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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 같은 영화, 열려진 영화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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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 같은 영화, 열려진 영화를 위하여

[탈춤과 나] 장선우의 탈춤

1971년 가을 어느 날, 어쩌다가 그 공연을 보게 되었을까? 일부러 찾아본 것은 아닌 거 같은데 그때 1학년이어서 공릉동 공대캠퍼스로 교양과목을 들으러 다니던 때니까 집으로부터 거리가 워낙 멀어서 대학에 적응하기도 벅찬 시절이었고 누군가 같이 가보자고 이끈 것도 아니었다. 혹시 교양학부 건물에 포스터라도 한 장 붙어있었을까? 혹은 고고학 전공 시간이라도 있어 문리대 교정에 남아있었을까? 아무튼 우연치 않게 그 근처에 있었고 나는 그날 저녁 홀린 듯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벌어진 탈춤 공연을 보고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풍물소리에 이끌려, 어른거리는 횃불에, 그 불빛 아래 모인 군중들 위로 흐르는 횃불 그을음까지 홀린 듯 보고 있었던 기억만은 지금도 뚜렷하다. 처음 보는 탈, 탈들이 추는 춤사위에 이끌려, 처음 듣는 불림소리에 이끌려, 그 험악하지만 익살스런 가면들은 무엇이고, 그 생동하는 몸짓들은 무엇인가? 그 북소리, 장구소리, 쇳소리는……. 

특히 미얄할미의 그 요란한 엉덩이춤은 아예 충격이었다. 그게 춤꾼 이애주여서 더 그랬었나? 지금까지 알고 보았던 서구식 문화적 경험을 일거에 뒤집어놓는 그날 공연은, 그 판은, 서울대가면극연구회 창립공연 봉산탈춤이었고 나는 그날 이후 어느새 그 무리에 끼어들어 회장 채희완을 비롯해 윤대인, 강철구, 진홍순, 서영수, 이애주 등 선배 회원들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한참 열심히 따라다녔다. 뭐 하나 제대로 배우는 것 없어도 마냥 따라다녔다. 인근 막걸리집, 한 순댓국집은 강의실보다 훨씬 많이 드나들었고, 강의실보다는 봉산탈춤 전수소가 있었던 서대문 영천시장, 양주별산대, 멀리 통영오광대, 하회마을 그리고 정병욱 지도교수 사랑채를 들락거리며 판소리도 알아가고 민속학자 임석재 선생 등을 통해 무가도 알아가고, 그리고 김금화 만신 굿판까지……. 아 이건 또 무어란 말인가 만신 김금화가 시퍼런 날이 선 두 개의 작두 위에 올라가 춤을 추는 광경은……. 

초중고 과정을 통해 학습된 상식이 다시 다 깨져나가는 순간이기도 했다. 기계적인 사유를 넘어서는. 인습적 사유를 다 넘어서는 어떤 것…….

그러나 실상 춤을 배우고 장단을 배워 공연을 올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물론 공연을 위한 본격적인 연습 기회도 없었다. 그날 창립공연 이후로 내가 채희완 형을 이어서 어쩌다 3학년이 되어 2대 회장이었다는데 그때까지도 그리고 휴학하고 복학하고 제적되고 다시 복학을 반복할 때까지도 정규 가면극회 공연은 더 이상 없었다. 가을이면 어김없이 휴교령, 위수령이 반복되던 시절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암울한 시절, 탈춤이 없었다면 얼마나 쓸쓸했을까?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 창립공연 팜플렛 중에서 ⓒ채희완
▲양주별산대놀이 보유자와 함께 ⓒ채희완

결국 탈춤은 곧바로 시대의 그늘에 맞서는 창작극, 삶의 현장을 떠도는 민중극이라는 이름으로, 마당극이라는 형식으로 전환되면서 불가피하게 수배와 도피, 투옥이라는 원치 않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렇게 몸으로 때우면서 그것이 탈춤의 본질, 탈춤의 방향이라고 여겼던 때이기도 하다. 북 치고 장구 치고 꽹과리 두들기며 춤추지 않아도 도망치고 붙들리고 매 맞고, 갇히는 것도 탈춤이라고 여겨지던 때였다. 이 글을 요청하며 채희완 형이 보내준 자료에는 그런 사정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지금 보면 매우 무모해 보이는 글이기도 하지만

“……. 웃고 있으나 웃을 수 없는 그 현실과 웃을 수 있는 새로운 현실 사이에서 오는 거리를 메꾸고 질탕한 웃음소리에서 우러나는 극복된 현실을 오늘에 재현하는 작업, 그것이 지식사회에서 민속놀이(가면극)를 취급하는 중요한 소임이라 하겠다.” _ 장만철(서울대 민속문화연구회) 서강대 민속문화연구회 정기공연에 붙여,

▲1974년 서강대 민속연구회 <서강굿> 공연 팜플렛 ⓒ장선우

그 뒤에는 스승 같은 형들이, 아름다운 선후배들이 알게 모르게 애써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끌어주고 버텨주었다. 서울대 문리대 너머 법대 쪽으로 허름했던 창고 같은 한 낡은 건물, 거기가 우리 가면극회 연습실이자 동아리 방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거기에 들르면 가끔은 혼자 앉자 장구 두들기며 연습하던 신동수 선배, 늘 조용하면서도 단호했던 형, 나를 민주화의 전선으로 이끈 형이었다. 그리고 가끔 홀연히 나타나 예술론을 떠들고 때로는 노래하고 가던 강도 김지하, 우리는 그를 암호처럼 강도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느 날 강도는 그 연습실에서 나를 춤추게 하더니(봉산탈춤 춤사위를 이용해 멋대로 막춤을 춘 건데) 보고나서 웃으며 한 마디 했다. ‘잡놈!’ 나는 잠시 기분 나빴다. 서울내기인 나로서는 순 쌍욕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끼 있는 예능인들에게 붙이는 애칭이기도 하다는 걸 알고 나서는 은근히 형이 더 우러러보였다. 

그러지 않아도 <오적>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다시 <빈산>으로 드높은 시의 경지로 늘 압도해 왔었는데 더욱이 춤과 장단이 늘지 않아서 혼자 답답했었던 때이기도 해서 그 한 마디가 적잖이 힘이 되었던 셈이다. 언젠가 백기완 선생님 앞에서도 그 막춤을 춘 적이 있는데 이후로 선생님께서 나를 가까이 챙겨주셨던 걸 보면 아주 못 볼 정도는 아니었는지도, 내가 영화로 들어선 후 적잖이 실망감, 배신감을 느끼셨겠지만…….

얼마 전 고인이 된 이애주(우리는 보통 애주형이라고 부르는) 출판기념회에서 받은 책 3가지 가운데 하나가 <춤꾼은 자기 장단을 타고난다>라고 했듯이 타고난 장단이 내게 없었다는 사실을 아는 데는 그래서 사실 시간이 좀 걸렸다. 장단을 모르면 춤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음악적 소양이 턱없이 부족한 나로서는 아무래도 춤에는 한계를 보였다. 그래도 탈춤이 각 대학이나 지역단체로 계속 퍼져나가면서 무대에 설 일은 종종 생겼는데 거의 8먹중 가운데 하나에 머무를 뿐 은근 노리던 취발이 같은 역할은 좀체 오지 않았다. 내가 가장 매력 있어 했던 첫목춤은 아예 가르쳐줄 생각조차 없었고 채희완 교주의 전유물이 되었다. 핑계지만 그래서 결국에 영화로 한눈을 판 건지도 모른다.

어쩌다 74년 <이애주 춤판. 땅끝>, 우리에게는 이제 전설이 된 그 공연은 같은 해 몇 달 앞서 올린 이종구 작곡발표회 <소리굿>과 더불어 내게는 71년 문리대 첫 공연만큼이나 강렬하게 각인된 순간이었다. <소리굿>에서는 뒷일꾼에 불과했고 <땅끝>에서는 춤추는 무리의 하나로 등장하고 별도로 바라춤 한 번 추는 게 고작이지만 내 무딘 기억력 저 너머에도 깊이 새겨질 만한 두 공연이었다. 그러면서 더불어 만난 스승 같은 친구들, 임진택, 김민기, 김석만, 김영동, 홍석화 그리고 이종구 형, 이애주 형…….

그리고 75년, 민청학련 사건과 연루시켰던 소위 인혁당 관계자들에 대한 갑작스런 사형집행과 그에 항의하는 서울 농대 김상진 열사의 할복 자결. 그리고 내려진 긴급조치 9호, 그리고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급조해서 치러진 서울대 탈반, 연극반, 문학회 합동장례식……. 

그로인해 그렇게 탈춤 아닌 탈춤을 춘 황선진, 연성수, 이지현……. 연극반 박우섭, 지금은 고인이 된 박인배, 문학반 김정환, 고 김도연 그리고 고 채광석……. 함께한 사범대 선후배들 고 유상덕, 천희상, 박성규……. 그리고 춤꾼 아닌 춤꾼 그래서 언제나 위로가 되었던 고고인류학과 선배 유영표 형……. 그리고 오랜 도피와 투옥 이후 다시 복권되어 학교로 돌아갔던 80년 봄, 민주화를 외치는 모든 굿판의 끝에……. 

신군부가 발동한 전국 확대계엄령, 그와 함께 생겨난 합동수사본부에서 우리를 구타하고 감시하던 한 헌병에게 얼핏 듣는 이야기 “광주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답니다.”

그렇게 문득 멈추었던 공간, 구타도, 고문도. 진술서도 더 이상 의미가 없었던 순간들, 그리고 그때 나는 갑자기 영화가 하고 싶어진다, 그해 여름, 합수부에서 군형무소를 거쳐 안양교도소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될 때까지 광주를 언젠가 화면 속에 그것도 대중영화 속에 담을 날을 꿈꾸었고, 영화판으로 들어가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전두환 군사정권 아래서 충무로에 들어가 상업영화판에 뒹굴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지지해주는 사람은 없었고. 없는 게 당연할 때였다. 그 한해 전에 나는 이미 한 아기의 아빠가 되어 주변 사람들은 더욱 나를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그때 거의 유일하게 나의 생각을 지지해준 사람이 김지하였다. 그는 영화판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 영화공부를 하고 돌아온 하길종 감독이 마침 시인의 대학친구이기도 했다. 그의 재능과 욕망이 충무로 현실에서 어떻게 망가지는지도 보고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가라고 했다. ‘카메라의 눈이 변하면 세계가 변한다’는 한 마디 말과 함께 굳이 내용과 주제를 갖고 부딪치지 말라고……. 

그래서 태어난 것이 ‘열려진 영화를 위하여’ ‘카메라의 인간선언’이라는 나름의 영화론이자 일종의 출사표였다. 그 글들은 한 마디로 탈춤을 통해 보는 영화, 탈춤 같은 영화, 영화로 추는 탈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 동안의 넒은 의미의 탈춤(판소리, 무가 등)을 통해 얻은 경험과 이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책 <새로운 한국영화를 위하여>서울영화집단, 학민사 1983년 ⓒ학민사

5월 광주가 일어났던 그해가 저물 무렵, 충무로 명보극장에는 <바람 불어 좋은날>이라는 영화간판이 이장호 감독의 포효하는 듯한 모습과 함께 마치 깃발처럼 걸려있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장호 감독의 연출부로 영화 인생을 시작한다.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감독 이장호 1981년작) 스크립터부터 하면서 떠오르는 대로 시나리오도 쓰고, 틈틈이 청탁을 받아 평론도 쓰고. 어느 영화사에 취업해서 영화 홍보한다고 때로는 육교 아래에서 전단도 뿌리면서 닥치는 대로, 그러면서 준비한 첫 영화. 그러나 그 영화 <서울예수>(1986년)는 공동감독인 선우완 감독의 성을 이름으로 빌려 요시찰이었던 이름을 버리고 장선우로 출발했지만, 검열에서 부분삭제를 거듭하다가 끝내는 제목이 불허됨으로써 상영정지가 되는 상태가 된다. 

다행히 87년 6월 항쟁을 넘으면서 88년 개봉한 <성공시대>는 그런대로 성공을 거둔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시는 당 총재였을 때인가 극장까지 찾아오셔서 축하해 주시기도 했다. 그 당시는 밝히지 못했지만 이 <성공시대>의 원안은 김지하 시인이다. 오랜 영어에서 풀려나서 당시 어느 여관방을 차지하고 하염없이 술을 마시던 그는 어느 날 이 이야기의 플롯을 대강 얘기해 준다. 주인공 김판촉이 죽어서 저승길에서도 판촉을 한다는 이야기를, 물신주의를, 자본으로부터 소외를……. 

그리고 내가 그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완성하자 <객지>. <장길산>으로 인연된 황석영 형이 <성공시대>라는 제목을 부쳐준다. 제작자 황기성, 배우 안성기, 이혜영. 그리고 카메라 유영길 감독과의 만남이 무엇보다 소중했던 작품이었다. <성공시대> 이후 유영길 촬영감독과는 <우묵배미의 사랑>부터 그 당시는 매우 실험작으로 알려진 <경마장 가는 길>. <화엄경>. <너에게 나를 보낸다>. 세계영화 1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한국영화 씻김>(1995). 그리고 결국은 오월 광주를 그린 <꽃잎>(1996)까지 일곱 편을 연이어 함께 한다. 나로서는 매 작품 형식을 내용에 따라 크게 달리한 셈인데 그는 그 다름을 이해하고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때로는 즐겼다. 

그때마다 그의 눈을 통해 새로운 시도들이 태어났다. 다만 <꽃잎>을 제외한다면, 그는 그것만은 즐길 수 없었다. 그때 5월 당시 그는 미국 CBS 특파원 신분으로 광주 현장에 있었고 그가 겪은 참상으로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촬영 내내 고스란히 견뎌야했다.(지난 2021년 한국영상기자협회가 제정한 ‘힌츠페터 국제보도상’ 시상식에서 최초의 광주를 기록한 그의 행적이 밝혀져 특별공로상이 수여되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 후 만들어진, ‘열려진 영화’의 정점이라고 할 만한 <나쁜영화>(1997)는 그와 함께할 수 없었다. 그는 다음해 <8월의 크리스마스>(허진호 감독1998)라는 기념비적 작품을 남기고 갑작스럽게 타계하였다.

얼마 전 고 이애주 출판기념회를 다녀오면서 오랫동안 추지 않았던 탈춤을 추고 싶었다. 교주(우리들이 부르는 애칭) 채희완 형이 갑작스런 심장병에서 의연히 회복하는 모습을 보아서일까? 화가 김봉준(홍대 탈반 출신)이 아무도 만들지 않는, 들지 않는 만장이 서러워서 직접 그려 김지하 무덤 뒤에 세웠다는 달랑 하나뿐인 만장을 보아서일까? 김지하 시인의 벗 원경, 스님을 시인보다 먼저 떠나보내서였을까? 다시 카메라를 들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두들 가기 전에, 더 멀리 가기 전에 찍고 싶다고, 그들의 나라를, 나의 나라를…….

▲김지하 묘, 만장과 함께 빈산을 노래하는 동영상 캡처 ⓒ김봉준
▲고 이애주 1주기 출판기념회 단체사진 한 장(채희완, 임진택, 서영수, 김봉준, 문무병, 김익두, 김상철, 유인택, 장선우 등) ⓒ채희완

글쓴이 장선우(만철) 71학번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 2대회장, 영화감독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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