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시대 나의 대학시절은 시작부터 암담했다. 겨우 미술대에 입학은 했어도 미대 커리큘럼과 학풍이 싫었다. 그러다가 자유를 향한 저항의 시들을 만났다. 담시 '오적'은 김수영의 시와 수필에 매료되었던 청년학생에게 또 다른 신선한 공기같았다. 현대문학에선 외면한 운문적 설화문학과 이어지면서도 자유로운 시로 보였다. 동아일보 투고'1974고행', 김지하가 주필인 미술선언문 '예술은 현실을 반영한다.' 등은 암담한 예술학도에게 어두운 밤길 후레시 같았다.
저 암울하고 공포스런 유신시대 미술대학 생활에서 희망의 빛은 탈춤 풍물 마당극같은 마당예술이었다. 그러나 전통문화에서 미래문화를 눈뜨게 한것은 김지하 선생님이다. 판소리를 담시로 노랫말이 되게 만들어 이걸 '소리내력'으로 김지하석방을 외치던 임진택 창작판소리는 독재시대 긴장 속에도 통쾌한 웃음의 칼노래였다. 전통문화에서 저항문화로 당차게 탈바꿈 한 것은 박정희 유신권력에 저항한 김지하와 임진택 예술 '오적'부터였다.
유신시대 나는 데모보다 마당예술을 좋아했다. 당시 예술창작의 미래 전범을 김지하 이애주 채희완 임진택 김민기로 대표되는 대안적 저항예술에서 보았다. 서구 예술을 영혼 없이 모방하기에 급급하던 시대에 민중 편에서 저항하는 마당예술이 대안예술임을 믿게 된 것이다.
그래도 문학이야 모국어가 있으니 예술형식의 고뇌가 미술보다 덜 할 것이나, 미술은 모국어를 잃어 외래미술 모방이 너무 빠르고 순전 서양 모던이즘 따라하기 시대가 되어 있었다. 받아들이되 문예중심을 잃은 시대였다. 미대 다니며 탈춤부흥운동에 함께 했어도 중심잡기 숙제는 여전히 혼미해, 내 자신의 미술창작 길찾기가 어려웠다. 모던이즘 미술형식을 좋은건 받아들이되 우리 문화 중심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탈춤 탈 풍물 민요 불화 등 전통예술을 체험학습하기에 열심이었던 학창시절이었다.
5.18을 혹독하게 겪어내고 사회에 나온 터라, 찍혀버린 나는 오라는 곳도 갈곳도 없었다. 농민회에 들어가 만화를 그렸다. 1983년에는 애오개예술마당을 벗들과 차리고 거기서 미술동인 <두렁>을 창립했다. 자료집을 탈춤부흥운동 하신 신동수 선배님 지원을 받아서 냈다. 창립선언문에 "미의식의 본질은 신명이다."라고 말해버렸다. 무식하니까 용감하다고, 서구 모던이즘 미학을 신앙처럼 받들지는 못하겠고 섣부르지만 우리 미학을 찾았다.
그리고 십년후 1993년 내 조그만 개인전(미호화랑 초대전)에 김지하 선생님과 채희완 선배님을 토론자로 청했다. 예산도 없이 발제자로도 초대하지 못하고, ‘신명론’을 주제로 맨입으로 무조건 단도직입적으로 토론하자고 했다. 참 무례한 기획이었으나 이를 흔쾌히 받아주신 김지하 선생님이 먼 길을 오신 것이다. 사실 좀 뜻밖이었다.
나는 평소 지론대로 "모든 예술에 미적 본질은 신명이다" 하였다. 이에 채희완 선배님은 우리 민속춤을 근거로 한 '집단적 신명론'을 강조하셨다. 그러자 김지하 선생님은 이를 인정하면서 신명의 개념 정리부터 하신 바, "신명이란 생명에너지의 고양된 충족, 또는 확대된 자아"로 풀었다. 무명의 삼십대 당돌한 청년작가가 고명한 김시인과 채교수를 전시장까지 오시게 했으나, 두 분 선배님은 격의 없는 토론을 만들어 주셨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미술의 미적 본질을 '신명'으로 동의하였다. 이 만남으로 나는 미술행동에 큰 용기를 얻었다. 이 때 우리가 동의한 신명론과 생명예술론은 1969년 '예술은 현실을 반영한다' 정도로 보았던 리얼리즘적 민족미술론을 더 진전시킨 일대 쾌거라 생각한다.
동식물도 웃고 춤춘다. 생명은 모두 웃고 운다. 생명은 모두 영혼이 있으며 '생명 에너지가 확대된 자아'로 나타나는 예술은 다 신명이 있어 멋이 있다고 보게 되었다. 예술이 생물과 영혼으로 통하겠다는 데 누가 말리나. 미적 범주는 인간사회만 아니고 우주로 무한하다. 감금된 미(美)를, 인간 독점적 영혼을 해방하라. 인간중심주의 모던이즘 예술을 벗어버리고 동식물도 영성이 있음을 인정하며 자연을 '싱그러운 힘'의 영혼으로 모시는 일, 그것이 미(美)이다.
님의 생명사상에 힘입어 한국 최초로 신화테마뮤지움을 산촌 귀향 15년만에 세울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를 리얼리즘에서 포스트모던의 신화예술로, 아시아의 토템과 천지인 조상신의 영혼을 모시는 예술로, 치유의 숲삶을 구도로 안심하고 넘어가는 치유예술로 격려하신 분은 원주 동향에 사시는 김지하 시인이 분명하다.
님은 토지문화관에 유승국선생님을 모셔와서 주역을 공부하라고 베푸셨고, 강의 후엔 김영주 관장님과 같이하던 점심, 강원도 메밀막국수를 사주시던 그 시절이 지금도 눈앞에 그렁거린다.
김지하의 생명사상은 환경과 생명을 분립해서 보지 않는다. 환경이란 개념은 인간중심주의를 못 벗어났다.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고 자원을 일방적인 욕망으로 소비하고 책임 없이 쓰레기로 버리니까 자연 생명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 김시인은 "자연이 인간의 들러리냐?" 일갈 하시며 밥과 똥은 자연에서 순환한다며 이원론적 철학을 넘어선 해월사상 물아동포를 모신 일원론의 생명사상을 내놓았다. 최열 선배님도 일원론 생명사상을 받아들여 "환경은 생명이다."로 새롭게 슬로건을 내세웠다. 인간과 자연을 분립한 이원론의 한계, 서양생태주의의 한계를 일찌기 말씀하셨다. 그 한계로 말미암아 기후위기를 극복 못한다고, 그 때 이미 지구위기를 내다보신 듯하다.
님은 인문학과 예술을 겸비한 학예일치(언행일치)형 사상가다. 인문학과 예술을 이성적 인식론과 감성적 직관론으로 동시에 활용하신 분이다. 조선말 추사 이후 보기 드문 학예일치의 예술가다. 거기에 어문일치 문장으로 생명사상을 펼쳤다. 시인이며 예술가이기에 더 살아있는 문장의 담론이 되었다. 고담준론의 학문 개념들이 육신의 언어로 거듭나던 그의 담론들은 책으로 나올 때마다 흡사 회색의 벽을 부수고 숲을 새로 가꾼 듯 했다. 나같은 무지한 장인도 알아먹어서 흥미진진하게 정독하게 했다.
동학의 재해석은 맑스사상과 서양 생태주의 등 이원론에 기초한 외래사상에 또 빠져드는 우리 청년들에게 단비와도 같았다. 아시아 신화와 전통문화의 재해석은 오리엔탈리즘의 컴플렉스를 부수고 우리전통문화의 자존을 세우게 하셨다. 아시아 전통문화를 맹목적 신비주의나 미신 취급하며 폄훼 왜곡 경시로 혼탁했던 시절이다. <밥> <남녘땅 뱃노래>는 신비주의와 미혹의 무덤에 갇힌 우리 전통문화를 지엄한 자주성으로 빛을 보게 했다. ‘다시개벽’ 동학의 복권은 김지하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 부는 한류문화에는 뿌리가 있다. 사실 1960~70년대부터 시작한 문화운동이 한류의 뿌리다. 촛불혁명의 뿌리가 7,80년대 민주화운동이라면, 한류의 뿌리는 60년대부터 시작한 민족문화운동이다. 김지하와 조동일로 시작한 60년대초 민족‧민속문화연구에 이어서 김시인의 담시(譚詩, 이야기시),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채희완‧임진택의 창작탈춤과 마당극, 김민기의 시노래, 오윤과 미술동인 두렁의 민중미술로 발현된다. 김시인과 동시대 백기완, 심우성, 무세중 선생도 빠질 수 없는 한류문화의 원조들이다.
1980년대 대학축제는 탈춤부흥운동의 성찰로, 마당극에서 마당굿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대학은 통키타문화에서 대동굿으로 바뀌는 일대 문화개혁이 1980년대 전반기에 일어났다. 탈춤부흥운동으로 대표되는 마당예술운동이 한국민주화운동에서 문화선전대를 자처한 것도 사실이다. 문화운동은 민중 속으로 들어가 농민 노동자에게 전통시대 민중문화(풍물‧탈춤‧굿‧민요‧민중가요‧이야기시‧마당극‧걸개그림‧판화 등)를 전수하고 공유하기 바빴다. 이름도 빛도 없이 민중이 된 문화패는 아직도 문화운동 중이다. 지난하지만 영광스런 민족문화 한류의 길이 아닐 수 없다. 아, 고달파도 꽃길이다.
이제는 포스트코로나시대, 탈근대의 기운이 완연하다. 세계는 보이는 힘, 즉 경제‧군사‧정치력 말고, 보이지 않지만 매력적인 힘도 세계를 움직이는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문화의 힘’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김구선생이 예언하신대로 무한한 ‘문화의 힘’이다. 이제 드디어 K컬쳐가 세계적 힘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말대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 할 때가 되었다.
한류는 K드라마나 K팝 ‧ K방역의 창의성이 한국민주주의에서 왔음을 알아채고 있다. 김지하가 국가폭력에 저항하던 인권과 민주의 가치는 한류정신을 떠받친다. 세계청년들이 한류를 좋아하는 배경에는 한국민주주의 문화를 배우려는 것이 바탕에 있다. 서양의 개인주의적 민주주의가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위기에 빠졌다. 어떻게 아시아 공동체문화가 민주주의와 양립되나? 그들은 이해를 잘 못한다. 이 답을 한국민주주의문화 ‘한류’는 갖게 된 것이다. 전통문화를 모시면서도 창조적 자유로 거역하는 "이중모순의 진리"이다. 생전에 김지하 선생이 벌써 하신 말씀이다.
21세기 융합 인문학 ‧ 신화학에서는 명제 하나가 있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는 그 나름의 신화를 창조하는 법이다." 신화를 창조했기에 위대한 예술가다. 현대 신화창조의 주역은 종교와 과학이 아니다. 인류는 계속 과학적 이성주의 너머로 감성과 영성의 문을 열고 신령한 힘의 신화를 갈망한다. 조셉 캠밸 말처럼 "현대는 예술이 신화창조를 주도할 것이다."
김시인이 말년에 캄차카반도에 직접 가서 원주민들을 만나며 여기 있는 수만개 원주민 신화를 알고 가슴 설렜던 이유를 후학들은 이제 알아야한다. 왜 김시인이 말년에 원주 지명설화에 얼킨 현장답사에 몰두하셨나 이해해야 한다. 신산고초를 겪은 끝에 노겸 김지하는 이제 신화가 되고 있다. 우리는 님을 우상으로 숭배하지도, 신비주의에 감금하지도, 사별했다고 잊고 작별하지도 않는다. 모시며 계승한다. 이제는 뿌린대로 뿌리내려 번성하리라. 마당은 삐뚤어 졌어도 장구는 옳게 치라 하셨네.
하나는 끝이 나지만 끝이 없는 하나이다.(천부경)
노겸 김지하는 말한다. "꽃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묵란으로 화두를 남기고 가셨네. 위대한 시인은 시로 말씀 하시네.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존재', 부활의 신화 '애린'으로.
"땅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 숨거나
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 간에
변하지 않고는 도리 없는 땅끝에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 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 오리 햇빛
애린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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