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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야기의 보물창고! 한양도성 ‘순성놀이’ 갈까요(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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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야기의 보물창고! 한양도성 ‘순성놀이’ 갈까요(上)    

[2022년 6월 서울학교는 <혜화문→낙산→흥인지문→목멱산(남산)→숭례문 구간>]

한양도성이 축조되자 도성 안 사람들은 ‘순성(巡城)놀이’를 즐겼다고 합니다. 유득공은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 순성놀이를 “도성을 한 바퀴 빙 돌아서 안팎의 멋진 경치를 구경하는 놀이”라고 설명하였고 그의 아들 유본예도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봄, 여름이면 한양 사람들은 짝을 지어 성 둘레를 한 바퀴 돌며 안팎의 경치를 구경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서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답사 전문가)는 6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한양도성을 일주하는 ‘순성놀이’를 벌려보려 합니다.

▲한양도성 순성놀이의 시작, 혜화문에서 낙산 가는 길Ⓒ서울시

먼저 이번 6월 서울학교의 ‘순성놀이’는 동소문인 혜화문에서 남대문인 숭례문까지 구간을 순성하면서 도성에 남아 있는 시설물과 한양도성의 좌청룡인 낙산과 안산인 목멱산(남산) 자락에 기대고 있는 역사유적들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울학교 제80강(제5기 제2강)은 2022년 6월 12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8시 50분까지 서울 혜화동 혜화문(서울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에서 190m) 앞에서 모입니다.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혜화문-자내마을(장수마을)-낙산-홍덕이밭-동망봉-한양도성박물관-북평관터-각자성석(刻字城石)-흥인지문(동대문)-오간수문-이간수문-광희문-(점심식사)-벌아현(버티고개)-남소문터-목멱산(남산)-경봉수대-목멱신사터(국사당터)-조선신궁터(주춧돌/계단)-잠두봉-숭례문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6월의 서울학교 <한양도성 순성놀이(上)> 답사도. 혜화문에서 낙산, 흥인지문, 목멱산(남산)을 거쳐 숭례문까지 순성한다. 답사도는 서울시 한양도성도감의 <한양도성 전도>에 답사지를 추가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한양도성 순성놀이(上)>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한양도성의 발자취

한양도성(漢陽都城)은 주산인 백악, 안산인 목멱산, 좌청룡 낙산, 우백호 인왕산의 내사산을 둘러친 18,6km의 석성으로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 숙정문의 4대문과 광희문, 혜화문, 소의문, 창의문의 4소문의 성문과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의 수문을 냈습니다.

▲낙산에서 바라본 도성 안. 멀리 백악, 인왕산, 안산 능선이 이어져 있다.Ⓒ서울학교

한양도성의 공사는 1396년(태조 5) 정월부터 전국의 민간인 장정이 무려 11만 8,000명이나 동원되어 600척을 한 단위로, 97구역으로 나누어 구역마다 천자문을 표시하여 백악 동쪽에서부터 <천자문>의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낙산, 목멱산, 인왕산을 거쳐 백악 서쪽에 이르러 조자(弔字)까지 구획하였습니다.

공사는 매 글자 구간 600척을 6등분하여 각 공사 구간에 판사, 부판사, 사, 부사, 판관 등 12명씩을 임명하여 민정을 독려하여 견고하게 축성하도록 책임을 맡겼습니다. 책임진 부분에 해당하는 성벽에 관직과 군명을 새겨 넣어 책임을 분명하게 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한양도성은 태조 때 창축되어 세종 때 개축되고 숙종 때의 수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데 축조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세 시기의 성벽은 쉽게 구분이 됩니다. 태조 때의 것은 1척 정도의 다듬지 않은 네모꼴의 작은 돌을 불규칙하게 쌓았으나 벽면은 수직이며, 세종 때는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을 아랫부분은 비교적 큰 돌로, 윗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습니다. 이때는 철과 석회를 사용하여 축성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숙종 때의 것은 가로, 세로 2척의 정방형 돌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으로 쌓아 근대적 축성기술의 완성으로 견고한 축성이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안타깝게도 한양도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옛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는데 1899년 도성 안팎을 연결하는 전차가 개통됨에 따라 먼저 성문이 제 기능을 잃었고, 1907년 일본 왕세자 방문을 앞두고 길을 넓히기 위해 숭례문 좌우 성벽이 철거되었으며 1908부터는 평지의 성벽 대부분이 헐렸습니다. 이어서 소의문은 1914년에 헐렸고, 돈의문은 1915년에 건축 자재로 매각되었으며. 광희문의 문루는 1915년에 붕괴되었고, 혜화문은 1928년에 문루가, 1938년에 성문과 성벽 일부가 헐렸습니다. 일제는 1925년 남산 조선신궁과 흥인지문 옆 경성운동장을 지을 때에도 주변 성벽을 헐어버리고 성 돌을 석재로 사용하였습니다.

한양도성의 복원공사는 1968년 1·21 사태 직후 숙정문 주변에서 시작되었고 1974년부터 전 구간으로 확장되었습니다. 2020년 기준으로 전체 구간의 70%, 총 13.7km 구간이 남아있거나 복원되었습니다. 돈의문, 소의문은 완전 멸실되었고 숙정문, 광희문, 혜화문은 복원하였지만 광희문과 혜화문은 부득이하게 원래 자리가 아닌 곳에 세워졌습니다.

▲낙산 자내마을(장수마을)의 성벽 야경Ⓒ서울시

좌청룡인 낙산, 안산(案山)인 목멱산

낙산(駱山. 125m)은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아 낙타산(駱駝山)이라고도 불렸는데 한양도성의 좌청룡에 해당되는 산입니다. 산의 북쪽에는 혜화문[東小門], 남쪽에는 흥인지문[東大門]이 있으며, 자내(字內)마을인 장수마을이 개발을 거부한 주민들의 노력으로 그나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낙산의 유방’이라고 불렸던 이화동약수, 신대약수가 있었으며, 신대약수에는 강세황의 글씨인 ‘홍천취벽(紅泉翠壁)’이라는 암각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져버렸습니다.

동촌이씨의 세거지를 비롯하여 효종의 아우 인평대군의 거소인 석양루와 문인들의 정자인 이화정, 일옹정, 백림정 등이 있었습니다. 단종이 수양대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단종 비 정순왕후는 단종과 이별하고 폐서인이 되어 이곳 낙산 산줄기의 동망봉 아래에 은거하여 살면서 비단에 자색 물을 들여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갔는데 당시 샘물이 있던 곳에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암각자가 남아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제국대학이 낙산 아래 위치했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기거했던 이화장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또한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도선국사가 창건한 청룡사(靑龍寺), 혜거국사가 창건한 미타사(彌陀寺), 담진국사가 창건한 보문사(普門寺)가 있습니다.

목멱산(木覓山. 262m)은 한양의 안산(案山)으로 인경산, 종남산이라고도 부릅니다. 누에모양으로 생겨 서쪽 봉우리를 잠두봉이라고 부릅니다. 정상에는 목멱신사가 있었고 전국의 봉수를 받는 경봉수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산의 동쪽에는 광희문이 서쪽에는 숭례문이 있으며 북쪽 자락으로 청학동천이 펼쳐져 있습니다. 산의 북쪽 자락에 도성을 수비하는 군대가 무예를 닦던 ‘무예장(武藝場)’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예장 터에 왜군이 성을 지어 '왜성대' 또는 '왜장대'라고 불렸습니다.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건립되기 전까지 왜성대 일대에 통감부 건물과 통감관저가 있었고, 그 주변에는 일본인들이 집단 거주지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왜성대에 사는 일본인들은 1898년(광무 2) 경성신사를 창건하였는데 조선신궁 창건 이전까지는 식민지 조선의 일본 신사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1925년 목멱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세웠는데 엄청나 규모에 한양도성 등 많은 유적이 크게 훼손되었으며 정상에 있었던 목멱신사(국사당)가 조선신궁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인왕산으로 강제 이전되었습니다.

산의 남쪽 자락에는 외국인들의 집단 주거지인 이태원이 있습니다. 조선 초기에 원의 역할을 하던 이태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외국인들을 일컫는 이타인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미처 일본으로 건너가지 못한 일본인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고, 병자호란 때 중국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인[還鄕女]들이 얼굴 모양새가 다른[異胎] 자식들과 함께 모여 살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런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도 이태원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가까이에 위치한 용산이 일본군과 중국군과 미군이 차례로 점령하여 머물던 외국군 주둔지인 것도 한번 새겨볼 일입니다.

▲흥인지문(동대문) 전경Ⓒ서울시

한양도성의 동쪽과 남쪽의 대, 소문

혜화문(惠化門)은 한양도성의 4소문 중 동문으로 '동소문'으로도 불렸습니다. 1396년(태조 5)에 창건했고 한양에서 강원도, 함경도 지역을 오가는 문으로, 태종 때 풍수적 문제로 북대문인 숙정문을 폐쇄한 후로는 사실상 그 역할을 했습니다. 원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는데 창경궁 정문 이름도 '홍화문'이라서 이를 피하기 위해 '혜화문'으로 고쳤으며 그 시기는 창경궁 홍화문이 1484년(성종 15)에 창건하였기에 아마 그 이후일 것입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으로 문루가 불탔으나 1684년(숙종 10)에 재건했고 1739년(영조 15)에 문짝에 불이 붙어 문을 못 닫자 한동안 어영청 병사들이 지키기도 했으며 5년 뒤에는 문루를 개수하고 현판을 새로 걸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관리 보수가 어렵다며 문루를 헐어버리고 석축과 홍예는 남겨두었는데 1938년에 동소문로를 뚫고 전찻길을 만들면서 남은 석축과 홍예마저 철거하여 구 혜화문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현재 혜화문은 원래 있었던 곳으로부터 약 15m 정도 이동하여 복원하였습니다.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동쪽 큰문으로 ‘동대문’이라고도 하는데, 1397년 도성을 쌓을 때 함께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세워졌으며 1452년에 중수하였습니다. 조선 말기까지 존속되어 오다가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전반적인 개축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문의 바깥쪽에는 무사석 한쪽에서부터 반원형의 평면을 이룬 옹성(甕城)을 쌓아 적에 대한 방비를 견고히 하였는데, 도성 내의 여덟 개의 성문 중 옹성을 갖춘 것은 이 문뿐입니다. 이 옹성 역시 창건될 때부터 마련된 것이며, 고종 때 다시 개축되었습니다. 또한 숭례문(남대문)이 조선 초기의 양식적 특성을 갖추고 있는데 비하여,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시대적 변천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광희문(光熙門)은 한양도성의 4소문 중 남문으로 '남소문'이라고도 부릅니다. 1396년(태조 5)에 도성을 쌓을 때 창건되었으며, 1422년 세종 때, 1711년 숙종 때 고쳐 쌓았으며 1719년에 석축 위에 문루를 짓고 ‘光熙門’이라는 현판을 걸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일부가 훼손되고 이후 혜화문과 함께 철거해서 문루도 사라졌습니다. 1975년에 도로 확장을 명목으로 홍예까지 철거했는데 다행스럽게도 홍예를 남쪽으로 15m를 옮겨가 문루와 함께 다시 쌓은 게 바로 현 위치의 광희문입니다.

별칭으로 '수구문(水口門)'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하는데 수구문은 목멱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청계천에 합류하지 못하고 도성 밖을 빠져나갈 때 이곳으로 흘러간다고 붙여진 이름이고, 시구문은 시신을 도성 밖으로 운구할 때 통과하던 문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입니다. 광희문 밖에는 당시 묘지가 많았던 수철리(현 금호동)가 있습니다. 또한 유족들은 무당들을 불러 굿을 하며 넋을 위로하였기 때문에 광희문 밖은 자연스럽게 하나둘씩 신당이 늘어나 이후 신당이 많다 하여 '신당동(神堂洞)'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갑오개혁 때부터는 한자어가 '신당동(新堂洞)'으로 바뀌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숭례문(남대문) 야경Ⓒ서울시

숭례문(崇禮門)은 남쪽의 큰문인 남대문이라고도 부르는 한양도성의 정문으로, 1396년(태조 5) 축조하여 1398년(태조 7) 2월에 준공되었고. 1448년(세종 29) 개수공사가 완료되었으며, 1961년부터 1962년 사이에 실시된 해체수리 때 발견된 상량문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대대적인 중수공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편액의 필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양녕대군이 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성문의 예자(禮字)는 오행에 배치하면 불[火]이 되고 오방(五方)에 배치하면 남쪽을 지칭하는 말인데, 다른 문의 편액이 가로쓰임이나 숭례문이 세로로 쓰여 있는 것은 숭례의 두 글자가 불꽃 염(炎)을 의미하여 경복궁을 마주보는 관악산의 화산(火山)에 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숭례문은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었으나 2008년 2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다행히 기반 석축은 화재로부터 안전하여 2010년 2월 착공하여 약 3년의 공사기간을 거친 뒤 2013년 복구되었습니다.

남소문(南小門)은 한양도성의 남쪽에 있던 소문 중의 하나로 광희문 남쪽, 남산 봉수대 동쪽에 있었던 성문으로, 장충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457년(세조 3)에 설치되었는데, 새로 이 문을 설치하게 된 것은 한강나루를 통하여 남쪽으로 가려면 광희문을 통과하게 되는데, 그것은 거리가 멀고 불편하므로 한강 나루터를 도성에서 곧바로 통과하여 나갈 수 있는 문을 하나 새로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가 있어 설치하게 되었으나 설치된 지 12년만인 1469년(예종 1)에 임원준 등의 건의로 폐지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실용에 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음양가에서 손방(巽方. 正東南方)을 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을 설치한 뒤에 의경세자가 사망하여 음양가의 주장이 맞았다는 것입니다. 그 뒤 명종, 숙종 때에 다시 남소문을 개통하자는 의견이 다시 제기되었으나 풍수금기설에 의한 반대론에 부딪혀 끝내 개통을 못하였습니다.

한양도성에 놓여 있는 두 개의 수문

오간수문(五間水門)은 조선 초기 도성을 수축하면서 물길을 낼 때 만들어진 것으로 백악과 인왕산에서 발원한 청계천이 도성을 빠져나가기 위한 수문으로, 흥인지문 옆에 설치하고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수문마다 쇠창살로 만든 철문을 달았습니다. 다섯 칸의 수문을 설치했다고 오간수문으로 불렀으나 1481년(성종 12)까지만 해도 수문이 3개였고 후에 몇 차례 증축을 거쳐 5개의 수문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쇠창살에 부유물이 걸리고 토사가 쌓여 2개의 나무문을 별도로 세웠는데, 이 역시 영조 때에 이르러 거의 막혔습니다. 그러자 1760년(영조 36)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수문 앞에 쌓인 토사를 걷어내고 나무문도 다시 철문으로 교체하여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하였으며, 주변에 버드나무를 심어 토사가 쓸려 내려와 다시 수문을 막는 일이 없도록 영구적인 조치를 하였습니다.

1907년(융희 1) 중추원에서 청계천 하수의 원활한 소통을 이유로 수문을 헐고, 이듬해 3월에는 흥인지문 근처의 성벽과 함께 오간수문의 성벽마저 헐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로 만든 다리를 세웠는데, 오간수문을 오간수교로 부르게 된 것은 이때부터입니다. 오간수문은 도성 안에서 죄를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나가거나 혹은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사람들의 통로로 곧잘 이용되었는데 실제로 명종 때 전국적으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의 무리들이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를 부수고 도망갈 때에도 오간수문을 통해 달아났습니다.

이간수문(二間水門)은 오간수문 바로 남쪽에 있는데 목멱산 동쪽 끝자락에서 발원한 남소문동천의 일부 지류가 도성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만든 수문으로, 이를 제외한 나머지 도성 안의 모든 물줄기는 오간수문을 통해 흘러나갔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이간수문 일대에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을 세우면서 땅 속에 묻었는데 2008년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및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던 중 그해 9월에 발굴되었습니다. 하천 바닥에 선단석을 설치하고, 그 위에 홍예를 얹고 그 주변에 화강암 석축을 구축했습니다. 남, 북 홍예 사이에는 물 가름을 편하게 하기 위해 뱃머리 모양의 물 가름돌을 두었고 오간수문과 달리 홍예 위에는 여장이 없습니다.

▲청계천에 합류하지 않고 도성을 빠져 나가는 수문인 이간수문 Ⓒ서울학교

선린관계인 여진과 일본의 객관

북평관(北平館)은 여진족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만든 국영의 객관(客館)으로 태종 때 설치된 것으로 보이며, 원래 야인관(野人館)이라 부르던 것을 1438년(세종 20)에 북평관으로 고쳤으며, 흥인지문 근처에 있었는데 조선 중기에 없어졌습니다. 조선은 중국에 사대(事大)하고 일본과 여진에 교린(交隣)하였는데 여진에 대한 교린정책으로 경성, 경원에 무역소를 두어 당시 반농반수렵생활을 하던 그들에게 생활필수품인 면포, 마포, 저포, 미두, 염장, 농구, 종이 등을 마필, 해동청, 산삼 및 각종 모피 등을 갖고 와 바꾸어가도록 하였습니다.

또 그들에게 조공과 귀화를 장려하는 한편, 여진 추장들에게 지중추원사 이하 호군, 사직, 만호, 천호 등의 명예군직을 주기도 하고, 이들이 토산물을 진상하면 그에 대한 회사물을 주어 보냈습니다. 여진인이 국경에 도착하면 향통사가 한양으로 인솔하여 왔는데, 명의 사신이 오게 되면 이들을 입경시키지 말도록 제약하였습니다. 한양에 도착하면 가진 병기를 모두 거두었다가, 돌아갈 때 내주었고 관사인 북평관에 들면, 금침, 의관과 쌀·콩·술·고기 등을 주어 대접하였습니다. 체류하는 동안에도 최소한 5~15회 정도의 각종 연회를 사절의 계급에 따라 베풀었습니다.

동평관(東平館)은 일본 사신이 머물던 숙소이며 조선 전기에 일본과의 외교와 무역에 중요한 구실을 하던 곳으로 왜관(倭館)이라고도 하는데, 위치는 지하철 2호선 을지로4가역 9번 출구로 나가면 덕수중학교 옆 인현어린이공원에 있었습니다. 1407년(태종 7)에 설치되었으며 1438년에는 영접도감의 예에 따라 감호관을 두었고 1444년에는 감호관이 영접도감의 예에 따라 해유(解由)를 모두 관장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동평관에는 관사와 창고를 설치해 그릇과 미곡을 저장하고 일본의 사신과 객인을 접대하였는데, 해가 뜨면 문을 열고 지면 문을 닫아 출입을 엄하게 하여 공청무역 외에는 관문 밖에서의 무역을 금했으며 위반자는 엄격하게 다스렸습니다. 임진왜란 때 불타 폐지되었으며, 조선시대에 동평관이 있던 곳을 왜관동(倭館洞)이라 하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카페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서울학교 기사(6월)를 확인 바랍니다.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자는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최종 백신접종을 완료하시고, 항상 마스크를 착용하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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