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이 러시아가 식량을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며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 통로인 흑해 봉쇄를 풀라고 요구하는 가운데 러시아가 제재 해제를 조건으로 내세우며 속내를 드러냈다. 러시아군의 조직적 곡물 약탈 의혹까지 제기되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쪽은 약탈된 곡물이 크림반도를 통해 수출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흑해 지역 식량 의존도가 높은 북아프리카의 기아 위험이 커지는 가운데 기아 위기가 유럽의 난민 위기로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경고가 나온다.
외신을 보면 24일(현지시각) 스위스 다보스에서 개최 중인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다보스포럼)에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지역의 농기계 등을 빼앗고 흑해 수출항을 봉쇄하고 있다"며 러시아가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식량 공급을 "무기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안날레나 베어복 독일 외무장관도 지난 주말 "러시아는 곡물 전쟁을 통해 전쟁을 우크라이나에서 다른 많은 국가들로 확대하고 있다"며 식량 위기는 전쟁으로 인한 "부수적 피해가 아니라, 대러시아 결집을 약화시키기 위한 하이브리드 전쟁의 도구"라고 러시아를 비난했다.
러시아 국영 <타스> 통신은 25일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무차관이 기자들에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곡물 반출을 위한 인도주의적 통로를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루덴코는 "식량 문제 해결은 러시아에 가해진 금융 및 수출 제재를 해제하는 것을 포함해 포괄적 접근을 요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크라인 쪽이 자국 항구에 설치한 기뢰 등을 제거할 것도 요구했다. 루덴코는 폰데어라이엔이 다보스에서 러시아가 식량을 무기화하고 있다고 비난한 것을 언급하며 "러시아는 항상 평화로운 해결책을 원하는 모든 이와의 대화에 준비돼 있다"고 덧붙였다. 앞서 러시아 국방부는 최근 장악한 마리우폴항 인근의 지뢰 및 기뢰 제거 작업을 완료해 안전한 출항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세계 밀 공급의 30%를 담당해 항구 봉쇄는 그 자체로도 세계 식량 공급에 위협이 되지만, 특히 인도주의기구인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이 필요한 밀의 50%를 우크라이나에서 조달하는 등 구호식량으로서의 역할도 커 빈곤국의 식량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 우크라이나 농업부는 흑해 봉쇄로 1400만톤의 옥수수, 700톤의 밀, 300만톤의 해바라기씨유가 출하되지 못했다고 밝혔다.
19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우크라이나 항구를 여는 데 실패하는 것은 세계 식량 안보에 대한 선전포고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 유엔세계식량계획(WFP) 사무총장 데이비드 비즐리는 23일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 곡물들이 시장에 나오지 않는다면 세계는 향후 10달~12달 안에 식량 가용성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예멘·레바논·이집트 등 43개국 4900만명이 기근의 문턱에 있다고 덧붙였다. G7 재무장관들도 지난주 독일 본에서 열린 재무장관회의 뒤 공동성명에서 농산물 수출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러시아는 즉시 우크라이나의 주요 운송수단에 대한 공격을 멈추라"고 요구했다.
현재 러시아는 흑해 북부 아조우해를 장악한 상태고 우크라이나는 주요 물동항인 오데사에 대한 통제권을 아직 유지하고 있지만 러시아가 오데사를 미사일로 공격하고 있는 데다 주변 해양에 기뢰가 포진해 있어 곡물 수출을 위한 선박 출항이 불가능한 상태다.
항구가 막혀 철도 등 다른 수단을 통해 곡물이 운송되고 있긴 하지만 선박에 비해 수송 용량이 적어 필요한 양을 채우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우크라이나의 많은 철도, 도로, 교량이 러시아의 공격으로 파괴된 상태고 주변국 간 사용하는 철도 시스템이 다른 것도 문제다. 미국 CNN 방송은 17일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중립적인 UN 표시 선박을 활용해 해상운송을 시도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매체는 그러나 미국과 유럽의 몇몇 외교관들은 러시아가 호전적 태도를 보이는 상황에서 이 같은 시도가 효율적일지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군함을 보내 수송선을 호위하자는 얘기도 나오지만 러시아와 포격전을 벌일 가능성이 있어 이 또한 몹시 위험하다는 평가다.
우크라 "러, 농산물 약탈해 크림 통해 수출" 의혹 제기도
수출항 봉쇄뿐 아니라 곡물을 약탈하고 농기구를 압수하는 등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식량 공급을 방해한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러시아군에 도난당한 곡물이 40만톤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CNN은 목격 증언과 영상 등을 통해 러시아군이 약탈한 곡물을 크림반도 방향으로 운송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쪽은 곡물 약탈에 대해 부인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가 조직적으로 곡물을 훔쳐 크림반도를 통해 수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인테르팍스> 통신을 보면 9일 미콜라 솔스키 우크라이나 농업 장관은 브리핑에서 최근 몇 년 간 크림반도에서 곡물 수출이 없었다며 "(크림반도에 위치한) 세바스토폴에서 곡물을 싣고 출항하는 거의 모든 배가 우크라이나에서 훔친 곡물을 적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2014년 침공해 병합한 크림반도에서는 곡물이 거의 생산되지 않는다.
CNN은 곡물값이 급등한 상황에서 이는 "매력적인 상품"이라며 올레그 니비에우스키 키이우 경제대학원 교수를 인용해 "중동 국가들은 곡물의 출처가 우크라이나인 것은 신경쓰지 않고 러시아로부터 기꺼이 20% 할인된 가격에 곡물을 구매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밖에 전투로 인한 농경지의 직접적 피해, 연료 시설 공격으로 인한 농기구 운행 중단, 러시아군이 곳곳에 남기고 간 지뢰 등으로 농사 자체를 짓기 어렵다는 호소가 나온다.
식량 공급 부족에 대한 우려로 식량값이 폭등해 이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등 흑해 지역 식량에 의존하는 북아프리카 지역 국가의 위기감은 심각한 상황이다. 더구나 식량 부족분을 채워줄 것으로 기대되던 인도가 이달 가뭄 등을 이유로 돌연 밀 수출을 금지하는 등 각 국이 식량 국외 반출을 단속하는 움직임이 이어지면서 공급 부족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세계은행(WB)은 지난달 말 발간한 보고서에서 식품 가격이 2008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올랐다고 지적하며, 생필품 가격 상승이 "저소득 가계에 가장 큰 타격을 줄 것"이라고 우려했다. 세계은행은 올해 밀값이 40% 오르는 것을 비롯해 전반적인 식량 가격 상승률이 22.9%에 달할 것으로 봤다.
국제사회는 기아에 대한 경고를 멈추지 않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 유라시아그룹은 데브리BV지속가능전략과 함께 24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빈곤 퇴치를 위한 긴급 모임인 글로벌시티즌나우 회담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여파로 전 세계적으로 식량 불안정에 직면한 인구가 2억4300만명 증가해 11월까지 19억명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24일 그랜트 샙스 영국 교통장관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촉발된 식량 공급 부족이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 희생자보다 더 많은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기아 위기는 결국 유럽의 난민 위기도 심화시킬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은 24일 다보스 포럼에서 "북아프리카의 기아는 스페인과 남유럽에 이주 문제를 양산할 것"이라며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을 가능하게 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아프리카는 내전과 빈곤을 피해 지중해를 통한 남유럽 이주를 시도하는 아프리카 이주민들의 통로가 되고 있으며 국제이주기구(IMO)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올해 4월11일까지 526명 이상이 지중해에서 실종 또는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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