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형님께서 이승을 떠나신 후 49재 되는 날, 남은 사람들이 형님의 혼령을 편안히 보내드리고자 정성으로 모였습니다.
돌아보니 형님과의 만남인연, 시절인연이 어언 51년이었습니다.
1971년, 노동자 조직 20만명이라는 큰 뜻을 가운데에 놓고 원주 봉산동 장일순 형님 댁에서 만났습니다.
곧바로 가까운 동네가게로 옮겨가서 소주를 대여섯병 마셨지요.
그 때는 기본이 2병,
노동자 조직보다는 작품구상 얘기가 호기롭고 장쾌하였지요.
세월은 빠르고 세상은 소연한데 마음은 처연합니다.
가뭄과 폭염을 걱정하며 숲을 바라보니, 바람에 나뭇잎만 흔들릴 뿐...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는 정해진 이치를 왜 모르겠습니까?
인연이 무겁고 정이 쌓여, 이 생각 저 생각에 누구 말대로 '한조각 구름이 일어나고, 스러지는 것'이 정녕 우리들 인생의 모습이던가?
그러하면서도 그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20여년 전, 형님이 단학 관련 명상수련 단체를 비판했다고 '테러' 어쩌구 저쩌구 했을 때, 형님이 제가 있던 산골 흙벽돌집에 한 50여일 머물렀을 적이 있었지요.
그 곳 춘천 인근에도 있는 '부용산' 자락이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형님은 그 때 몇 번이나 봉황이라는 큰 새 얘기를 꺼내셨지요. 허나 저에게는 봉황얘기보다 형님이 새벽 기도를 두 세 시간씩 정성되게 하시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형님! 얼마나 몸 고생, 마음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오죽하면 형수님께서 저보고 '내가 먼저 죽으면 세상물정 모르는 김시인이 너무 고생 할 것이니, 그가 먼저 죽고 자기가 뒤따라가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지요.
형님! 말년에 여러 가지 병이 겹쳐 너무 고생이 크셨습니다.
유신독재 때의 혹독한 감옥살이로 몸과 정신이 엉망이 돼서 정신병원에 드나들고, 온갖 처방을 찾으셨지요. 저도 홧병, 교통사고, 암수술 등으로 몇 달 몇 년을 병원을 다니다 보니 몸의 고통을 어느 정도는 압니다.
몸이 아프면 정신도 아픈 것이고, 마음이 아프면 몸이 더 나빠지는 것...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그리 무심하게 또는 험한 말을 하지요.
형님!
1980년대 초 형님이 외치고, 쓰고, 조직했던 '생명운동'은 여러 갈래로 이름은 다르고 조직 형태나 활동 내용은 달라도 생명의 큰 길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하긴 생명의 운동양식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형님이 광주민중항쟁 이후의 그 암울했던 시절에 벼락 때리듯 '생명운동'의 큰 깃발을 올렸을 때 우리는 정말 흠쾌(欽快)하게 뜻을 같이 하였습니다.
저는 그 때 카톨릭농민회(가농) 조직부장 시절이었지요.
많은 이들은 '생명운동'이라면 원주 장일순 선생을 먼저 생각하는데, 제가 알고 겪은 바로는 '생명운동'은 김지하 시인이 길을 열고 뜻있는 이들이 생명체의 특성대로 제 각각 역할을 분담하여 싹을 틔우고 물을 주어 가꾸었지요.
이를테면 이런 큰 인물들이 나섰습니다.
•김지하 - 생명사상, 생명운동의 깃발을 말하고 쓰고 초기 조직하다.
•장일순 - 쉬운 말로 이를 대중 특히 천주교 대중들에게 전파하다. 그 후 더 많은 이들을 만나다.
•박재일 - 생명살림 협동체 한살림을 만들다.
•지학순 주교 - 김지하 장일순 박재일을 후원하고 초기 한살림을 돕다.
•이건우 - 생명운동이 협동조합운동으로 조직화되도록 생협(생활협동조합)을 교육하고 안내하다.
•가농 - 유기농업을 중심으로 생명공동체 운동을 실천하다.
정말 많은 분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생명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한살림운동, 생명공동체운동, 생명평화운동, 녹색운동 등...
정말 우리 주변의 알게 모르게 뛰어난 선각자들과 중생, 뭇 생명과의 생명운동이었습니다.
형님!
엄청난 파고로 닥쳐올 기후위기, 언제 다시 재발할지 모르는 팬데믹 위기, 생명의 위기가 심각하고 심각합니다.
상황은 절박하고 시간은 촉박합니다.
온 마음 온 몸으로 형님의 본뜻을 이어받아 생명의 길로, 생명살림의 대전환으로 가겠습니다.
형님! 편히 쉬소서.
4355년 6월 25일
정성헌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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