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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된 들뢰즈를 위한 변론, 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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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된 들뢰즈를 위한 변론, 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

[프레시안 books] <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 연속성에 반대한다>

<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 : 연속성에 반대한다>(김효진 옮김, 갈무리)는 아연 클라인헤이런브링크(Arjen Kleinherenbrink)라는 낯선 네덜란드 철학자의 저작으로,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다. 들뢰즈는 어렵고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현대 철학의 거장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들뢰즈의 철학이 '어렵다'는 주장이나, 그가 철학의 거장이라는 주장에는 대부분이 동의를 표하지만, 그의 텍스트가 어떤 논의를 전개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특히 국내에서는 2000년대 초에 이미 그의 저작들의 번역과 개념 해석 등을 둘러싸고 활발한 논쟁이 벌어졌을 정도이다. 때문에 국내에서 질 들뢰즈를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상당한 어려움이 수반된다.

그런데 이는 국내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미국의 물리학자인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는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을 읽는 행위를 일종의 지적 허세로 취급한다.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이 "막연하게 밖에 모르는 과학 이론들을 늘어놓거나", "동떨어진 맥락에서 전문 용어를 남발한다"는 것이다. 소칼은 이런 텍스트들을 둘러싼 논쟁들이 난해하고 현학적인 문장들과 권위에 기대는 주장들이 난무하는 장난질일 뿐이라고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 이때에도 들뢰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 주자로 거론되며 비난의 화살을 감당해야 했다. 때문인지 여전히 종종 들뢰즈를 비롯한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은 지적 사기꾼으로 매도당하곤 한다.

이런 배경 속에서 들뢰즈를 읽는다는 것은 몇 중으로 중첩된 어려움을 촉발한다. 평범한 사회학도인 서평자(철학 전공자가 아닌)로서 솔직히 고백하건대, 한편으로 들뢰즈의 텍스트는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고, 또 한편으로 난해함과 논쟁들을 감당해가며 굳이 들뢰즈를 읽을 필요가 있을지 의심하게 만드는,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텍스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국내에 활발하게 소개되고 있는 신 실재론, 사변적 실재론, 신 유물론, 객체지향철학, 기계지향철학 등 소위 '존재론적 전회'의 바람을 타고 접하게 된, 아연 클라인헤이런브링크의 <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 : 연속성에 반대한다>은 들뢰즈의 철학 체계와 매력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는 훌륭한 저작이다. 때문에 부족한 전문성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독자로서 이 책의 매력을 알리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기로 했다.

이 책은 단순히 들뢰즈에 대한 쉬운 입문서나 해설서가 아니다. 오히려 기존의 여러 갈래로 전개된 상이한 들뢰즈 독해들을 비판하고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 도발적이고 본격적인 철학서이자, 오해되고 잊힌 들뢰즈의 존재론을 다시 드러내고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때문에 이 책은 들뢰즈의 주장들을 다른 철학들, 과학 이론들 혹은 예술 작품들과 비교하는 방식이 아니라, 들뢰즈를 들뢰즈로서 고찰하는 방식을 취한다.

지금까지의 많은 들뢰즈 해석자들(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피터 홀워드, 제임스 월리엄스 등)은 들뢰즈를 개별적 존재자들이 모든 적실성을 상실하고 흐름과 사건, 강도, 과정이 소용돌이치는 잠재적 영역을 상정한 철학자로 독해했다. 특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은 그런 해석을 보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후 <차이와 반복>에서 스스로가 여전히 일종의 고전적 높이와 의고적 깊이를 열망했다는 것을 고백하며, 이를 폐기하겠다고 명시적으로 밝힌다. 따라서 클라인헤이런브링크는 <차이와 반복>에서 드러난 들뢰즈의 형이상학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들뢰즈가 수정을 가한 존재론을 추적하고 재구성한다. 들뢰즈의 이런 면모는 특히 <의미의 논리> 이후의 저작들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클라인헤이런브링크가 도달한 도발적인 독해는, 들뢰즈 철학의 "뛰는 심장이 개별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존재자들과 그런 존재자들 사이의 불연속성을 기반으로 하는 존재론"이라는 것이다. 들뢰즈의 통찰은 존재자들이 더 근본적이고 비존재자적인 것―혼돈, 강도, 물질성, 과정, 상호작용성, 잠재 영역, 초-우연성 기타 등등―의 왜곡된 표상, 표현, 파생물에 불과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들뢰즈가 잠재 영역, 유동적인 장, 힘, 과정, 사건들, 즉 '연속성'으로 존재자들을 용해한다는 해석들과는 완전히 상반된 주장이다. 클라인헤이런브링크는 들뢰즈를 '환원 불가능성'과 '물러섬'의 사상가로 재정립한다.

그에 따르면 들뢰즈는 허위 깊이와 높이에 의존하는 낡은 형이상학과 존재신학을 비판하며 자신의 존재론을 정초한다. 허위 깊이에 의존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들은 근본적인 요소들, 더 깊고 보편적인 심층을 통해서 존재자들을 설명하려 시도한다. 근원, 본질, 아원자 입자, 파동, 힘, 장, 신경세포, 유전자 등 다양한 개념들은 허위 깊이를 동원하여 충만한 존재자들을 환원하는 형이상학이다. 반대로 이데아, 영원한 형상, 유일신, 소박한 과학주의와 자연법칙, 조야한 관념론과 변증법, 완고한 구조주의자와 정신분석가 등은 허위 높이를 도입해 존재자들을 포괄적인 구조가 규정한다고 주장한다. 풍부한 존재자와 사건들, 우리의 삶과 경험이 언어, 역사, 이데올로기 혹은 유사한 체계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허위 높이에 의존하는 존재신학을 따르는 것이다.

심지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허위 깊이와 높이를 모두 받아들이는 것도 가능하다. 한편으로는 궁극적인 근거 혹은 인형 조종사가 존재한다고 상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전적으로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소박한 과학적 실재론이 그 대표사례이다. 소박한 과학적 실재론은 '이중 구속'되어 있는데, 모든 존재자가 궁극적인 요소들의 마지막 층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이들 요소가 우리의 지식/모형들에 정확히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들뢰즈가 비판하고자 했던 허위 깊이와 높이의 철학은 여전히 현대사회에 만연한 세계관이다. 온갖 환원주의와 소박한 지식주장들은 존재자들의 차이와 반복을 망각시키고, 고정된 편견과 본질에 대한 관념을 유통시킨다.

즉, 들뢰즈는 소박한 실재론과 경험주의, 환원주의와 본질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외부성 테제와 기계(회집체) 테제에 기반한 체계적이고, 존재론적이며, 개별적 존재자들에 중점을 둔 철학을 주장한다. 들뢰즈의 존재론은 "관조의 객관성, 반성의 주체, 그리고 소통의 상호주관성"이라는 상투적인 세 가지 표상을 회피한다. 그것은 무한한 이해 혹은 절대적 지식의 존재론이 아니다. 클라인헤이런브링크는 들뢰즈의 이런 존재론적 면모를 강조하면서 그의 철학이 사변적 실재론이자 객체/기계지향 존재론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들뢰즈의 철학은 존재론적 전회에 합류한다. 존재론적 전회는 낡은 형이상학을 전복하려는 시도로서, 기존의 인식론과 지식 체계의 틀로는 바라볼 수 없었던 존재자들을 전면으로 드러낸다. 인류세와 기후위기, 바이러스와 팬데믹, 전세계적 공급사슬과 로지스틱스 시스템, SNS와 사이버성범죄, 포스트트루스와 반지성주의, 새로운 모빌리티 장치들과 자율주행, AI와 머신러닝, 메타버스와 암호화폐 등 온갖 낯선 비인간, 객체, 기계, 회집체들이 우리 앞에 등장하면서 예기치 못한 효과들을 발생시키고,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사회와 혼종적으로 결합하며 새로운 형태의 문제들과 행위성이 튀어나오고 있다. 기존의 틀로는 포착되지 않는 이런 현상들의 고유한 특이성과 창발성을 이해하고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낡은 형이상학과 자연/사회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서는, 환원적이지 않은 존재론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기계 존재론은 무겁게 인간 행위를 규정하는 구조나 자본주의, 성차별 같은 강력한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오직 그것들도 기계일 뿐이라고 말한다. 기계는 오직 다른 기계들과의 마주침, 결합, 회집을 통해서 생성된다. 회집된 기계는 어떤 본질적인 목적이나, 초월적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기저기서 온갖 존재들의 함성이 새어 나오는, 각자의 고유한 역능을 지닌 이질적인 기계들의 결합체다. 자동차에 시동이 걸려 웅웅거리는 소리는 한편으로 자동차의 소리이지만, 동시에 고유한 기계 부품들이 내지르는 불협화음이기도 하다. 브레이크도 타이어도 고장 날 수도 교체될 수도 있다. 각 기계들은 고유의 역능이 있다. 그러나 어느 한 기계가 자동차의 본질일 수는 없다. 심지어는 자동차의 달리는 기능은 본질이 아니라, 오직 기계들의 결합을 통해서만 구현되는 역능이다. 자동차는 달릴 뿐 아니라, 온갖 방식으로 에너지를 소비하고 폐기물을 뿜어내며, 여러 위험한 가능성을 마주친다. 사소한 기계의 고장이 큰 위험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적절한 시기에는 가벼운 정비로도 교체될 수 있다. 이처럼 기계 존재론이 시사하는 바는 아무리 거대하고,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기계도 수많은 변형가능성에 필연적으로 열려있다는 점이다. 저항과 해방의 가능성은 여러 곳에 산재하지만, 그것은 다른 기계들과 구분되는 인간 주체만의 특별한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들(인간/비인간)의 역능과 행위성과 관련된다.

클라인헤이런브링크는 들뢰즈의 전문 용어에 친숙하지 않은 이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글을 썼기 때문에 들뢰즈가 생소한 독자들에게도 매력적일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들뢰즈의 존재론을 다른 동시대의 사변적 실재론자들과 정교하게 비교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에도 여러 권 번역된 브뤼노 라투르, 레비 브라이언트, 마누엘 데란다, 그레이엄 하먼, 마르쿠스 가브리엘 등의 철학자들과 들뢰즈의 대결은 파고들 만한 흥미로운 논점들을 제기한다. 그뿐만 아니라 국내에는 아직 소개되지 않은 마우리치오 페라리스, 트리스탕 가르시아의 이론을 소개하고 비교하는 작업까지 진행되어있다.

따라서 이 책은 들뢰즈에 입문하고자 하거나, 새로운 독해를 기대하는 독자뿐만 아니라, 기존의 인식론과 지식 체계의 한계를 느끼는 이들에게 더 나은 철학적 기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들뢰즈와 클라인헤이렌브링크 모두가 신신당부했듯이, 철학은 모든 것을 설명하는 '학문의 왕'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아무 것도 미리 진술될 수 없는데, 우리는 연구 결과를 사전에 판단할 수 없다." 들뢰즈가 보기에 철학자는 거대한 물음에 대답하는 이도 고고하게 높이와 깊이를 홀로 간파하고 있는 이도 아니다. 오히려 존재의 지도를 구축하기 위해 기계들을 분류하고 검토하는 작업자일 따름이다.

▲<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 연속성에 반대한다>(아연 클라인헤이런브링크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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