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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기후재난 시대 '진리에 근거한 새문명'을 꺼내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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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기후재난 시대 '진리에 근거한 새문명'을 꺼내들다

[기후위기, 백낙청을 다시 읽다] ① 인민인가, 국가인가?

"인민이란 말에 대해 거부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같은 거부감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되찾아야 진정으로 자유로운 주권자 국가와 사회는 가능해진다. 사상의 자유라는 숲 속에서 학문과 예술이 꽃필 수 있다. 인민이란 용어는 대한민국 헌법 초안에서도 사용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에도 대통령의 공식 담화문에서조차 버젓이 썼던 말이었다. "이 제도로 성립된 정부만이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부입니다."(이승만 대통령의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 기념사', 1948.8.16.) 

"옹진반도의 전투 보고는 내가 믿기로는 침략을 악하다 혐의해서 자치에 대한 인민의 권리를 존중하는 모든 인민을 고무할 것이다."(이승만 성명, '국민보', 1949.8.3.) 

"제헌헌법을 기초했던 유진오는 "국회 본회의에서 윤치영 의원은 인민이라는 말은 공산당의 용어인데 어째서 그러한 말을 쓰려 했느냐, 그러한 말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공박하였지만… 결국 우리는 좋은 단어 하나를 공산주의자에게 빼앗긴 셈이다."(유진오의 <헌법기초회고록>(일조각 펴냄) 65쪽)

사람은 자신이 만든 세상을 산다

사람은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로 소통하는 사회성 동물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어머니 젖을 먹고 성장하면서 눈, 귀, 코, 입, 살갗 등의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보면서 행동으로 세상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함’을 통해 ‘앎’이 생긴다. 그리고 말을 배우고 글을 배운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이름으로 분별하기 시작한다. 사람은 언어가 없으면 세계를 인식할 수도 없고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갈 능력도 상실한다.

우리는 눈을 통해 외부세계의 실체를 고해상도의 영상으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시신경이 뇌에 전달하는 정보는 시야에 들어와 관심을 끄는 몇몇 대상의 윤곽과 실마리에 불과하다. 우리는 시신경의 10~12개 통로를 통해 들어오는 10~12개에 불과한 소량의 시공간 가장자리 정보와 그림만을 가지고 세상의 모습을 재구성할 뿐이다. 새로운 껍질이라는 뜻의 신피질에 있는 뉴런은 외부 자극을 일련의 단계를 거쳐 '유형(pattern)'으로 분류해서 세상을 인식한다.(레이 커즈와일의 <마음의 탄생>)

우리는 세계의 시공간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야를 체험한다. 세계의 색깔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색채감각을 체험한다. 즉, 사람은 자신의 몸과 마음이 재구성해서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진화생물학자이자 구성주의 철학자인 움베르또 마뚜라나(Humberto R. Maturana)와 그의 제자인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J. Varela)의 통찰이다. 많은 생물학자와 뇌과학자들이 동의하는 인식이다.(움베르또 마뚜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의 <앎의 나무>)

우리는 모두 저마다 자신이 만든 세상을 산다. 동시에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없으면 세계를 인식할 수도 세상을 살 수도 없다. 지구상에는 2022년 현재 79억 넘는 인민들이 79억 개 이상의 세상을 살고 있다. 호모사피엔스는 언어라는 소통 체계를 통해 이같은 제각각의 세상을 서로 주고받으며 이웃과 함께 공존과 공유의 세상, 공동체와 국가를 만들어내 역사를 창조해왔다.

인민이 마음을 바꿔야 세상이 바뀐다

외부에 객관으로 존재하는 그런 세계란 없다. 눈이 나쁜 개는 2원색의 눈으로는 흐릿한 세계를 볼 수 있을 뿐이지만 2억~3억만 개 이상의 후각수용체가 맡은 냄새로 아주 세세하게 세계를 인식한다. 귀가 없는 뱀은 눈과 진동으로 세계를 인식한다. 박쥐는 초음파로 세계를 인식한다.

개, 뱀, 박쥐가 인식하는 세계와 사람이 보고 실감하는 세계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객관으로 존재하는 세계라고 확언할 수 없다.

사람과 세계는 객관으로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상호관계 속에서 서로를 조건으로 끊임없이 생겼다 변하고 사라진다. 양자역학과 양자생물학이 밝혀낸 존재의 실상이 바로 그렇다. 물질을 쪼개고 쪼개면 물질의 궁극적 실체가 드러나는 게 아니라 텅빈 공간과 초고속으로 회전하는 에너지만 관찰될 뿐이다. 관찰자에 의해 관찰대상이 영향을 받고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관계성 속에서만 존재가 드러난다는 불확정성 원리와 양자역학은 세계와 인간의 상호관계성, 의존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2500여년 전 붓다는 이미 우리가 보는 세상은 우리의 마음이 이름을 붙이고 개념화해서 만들어낸 세상임을 깨달았다. 기원전 5세기경 순전히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함으로써 자아와 세계의 실상을 밝힌 붓다의 철학에 대해 현대 물리학자들과 생물학자, 뇌과학자들이 경이의 시선으로 다시 보는 까닭이다.

사람의 세계관이란 디지털미디어가 만들어 낸 메타버스처럼 언어라는 개념으로 마음이 만들어낸 가상의 건축물이다.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도 현실에 대한 모든 착시도 언어에서부터 시작한다. 공자가 바른 이름(正名)을 강조한 것도, 붓다가 명색(名色), 이름붙인 물질과 개념(namarupa)과 식(識), 분별심(vinnana)을 깨달음의 핵심 대상으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이래 전쟁과 폭력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세계와 현실에 대해 바른 이름을 붙임으로써 인민의 마음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한 사람들을 우리는 선각자, 현자, 철학자, 예언자라고 불러왔다. 이들은 단순히 세상과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 밝은 눈으로 현실을 통찰하고 이름을 붙여 바른 길을 분별하고자 했던 이들은 온몸과 마음을 다 던져 인간과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개혁과 혁명의 행동가였다. 행동을 통해 인민들에게 삶의 바른 길을 제시한 예언자였다. 선각자란 곧 실천하는 혁명가였다.

지금도 우리는 현실 사회와 세계에 바른 이름을 붙이고 밝은 지혜로써 사람의 세계관과 세상을 바꾸고자 인민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수많은 선각자들을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행동하는 선각자, 백낙청

이런 선각자 가운데 하나가 한국에서는 행동하는 지식인, 지성인이었다. 지식인은 새로운 세계관의 안내자, 촉진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단순한 지식과 정보의 전달자, 지식 정보 판매 상인과 지식인은 확연하게 구별된다.

기후위기가 전면화되고 기후재난에 대한 적응과 극복이 시급한 시대 과제로 떠오른 오늘날 이 같은 지식인의 깊은 현실 분석과 이름짓기는 더더욱 절실하게 요청된다고 하겠다.

백낙청은 한국의 현실과 세계에 대해 바른 이름을 붙이려고 노력한 선각자이자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제기한 분단체제론은 한반도의 분단 현실에 대해 그럴듯한 겉포장을 뜯어내고 속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함으로써 지식인들과 인민들에게 생생한 경종을 울려온 탁월한 이름짓기였다. 현실의 억압과 폭력에 순응하거나 풍요에 취해 해태 혼침 상태에 빠져 있던 지식사회와 인민들에게는 남북의 적대적 공존 상태와 한반도 남쪽에 군사정부를 세워 한국을 지배하기도 했던 미국의 존재를 화들짝 다시 환기시키는 일종의 파수꾼 역할을 자임했다고도 할 수 있다.

백낙청은 최근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를 펴냈다. 정말로 왕성한 활동에 눈을 다시 부빌 수밖에 없다. 자신이 이름지은 용어에 대한 세세한 분석에서부터 치밀한 논리 전개까지 그 광범위한 독서와 관심의 폭, 사고의 깊이와 넓이는 나로서는 따라갈 수조차 없는 너무 먼 경지일 뿐이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내내 백낙청은 생태전환, 기후체제 전환, 풀뿌리 민주주의 체제로의 전환 실천가들, 특히 『녹색평론』 독자였던 사람들 다수와는 다른 시각, 다른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발을 딛고 있는 근거지가 다르면 현실도 다르게 보인다. 무엇보다도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행동도 달라진다.

나는 그것이 인민의 삶과 지역공동체, 국가 중에서 무엇을 우선 먼저 바라보고 초점을 맞추는가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민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 사회성 동물인 사람의 생존근거지인 공동체와 상상의 산물인 국가 가운데 무엇을 먼저 바꾸고자 하는가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백낙청은 인민의 삶을 논의하면서도 시야는 공동체가 아니라 그 너머 국가를 먼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글은 비록 좁고 얕은 소견이지만 백낙청의 최근 저서와 동학과 개벽에 대한 좌담 '다시 동학을 찾아 오늘의 길을 묻다'(<창작과 비평> 2021년 가을호) 특별좌담를 읽고 쓴 에세이다.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백낙청의 '개벽'과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화두의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근대 극복의 구체화된 개념으로 개벽의 세상을 언급한다는 것은 인민들에게는 그야말로 천지개벽의 세계관과 행동 변화를 요구하는 일이다. 어쩌면 백낙청의 기존의 이름짓기 전체를 정반합의 변증법 논리로써 다시 개벽시키는 일일 수도 있다. 일찍이 1994년부터 '물질개벽 시대의 공부길'을 주창했다는 점은 그가 이름지은 모든 개념에 이미 그러한 개벽 세상에 대한 생각의 씨앗이 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나는 성큼 문턱을 넘어선 기후재난 시대에 백낙청 이름짓기의 최종판으로서 '진리에 근거한 새문명'의 개벽을 꺼내든 그의 다음 걸음이 어느 문지방을 넘어설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백낙청 지음, 창비 펴냄) ⓒ창비

우리는 코가 꿰어 있는 국가의 인민들이다, 백낙청의 분단체제론

모든 사회혁명은 문화운동으로 시작한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첫 번째 시도는 언어창조의 문화운동이다.

1966년 백낙청은 20대 후반의 나이에 계간지 <창작과 비평>을 창간했다. 반공이라는 감옥에 갇힌 1960년대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변화의 모색은 문학이 그나마 돌파구였다. 그 당시는 공산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주의의 '사'자만 나와도 쥐도 새도 모르게 중앙정보부와 경찰에 끌려가는 정신병동의 시대였다. 창간호에 실린 백낙청의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는 시대를 선도하는 지식인으로서 향후 백낙청의 활동을 예고하는 일종의 서문이었다. 창간호에 실린 싸르트르의 '현대의 상황과 지성', 라이트 밀즈의 '문화와 정치'는 백낙청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해 보게 하는 배경 화면이었다.

백낙청은 잡지 창간의 포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상이 메마르고 대중의 소외와 타락이 심한 사회일수록 소수 지식인이 그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만나 서로의 선의를 확인하고 힘을 얻으며 창조와 저항의 자세를 새로이 할 수 있는 거점이 필요하다. 작가와 비평가가 힘을 모으고 문학인과 여타 지식인들이 지혜를 나누며 대다수 민중의 가장 깊은 염원과 소수 엘리뜨의 가장 높은 기대에 보답하는 동시에 세계문학과 한국문학 간의 통로를 이룩하고 동양 역사의 효과적 갱생을 준비하는 작업이 이 땅의 어느 한 구석에서나마 진행되어야 하겠다."

- 백낙청,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창작과 비평>(1966년 창간 겨울호)

이후 백낙청은 널리 알려진 바대로 실제 창비를 거점으로 문인과 지식인들의 힘을 모아 창조와 저항의 자세로 문학에서부터 점차 사회정치 발언과 현실참여 행동으로 나아간다. 그는 시민문학론을 거쳐 1970년대에는 민족문학론을 앞장서서 정립해나갔다.

백낙청 이름짓기의 정점은 분단체제론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21년 11월 말 '60+기후행동'의 기후재난 현장 체험 행동 프로그램에 참가해 제주에 간 적이 있었다. 이미 30%를 넘어서고 있는 급속한 제주 연근해 바닷속 사막화 현장을 직접 방문해서 해녀, 어민 등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그들과 함께 작은 행동이라도 하자는 취지였다.

제주도 인근 바다의 표층 수온은 1968~2017년의 50년 동안 1.23도가 올랐다. 전세계 평균 0.48도의 2.6배나 되는 수치다. 그런데 방문 현장이 다름 아닌 강정의 해군기지를 포함한 연산호(soft coral) 군락지였다. 고백건대 나는 제주 강정마을이 처음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강정 해군기지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거대한 방파제와 기지 내 건물들, 대형 운동장에서 뛰노는 군인 가족들 등 육중하다 못해 거대하고도 낯선 풍경은 이미 새로운 인공 도시가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과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시각에도 대형 건설 공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한라산 중산간까지 이어지는 토목공사와 도로공사 현장도 가보았다.

나는 제주 해군기지를 직접 눈으로 보고 나서야 왜 그렇게 정부와 제주시가 강정에서 가까운 서귀포 신공항에 집착하는지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강정 해군기지는 명백히 미국의 장기 세계전략 아래 진행되고 있는 미군의 인도태평양 해군기지임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이튿날 새벽에 함께 간 한승동 전 한겨레신문 기자로부터 변화하고 있는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과 일본의 지위 변동, 전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제와 오끼나와 미군기지의 이전 가능성 등등 최근 한반도 주변에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정세 변화에 대해 두런두런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해박한 일본 전문가의 개인 교습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커튼 뒤에 감독처럼 버티고 있는 미제국과 한국이라는 2개 국가가 연합해서 강정마을에 인천상륙작전과도 같은 거대한 전방위 압력과 공격을 가하는 형국이었다. 그럼에도 강정마을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삶의 근거지였던 자신들의 마을을 지키며 몇 년 동안이나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항쟁을 계속해왔다. 주권자인 마을공동체 주민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필사의 저항과 투쟁을 하면 그 어떤 거대한 국가 폭력에도 맞설 수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강정마을은 풀뿌리 주민자치의 놀라운 기적을 보여준 현장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우리는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은 강정 해군기지를 설명하는 가장 명료한 이름짓기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대한민국 국군은 시체 군대

한반도의 분단 현실을 분단체제라는 개념으로 이름지은 것은 남과 북 2개 정권의 적대적 공존 체제가 사실은 주변 강대국, 특히 미국에 코를 꿰인 상태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가장 강렬하게 표현해준다. 신식민지나 종속 개념보다 훨씬 더 넓은 시야로 우리의 주제를 잘 파악하게 만든다. 평화공존이건 남북연합이건 중립화건 분단체제를 타파하고자 하는 행동에 가장 먼저 제동을 거는 것은 미국이다. 우리는 미국이라는 제국의 코뚜레에 꿰인 채 해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민의 피와 땀이 밴 엄청난 돈다발을 무기 구입으로 미국의 군산복합체에 상납하는 황색 군종 노예 신세다. 어처구니없지만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주권국가인 한국의 군대는 전시 군사작전권이 없다. 작전권 없는 군대란 염통을 떼어내 딴 사람에게 준 육신처럼 시체 군대나 다름없다. 6.25동란 때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헌납 이양한 뒤 지금까지 70여년을 한국군의 국적은 미국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제대로 된 독립국가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1994년 평시 군사작전권은 되찾아와 대한민국 국군의 국기는 절반은 태극기고 절반은 성조기다.

미국이 저 위에서 제국의 세계 패권 전략에 따라 던져 놓은 투명 그물이야말로 한반도 인민들이 그 속에서 포획되어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한국 인민들뿐만 아니라 북한 인민들까지도 자신들의 삶의 조건에 대해 뿌리부터 다시 보게 만드는 언어가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이다. 분단체제론은 한국 인민들의 세계관을 바꾸는 데 일정한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단체제론은 분단현실을 보는 하나의 견해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이것이 한반도 현실을 한마디로 개념화해 이해시키는 언어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한반도의 모든 현실이, 특히 한반도 인민들의 삶 전체가 분단체제론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분단체제 환원론으로 나아가는 것은 개념이 인민을 우물 속으로 밀어넣어 우물 안에 갇히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만다. 환원론은 대부분 '앎'이 '핢'을 옭아매 우물 속으로 집어던져 이른바 확증편향에 빠질 수 있게 만든다. 요즘 한국 사회에 난무하는 음모론이 바로 그런 환원론의 오래된 대표 사례다.

분단체제 타파를 위해서는 남과 북이 주권국가임을 서로 인정하는 양국체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김상준의 양국체제론 또한 설득력 있는 이름짓기다. 분단체제론과 배치되지도 않고 오히려 분단체제론을 더 풍부하게 심화시킬 수 있는 이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김상준의 양국체제론에 대해 김명환이 논쟁을 벌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
김상준,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녹색평론> 2019년 1/2월호. 
김명환, '한반도 평화와 분단 극복을 위하여', <녹색평론> 2019년 3/4월호. 
김상준, '하노이 북미회담 이후의 분단체제-양국체제 논쟁', <프레시안>, 2019.4.24.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론, 하나 마나 한 이름짓기

한반도 현실에 대한 또다른 주요한 백낙청의 이름짓기는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론'이다. 그런데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란 어찌 보면 기후위기 적응과 극복이라는 말처럼 지당한 말의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백낙청 자신도 "일상의 삶에서 이중과제론이 일종의 상식에 해당하며 그렇기 때문에 굳이 현학적으로 그런 표현을 쓸 필요조차 없지만"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357쪽이라고 일단 이를 인정하면서도 그는 이중과제론을 지속해서 제기한다.

선각자의 이름짓기란 기존의 현실인식을 한순간에 중단하게 만든다. 독일의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이것을 '소격효과'라고 이름지은 바가 있다. 멈추고 시선을 내 안으로 돌려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게 함으로써지관(止觀, samatha-vipassna) 인식의 대전환을 일으키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을 변화시킴과 동시에 세상의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행동에 나서게 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선언은 우리가 흔히 익숙하게 생각하고 있던 기존의 고정관념을 밑바닥에서부터 송두리째 허물어 버린다.

백낙청의 이중과제론은 현실의 변혁이론으로서도 생태 근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극복의 이론으로서도 뚜렷하지 못한 이름짓기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자본주의 발상지인 영국에서조차 노동자를 비롯한 인민들은 새로운 체제인 자본주의에 어쩔 수 없이 적응하면서 동시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을 만들고 다양한 사회주의 사상을 발전시켜 왔다. 이를 영국의 이중과제론이라고 이름짓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이와 관련해서 백낙청의 이름짓기 가운데 가장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적당한 경제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세계가 탈성장에 합의하지 않은 상황에서 양적 성장을 아예 멈추면 "탈성장은 고사하고 오히려 '약탈적 축적'의 표적이 되는 사태"가 예견되며 더구나 가장 취약한 계층이 가장 혹독하게 당하게 마련이다. (중략) 체제 전환을 꿈꾸는 사람들이 탈성장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 시기와 지역에 따라 얼마만큼의 성장을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적당한지를 연마하자는, 경제성장 문제를 반체제운동 전략 차원으로 바꾸는 경제에 대한 관념의 전환을 이룩하려는 일에 다름아닌 것이다. (중략) 탈성장이 인류 생존에 아무리 필요한 것이라도 그것이 대중의 먹고사는 문제를 도외시한 당위론에 머문다면 대중은 탈성장론을 일부 '잘난 사람들의 거룩한 말씀' 정도로 들을 뿐 적극적으로 함께할 마음이 안 생길 것이 분명하다."

-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백낙청 지음, 창비 펴냄), 350~351쪽


* 위 글은 웹진 <나비>에도 실렸습니다.(☞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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