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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치매 나타난 달이…"

[김유경의 문화산책] <47> 삼화령에서 내려오다

3월 중순, 경주 남산 삼화령을 오르게 되었다. 이곳의 연화좌대를 보려는 생각이 간절했다. 남산에서 제일 높은 494미터 높이 고위봉과 금오봉을 잇는 삼각지점의 고개란 위치가 연화좌대를 보러 갈 특별한 명분이었다.

월성 안팎을 연결하는 월정교를 끼고 가서 천관사 터를 지나고 서출지까지 온 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남산의 한 중간쯤 되는 곳, 삼화령까지 가장 완만한 경사의 순환도로를 따라 오르는 길이었다.

새 잎과 진달래가 더러 피어나고 길가에 보이는 밭에는 봄 농사 준비로 흙을 다 갈아엎어 놓은 동네를 통과했다. 마당 담장에 붙어 피어 있는 매화가 조용한 동네에 봄이 역력함을 말해주었다.

▲ 사진1. 충담이 매년 봄 가을 차를 올리던 삼화령 꼭대기 미륵불 자리의 연화좌대 바위. 좌대 바위만 남았을 뿐인데도 불상이 바위 위를 가득히 차지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이순희

소나무들이 저마다 바윗돌에 뿌리를 기대고 촘촘히 들어선 산길은 현대에 조성된 널찍한 폭으로 펼쳐지고 햇살이 가득 비쳤다. 오르는 중간에 약수가 수돗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곳이 있고 가끔씩 삼화령 너머로 오가는 산객들과 마주쳤다. 햇살에 물이 들 듯한 그 길을 가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한 것은 765년 음력 3월 삼짇날 있었던, 경덕왕과 충담 스님의 만남이었다.

<삼국유사> 권2 기이편과 권3 탑상편에 경덕왕과 충담 스님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 사람은 "열치매, 나타난 달이…"로 시작하는 향가 <찬기파랑가>의 저자 충담, 해마다 3월 삼짇날과 9월 9일 중양절에 삼화령 미륵불에게 차를 드리러 오는 스님이다. 또 한 사람은 신라 35대 임금으로 24년 재위의 마지막 해 죽음을 석 달 앞둔 765년 음력 삼월 삼짇날, 월성대궐 귀정문 누각에 올라 소박한 외관의 충담을 굳이 청해 차 한잔과 시 얘기를 나누던 경덕왕(723~765, 재위 742~765)이다.

▲ 사진2와3. 초봄 삼화령 올라가는 길 ⓒ이순희

그날 왕이 귀정문(歸正門) 누각에 나가서 측근에게 말했다. "누가 길에서 위의 있는 승려 한 사람을 데리고 올 수 있겠소?" 이때 마침 모습이 깨끗하고 덕이 높은 고승이 거닐면서 지나갔다. 신하가 보고 그를 데리고 와서 뵈었다. 왕은 말했다.

"내가 말하는 위의 있는 스님이 아니다."

왕은 그를 물리쳤다. 다시 승려 한 사람이 장삼을 입고 앵통(혹은 삼태기)을 걸머지고 남쪽에서 왔다. 왕은 기뻐하면서 그를 누 위로 맞아들였다. 앵통 속을 보니 다구만 담겨 있었다. 왕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 
"충담입니다."
"어디서 오오?"
"제가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이면 차를 다려서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드립니다. 오늘도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나에게도 또한 차 한 잔 주겠소?"

충담이 이에 차를 다려서 왕에게 드렸는데 차의 맛이 이상하고 찻사발 안에서 이상한 향기가 풍기었다. 왕은 말했다.

"내 들으니 스님이 지은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가 그 뜻이 매우 높다 하니 과연 그러하오?" 
"그렇습니다."

양주동, 이재호 역을 통해 본 <찬기파랑가>는 이렇다.

열치고
나타난 달이
흰 구름을 좇아 떠가는 것이 아닌가?
새파란 시내에 기파랑의 모습이 있도다.
일오천 조약돌에서 
낭이 지니신 마음 가를 좇으려 하노라.
아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 
서리모를 화랑의 장(長)이여!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도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할 노래를 지어 주오."

충담이 명을 받들어 곧 <안민가>를 지었다. 왕은 그를 아름다이 여겨 왕사로 봉하니 충담사는 두 번 절하고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그때는 아마 봄이 무르익은 화창한 양력 4월 중순께이고 경덕왕은 43세 가량의 장년, 충담 또한 나이 지긋한 연배의 남성들이었으리라. 외관상 두 사람은 아주 대비되어 보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고귀한 복식으로 감쌌을 최고 권력자 경덕왕과 승복에 차 달이는 도구만 갖추고 돌부처 공양을 위해 남산을 오르내리던 충담 이었다. 그리고 5백 년도 더 지난 고려시대에 와서 사가 김일연이 이 두 사람의 조우를 <삼국유사> 그 압축된 역사책의 한 부분에 기록함으로써 이들의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지게 했다.

<삼국유사>의 이 기록은 경덕왕과 충담, 역사가 김일연이 시공을 넘어서 한데 엮여진 테마로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맴돌았었다. 나는 이 두 사람의 만남이 <삼국유사>에서 비정치적인 부문의 가장 고차원적 철학이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기록 중의 하나라고 믿는다. 저자 김일연은 분명히 경덕왕과 충담의 만남을 단순한 일화로 <삼국유사>에 기록한 것은 아니리라 확신한다. 차를 매개로 한 이 일화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역사가로서 일연 스님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그 귀중한 책의 한 페이지를 내주어 기록한 것일 게다. 한국 다도의 깊이 있는 심미안과 철학을 이렇게 말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는 난정서 이야기가 한 폭의 그림처럼 기억된다. 그리고 한국 역사에는 이 충담과 경덕왕의 이야기가 어디 걸리는데 없는 봄바람 같고 하늘에 뜬 달처럼 아름답다.

경덕왕은 왜 굳이 차 달이는 충담을 대화 상대로 택했을까. 전후좌우 모든 사실이 다 제거된 상태의 담백하고 단순한 역사기록이지만 낱말 하나하나마다 서려 있는 여러 가지 상징들이 유추된다. 왕은 허세에 쩔은 권력과 세속 이야기가 아니라 정신을 고양시키는 대화 상대를 기필코 찾아냈다. 대덕의 칭호를 받은 위의 있는 화려한 고승을 만날 수도 있었지만 왕은 그를 내치고 꾸밈없는 외양에 <기파랑가>를 통해 그 깊이가 짐작되는 철학자 같은 충담과의 대화의 장을 마련했다. 궁문 누각은 왕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자유롭고 소박한 장소였을 것이다.

궁과 민간의 경계선이랄 대궐 문루에서는 왕이 속해 있는 귀족계급 간에 신물 나게 차려지는 산해진미 대신, 특별한 향기가 나는 차를 다리는 충담 스님의 손놀림이 느껴진다. 여기서부터는 주객이 전도되어 불교철학을 배경으로 깔고 차를 베푸는 충담이 주인이 되고 경덕왕은 그가 만들어 주는 차가 사발에 담겨 베풀어지는 것을 기다리는, 어떤 본질의 추구를 고대하는 하나의 구도자가 된다. 차가 달여지면서 몇 가지 다구가 펼쳐졌을 것이다. 어디선가 물을 길어왔으리라. 주전자의 물이 끓는 소리가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누각 자리에 대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처럼 생겨났을 것이다. 차 맛은 향기롭고 차를 담은 사발 또한 호화로운 금잔 은잔 같은 것이 아닌, '향기가 나는 잔'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두 사람 간에 오간 대화는 충담이 지은 찬기파랑가이다. "열치매 나타난 달이…" 하는 서두 한줄 만으로도 시에서 펼쳐지는 고귀한 세계의 깊이가 느껴진다. 이런 내용을 대화로 끄집어내는 경덕왕은 그가 고도의 지적 인물임을 드러내준다. 권력자로서 <안민가> 노래 지어줄 것을 요구하면서도 충담과 기파랑가를 통해 사물의 본질을 알아보는 정신 또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과의 대화에 누구보다 겸허하게 차를 다루는 충담이 자질을 갖춘 불교인이었음을 <삼국유사> 기록은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의 대화는 부드럽고 천연스러웠다. 이처럼 자연스럽고 고귀한 대화와 지성은 쉽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경덕이 왕이었기에 역사기록의 대상이 된 기본 전제가 있긴 하지만, 그런 정신적 고양을 주제로 한 철학 이야기가 바닥에 깔리지 않고서야 고작 왕이 스님과 차 한 잔 마신 '사건'이 역사 기록으로 천 수백 년 전해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 다도의 정수가 바로 이런 장면이라는 확신이 생긴다.

▲ 사진4. 전남 순천 금둔사 차공양 조각이 새겨진 탑을 마주한 불상에 차 한잔을 공양 올리는 2012년 3월의 지허스님. 탑신 이층에 새겨진 공양상의 팔과 스님이 차를 올리고 있는 팔의 곡선이 똑같다. 충담스님이 삼화령 연화대 미륵불에게 올리던 차공양도 이런 팔 움직임이고 경덕왕과 담소하며 달이던 차도 이런 팔 놀림을 보였을 것이다. ⓒ이순희

충담 스님은 경덕왕을 만나기 전 삼화령에 와서 돌미륵불에게 차 공양을 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수많은 불상들이 자리잡고 있는 남산이지만 삼화령 가장 높은 자리에 남아 있는 연화좌대의 존재를 안 순간, 바로 충담이 이곳에 왔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삼화령은 삼화수리라고도 하는데, 수리란 높은 곳을 의미하는 순 우리말이다. 신라시대에도 이곳이 삼화(三花)란 이름으로 불리었을까? 고위봉과 금오봉을 연결하는 또 하나의 높은 고개란 뜻으로 세 송이 꽃, 삼화란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 안내판에 나온다.

▲ 사진5. 비 오는 날 사진가 이갑철씨가 삼화령을 찍고 있다. 연화바위의 크기가 가늠된다. ⓒ이순희
▲ 사진6. 잔설이 남아있는 겨울의 연화좌대 ⓒ이순희

삼화령은 고개 높이 걸리는 데 없이 하루 종일 햇살을 받는 장소 같았다. 용장계곡이 서남향으로 펼쳐져 발치에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에 200-300미터 가량 이어진 암석 벽이 길가에 면한 곳, 두 그루 소나무가 땅에 엎어질 듯 서 있는 곳이 연화좌대 바위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무슨 대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칫 못 알아보기 십상인 그런 숲속 틈새이다. 몇 구비 거친 디딤돌을 밟고 올라가니 곧 높이 160센티미터쯤 되는 자연석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그 꼭대기 원형으로 평평하게 닦인 자리에 연꽃 잎이 돌아가며 새겨진 것이 보였다. 이곳이 연화좌대였다. 주변에는 크고 작은 바윗돌들이 잔뜩 널려 있는데, 좌대가 새겨진 이 돌은 어떤 장애물에도 가려지지 않고 솟아 눈앞에 고위봉을 마주하고 아래 펼쳐진 용장계곡과 경주시 내남면 일대, 저 멀리 언양 부근 가지산 능선까지 겹겹이 이어진 땅을 그윽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햇살이 바위 전체에 그림자 없이 노랗게 내려쬐었다. 누군가 미술사 논문에 '불상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워낙 그 자리에 있다가 돌을 깨고 나온 것'이란 말을 했었다. 그 표현은 '너무나 감상적이고 독선적인 표현'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한데 이 연화좌대를 보는 순간 종교 유무에 상관없이 '아 여기는 부처님이 있을 자리로구나' 공감하게 됐다.

좌대 위의 불상은 언제 없어졌는지 그 생김새에 관한 어느 정보도 없이 완전한 허공이었다. 충담이 삼화령 생의사(生義寺)터 돌미륵에 차공양을 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에 근거해 이 연화좌대 위의 부처가 미륵불이었으리란 짐작을 한다. 그렇다면 7세기 미륵불 중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반가사유상 미륵이었을까? 이곳 부처님은 어느 시기에 어떻게 사라진 것일까. 허공엔 바람만 스쳐 지나갔다.

▲ 사진7. 용장사지로 내려가는 길에서 뒤돌아본 연화좌대. ⓒ이순희

하늘에 떠 있는 듯 보이는 좌대에는 불상을 고정시키느라 쐐기가 박혀 있던 자리만 패여 있었다. 툭툭 대범하게 쳐낸 듯 다듬은 화강암 바윗돌 위에 새겨졌으나 1천 수백 년의 풍상으로 연꽃잎의 돋을새김도 그다지 생생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그 좌대가 주는 느낌은 한마디로 위압적이었다. 불상은 어떤 미혹도 없이 선택된 신념의 예술 같았다. 허공에 드러난 좌대뿐인 유적임에도 왠지 그 자리를 가봐야 될 것 같은 기분이 이곳으로 이끌었다. 같은 삼화령의 불상인 애기 같은 얼굴의 삼존불은 그렇게까지 마음을 뒤흔들지는 않았다.

충담은 이미 통일신라 시대에도 골골이 들어선 남산의 돌부처와 탑들을 지나 이곳으로 왔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곳 연화좌대에 있었을 부처에게 봄의 삼짇날과 가을의 맑은 날에 가장 정신을 고양하는 의례로서 일 년에 두 번 차를 공양하러 남산 꼭대기에 올랐으리란 것은 알 수 있었다. 760년대의 삼화령 오르는 길은 지금처럼 정돈된 순탄한 산길도 아니었을 것이다.

좌대가 있는 바위 옆에 그보다 더 큰 바위도 있었지만 바위 색깔이나 자리잡은 위치가 좌대 바위보다 못했다. 미륵불은 서남향으로 터진 앞쪽의 용장계곡을 바라보고 설치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차 공양은 어디서 올렸을까. 불상은 산꼭대기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었을 좌대 바위 주변은 울퉁불퉁한 돌들이 땅바닥에 깊이 박혀 있다. 1천 수백 년 전 이곳 풍경은 뭔가가 달랐을 것이다. 지금의 길 쪽에 미륵불 가까이 어떤 공양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거기서 부처님을 정면으로 올려다보는 것이었을 듯했다. 연화좌대 뒤로 접근해서 거친 돌멩이 바닥들 틈에서 부처님 뒤쪽에다 공양을 올리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현재 상황에서 연화좌대를 자세히 보기 위해서는 이쪽으로 접근하는 방법밖에 없다.

촬영차 이곳을 여러 번 올라왔던 사진가들의 말로는 용장계곡 깊숙이서부터 안개가 피어오르고 비가 오는 날씨엔 이곳이 정말 신비롭게 보인다고 했다. 나도 비 오는 날 이곳에 와보고 싶지만 그게 가능한 일인지 알 수 없다. 그래도 10여 년간 생각만 하다가 올라와 본 봄빛 강렬한 날의 풍광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고 한없이 좋았다.

▲ 사진8(왼쪽). 연화좌대 앞 차 나무. 아직 잎이 돋질 않았다. 사진9(오른쪽) '연화좌대 있는 곳에 차나무를 심어 충담을 기린다'는 글귀를 쓴 팻말이 커다란 바위 밑에 빛 바랜 채 놓여있다. ⓒ이순희

좌대 앞 돌 틈바구니에 충담스님을 좋아하는 사람 누군가 차나무 여러 그루를 심어 놓았다. 큰 바위 한구석에 세워진 팻말에 빛바랜 글씨로 "안민을 노래하고 / 이 지역은 서라벌 삼월 삼짇날 충담 스님이 차를 다려 남산 삼화령 부처님께 차를 드린 / 고운 뜻을 받들어 차나무를 심고 가꾸어 / 0답게 살 수 있는 슬기를 함께 하고자 차나무를 심습니다. 차나무가 크게 꽃필 수 있도록 마음 모아주세요"라고 새겨져 있다.

충담이 여기서 차를 다려 공양했음을 가슴 벅차게 받아들이고 이곳에 차나무를 가지고 올라와 돌 투성이 땅에 나마 심어 그를 기리려는 후대인의 진정성이 그렇게 나타난 것인 듯 했다. 경주시에서는 매년 10월 다인들이 모여 차를 달이는 충담제 행사를 한다.

▲ 사진10. 2010년 4월 경주시의 충담제에서 차 달이는 다인들 ⓒ김유경

연화좌대에서 내려와 곧바로 용장계곡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길로 김시습의 흔적이 담긴 용장사지를 가볼 수 있었다. 그 또한 차에 관한 많은 일화를 남긴 사람이다. 나무들 많은 산속으로 가는 동안에도 돌아보면 연화좌대 바위는 멀리서도 공중에 뜬 듯 높이 떠서 노랗게 돋보였다. 다른 바위들은 어두운 색으로 물러나 보였다. 이 바위가 불상을 세울 연화좌대로 선택된 필연적인 조건이 너무도 확연했다.

해지기 전에 다시 서출지 있는 쪽으로 되돌아 내려왔다. 여전히 동네는 조용하고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충담이 어느 길로 남산에서 내려오다가 경덕왕과 조우하게 됐을까. 월성의 서북방향 문인 귀정문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남산 오르는 길은 지금의 경주향교 자리에서 가까운 상서장(최치원의 사당) 주변의 남산 가는 길이 있다. 충담은 남쪽에서부터 대궐이 있는 북쪽 방향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기파랑이라는 화랑을 높이 우러른 시를 지은 것으로 보아 충담 또한 화랑 출신이 아닐까 한다. 이 시절의 승려는 최고 지식인층에 속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화려한 고승대덕의 권력을 누리기 보다는 다구만을 들고 미륵불에게 차를 공양하러 산을 오르기도 하는 승려가 되었다.

불교가 최고 성세를 떨치던 당시, 경덕왕은 왜 굳이 제도권의 위의를 갖춘 스님을 물리치고 야인과 같은 충담을 맞아 이야기를 나눴을까. 아마도 왕은 이미 권위의식과 사치에 익숙한 승려들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왕은 오랜 경험을 통해 허울과 허영을 벗어난 본질을 구별해 보는 의식이 있었기에 아무 가진 것 없는 충담에게 차를 청해 마시며 그와 <찬기파랑가>를 논했던 것인지 모른다. 왕은 누군가와 초월한 사상을 나누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런 자리에 베풀어진 차는 맛이 특별나고 찻사발 조차 향긋한 최상의 것이었다. 왕은 충담에 대한 최대의 인사로 왕사라는 최고위직을 권했으나 충담이 이를 거절한 것까지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충담이 만약 이를 '얼씨구나! 이제 출세하게 됐다' 하고 받아들였다면, 이 고사는 역사책에 오를 만큼 기억되지 않았을 것이다.

▲ 사진11. 초봄 삼화령 올라가는 길가의 논 ⓒ이순희
▲ 사진12. 삼화령 올라가는 길 봄이 무르익을 무렵 활짝 핀 주택가의 꽃나무 ⓒ이순희

내려온 길을 되짚어 주택가로 들어섰는데 형태가 말쑥한 복숭아 나무 한 그루가 담 밖의 밭에 심어진 것을 보았다. 주인장 이종태 씨가 다가와 "꽃이 곧 피어나면 아주 보기 좋다"고 설명하고 덩달아 집안에 심은 여러 가지 꽃나무를 보여주었다. 으름덩굴을 가득 올린 파고라가 굉장하고 대단히 귀해 보이는 꽃들이 포근하게 일군 꽃밭에 줄줄이 심겨 있었다. 그리고 봄이 더 무르녹은 3월 말 그로부터 꽃나무가 활짝 핀 사진이 보내져 왔다. 2021년 양력 3월, 평범한 현대인이 삼화령에서 내려오던 길의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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