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 슬프다! 김지하 시인이 지상의 나날을 헤치고 간 서사는 도대체가 황망하기 짝이 없다. 온통 파란만장뿐이요, 온통 적막강산뿐이었다. 한 번도 그 앞에 엎드릴 틈을 주지 않았다. 나는 거기서 얻은 생채기 하나를 지금도 젊은 날의 화인처럼 가슴에 새겨놓고 있다.
영원히 지우지 못하리라.
2.
31년 전 딱 이 무렵이다.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하고 외칠 때 나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청년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 정말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청년위원장은 '노동해방문학'으로 수배 중이고, 한국 지식인 사회는 소위 '문명사적 대전환기'라는 유행어 아래 극단의 침체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지상의 모든 가치 지향적 좌표 위에 역사를 회의하는 비관의 노을이 붉게 번져가던 무렵이었다. '역사의 종언'이라더니 이게 그 얘기인가? 더구나 그 글은 조선일보와 민족 지성 간의 격전을 불사하는 도발의 무기로 사용되었다. 나는 여기에 누군가 응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속한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현신이고,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1974년 김지하를 구명하려고 전선에 뛰어든 선후배 문인들이 만든 결사체였다. 김지하 시인이 이를 버린다 함은 당신의 과거를 버리는 것이므로 '살신성인'의 선언이 된다.
나는 대들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의 굿판을 치워라'가 어떻게 생명 운동이고 김지하 사상인가? 자민족 중심주의, 민중 중심주의, 인간 중심주의 따위로는 '생명'을 얘기할 수 없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정신도 전선을 떠나고, 엘리트주의의 수렁에 빠지며, 그것이 넘어야 할 고개를 함께 넘는 후생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김지하 선언은 한국 토착 사상의 위기를 예고하는 것이다. 동일한 시대에, 동일한 장소에서 '생명 사상'을 펼친 문익환 목사는 '죽음을 살자'라고 외치고 있었다. 전태일은 '살림'의 역사에 불을 붙인 새싹의 넋이고, 전두환은 '죽임'의 역사를 장수한 낙엽의 목숨이었다. 나는 김지하 미학을 사사한 신도로서 강 건너의 스승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이 하루빨리 조선일보 곁이 아니라 빨리 '남(南)'의 자리로 돌아와야 우리를 꾸짖을 수 있다."
나는 삼십 년이 지나서도 그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
3.
나는 기억한다. 1980년 5월, 아직 피 냄새가 가시지 않은 도청 앞 분수대 옆에서, 분노와 공포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한 구멍에서 세 줄기, 네 줄기씩 솟구쳐 오르는 물줄기를 보면서 나는 떨면서 감격했다. 불후의 산문 <고행 1974>는 김지하가 허약한 '한국문학'의 그늘을 장엄하게 탈주하는 광경을 뜨겁게 묘사한다. 흑산도에서 체포되어 목포를 통과할 때 맞닥뜨린 사람들이 그에게 강도나 절도범을 대하듯 연민하는 것을 느끼면서, "저주받은 땅, 전라도의 아들답게 수갑을 차고, 천대받는 사람들 '하와이'의 시인답게 한과 미칠 듯한 분노와 솟구치는 통곡을 가슴에 안고" 피억압자의 일원으로 복귀했음을 알린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나의 내부가 비어 있다는 걸 알았다. 오지의 아들이여. 천상에서 내려와 지옥에 발을 디뎌라. 구원의 문이 보일 것이다. 나는 아둔한 학승처럼 날마다 김지하 죽비에 두들겨 맞았다. 그 숨 가쁜 '고행'의 길을 따라 미학에서 정치로, 정치에서 사상으로 한없이 확장되는 세계를 보면서 거듭거듭 깨달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전봉준의 형틀에서 최제우의 길을 찾아낸 실로 경이로운 사상의 대장정이었다. 김지하는 심신이 부서져도 멈추지 않고 그 길을 파헤치고 추적해간 위대한 스승이었다. 조동일과 판소리와 강증산과 김일부와 정감록과 또, 또…. 그것이 나의 길이고, 나의 학교였다. 내 앞에, 내 옆에, 또 내 뒤에 얼마나 많은 '지옥'의 자식들이 태어났는지 모른다.
이 같은 역사가 어찌 지나간 추억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생각하는 20세기 한국 예술정신의 상상봉은 김지하가 이끌고 이문구가 기록한 <<김지하 사상기행>>이었다. 그 장쾌한 역정의 발화점이자 꼭짓점 위에 김지하라는 나침반이 새겨진 사실을 나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그로 인해 나처럼 캄캄한 오지의 영혼도 세계와 대화할 수 있고, 저 먼 나라 흑인 작가들과 연대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그것은 김지하가 '남'이라고 말했던 '나머지 사람들', 예컨대 대지 위에서 땀 흘려 일하고 사랑하는 '목숨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그들의 천한 이웃'으로 뜨겁게 다가갈 근력을 충전 받는 지상 최후의 보루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비록 가난하게 살지라도 정서적 조국과 영혼의 혈통을 함께 나눈 구도자의 음성을 듣는 기쁨은 얼마나 컸던가? 남모를 골방에서 세상이 어지럽고 혼미할 때마다 형형한 눈빛으로 개벽을 이야기하는 가슴은 얼마나 행복했던가?
나는 당시에도 그 길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젊은 벗이 김지하에 답한다>를 읽고 꾸짖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것이 '김지하 사상을 박제화하는 처사'라 생각했다.
4.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김지하 시인이 박정희기념관 반대 1인 시위를 마치고 작가회의 사무실에 들렀다. 어른들이 나를 불러 인사를 올리게 했으며, 김지하 시인은 '생명운동'을 위한 네 개의 고언 중 하나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인데, 하필 그 글을 1번으로 조선일보에 발표한 게 잘못이라고, 까마득한 후배들과 마주 앉아 사과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이후 몇 차례 선생님을 뵈었는데, 남북작가대회에 대한 구상을 전하는 날은 덕담을 주었고,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축제를 앞두고는 그 일이 성사되지 못할 거라 비관(悲觀)했다. 그러나 만물이 살아 숨 쉬는 틈에서 다들 바빴고 주요 행사를 실행할 시기에 주파수를 맞출 수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한편으로 그 위대한 역사 뒤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만신창이가 된 아버지를 둔 자식처럼 어둡고 우울한 가족들의 탄식이 있다는 걸 깨닫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지하의 적손으로 산다는 건 외롭고 슬픈 일이다. 그 위대한 사상의 외피를 둘러싼 그림자를 초월해 언제 어느 때든 경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래고 오랜 고문 후유증으로 거동이 편치 않으니, 후학들은 김지하 시인이 필요할 때마다 반드시 모시러 가고 바래다 드리고, 또 누군가 곁에서 부축해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김지하 사상의 대장정을 가로막는 것은 언제나 김지하 시인의 문화형식, 즉 센세이셔널리즘이었다. 내가 아는 전라도 선배들의 공통점은 늘 '전폭적'이라는 점이다. '위선'을 미워하다 못해 '위악'을 양식으로 삼아버린 그 아슬아슬한 충격 요법 때문에 나는 늘 가슴을 졸이곤 했다. 세상은 여전히 척양척왜의 파도 소리를 들어야 하고, 가난한 이들은 날마다 개벽의 현주소를 찾아다녀야 한다.
나는 이를 위해 '양 개벽'에서 '음 개벽'으로, '동세 개벽'의 시대에서 '정세 개벽'의 시대로 이동시키려 한 김지하 시인의 의지에 뜨겁게 감격했고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선생님은 어떤 날은 맑고 어떤 날은 흐렸다. 어떤 날은 천국이었고 어떤 날은 지옥이었다.
야속한 일이다. 나는 내게서 김지하라는 스승을 빼앗아간 것이 부와 권력과 명예 따위가 아니라는 점을 매우 중시했으나, 그럴수록 더욱 괴로운 것은 모든 게 국가폭력뿐이었겠는가 생각될 때였다.
내가 아는 김지하 시인은 늘 강고한 자기 존엄의 정점에서 살았는데, 그러나 그 때문에 개체의 나약함은 없었는가 싶을 때마다 나는 인간의 영혼이라는 광야가 너무도 넓고 커서 슬프고 무서웠다.
5.
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남조선 뱃노래>>를 펼쳐들곤 했다. 나는 지금도 가난한 생명을 조롱하는 난폭한 독재자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고 김지하 시인이 밝힌 사상의 남은 길을 어떻게든 뒤따라가고자 애쓰곤 한다. 그러나 인간은 아주 사소한 서운함만으로도 서로를 찾지 않는다.
긴 세월 동안 병마와 악전고투하는 김지하 시인만큼이나 한국의 민중의 자식들도 사상가를 잃은 공허감에 시달려왔다.
내가 김지하 시인의 부음을 듣고 막막한 것은, 위대한 역사적 인격 하나를 잃었다는 사실에, 그 많은 후학을 남긴 스승이 '나머지 사람들'의 '섬김'을 못 받았다는 사실에, 그 장엄한 생애가 국가폭력으로 만신창이가 되어서 말년을 너무 적막하게 보냈다는 사실이 마구 겹쳐온 까닭이다.
오호애재라, 우리가 끝내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별리의 순간을 맞은 결과는 옛 선각들의 지혜를 '지금 이 자리'로 끌고 올 지도자를 잃은 참화이니, 이제 자칫하면 김지하의 역사가 '학문'이 되거나 소수의 '운동'으로 방치될 위기 앞에 놓여 있다. 나는 여전히 그 슬픔과 더불어 이기적 생각을 거두지 못한다. 아! 이제 누가 내게 그 길을 가르쳐줄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오늘 시인의 그림자 뒤에 엎드려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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