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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선비 문재인을 어떻게 평가할까

[인문견문록] 김기현의 <선비-사유와 삶의 지평>

대통령 문재인은 이제 자연인 문재인으로 돌아간다. 누군가에게는 비하의 대상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존경하고 있다. 그의 높은 지지율은 기본적으로 인격의 힘에서 나오는 것 같다. 인격적 훌륭함에 엄격한 친인척 관리가 더해져 유례 없는 지지율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찮다. 반대 목소리는 주로 정책적 실패 내지는 미진함에서 오는 듯하다. 인격의 향기가 모아오는 지지와 실천적 과오로부터 초래되는 반대, 두 대립항 모두 문재인이라는 개인의 인격적 특성으로부터 유래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 특성은 바로 '선비적 특성'이다. 선비가 실제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아는 현대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 선비의 모습을 21세기에 풀어낸 책을 집어 들었다. 전북대학교 김기현 교수의 책 <선비-사유와 삶의 지평>(민음사 펴냄)이다.

▲ 문재인 대통령이 5월 3일 오후 청와대 충무실에서 열린 국무위원 및 장관급 초청 오찬을 마친 뒤 본관 테라스에서 참석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저자는 선비를 "일반적으로 유교의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조선 사회의 지식인상"으로 정의한다. 그런데 '선비'라는 단어는 현대인들에게 별다른 공명을 불러오지 못한다. 기독교, 불교가 아직도 열성적인 신도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 비교한다면 못내 아쉽다. 왜 우리는 시간적으로 가까운 조선의 '선비'를 이해하지 못할까? 아마도 유교의 종교성을 빠트리고 유학을 사고하기 때문은 아닐까? 책은 퇴계를 비롯한 여러 선비들의 내면과 일상을 들여다보면서 당시 선비들에 대한 총체적 상을 그려내고 있다.

선비 황현은 조선의 망국을 슬퍼하면서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그의 유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음풍농월하는 한량 이미지의 선비는 절대로 이런 충절을 보일 수 없다. 나라가 없어졌기에 충(忠)을 바칠 대상도 사라졌는데 어떤 선비는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 이런 선비의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비를 '지식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종교인'으로서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생긴다. 그들의 행위는 상당한 수준의 종교성을 띠고 있었다.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들은 절대자를 믿지도 연기법칙에 따른 윤회를 믿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경건한 삶을 살려 노력했고 불선(不善)에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 이들 삶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선비의 정신구조는 그들의 독특한 '자연관'으로부터 쌓아올려졌다. 자연관이 선비의 신념체계의 핵심부분을 형성했다. 서구 근대사상의 비조인 데카르트는 물심이원론을 설파했다. 저자의 설명이다. 

"'자연은 야만'이라는 서양인들의 의식의 근저에는 이러한 만물관(물심이원론-필자 주)이 놓여있다. 그들은 자연을 그러한 만물의 단순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그것을 정복하여 그 위에 세운 거대한 인공의 구조물을 문명으로 여긴다."

선비들의 자연관은 데카르트와 달랐다. 저자는 선비들의 자연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선비-필자 주)에게 자연은 개체들의 집합을 넘어선, 하나의 통일적이며 연속적인 전체로 이해되었다. 만물은 그 안에서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갖고서 부단히 생성 변화해 나간다." 이런 자연관은 신유학인 성리학만이 아니라 선진유가(先秦儒家)에서 이미 배태되어 있던 사상이었다. 중용의 한 구절이다. "천지의 도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변함없이 만물을 신묘하게 생성한다." 유기체적 자연관은 만물과 만인이 서로 쟁투하는 세계관과는 다르다. 무엇보다 '조화'와 '화합'을 우선시한다. "자연의 세계는 결코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정글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만물이 상호, 의존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공생 공영하는 장이다."

선비는 자연 만물에 대한 남다른 경외심을 가졌다. 현대인은 바로 이 지점을 놓친다. 우리는 자연에 대한 경외의 감정을 거의 느끼지 않으며 생활한다. 이렇게 상상해보자. 지금과 같은 과학적 지식이 없었다면 우리의 자연에 대한 인식과 감정은 어땠을까? 겨우내 추웠던 날이 봄냄새를 살포시 풍기고 꽃봉오리들이 삐죽 얼굴을 내밀 때 그런 장면을 보는 선비들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의한 물리적 현상이라 생각하는 대신 경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장면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생명사상가 김지하의 경험을 추체험해 보자.

"그 때가 마침 봄이었는데, 어느 날 쇠창살 틈으로 하얀 민들레 꽃씨가 감방 안에 가득히 날아 들어와 반짝거리며 허공 중에 하늘하늘 날아다녔습니다. 참 아름다웠어요. 그리고 쇠창살과 시멘트 받침 사이의 틈, 빗발에 패인 작은 흠에 흙먼지가 날아와 쌓이고 또 거기 풀씨가 날아와 앉아서 빗물을 빨아들이며 햇빛을 받아 봄날에 싹이 터서 파랗게 자라 오르는 것, 바로 그것을 보았습니다. 개가죽나무라는 풀이었어요. 새삼스럽게 그것을 발견한 날, 웅크린 채 소리 죽여 얼마나 울었던지! 뚜렷한 이유도 없었어요. 그저 '생명'이라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신선하게, 그렇게 눈부시게 내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한없는 감동과 희열 속으로 나를 몰아넣었던 것입니다."(김지하의 <생명과 자치> 중)

유기체적·생성론적 자연관은 곧바로 조화와 화합을 중시하는 사회관으로 이어진다. 저자의 설명이다. "만물이 상호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인식은 그(선비)로 하여금 인간 사회를 넘어서 만물과, 더 나아가 자연과 어떻게 대면해야 할 것인가하는 문제까지 숙고하도록 만들었다." 인간 개개인은 만물의 한 부분이고 상호 연결된 존재라는 감각이 그들의 도덕의식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인간의 마음은 만물 나아가 하늘에까지 연결되어 감응한다는 천인상감(天人相感)이 등장하게 된다. 결국 유기체적 자연관에서 출발해 내면의 수양으로 연결된다. 선비들이 왜 일반적 의미의 종교인이 아니었음에도 도덕의 극한을 추구했는지 이해가 된다. 절대자는 없지만 나와 하나인 천지와 공동체에 의해 나의 도덕감각은 활성화되는 것이다.

이런 유대감은 세계와 타자만이 아니라 세대를 연결해 확장된다. 선비의 내면에는 세계와 타자에 대한 공시적 유대감, 조상과 후손을 잇는 통시적 유대감이 충만했다. 유대감의 효과는 무엇이었을까? 저자 김기현 교수가 말하는 개인주의의 폐해가 정확히 유대감의 효과일 것이다. 해당 구절은 이렇다. "개인주의의 한 가지 심각한 문제점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사람들은 자신을 선조와 후손으로부터 스스로 고립시킨 결과 자기들의 존재 전후좌우에 놓여있는 공무(空無)를 해명할 방법을 알지 못하여 결국 실존의 허무와 공포에 시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인을 넘어서는 유대감, 연대감은 실존적 허무를 극복한다. 심리학의 공포관리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은 인간 문화의 바탕에는 문화를 통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려는 의도가 잠재되어 있다고 본다. 실존적 허무와 죽음의 공포를 유교에서는 이런 공시적·통시적 유대감으로 극복하려 한 것이다.

실존적 공포는 유대감만으로 온전히 극복되지 않는다. 무질서한 세상은 불안의 근원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해석해내려고 애쓴다. 자신의 관념과 개념을 동원해 세상을 정합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욕구를 저자는 '형이상학적 충동'이라고 말한다. 이런 형이상학적 충동이 고차원적으로 발전한 것이 성리학의 이기론이다. 세상이 이(理)냐 기(氣)냐는 공리공담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해 저자는 "불안을 해소해 줄 사고 기제로 작용했던 만큼, 또 다른 의미의 실학성을 담지하고 있다"며 유학을 방어한다.

유기체적 자연관을 갖고 공시적·통시적 유대감에 충만한 선비는 현실 속에서 사랑(仁)을 실천하는 존재다. 사랑을 통해 타자의 성취를 돕고 같이 화합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이 사랑은 매우 얄궂어서 원초적 감정 그대로 두어서는 화근이 된다. 좋은 게 좋은 것이란 없다. 사랑도 일정한 예(禮)적 양식을 통해야만 더 굳건해질 수 있다. 저자는 "예는 사랑을 규범화한 것이다"라고, 예를 정의한다. 예란 모두가 상통화합(相通和合)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다.

불교에 부처가 있듯 유가는 이상적 인간으로 성인(聖人)을 제시한다. 성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어지는 설명이다. "성인은 공동체적 자아의 성실한 체현을 통해 자신은 물론 타자까지 성취시켜 주며, 궁극적으로는 만물의 생성발육을 도움으로써 천지에 비견될만한 우주적 대아(大我)를 완성한다." 세상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선비는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 모두를 일으켜 성취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은 혼자 고고한 삶을 사는 것과는 비견되지 않는 차원의 일이다. 세상은 책과 달리 만만하지 않다. 유학은 정석대로 행하는 정도(正道)를 권면하지만 경우에 따라선 권도(權道)도 허용한다. 권도는 정석플레이가 작동하지 않을 비상시기에 작동하는 윤리감각이다. 정도와 권도는 반대개념이 아니다. 둘다 왕도정치라는 목적을 성취하는 방법일 뿐이다. 다만 권도는 대현(大賢)의 경우만 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어설프게 변칙으로 승부하느니 정공법만 쓰라는 이야기다. 수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선비의 과제는 치국과 평천하로 나아가며 완성되는 것이다.

선비들은 전국 곳곳의 향촌을 '도덕적'으로 지도하며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들이 조선의 시민사회였던 것이다. 역사학자 김기협은 자신의 책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조선 왕조 아래 한국 사회가 누린 안정과 번영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많지 않은 높은 수준의 것이었다." 조선이라는 전근대 사회가 왜 이토록 최장기간 번영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역사의 종말로 유명한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국가 흥망성쇠의 관건을 '가산제'에서 찾았다. 가산제란 "인정에 치우쳐 자기 가족과 친지들에게 특혜를 주려는 성향"이다. 통치자나 지배연합이 공적 가치를 망각하고 특정 인물이나 그룹을 편애함으로써 국가는 망국의 길로 들어선다고 그는 말한다. 

"길게 이어지던 평화와 안정의 시기의 끝에 경제적 또는 군사적 위기가 찾아올 때, 이 기득권 가산제 집단은 자신들의 세력을 한껏 넓히거나 국가가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방해한다."(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정치질서의 기원> 중)

"천하는 모두의 것"이라는 천하위공(天下爲公)에 대한 강조는 공적 가치를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유교적 신분질서는 유력계층이 실력을 키우고 (권력-필자 주) 휘두르는 길을 제한하는 특성을 가진 것이었다. (중략) 이 질서의 제도적 핵심은 권력의 공공성에 있었다."(상기 김기협의 책에서 인용) 이런 국가의 공공성을 뒷받침한 핵심세력이 조선 선비들이었다.

물론 선비들이 믿고 실천했던 유학에 대한 비판들도 많다. '사대자소(事大慈小)'의 개념을 모르는 이들은 선비들이 사대적이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국제관계에 평화질서를 구축하는 일의 지난함을 아는 선비들에게 사대란 사대주의와 분명 다른 것이었다. 선입관을 가지고 던지는 질문보다 좀 더 본질적인 비판을 제시하는 이들도 있다. 철학자 한형조는 글 <근사록에 담긴 학문의 구상>에서 성리학의 자연관을 '인간-동형론적'(anthropo-cosmic) 사고라고 말한다. 이 사고 안에서는 자연이 인간 존재와 도덕성의 최종 근거이자 심급이 된다.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우주적 질서와 본성이 나의 내면에 들어와 있다는 이 믿음은 일반적 추론의 영역이라기보다는 믿음의 영역이다.

한형조는 이렇게 말한다. "이 최초의 설득이 관건이라고 생각했기에, 주자도, 여조겸도, 퇴계도 초심자에게 이 어려운 우주-인간 동형론과 인간성의 우주적 선을 그토록 미리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해 마지않았던 것이다."(상기 논문에서 인용) 그래서 주자학(성리학)은 '먼저 믿으라'는 기독교와의 거리가 생각만큼 멀지 않다. 그러나 믿음이 강조된다고 반드시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현재 모든 인류가 믿고 있는 천부인권, 자연권은 단 한번도 현실에서 존재한 적이 없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믿음으로써 현대 국가는 공동체를 유지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유학의 핵심적 프로젝트다. 인격자가 국가를 통치하고 다른 국가와의 평화질서를 구축한다는 원대한 비전. 대통령 문재인은 유학적 비전의 실사판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선비 문재인을 어떻게 평가할까? 책을 덮으면서 문득 궁금함이 들었다.

▲ <선비-사유와 삶의 지평>(김기현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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