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그린 데탕트(Green Detente)'라는 표현을 처음 떠올린 때는 2021년 여름이었습니다. 그해 여름에 지구촌 곳곳이 극한 기후로 몸살을 앓고 있는 뉴스를 보면서 '기후변화, 이거 정말 큰 문제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읽은 만한 책이 있나 책장을 훑어보다가 데이비드 월러스 웰스가 쓴 <2050 거주불능 지구>을 집어 들었습니다.
2020년 봄에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너무 과장이 심한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어 읽다가 말았는데, 다시 읽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 책에서 그린 암울한 시나리오가 하나둘씩 현실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평화 연구자이자 활동가입니다. 이런 저에게 최근 몇 년 사이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한반도 군비경쟁이 위험 수위에 다다르고 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또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이 치열해지고 대만 문제가 '동아시아의 화약고'로 부상하면서 우리의 운명이 타자화될 수 있다는 강한 우려도 가져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기후변화에 따른 위기감도 엄습해왔습니다.
그래서 이들 걱정거리를 '그린 데탕트'라는 하나의 그릇에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기후위기와 신냉전이라는 양대 위기를 생태환경을 의미하는 '그린(Green)'과 긴장완화를 뜻하는 '데탕트(detente)'로 합쳐서 사고하면 새로운 접근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지구도 뜨거워지고 군비경쟁도 뜨거워지는 현실을 보면서 기후위기를 '게임 체인저'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들이 떠올랐죠. 지구의 안보는 갈수록 위태로워지고 있는데 지구에 있는 국가의 안보는 무사할 수 있을까? 군사 활동 자체가 기후위기의 주된 원인이자 기후위기 대처에 '거대한 구멍'인데 이를 자각하게 된다면 고삐 풀린 군비증강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달라질 수 있을까? 갈수록 지구는 거주 불능의 땅이 되고 있는데 그 지구를 둘러싼 경쟁에 여념이 없는 미국,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의식과 질문을 품고 군사 활동과 기후위기의 상관관계를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생소한 문제제기이지만 국제사회 일각에선 이미 이 문제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이에 설상가상으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쟁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막대한 탄소 배출이 일어나고 있고 군비경쟁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지고 있으며 기후위기 대처에 필요한 국가들 사이의 협력은 차갑게 식고 있습니다. 이를 바라보면서 인류사회의 처지가 '냄비 속 개구리'가 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죠.
걱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전쟁도, 그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와 장비도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인류세'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후위기도 사람들이 자초한 것입니다. 절망의 근거도, 희망의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겠죠.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류와 지구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물이 새는 댐의 구멍을 막으려 했던 '네덜란드의 소년' 얘기를 알고 있을 겁니다. 한스 브링커라는 소년은 처음에는 작은 구멍이어서 손가락으로 막았지만, 구멍이 커져 팔뚝으로 막았고 그래도 구멍이 계속 커지자 온몸으로 막으려 했죠. 저는 기후위기와 군사 활동의 상관관계를 보면서 이 동화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자각한 인류사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탄소 배출 구멍을 막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막대한 탄소를 배출하고 있는 군사 활동은 잘 모르거나 모른 척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에 구멍은 갈수록 커지고 있고요.
군사무기와 군사 활동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합니다. 무기와 군사 훈련이 전쟁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는 관점도 있고 오히려 전쟁을 부추긴다는 반박도 있습니다. 또 적정 군사비를 둘러싼 논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또 하나의 관점이 절실해졌습니다. 군사 활동이 기후위기에 미치는 영향이 바로 그것입니다.
흔히 기후위기라는 압도적인 힘에 대응하려면 비상한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기회의 창"이 닫히기 전에 행동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당수 국가들의 정치적 선택은 군비증강에 쏠려 있고, 지구촌의 군사 활동은 막대한 탄소를 내뿜으면서 나날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가 국가안보의 중대한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는데도 정작 군사 활동 증대로 그 위협을 더 키우고 있죠. 모두 안보라는 이름을 달고선 말입니다. 이러한 현실에 눈감고 있어야 할까요? 이 연재를 통해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얘기입니다.
'그린 데탕트'라는 표현을 떠올리면서 자료를 찾아보니 이명박 정부가 이 표현이 처음 사용했고 박근혜 정부도 국정과제의 하나로 삼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 윤석열 대통령도 후보 시절에 대북정책 공약의 하나로 제시했고 국정과제에도 포함시켰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그린 데탕트와는 큰 차이가 있지만 말이죠.
반면 저의 취지에 공감하면서 대선 공약으로 삼은 후보는 정의당의 심상정 의원이었습니다. 보수적인 후보와 진보적인 후보가 같은 이름의 공약을 내세운 셈입니다. 뭔가 의미 있는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전쟁 방지와 기후위기 대처에는 좌우도, 진보도 보수도 없다면 말이죠.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국제사회에선 '군사 활동 축소를 통해 기후위기 대처에 기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커지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그린 데탕트의 취지와 잘 맞습니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선 이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 국내에선 여러 정부에서 이 표현을 사용해왔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국회는 물론이고 시민사회와 언론에서도 군사 활동과 기후위기의 상관관계에 대한 관심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를 앞두고 전 세계의 224개 단체들이 연명해 군사 분야의 탄소 배출 감축을 위한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지만, 224개 단체들 가운데 한국의 단체는 찾아볼 수 없었을 정도입니다. 한반도는 기후위기의 취약 지역 가운데 하나이자 세계에서 군사 활동이 가장 활발히 벌어지고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이러한 현실 역시 국제협력의 단초를 제공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 기후위기에는 국경도 없으니까요.
다음에 이어질 글 : 핵전쟁과 기후재앙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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