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민의 복지, 즉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나라를 복지국가라고 한다. 우리는 우리가 나아가야할 사회의 지향점으로 복지국가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가 되었다. 필자는 한국이 지금보다 더 좋은 복지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복지국가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관점이 필요하고, 여러 가지 생각이 만나서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복지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역에서 사회복지 운동을 실천하는 필자에게는 대한민국이 더 좋은 복지국가가 되는 과정에서 복지재정이 어떻게 늘어나야 하는 지에 대해 걱정과 우려가 있다. 복지의 현장에서 잘못된 관행과 의식, 착각에 기초해서 복지에 관한 돈과 자원이 쓰이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안타까울 때도 있었고, 화가 날 때도, 절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이러한 왜곡된 재정집행의 특징은 여섯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해결해야 할 분야에 돈을 쓴 것으로 책임을 다했고, 할 일 다 했다는 식의 인식.
둘째, 선거에 도움이 되는 분야에 집중적으로 재정을 집행하는 행태.
셋째, 언론에서 자극적인 보도가 되는 부분에 재정을 집행하려는 경향성.
넷째, 강력한 이익집단이 요구하는 곳에 재정이 집행되는 편향성.
다섯째, 세금은 공돈이며, 아낄 필요가 없고(아끼면 안 된다), 정해지면 그대로 쓰면 된다는 의식.
여섯째, 미래세대의 문제는 미래세대에게 미루는 방식으로 재정을 집행하는 폭탄 돌리기.
저출산 대책 실패가 주는 시사점
한국은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 여러 가지 육아지원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2007년부터 어린이집 비용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저출산 대응 정책이 시행돼 현재는 매년 40조 원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큰 돈을 썼음에도 2006년도 1.1명이던 합계출산율이 2021년도 0.82명으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저출산 대응 재정 집행을 본격적으로 수행했음에도 출산율은 매년 급격히 떨어진 것이다. 최소한 출산율의 유지를 목적으로 재정을 집행했지만 그 효과는 전혀 없었다. 현재의 정책은 실패한 것이다.
정책가들이 돈을 쓰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고 15년 이상 재정을 집행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리고 매년 들어가는 40조 원은 되돌릴 수 없다. 그 40조 원에는 난임 가정의 불임치료에 정말 필요한 예산은 매우 적게 편성되어 있다. 병원을 찾는 난임 부부만 20만 명 정도 된다. 수백에서 수천만 원의 개인 비용이 들어가는 이러한 부분을 국가가 최대한 지원하고 연구한다면 난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고, 가정의 행복도를 올릴 수도 있다. 그러함에도 이 문제 대응이 저출산 대책이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복지재정, 제대로 늘려야 더 좋은 복지국가 된다
한국사회를 저부담 저복지 국가라고들 한다. 한국의 2019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사회복지지출 비중은 12.2%며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20.0%에 현격히 미달한다. 이에 많은 이들이 최소한 중부담 중복지 수준의 OECD 평균은 맞추어야 하며 이를 위해 복지재정을 계속 확장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선거 때가 되면 많은 정치인들이 이를 근거로 다양한 복지를 늘리는 공약을 남발하는 배경이다. 한국의 국가재정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탄탄하며 복지 재정을 확대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며 제대로 된 검토 없이 복지재정을 늘려나간다. 물론 복지재정은 당연히 늘어나야 한다. 문제는 저출산 대책 문제에서 보듯 복지비용은 늘어나지만, 애초 목적한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는 재정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포퓰리즘이 아님을 확인하려면 확충하는 재정으로 인한 기대효과를 정확히 설명 가능하고, 그 결과를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복지재정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1990년도 대비 4.1배, OECD 평균 1.21배). 복지 재정이 늘어나면, 국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국가가 충분히 보장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나라가 OECD 평균수준의 재정지출을 하게 되어도 세계최고의 자살률 국가, 청소년들이 불행한 나라, 각자도생의 나라,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초저출산 국가, 국민들의 삶이 불안한 나라라는 현재의 한국사회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 좋은 복지국가가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스웨덴만큼, 덴마크만큼 복지재정은 늘었는데, 국민의 행복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건강한 복지국가라고 할 수 없다.
기초생활보장과 공공 일자리는 사회적 안전망이자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6월 들어 기초생활수급자가 200만 명을 넘었다. 계속해서 수급의 범위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이다. 물론 부양의무제 폐지 등 여러 규제를 없애서 실질적인 국민들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기 위해 수급 범위를 늘릴 필요는 있다. 그런데 수급자가 늘어나는 만큼, 수급자가 자립하는 경로도 같이 있어야 한다. 현실에서는 일할 능력이 있는 조건부 수급자가 제대로 된 지원을 받아 자립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수급자의 자녀가 대를 이어 수급자가 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시설에서 독립한 보호 종료 청년이 20대부터 수급자로 살아가는 경우도 많다. 가정폭력 등의 피해를 입어 공황장애, 우울증을 앓는 한부모 가정 자녀도 있다. 수급자가 되어 60년을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번 수급자가 되면 일을 하는 것보다는 일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기에 이런 일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보통 인간은 더 나은 삶을 위해, 혹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일을 한다. 수급자에게 그런 동기가 생겼다면 일자리를 보장해주어 수급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더 좋은 복지가 아닐까? 수급자로 하여금 일을 하지 못하게 하고, 고립시키고 수급에 의존하게 만드는 시스템의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정책당국이 수급자 구분을 위한 빈곤 기준만 가지고 예산을 집행하는 것으로 정책목표를 달성했다고 여긴다면, 디딤돌만 있다면 충분히 자립할 수 있는 수급자도 계속 자신의 무기력, 무능력을 증명하는 삶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는 공공일자리에서 더 심각하다. 고용보장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정부지원 일자리는 10개월 단위로 편성된다. 2022년 정부의 일자리 예산은 31조1331억 원 규모로 편성되었고, 그중 노인 일자리와 자활근로에 3조 원 정도가 쓰이고 있다. 공공 일자리의 경우 형식적으로 일이 주어지고, 일자리를 만들어 급여를 지급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일의 성격이나 가치, 효용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일을 하는 사회적 약자의 자립을 위한 디딤돌이 되지 못한다. 자활일자리에서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다음 더 좋은 일자리로 연결되어 계속해서 자립하는 삶을 지원하도록 해야 하지만, 우리의 공공 일자리는 몇 명에게 제공되었는지만을 목표로 하고, 그것이 실적으로 쌓이면 목적이 달성된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바꾸는 지원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모두를 위한 사회보장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를 복지국가라고 규정할 수 있게 한 사회보장도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 사회보장은 국민연금, 산재보험, 고용보험, 건강보험, 요양보험으로 구성되는데, 우리나라의 사회보장은 공무원, 교사, 대기업 근로자 등 제대로 된 급여를 보장받는 직장인 중심의 시스템이다. 안정된 기득권 중심의 보장체계라고 할 수 있다. 사회보장에서 보장하는 산업재해로 중도장애인이 되는 경우와 일반 사고로 장애인이 되는 경우 엄청난 차이를 갖는다. 산업재해로 장애인이 되면 본래 받았던 급여가 보장되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는 반면, 일반사고로 장애인이 되면 최소한의 장애연금과 관련 지원만으로 살아가게 된다.
유족연금의 경우 더 심각한 차이를 갖는다. 산업재해로 인정되어 유족이 받는 급여와 일반재해로 판정되어 받는 보상은 전혀 다르다. 누군가는 한창 일할 나이인 30, 40대에 장애인이 되어 살아가야 하는데, 산업재해의 여부에 따라 그 삶이 달라지는 것이 타당할까? 유족연금도 마찬가지다. 한 집안의 가장이 사망했는데, 개인적인 사유로 사망한 것과 업무상 재해로 사망하는 것에 따라 남은 가족의 삶이 달리 결정된다면 좋은 복지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에 사는 국민이 어떻게 다치든, 어떻게 죽든 상해 당사자나 그 유족에게 최소한 원래 살던 정도와 크게 다르지 않는 삶을 보장하는 것이 복지국가가 아닐까? 기득권만 보장하는 사회를 복지국가라고 할 수 없다. 반대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중심으로 지원을 충분하게 하도록 설계하고 실행하는 것이 국가 전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정책이 되리라 믿는다.
장애인복지 예산은 늘어나야 한다. 단, 제대로!
장애인 복지관련 예산도 지금보다 더 많이 늘어나야 한다. 2017년 기준 한국의 장애인복지 예산비율은 0.6%로 OECD 평균 2.02%보다 현격하게 낮다. 그런데 한국의 장애인 출현율은 5.4%인데 반해 OECD 평균 장애인 출현율은 13.8%이다(2014년 장애인통계,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 OECD 국가에 장애인이 한국보다 많은 것이 아니다. 장애에 대한 정의와 기준이 달라서 생긴 결과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한국 정부가 장애인 복지예산을 무엇을 근거로 정의하는 지, 장애인 판별에 국제적으로 공통된 기준을 쓰는 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한국 정부의 장애의 정의, 분류 기준이 국제적 기준과 달라서 장애인 출현율이 과소 집계된다면, 한국의 관련 지표를 단순히 국제 사회와 비교하는 것은 현실을 왜곡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에 비해서 예산을 적게 쓴다는 단순한 분석만으로 예산을 늘린다면, 저출산 정책의 실패 사례처럼 예산은 늘어났지만 실질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는 현실을 맞이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장애인 탈시설과 관련된 예산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장애인 거주시설에 사는 장애인은 3만여 명 정도다. 그런데 시설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 가족의 수는 그 2~3배 정도 된다. 가족과 함께 살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신 장애아동과 청소년, 부모님이 노인이 되어 더는 함께 살기 어려운 장애인 가족의 돌봄 부담을 사회가 맡아야 하는데, 탈시설 예산에는 그에 대한 검토가 없다. 최중증의 장애인일수록 가족의 어려움은 가중되지만, 현재 우리 사회는 제대로 된 지원책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돌봄의 극한에 몰린 장애가족이 극단적 선택을 하거나 지역과는 상관없는 미인가시설로 장애인을 보내게 된다.
돌봄이 필요한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지원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장애인가족을 지원하는 주간보호센터, 단기보호센터, 장애인지원주택, 거점시설 등 다양한 지원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단순히 예산을 늘린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 큰 걱정은 장애인 예산이 늘었는데도 장애인들의 삶이 바뀌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해결해야할 과제를 올바로 정한다면 장애인 국가 책임제가 그리 먼 훗날의 과제가 아닌, 지금 여기 바로 해결을 목표로 해야 할 아젠다일 것이다.
청소년, 가장 소외된 복지의 사각지대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삶, 나아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을 국가의 책임이라고 여긴다면, 그 대상의 최우선 순위는 아동과 청소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정상과 표준을 매우 제한적으로, 또 획일적으로 구분한다. 우리나라에서 건강한 청소년은 학교에 대한 다니는 청소년, 즉 학생이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만이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며, 그 정상경로에서 ‘이탈’한 청소년은 개인에게 문제가 있는, 문제를 일으키면 처벌을 해야 할 ‘무엇’으로 우리 사회는 규정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에게는 1인당 1400만 원 정도의 교육비를 지출하고 있다. 그에 비해 학교를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에게는 1인당 55만 원을 지출한다. 돈을 쓰는 것이 관심의 척도라면, 우리 사회가 학교를 다니지 않는 청소년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를 알 수 있다. 학령기의 모든 아동과 청소년은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고 교육받을 권리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그들은 아동과 청소년으로서의 권리를 누리고 어른(사회)의 보호아래 건강하게 성장해야 한다. 가정과 학교라는 기본적인 보호망이 실패했을 때, 그 다음의 모든 것을 오롯이 청소년 개인이 담당하는 사회가 한국 사회이다. 학교가 실패하고 가정이 실패해 청소년이 학교와 가정을 나왔다면 결국 어른들이 실패한 것인데, 그 책임은 청소년인 당사자가 지고 있다.
학교폭력으로 은둔형 외톨이가 된 한 친구를 돕다 알게 된 일이다. 초기의 잘못된 상담과 학교에서의 획일적인 서비스로 아이가 상처를 받고 부모와 사회 모두를 거부했다. 어렵게 지역의 상담복지센터에 연계하여 찾아가는 상담사가 있어 아이가 사는 집에 직접 방문하여 아이와 공감하는 상담을 하니 아이가 좋아지고 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12주 프로그램이다. 12주가 지나면 더는 지원되지 않는다. 아이가 상처를 치유하고 스스로의 노력과 주변의 도움으로 다시 사회와 관계 맺는 시간을 12주로 한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효과가 좋은 프로그램임에도 제대로 효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실적주의에 있다. 상담인원 수, 건수가 정해지고 그것을 달성해야 센터는 좋은 평가를 받는다. 은둔형 외톨이의 회복은 상담복지센터가 잘했다는 기준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에 아이에게 그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12주를 해야 실적을 쌓을 수 있기에 해당 기간만 아이를 도운 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멈추는 예산집행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재정집행에서 이런 경우는 참 많다. 장애인 고용에서 실적 집계 기준은 다음과 같다. 어떤 장애인이 연초에 취업하여 그 회사를 계속 다니면 1건의 실적으로 잡힌다. 그런데 연초에 취업했다 퇴사하고, 또 취업하고, 퇴사하고 또 취업하면? 3건으로 실적이 잡힌다. 어디가 일을 더 잘한 것일까? 현재는 계속 일하는 장애인을 취업시킨 곳이 아니라 취업과 퇴사를 반복하여 3건의 실적을 올린 곳이 더 좋은 평가를 받는다. 여성가족부가 상담복지센터를 평가할 때, 상담건수 수천 건을 달성해야할 실적으로 제시한다. 자살하려고 하는 어떤 아이를 계속해서 집중 상담하여 아이를 살려도, 이는 건수라는 실적과 연계되지 않으면 좋은 실적으로 평가받지 못한다. 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한 아이가 센터와 상담하려면 보호자인 아버지의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 1년에 청소년에게 1인당 55만 원을 쓴다는 것은 이러한 전적인 무관심, 무지에 기초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청소년이 잘 곳이 없어서 가출팸을 이루고, 성매매를 하고, 절도를 하는 등의 범죄와 일탈이 발생한다. 그것은 어른의 보호와 성장이 필요한 미성년인 청소년의 몸부림이다. 어른이 제공하는 안전하고 좋은 환경이 없어서 스스로 살기위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처럼 그들에게 1인당 1400만 원을 쓰는 관심을 우리 사회가 갖는다면, 먹을 것과 잘 곳을 구하기 위해 성매매를 하거나 절도나 강도를 하지 않는 청소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려운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자신의 삶을 바치는 어른들(단체)이 있다. 그런데 그런 곳에는 재정이 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리고 너무나 부족하다. 우리사회의 가장 큰 사각지대는 청소년 복지의 영역이다. 선거에 도움도 되지 않으니 청소년은 계속해서 복지의 영역에서 배제된다.
선진국인 대한민국에서 아이들이 배가 고파서 절도를 하고 잘 곳이 없어서 성매매를 하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우리는 이를 그 청소년의 실패로 여긴다. 청소년이 일으킨 문제에 강한 처벌을 하면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라고 집단적으로 생각한다. 공정과 정의는 개인으로 하여금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며, 그러한 문제가 생기게 된 사회환경이나 제도의 문제, 가정과 학교의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지원하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청소년들이 한번 두 번 소년원과 교도소를 학교삼아 다니다가 전과 10범, 20범의 중범죄자가 된다. 청소년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사회는 계속해서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로 변화해간다. 가출팸 출신들이 범죄의 온상이고, 은둔형 외톨이가, 정신장애인이 묻지마 범죄를 저지르면, 강한 처벌을 해야 정의는 실현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개인의 책임일 뿐이다.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적어도 5년 10년의 시간동안 사회는, 어른은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사랑도, 도움도 주지 못했지만, 정의구현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강하게 처벌하는 데만 관심을 쏟는다.
미래세대를 위한 연금개혁
마지막으로 연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서 연금개혁을 해야 한다고 한다. 더 많이 내고, 더 적게 받는 개혁을 해야 지속가능한 연금이 되고, 적지만 노후를 책임질 수 있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필자의 아버지는 국민연금 초창기에 5만 원 정도를 10년간 불입하고 자격을 얻으신 것으로 알고 있다. 5년 정도 유예하여 더 좋은 조건으로 연금을 받게 되셨다. 20년 전에 35만 원 정도를 받으셨고, 현재는 55만 원 정도를 받으신다. 불입한 총액에 비해 5배에서 10배 이상을 받고 계시다. 장인어른은 교사로 은퇴하시고 350만 원 이상의 연금을 받으신다. 국민연금은 초기에는 가입을 독려하는 데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설계됐다. 그러나 연금개혁은 현재 미래세대보다 너무나 유리하게 설계된 현재의 연금은 그대로 두고, 미래에 받는 것을 개혁하는 것을 전제로 논의가 된다.
현재 세대가 미래를 위해서 양보하는 방법은 없을까? 현재의 50대는 단군 이래 가장 부유한 세대라고 한다. 산업화세대가 성장시키고 발전시킨 경제와 사회를 민주적이고 시스템적인 사회로 만든 것이 민주화세대, 50, 60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30대 이하의 미래세대는 50, 60대인 부모세대보다 못사는 미래를 자신들의 미래로 생각하고 있다. 더 나은 미래를 희망하고 만들어가기 보다는 절망하고 더 좋은 미래를 그려내는 노력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청년세대가 아닌지 걱정이 든다. 단군 이래 가장 잘 산다고 하고 여유가 있는 부모세대가 청년과 아이들을 위해서 손해를 보고 미래를 위해 도움을 주는 방법은 없을까? 말로만 걱정하면서 청년수당 등 미래에 부채로 자신들이 갚아야 하는 그런 지원이 아니라 현재의 파이를 다음 세대와 나누는 연금의 개혁, 재정의 개혁이 진행되면 청년세대도 미래에 희망이 있다고 여기지 않을까? 우리의 자식들, 손자, 손녀들이 더 잘사는 사회, 돈은 덜 벌어도 행복한 나라에서 살게 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잘사는 50, 60대 세대, 집도 있고 연금도 있는 기득권이 양보하면 청년에게 희망이 생기고 미래는 열린다고 믿는다. 부모세대의 파이를 나누고, 복지국가를 제대로 만들어서 돈이 좀 부족해도 행복하고 잘 살 수 있는 사회의 틀이 만들어져야 한다. 삼성과 엘지, SK에 기대어 GDP를 올려서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애플과 아마존, 구글 등 최고의 대기업들이 더 잘 되는 미국이 왜 복지국가가 되지 못하는 지 생각해보라. 복지국가는 국가의 구성원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고 누구에게 기대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성원들의 연대와 협력, 신뢰에 기초해서 복지국가는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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