부인들의 패물과 가락지 등을 파는 가게, 신발을 파는 가게, 물감과 중국 과실을 파는 가게, 칠목기와 장롱을 파는 가게, 잔치 때 그릇을 세놓는 가게, 채소를 파는 가게, 솜을 파는 가게, 말총·가죽·초·실·휴지·책 등 잡화를 파는 가게, 말안장·등자·굴레 등을 파는 가게, 서화와 책을 파는 가게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한양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항상 광통교 주위에 모여들어 생필품을 팔고 사곤 하였습니다.
광통교는 태조 때에 흙으로 축조되었다가 폭우로 인하여 무너지자 1410년(태종 10) 8월에 돌로 개축할 때 석재를 정릉의 무덤 돌을 사용하였는데 여기에는 이성계의 셋째 아들 이방원과 신덕왕후 강씨의 깊은 원한 관계가 상당히 작용하였습니다. 1392년(태조 1) 계비 강씨는 정도전 등의 도움으로 이방원을 물리치고 자신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에 옹립하였습니다. 이 일로 계비 강씨는 이방원의 깊은 원한을 사게 되었습니다. 계비 강씨는 방석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채 1396년(태조 5) 세상을 떠남으로써, 세자가 된 아들 방석 또한 1398년(태조 7) 정도전 등과 함께 이방원에 의하여 제1차 왕자의 난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한편 계비 강씨를 무척 총애하였던 태조 이성계는 강씨가 죽자 자주 찾을 수 있는 가까운 중부 취현방(중구 정동 일대) 북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고 정릉이라고 이름 하였습니다. 태조는 이 능을 조성할 때 특별히 제주목사 여의손으로 하여금 일류 석공을 동원하여 당대 최고 수준의 석물을 조성하도록 하였으며, 완성된 이후에도 수차례 행차하여 강씨에 대한 그리움을 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1408년(태종 8)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인 1409년(태종 9)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정릉만 도성 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다고 하여 지금의 성북동 정릉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410년 큰비가 내려 흙다리인 광통교가 유실되자, 왕위에 오른 이방원이 정릉의 옛 터에 남아 있던 돌을 사용하여 석교를 만들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함으로써 강씨에게 맺힌 분한 마음을 토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광통교는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어가행렬과 사신행렬이 지나다니는 도성 제일의 다리로서 영광을 누렸습니다. 현재의 광통교 양측 교대에는 정릉의 부재로 사용되었던 신장석, 구름 문양과 당초 문양이 새겨진 무덤돌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태조가 정릉을 조성할 때 얼마나 공을 들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장통교(長通橋)는 다리 부근에 긴 창고가 늘어서 있었다고 하여 장창교(長倉橋), 또는 ‘장찻골 다리’라고도 했으며 또한 장통방에 있던 다리이므로 장통교를 줄여서 장교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통교의 위치가 백악·인왕산 방면의 물이 우회하고 꺾여서 지나오다가 광통교를 지나서는 다시 목멱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줄기까지 합하여 비로소 일직선으로 오간수문을 지나 영미교 방면까지 길게 통하여 나가는 곳이기 때문에 '장통'의 다리명이 생기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1480년 이전에 설치되었고, 다리 서쪽 기둥에 ‘신미개조(辛未改造)’와 ‘기해개조(己亥改造)’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차례의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리에는 교각이 없었고, 1929년 홍수로 인해 붕괴되었다가 복구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일대는 일찍부터 도성 안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시전상인들이 모여 살았으며 중앙과 지방관청의 연락사무를 맡아보던 경주인(京主人)들의 본거지일 뿐만 아니라 19세기 개화파의 선각자적 역할을 한 유대치가 장통방, 지금의 보신각 뒤편에 살았습니다.
수표교(手標橋)는 광통교와 함께 한양도성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였습니다. 1420년(세종 2) 축조되었는데, 당시 이곳에 소와 말을 매매하거나 대여해주는 말 시장이 있었기 때문에 마전교라고 불렀고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를 세운 이후부터는 수표교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수표는 하천 수위를 과학적·계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기구로 측우기와 함께 세종 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과학기기의 하나입니다.
수표는 청계천의 마전교 서쪽과 한강변에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물속에 돌을 놓고 그 위에 구멍을 파서 나무로 만든 기둥을 세웠는데 나무기둥에는 눈금을 새겨 수위를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무로 만든 수표는 쉽게 망가져 성종 때 돌기둥으로 교체하였습니다. 돌기둥 양면에는 1척에서 10척까지 눈금을 새겼으며, 다시 3·6·9척에는 ○표를 파서 각각 갈수(渴水)·평수(平水)·대수(大水)를 헤아리는 표지로 삼았습니다. 즉 6척 안팎의 물이 흐르면 보통의 수위로, 9척 이상이 되면 위험 수위로 개천의 범람을 미리 헤아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개천은 건천(乾川)으로 평상시에는 물이 조금밖에 흐르지 않았으나 도성 안에서 흐르는 모든 지천의 물이 개천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비가 조금만 와도 물이 범람할 정도로 유량의 변화가 매우 심했습니다. 수표에 표시된 1척은 대략 20.3cm 정도로 9척의 경우 수위가 183cm 정도이나 비가 올 때 개천 물이 이 정도까지 차오르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수표교 옆에 수표가 설치된 이후 수표교는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는 기준이 되었으며, 담당 관청을 정하여 정기적으로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여 임금께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수표는 성종 때 돌기둥으로 교체된 이후 1760년 경진년 개천을 준설할 때 보수되었으며, 영조는 준천 이후 수표교 교각에 경진지평(庚辰地平)이란 글자를 새겨서 이후 개천 준설의 표준을 삼도록 하였습니다. 순조 때 개천을 준설할 때 새로 만들어 세웠는데 지금 남아 있는 수표는 바로 이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수표교 역시 세월이 지나면서 수차례 보수되었습니다. 다리 한쪽 귀틀석에 '무자금영개조(戊子禁營改造)’ ‘정해개조(丁亥改造)'라고 새겨져 있는데,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자년과 정해년에 각각 다리를 보수했다는 내용입니다.
또한 당초 수표교에는 난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수표교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면 1890년경에는 다리 위에 돌난간이 없었다가 18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지금과 같은 돌난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도성의 인구가 늘어나고 더불어 수표교를 건너다니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면서 사람이 떨어지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자 다리에 난간을 추가로 설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수표교는 광통교와 함께 청계천에 있던 가장 유명한 다리로 다리밟기, 연날리기 등이 행해지던 대표적인 민속놀이 공간이었으며, 숙종과 장희빈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오기도 합니다.
수표교는 영희전으로 가는 통로이기도 한데 영희전은 임금의 영정을 봉안하는 곳으로 설·한식·단오·추석·동지·섣달 그믐날 등 명절이 되면 임금이 융복(戎服)을 입고 이곳을 전배(展拜)하였습니다. 따라서 명절 때 임금의 어가행렬이 이 다리를 지날 때면 다리 주위에 구경꾼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습니다. 어느 날 숙종이 영희전을 전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표교를 건너다가 부근 여염집에서 문밖으로 왕의 행차를 지켜보던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고 마음에 들어 궁궐로 불러 들였는데, 그가 바로 훗날 장희빈이 된 장옥정이었습니다.
장옥정은 중인인 역관 집안의 서녀(庶女)였는데 장옥정의 숙부 장현은 <숙종실록>에 '국중의 거부'라고 기록될 정도로 부자인 데다 역관의 우두머리로서 1677년(숙종 3년)에는 종1품 숭록대부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미모의 재벌가 따님이었던 셈입니다. 그 여인은 단숨에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곧바로 궁으로 들어와 아들을 낳습니다. 1689년(숙종 15) 장옥정을 희빈으로 삼고 그 아들을 원자로 삼았습니다.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나서서 원자 책봉을 강력히 반대하다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숙종과 장옥정의 수표교 만남이 없었다면 백 년 넘게 지속한 정쟁도 없었을 것입니다.
수표교와 수표는 청계천이 복개되기 직전까지 비교적 완벽하게 남아있었는데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 1959년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으며, 수표는 다시 청량리동에 있는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오간수문은 청계천 물이 도성 밖으로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흥인지문 남쪽 성벽 아래에 다섯 개의 수문을 설치한 것인데 그 위에 놓인 다리가 오간수다리입니다. 오간수문 조금 남쪽에는 이간수문이라고 하는 수문이 있었는데, 이것은 목멱산 남소문동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성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만든 수문입니다. 오간수문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하지 않으나, 조선 초기 한양도성을 수축할 때 물길을 고려하며 성벽 아래 수문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오간수문은 크기가 5척이나 되었으며, 각 수문마다 쇠창살로 만든 철문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함과 동시에 외부에서 이 수문을 통해 함부로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명종 때의 의적으로 알려진 임꺽정이 이 오간수문을 통하여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오간수문은 외부 사람들이 도성을 몰래 드나들 때 이용하던 주요 통로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영조가 이 오간수문에 행차하여 개천 바닥을 쳐내는 일꾼들의 모습을 그린 <준천도>(1760년)를 보면 다섯 개의 수문과 수문마다 설치된 철문, 그리고 수문 위에 놓여 있는 다리의 모습이 선명합니다. 또 주변에 심어놓은 버드나무도 무성하게 우거져 있으며 버드나무가 우거진 오간수문은 이후 도성 안에서 이름난 봄놀이 장소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1907년 중추원 참의 유맹 토목국장은 청계천 하천수가 원활하게 소통되고 토사가 쉽게 흘러 내려가도록 한다는 명분으로 수문을 뜯어버렸습니다. 그리고 1908년 3월에는 훼손되어 방치된 성벽을 처리하고, 교통을 원활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흥인지문 부근 성벽과 함께 오간수문의 성벽까지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로 근대식 다리를 놓았습니다. 이로써 오간수문의 원형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풍수 비보책으로서의 가산
가산은 자연적으로 생긴 산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조산(造山)입니다. 가산을 만드는 이유는 자연경관을 일상 생활공간 주변에 가까이 두고 즐기고자 하는 옛 사람들의 바람으로 비롯되었는데, 궁궐이나 도성 안에 큰 연못이나 하천을 조성할 때 파낸 흙이 쌓여 인공 산인 가산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또 풍수지리적으로는 땅의 기운이 허한 곳에 지기를 북돋우기 위하여 가산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한양도성의 좌청룡의 지세가 허하다고 흙으로 산을 쌓은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계천 주변에는 오간수문 안쪽에 가산이 있었는데, 하나는 개천 북쪽에, 하나는 개천 남쪽에 가산이 있었습니다.
이 가산은 1760년 영조 때 개천을 준설하면서 하천 바닥에서 파낸 흙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준설이 끝날 무렵인 1760년 4월 영조는 당시 원로대신인 유척기에게 개천 준설공사의 성과를 물을 때 유척기는 준설로 생긴 토사를 그냥 개천의 양안에 방치해 두면, 비가 올 때마다 쓸려 내려와 다시 개천을 메우게 됨으로 거액을 들여서라도 토사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유척기의 지적에 따라 영조는 개천에서 준설한 수백만 석의 토사를 오간수문 부근 양안으로 옮겨서 쌓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 개천 양안에 커다란 흙더미가 생겼는데, 이것이 가산입니다. 이때 만들어진 가산은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당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산으로서는 상당히 컸는데, 1770년 이후 발행된 고지도를 보면 오간수문 안쪽 개천 양편에 가산 또는 조산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청계천변, 거지들의 근거지
이렇게 만들어진 가산은 청계천변에 살고 있는 거지들이 토굴을 파고 생활하는 근거지가 되었고, 포도청에서는 이들을 단속하기 위해 두목을 선정하도록 하여 거지의 총 두목인 ‘꼭지딴’이 가산에서 선출되었습니다. 한편 거지들에게는 뱀을 잡아 파는 권리가 부여되었는데, 뱀잡이를 땅꾼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들이 가산에서 땅굴을 파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가산은 특별히 기초를 다져서 쌓은 것이 아니라 그냥 흙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였으므로 비가 오면 조금씩 깎여 내려가기도 하였고, 반대로 개천을 준설할 때마다 토사가 다시 쌓이기를 반복하여 완만한 언덕을 이루게 되니 언제부터인지 가산에 나무와 화초를 심게 되었으며, 1914년에 서울의 지명을 새로 정할 때 가산에 심어놓은 꽃향기가 좋아서 이곳을 방산동(芳山洞)이라 이름하였다고 합니다.
가산은 인구가 늘어나고, 근대적인 도시 시설이 들어서면서 사라지게 됐습니다. 북쪽 가산은 1898년(광무 2)에 그 자리에 전차 차고가 들어서면서 대부분 훼손되었으며, 남쪽 가산은 1918년경 현 국립의료원 자리에 조선약학교가 들어서고, 1921년에는 그 서편에 경성사범학교가 들어서면서 모두 헐렸으며, 그 흙은 종로의 도로 정비에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남쪽 가산 터는 청계천6가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국립의료원을 거쳐 방산동 일대이고, 북쪽 가산 터는 동대문종합상가가 들어서 있는 곳입니다.
문화 중심지로 떠오른 청계천
원래 조선시대에 청계천 주변은 5부 가운데 ‘중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사대부가 거주하거나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개천가였기 때문에 평민이나 빈민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1760년 영조가 연인원 21만 명을 동원해 청계천에 쌓인 모래를 파내고 청계천 양쪽에 돌로 제방을 쌓는 등 대규모로 준설을 했는데 이 사업으로 청계천은 홍수위험이 낮아졌고 위생상태도 개선됐습니다. 이 대규모 준설은 청계천을 도성 안 문화의 중심으로 만들었습니다.
영조가 청계천을 준설한 18세기 후반부터 광통교와 수표교 주변 지역은 서울의 ‘핫 플레이스’가 됐습니다. 청계천 준설 이후의 변화는 조선시대 문헌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그려낸 글이 바로 강이천의 <한경사>입니다. <한경사>는 모두 106편의 연작시로 18세기 말 서울 풍경을 잘 묘사했는데 당시 청계천 주변엔 어떤 변화가 나타났을까요?
첫째 그림 거래가 활성화됐습니다. 그림의 상업화는 조선후기 경제발전으로 중인과 평민 등 새로운 그림 소비자가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그 이전 그림의 소비자는 오직 양반뿐이었습니다. 원래 광통교 주변인 구리개(을지로입구역) 부근에 도화서가 있었는데, 준설 이후 광통교 주변에 종이가게와 지물포, 그림가게, 서화실 등이 많이 들어섰습니다.
둘째로 광통교와 수표교 일대 청계천은 닭싸움, 타구의 현장이었습니다. 특히 닭싸움은 단순한 오락에서 내기도박으로 이어져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셋째는 광통교와 수표교 일대가 놀이의 중심지가 됐습니다. 다리밟기와 연날리기, 팽이치기 등 전통놀이가 활성화 됐고 음식점이나 술집, 찻집 등 근대적 소비시설도 집중적으로 들어섰습니다.
예술품 시장의 중심 광통교
조선후기 상품 화폐가 발전하면서 서울의 거리에는 글씨와 그림을 파는 서화시장이 등장하였습니다. 시장은 광통교를 중심으로 종각에서 남대문에 이르기까지 큰 길에 자리 잡았습니다. 여기에는 도화서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이 나와 있기도 하고 양반가에서 흘러나온 글씨와 그림들도 즐비하였습니다. 최북과 같은 화가는 ‘아침에 한 폭 팔아 아침밥 먹고 저녁에 한 폭 팔아 저녁밥 먹기’까지 하였습니다. 대부분 판매용으로 제작된 글씨와 그림으로 그 가치는 별로 없으나 많은 사람들이 구매하여 자기 집에 걸어두거나 선물로 다른 사람에게 보냈습니다.
이곳은 이야기 공간이기도 하였는데 ‘이야기꾼’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천변을 따라 다니면서 도성 주민들에게 책을 읽어주기도 하였습니다. 전기수는 동대문 밖에 사는 사람으로 매달 초하루는 제 일교 아래, 초이틀은 제 이교 아래, 그리고 초사흘은 배오개에, 초나흘은 교동 입구에, 초닷새는 대사동 입구에, 그리고 초엿새는 종각 앞에 앉아서 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워낙 재미있게 읽는 까닭에 청중들은 겹겹이 담을 쌓듯이 몰려들었는데 그는 읽다가 가장 간절하여 매우 들을 만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문득 읽기를 멈추면 청중은 다음 차례가 궁금해서 다투어 돈을 던졌다고 합니다.
이야기만 듣는 것이 답답한지 책을 직접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이곳에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등장하였으며 곤궁한 양반들이 자진해서 책을 빌려주는 일에 종사하고 많은 부녀자들이 비녀, 팔지를 팔거나 빚을 내 다투어 책을 빌려다가 읽었습니다. 특히 여기서는 한글소설들이 많이 읽혔습니다. 그러나 값싼 목판본 소설이 출현하면서 세책점이 줄어들고 이를 대신하여 서점들이 등장하였고 이런 서점은 이미 영조 연간 정릉동(신문로 인근)과 육조거리에 등장하였는데 여기서는 경서류도 취급하였지만 <열국지> 등 대중용 서적도 판매하였습니다.
답교놀이가 흥행했던 청계천 다리
청계천 다리에서 도성 사람들은 다리밟기[踏橋]를 하였습니다. 정월 대보름 밤에 많은 사람들이 다리를 밟고 달구경을 하면 다리 병이 없다고 하여 이곳으로 나와 맘껏 즐겼습니다. 기원을 알 수 없지만 어숙권의 <패관잡기>에 따르면 중종 말년부터 도성 안 사람들이 정월 대보름 저녁이면 이곳을 즐겨 찾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도성 주민들은 청계천 12다리를 밟으면 그 해 열두 달 재수를 좋게 한다 하여 액막이로 답교놀이를 즐겼는데 양반집 부녀들도 가마를 타고, 그 이하는 천의로 머리를 가리고 도보로 다녔으며 여염 처녀들은 서로 짝을 지어서 다리밟기를 하였습니다. 무뢰한 사내들은 떼를 지어 여자들을 따라다녀서 추잡한 일이 생기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주민들끼리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명종 15년에 사헌부 관헌들이 이들을 잡아서 죄를 다스리자 부녀들의 다리 밟는 풍속이 점점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이런 조치는 별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오히려 영조 46년에는 임금이 백성들과 태평을 즐기는 뜻을 보이기 위해 이날은 통행금지를 해제하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정조 15년에는 숭례문과 흥인문의 빗장을 잠그는 것을 중지하도록 하여 주민들이 성 밖으로 나가 답교를 하였습니다.
전문 음식점이 생겨난 청계천변
청계천을 끼고 많은 주막들이 즐비하였는데 이곳 주변에는 상인들과 하급 관리, 서민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주막은 날로 번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주막이 상밥집에서 장국밥집, 설렁탕집 등 전문음식점으로 발달해갔습니다. 그중 장교동의 설렁탕은 맛이 좋기가 장안에서 으뜸이었습니다. 그래서 한양 주민들이 이곳의 설렁탕을 먹기 위해 자주 찾았습니다. 무교동 장국밥은 19세기 후반에 등장하였는데 그 맛이 유명하여 미행 나왔던 임금들도 초롱을 든 상도를 앞세우고 무교동 장국밥집을 찾았다고 합니다.
연암 박지원과 친구들, 청계천에서 놀다
박지원은 1768년부터 가족과 함께 황해도 연암골로 들어간 1778년까지 10년가량 탑골공원 근처 전의감동(종로1가 종로타워 부근)에 살았습니다. 이때 박지원은 당대에 ‘백탑시사’, 나중에 ‘북학파’라고 불린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백탑’은 당시 서울의 초고층 ‘랜드마크’였던 원각사지 10층석탑을 말합니다. 이 모임의 활동 이야기에 대한 기록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박지원 자신의 <연암집>에 ‘여름날 밤 잔치’라는 글을 남겼고, 다른 하나는 아들 박종채가 <과정록>에 썼습니다. 그중에서 눈 오는 밤 청계천 수표교 위에서 술을 마시고 ‘구라 철현금’(양금)을 연주한 일을 적은 <과정록>의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합니다.
우정의 달인, 연암과 그의 친구들
기존의 길을 갈 수 없다면 자신의 길을 만들었던 연암과 그의 친구들에게, 새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기 위해 배워야 할 3가지는 관계·우정·공동체입니다. 연암 혼자였다면 후세에까지 이렇게 오랫동안 이름을 남기진 못했을 것인데 함께였기에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갈 수 있었고, 중간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고, ‘북학’이라는 이름으로 현대까지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연암은 30대 초반 무렵 백탑 부근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인근에는 훗날 친구가 된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 유금, 서상수 등이 살고 있었습니다. 양반, 서얼까지 뒤섞여 있지만 신분의 구별 따윈 그들에게 중요치 않았습니다. 각자가 한 분야의 전문가 이상의 수준을 겸비했던 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연암의 집에 찾아와 함께 밥을 먹고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고 소풍가며 지냈습니다.
백탑파들은 한 가지에 몰두하면 무서울 정도로 집착하는 천재성을 보였습니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들은 열심히 놀고 공부하고 또 글을 썼습니다.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는 더 나은 길을 찾아 외부로 눈을 돌렸습니다. 연암과 벗들은 현실이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외려 세계관을 더욱 넓힐 수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두 개의 금기를 깬 백탑파
이들은 두 가지 금기를 깼습니다. 하나는 청계천이 수준 낮은 지역이라는 인식을 깨고 자신들의 산책이나 연주, 음주, 가무 등 활동무대로 삼았습니다. 둘은 계급적 장벽을 뛰어넘었습니다. 백탑파 가운데 박지원과 홍대용, 이서구는 집권 노론의 자제였지만,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은 서자였습니다. 이들은 신분을 뛰어넘어 어울렸는데 훗날 이들은 ‘북학파’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앞장선 인물은 가장 나이가 많은 홍대용으로, 그는 천문·경제·음악·교육 등 여러 방면에 뛰어났습니다. 홍대용은 1765년 연경에 다녀왔으며 3대 연행록으로 꼽히는 <을병연행록>을 썼습니다. 그의 연행 경험은 그 뒤에 연행을 떠난 박지원·박제가·이덕무·유득공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박제가와 유득공도 1778년 연행을 다녀왔는데 박제가는 가장 강력한 개혁론자로 <북학의>를 썼으며, 경제와 과학기술 발전을 역설했습니다. 유득공은 <발해고>를 써서 통일신라시대를 발해와의 ‘남북국시대’로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두 사람과 이덕무·서이수 등 4명의 서자는 정조 시절 규장각 검서관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박지원은 노론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양반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였습니다. 1780년 이들 중 가장 늦게 연행을 다녀와서 불후의 명작 <열하일기>를 썼는데 <열하일기>는 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문학작품 중 하나로 꼽힙니다. 박지원은 이 밖에 <양반전> 등 10여 편의 사회비판 소설도 썼습니다.
그러나 청계천을 배경으로 개혁을 꿈꾼 이들 백탑파의 원대한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정조 이후 왕들을 계몽군주로 바꾸지 못했고, 스스로 개혁 주체가 되지도 못했습니다. 이들이 꿈꾼 북학을 바탕으로 한 사회개혁은 이들이 쓴 책 속에서 끝났습니다.
구리개의 약국거리
지금의 을지로 입구에 해당하는 구리개[銅峴] 지역은 약국이 밀집되어 있었던 곳입니다. 이 거리가 약국거리가 된 유래는 조선정부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내의원·전의감·혜민서 등 의약 관청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약국을 할 수 있는 특권을 주고 개업할 수 있도록 했던 데서 나옵니다.
그러나 조선전기에는 별로 많지 않았으며 16세기 대사헌을 지낸 유희춘의 경우, 약재를 관청에서 조금씩 구매하거나 의원들로부터 선물을 받았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면서 약재 거래가 활발해지자 구리개를 비롯한 한양 여기저기서 의원들과 사설 약국들이 늘어나고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약국은 모두 갈대로 발을 만들어 문 앞에 늘어뜨리고 ‘신농유업’ ‘만병회춘’ 등의 가게 이름을 내걸고 의원이 환자에게 내린 처방전을 보고 약재를 팔거나 환제나 탕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양반들은 아프면 이들 약국을 찾기가 일쑤였고 일반 서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한 시골에서 약재를 지고 온 사람도 꼭 구리개에서 약재를 팔았고 구리개 약국은 공물로 납품되는 약재 유통에도 개입하여 이익을 크게 남기거나 변두리에 약재를 널리 판매하여 그 위세가 등등하였습니다.
또한 의원들도 이 지역에 각종 의료활동을 벌였는데 급진개화파의 스승이라 할 유대치도 한의사로서 장통방(지금의 보신각 뒤)에 거주하며 환자를 진료하였습니다. 또 약국에는 사람들이 모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전하기도 하였는데 그래서 온갖 소문들이 약국을 통해 퍼져 나갔고 그 중에는 변란을 꾀하는 무리들이 약국에 모여 계획을 모의하기도 하였습니다.
훈련도감 군인 이야기
원래 조선시대 군대의 핵심은 말을 타고 싸우는 갑사였으나 전쟁이 드물고 문반이 더욱 우대받자 갑사를 구성했던 양반들이 이탈해 갔으며 또한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총으로 무장한 새로운 병기 앞에 갑사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국왕의 시위를 위해 급조된 훈련도감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이듬해인 1593년에 생겨났습니다,
훈련도감은 한양의 경비 방위 업무를 담당할 뿐만 아니라 궁궐 담 밖과 도성 내외의 순라 임무도 수행하였습니다. 원래 이러한 임무는 포도청에서 관장하였으나, 포도청이 부실하여 도적이 횡행하자 훈련도감이 이 업무를 대행하였으며 도성과 북한산성의 수축과 관리도 담당하였습니다.
훈련도감의 군인은 갑사와 달리 경제적 형편이 좋지 않아 가족들을 거느리고 한양에서 상주하면서 군역 근무에 임했습니다. 이러한 군인들에게 국가에서는 급료로 매달 쌀 12∼6말, 피복비로 1년에 면포 9필을 지급하였습니다.
그러나 국가에서 지급하는 급료와 면포가 한양생활에 충분하지 않자 군인들은 군역근무 이외의 시간을 이용하여 각종 상업활동을 하였는데 정부로서도 이들의 생계안정을 위해 상업 활동을 허용하였습니다. 그 결과 군인들이 시전 상인들과 치열하게 상권 다툼을 벌려 조선후기 내내 이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마찰과 분규가 일어났으며 심지어 일부 군인들은 백목전(白木廛)까지 열어 국가로부터 지급받은 면포를 판매하였습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정부가 재정 부족으로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자 훈련도감 군인들의 생활은 어려워지고 불만은 나날이 쌓여만 갔습니다. 더욱이 개항 이후 민씨 정권이 개화정책을 내세우며 구식군대를 도태시키고 일본식 군사제도를 도입하는 등 군제개혁을 추진하자 드디어 훈련도감 군인들이 서울 하층민들과 손잡고 1882년 난을 일으켰으니, 임오군란입니다. 이 사건으로 훈련도감은 혁파되고 그 군인들은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카페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서울학교 기사(8월)를 확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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