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1960년대 중엽 김지하를 처음 알게 됐을 때 그는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박정희 정권의 대일 굴욕외교를 반대하며 궐기한 학생운동 속의 모습이었습니다. 학교를 갓 졸업하고 어느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근무가 끝나면 복학한 친구들을 만나러 동숭동의 농성현장으로 가곤 했었지요. 그때 김지하의 쉰 듯한 목소리가 뿜어내는 뜨거움을 나는 화상(火傷)의 위험처럼 느끼며 외곽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가정교사로 숙식을 해결하며 주로 서구문학의 좁은 울타리에 갇혀 지내온 나 같은 사람의 눈에는 당시 학생운동의 주역들이 외친 민족문제의 심각성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청맹과니였던 거지요.
다른 하나는 시인이자 미학이론가로서의 김지하였습니다. 1964년 5월쯤이던가, 을지로 5가 뒷골목의 어느 술집에서 시화전이 열렸고, 거기서 나는 아마 처음으로 金之夏라는 이름으로 쓰여진 그의 시를 보았습니다. 그의 시뿐만 아니라 그 시화전에 나온 시들 대부분은 그동안 내가 읽어오던 우리나라의 시적 관습에서 벗어난 낯설고 실험적인 것들이었습니다. 후일 김지하 본인은 당시 자기가 슈르(초현실주의)풍의 모더니즘 계열 시를 썼다고 하더군요. 여하튼 나에게는 친숙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뒤 나는 그의 논문 발표를 듣게 됐습니다. 박종홍 교수가 늘 철학개론을 강의하던 문리대 대형강의실에서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정규 강의가 끝난 뒤의 어둑한 분위기가 지금도 아련히 떠오릅니다. 제목은 <추(醜)의 미학>. 칸트와 헤겔로 대표되는 전통미학 바깥을 더듬는 내용이었는데, 미학 이론에 입문조차 못한 나에게는 그의 대담한 이론 탐색이 낯설뿐더러 적잖은 충격이었습니다. 지하 자신도 후에 고백한 바 있지만, 사실 그 발표는 헤겔의 제자인 19세기 독일 철학자 칼 로젠크란츠(Johann Karl Friedrich Rosenkranz, 1805~79)의 저서 <추의 미학>(Ästhetik des Häßlichen, 1853)에 근거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그는 로젠크란츠라는 서구학자의 이론을 수용하되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지하는 로젠크란츠의 미학을 발판으로 우리 고유의 전통예술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이론적 확장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추의 미학’이라는 동일한 이름 아래 로젠크란츠와 김지하는 사뭇 다른 내용을 말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다들 알다시피 지하는 1960년대 중엽부터 서구 모더니즘에 여전히 한발 담그고 있으면서도 조동일 학형과의 다양한 교류를 통해 탈춤이나 풍물 또는 민요나 판소리 같은 우리의 전통예술의 중요성에 눈을 떴고, 이용희(李用熙, 1917~1997) 교수의 회화사 연구에 자극받아 조선 후기의 풍속화와 실경산수(實景山水)를 주목하게 됐습니다. 요약하면 김지하의 ‘추의 미학’은 초현실주의 같은 모더니즘 서구예술로부터 우리 자신의 민족·민중미학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론적 초석을 놓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지하와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가 입원해 있던 역촌동 병원에도 몇 번 갔었지요. 수색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포수마을(지금의 서부병원 근처)에서 내려 논밭을 지나 산길을 오르던 일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가 퇴원한 뒤에는 소설가 오영수 선생 댁을 여러 번 동행했습니다. 갓 결혼한 나의 셋방이 오선생 댁에서 아주 가까운 쌍문동 우이천변이었던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 오선생의 장남인 미대 후배 오윤의 남다른 미술적 재능에 지하가 흠뻑 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이 무렵 그는 미학과 선배인 김윤수 선생의 이론적 지도와 오윤 등의 실천적 뒷받침을 조직하여 과감하게 리얼리즘 미술운동에 시동을 걸었고, 알다시피 그것은 지난 반세기 사이 한국미술의 새 역사를 쓰는 데까지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1970년은 김지하 개인에게나 한국시의 역사에서나 특별한 해였습니다. 5월에는 담시 <오적>이 폭탄처럼 문단과 정치-사회를 강타했고 연말에는 시집 <황토>가 출간되어 시단을 흔들었지요. 그 어간에는 선배시인 김수영의 모더니즘에 기대어 자신의 시학(詩學)을 천명한 논문 <풍자냐 자살이냐>를 발표했습니다. <농무>의 시인 신경림이 문단에 복귀한 것도 그해 가을이었고요. 눈을 돌리면 열악한 노동현실에 항의하여 젊은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1960년대 말 김수영, 신동엽이 잇달아 세상을 떠난 데 이은 김지하의 눈부신 등장과 신경림·이성부·조태일 등의 새로운 활약은 우리 사회와 문학 내부에서 거대한 전환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이 전환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의식하고 가장 치열한 언어로 표현한 것은 김지하 자신이었을 겁니다. 시집 <황토>의 후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작은 반도는 원귀(怨鬼)들의 아우성으로 가득차 있다. 외침, 전쟁, 폭정, 반란, 악질(惡疾)과 굶주림으로 죽어간 숱한 인간들의 곡성(哭聲)으로 가득차 있다. 그 소리의 매체, 그 한(恨)의 전달자, 그 역사적 비극의 예리한 의식. 나는 나의 시가 그러한 것으로 되길 원해왔다. 강신(降神)의 시로."
여기 표명된 시인으로서의 강렬한 사명감이 전통예술인 판소리의 형식을 빌어 표현된 작품이 담시 <오적>입니다. 사실 이 작품은 그 정치적 파장과 사회적 폭발력 때문에 미학적 성취나 시사적(詩史的) 의의가 충실하게 검토되지 못했습니다. 지하 자신도 그 점을 아쉬워하곤 했지요. 당시 동아일보에 시 월평을 쓰던 나도 다음과 같은 소략한 언급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이 작품을 단순한 현실풍자로만 보아넘기는 것은 피상적 판단에 그치기 쉽다. 도리어 그러한 생생한 풍자를 유기적으로 자기 내부에 용해시킨 시형식적 달성이야말로 한국시의 앞날을 밝게 한다."(동아일보 1970.5.30.)
그야말로 단순한 암시에 불과한 촌평입니다. 여기서 내가 말한 ‘시형식적 달성’이란 박물관에 전시된 박제품 상태의 판소리 형식을 현실비판의 살아 있는 무기로 힘차게 살려낸 업적을 가리킵니다. 후일 김지하 자신도 <담시 전집>(솔 1993)을 간행하면서 "판소리의 현대화와 동학혁명 서사시는 내 꿈"이라고 언명한 바 있지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판소리의 현대화는 김지하가 평생에 걸쳐 수행한 여러 고뇌 어린 예술적·이념적 및 실천적 탐색의 일부, 즉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김윤수·오윤 등과 함께 시작한 새로운 현실주의 미술운동이 오늘날 한국 미술의 주류의 위치에 올라섰음은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국문학자 조동일의 이론적 지도와 창작자 김지하의 실천적 노력이 결합된 결과로 구체적 생기를 얻은 마당극, 마당굿, 탈춤, 풍물, 민요 등의 광범한 민중·민족연행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운동권 자체의 활동방식을 바꾸었습니다. 사회가 변하면 문화도 달라지지만, 1970년대 이후 30년 동안 한국에서는 거꾸로 대학문화가 사회의 변화를 선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지하가 불붙인 새로운 문화운동이 퍼져나가는 동안 그 자신은 불행히도 1970년대의 많은 기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그의 독방은 유례없이 혹독한 감시 속에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온전한 정신으로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후일 그는 고백했지요. "어느 날 대낮에 갑자기 네 벽이 좁혀들어오고 천장이 자꾸 내려오며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서 꽥 소리 지르고 싶은 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무리 고개를 흔들어봐도 허벅지를 꼬집어봐도 마찬가지였다. 몸부림, 몸부림을 치고 싶은 것이었다."
1980년 12월 마침내 그는 석방되었습니다. 하지만 집 앞의 감시는 계속되었고, 그리하여 그는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번뇌가 그 무렵에 나를 사로잡고 놓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원래 지하는 술을 좋아했어요. 그나마도 왕소금에 깡소주를 마시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니 애주가는 아니었어요. 출옥 후에는 더 심하게 술에 의존하게 된 듯합니다. 1980년대에는 내가 사는 대구에도 내려와 친교의 시간을 가졌고 그러다가 어느 때엔 우리 집에서 잔 적도 있습니다. 나로서는 그를 상대하기 버거웠어요. 나는 잠을 자러 들어가야 되는데, 그는 소줏잔을 들고 장광설을 그치지 않았으니까요. 새벽에 깨 보면 그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당시에 나는 충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회고록에 보면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에 의한 정신황폐증'이라? 내 병의 최초의 근원은 유년기의 사랑 결핍과 욕구 불만이었고, 최근의 원인은 과도한 알코올 중독인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오늘 나는 40년 가까운 지난날을 돌아보며 한없이 아픈 마음으로 시집 <화개(花開)>((2002)에 실린 그의 시 <횔덜린>을 읽습니다.
횔덜린을 읽으며
운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즐거워서 사는 것도 아니다’
어둠이 지배하는
시인의 뇌 속에 내리는
내리는 비를 타고
거꾸로 오르며 두 손을 놓고
횔덜린을 읽으며
운다
어둠을 어둠에 맡기고
두 손을 놓고 거꾸로 오르며
내리는 빗줄기를
거꾸로 그리며 두 손을 놓고
횔덜린을 읽으며
운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즐거워서 사는 것도 아니다'
횔덜린(Friedrich Holderlin, 1770~1843)이 누구인가. '신이 사라지고 자연과의 조화가 무너진 자기 시대'를 탄식하며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고귀한 신성을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소임'이라 보았던 시인, 그러나 바로 그 너무도 순결했던 소임 때문에 도리어 생애의 후반 37년을 정신착란자로 살아야 했던 시인 아닌가. 그 횔덜린을 읽으며 눈물 흘리는 또 다른 시인을 우리는 이제야 봅니다.
물론 지하는 1980년 석방 이후 30여 년 동안 괴로움과 외로움에도 불구하고 횔덜린처럼 정신착란의 감옥에 유폐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지독한 고통 자체가 동력이 되어 김지하 특유의 사상적 모색이 더욱 심오한 깊이를 얻게 됐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남긴 책들을 읽어보면 그는 젊은 날부터의 수많은 지적·현실적 자극들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종합하고 극복하여 어떤 사상적 화엄의 통일체, 그 자신의 용어로 '움직이는 무(無)'의 상태에 이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짓밟히고 학대받은 땅의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노래했던 첫시집 <황토>부터, 원주중학 동창(윤노빈)과 함께 읽은 헤겔의 <정신현상학>, 대학의 미학과에서 습득한 다채로운 서구의 예술이론들, 박정희 정권과의 목숨을 건 투쟁, 수운과 해월의 동학사상, 장일순 선생•지학순 주교와 함께했던 '원주 캠프'의 뜨거운 경험들, 정지용부터 이용악을 거쳐 김수영까지의 수많은 선배 시인들... 이 모든 자양분을 빨아들여 그는 '김지하'가 되었습니다.
물론 생애의 마지막 10여 년에 보인 그의 정치적 행보는 아쉽기 짝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고 비판했습니다. 그 비난•비판의 일정한 정당성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병고에 시달리다 노년에 들어선 김지하는 지난날처럼 그 비난과 비판 안에 들어 있는 합리적 핵심을 붙잡아 자신의 인간적 성장을 위한 거름으로 삼을 힘을 이미 잃었던 것 같습니다. 그 점이 김지하를 사랑했던 동료와 후배들을 더욱 가슴 아프게 합니다.
생각건대 김지하는 아직 미지의 존재입니다. 그의 80년 생애와 그가 남긴 방대한 저작들은 제대로 검토 연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선 필요한 것은 그의 삶과 죽음 모두를 끌어안는 포용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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