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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섬섬···답사길이 열린다

[2022년 6월 섬학교는 <지심도 원시림 걷고 통영 맛보기>]

원시림이 가장 완벽히 남아 있는 섬. 거제의 지심도는 동백으로 유명한 섬이지만 이 땅에 얼마 남지 않은 원시림의 섬이기도 합니다. 섬 전체가 수백 년 수령의 원시림으로 뒤덮여 있어 한여름에도 시원한 숲 터널을 지나 섬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지심도에서 펼쳐지는 망망대해, 섬은 작지만 섬이 보여주는 풍경은 광대하다.Ⓒ섬학교

코로나19의 오랜 터널을 벗어나 섬학교가 다시 개강합니다.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연구소 소장) 제95강은 6월 4(토)-5(일)일, 1박2일 일정으로 진짜 원시림을 보러 거제의 지심도로 갑니다. 지심도는 수백년 된 고목 동백과 후박, 소나무 거목들이 섬 전체를 뒤덮고 있어 섬 전체를 걷는 내내 숲 터널을 통과하게 됩니다. 경상도에서 가장 걷기 좋은 길로 꼽힐 정도입니다.

아름다운 섬 지심도에는 15가구 35명의 주민들이 살아가는데 작년까지만 해도 섬에서 강제로 추방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거제시가 관광 개발을 이유를 주민들을 강제 이주 시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사단법인 섬연구소(소장 강제윤)가 2년에 걸친 노력으로 국민권익위원회의 중재를 이끌어 내 주민들은 다시 섬에 영구 거주할 수 있게 됐습니다. 섬연구소가 지켜낸 근대문화유산들도 함께 보러 갑니다.

섬학교는 또 통영의 맛을 보러 갑니다. ‘맛의 지존’이라 할 통영은 어느 때나 해산물 요리가 풍성하고 맛있습니다. 경상도 음식이 맛없다고 투덜거리던 사람들도 통영에 와서는 그 맛에 탄성을 지릅니다.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큰 전라도 사람들도 통영 음식만은 인정하길 주저하지 않습니다. 통영 음식이 특별한 것은 조선시대 3백 년 동안 전라도 여수에서 이주해온 삼도수군통제영이 자리잡은 특별자치구역이었기 때문입니다.

▲통영 해산물 요리의 알파와 오메가, 다찌 상차림Ⓒ이상희

해산물 요리의 향연도 즐기고 윤이상, 박경리, 유치환, 이중섭, 백석 등 예술가들의 발자취도 더듬어봅니다. 내내 바다가 보이는 삼칭이 해안길도 걸어 봅니다. 오는 6월, 지심도 원시림을 걷고 통영을 맛보며 섬의 향기에 빠지고 싶은 분들을 초대합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95강, 6월의 답사지인 <지심도 원시림 걷고 통영 맛보기>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원시림의 보물섬 지심도]

세상에 없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장승포항에서 지심도까지는 불과 5킬로, 짧은 거리지만 배가 끊기면 섬은 다른 세계에 속한다. 하지만 그도 잠시, 벗어났다고 생각했으나 벗어난 것이 아니다. 어찌할까. 뱃길이 끊어진 시간 동안 섬은 여행자에게 또 다른 세계가 된다. 섬에 깃든 생명체들은 모두가 한 운명이 되는 것이다. 강한 바람과 거친 파도가 여행자라고 비껴가지 않는다. 삶을 넘어서고 싶은 열망으로 섬에 왔으나 섬은 다시 삶이다. 세상 밖의 삶은 없다. 세상에 없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이 섬의 유일한 운송수단은 짐수레를 매단 오토바이들이다. 짧지만 섬은 초입부터 언덕길이다. 주민들은 짐을 싣고 가파른 길을 오른다. 부두에는 어선 한 척 떠 있지 않다. 섬에 방파제가 없는 까닭이다. 폭풍으로부터 배를 숨길 곳이 없으니 섬이지만 섬의 주업은 어업이 아니다. 섬은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나무 터널이 시작된다. 동백나무, 소나무, 팔손이, 후박나무 등의 상록수가 원시림의 숲으로 남아 있는 이 땅에 보기 드문 보물섬이다. 지금은 거제시로 소유권이 이전됐지만 오랫동안 섬의 소유권자는 국방부였다. 섬의 땅 주인이 국방부였다는 것이 주민들에게는 불운이었지만 나무들에게는 행운이었다.

지심도는 면적 0.356㎢(10만여 평), 길이 1.5㎞, 너비 500m, 해안선 둘레 3.7㎞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더 오랜 옛날에도 살다 떠나고 들어와 살기를 거듭했을 터지만 기록에 남아 있는 사람살이의 역사는 길지 않다. 사람들이 다시 이 섬에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현종 때인 17세기 후반부터다. 주민들은 모두 일제시대 제국의 군대에 의해 쫓겨났고 8.15 해방 때까지 섬에는 일본군 일개 중대가 주둔했다. 해방 이후에야 다시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섬의 뒤편에는 일제의 포진지와 탄약고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심도는 그 자체로 숲이다. 숲길에서 시작해 숲길로 끝난다.Ⓒ섬학교

동백섬, 숲은 바람 속에서 깊어진다

아침부터 바람이 제법 분다. 민박집 정원은 다양한 수종의 나무와 초본 식물들로 잘 가꾸어져 있다. 용설란은 주인이 10여 년 전 섬의 마끝 절벽에서 캐왔다. 주인이 들여다 심은 뒤 안의 종려나무들도 세월 따라 울창해졌으나 바람과 추위에 시달려 모색은 초췌하다. 민박집 뒷길, 섬의 정상에는 잔디가 깔린 '활주로'가 있다. 활주로라 이름 붙어 있지만 경비행기도 착륙하기 어려운 짧은 거리다. '활주로'는 비행기 활주로가 아니라 헬기 착륙장이다.

섬은 그 전체가 원시의 숲이다. 태풍이라도 불면 모든 숲이 바닷물을 뒤집어 쓸 만큼 작은 섬에서 끝내 살아남은 나무들은 대체로 뿌리가 깊어 바람에 강하거나 염분에도 잘 견디는 나무들이다. 그들 중 동백나무의 개체 수가 월등히 많다. 섬이 동백섬이라 불리는 이유다.

동백은 겨울 중 가장 추운 때는 꽃이 피지 않는다. 꽃망울을 머금고 날이 풀리길 기다린다. 동백은 대개 11월 말 경부터 이듬해 4월까지 피고 지기를 거듭한다. 겨울 꽃으로 알려져 있지만 동백은 세 계절에 거처 물경 반년 가까이 피는 꽃입이다. 겨울에 피는 꽃은 동백(冬柏), 가을에 피면 추백(秋柏), 봄에 피면 춘백(春柏)이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3, 4월의 동백은 실상 동백(冬柏)이 아니라 춘백(春柏)이라 해야 맞다.

동백의 숲으로 난 흙길을 걷는다. 지심도보다 더 작은 섬에도 자동차 길이 나 있는 것을 여러 번 봤다. 다행히도 지심도에는 자동차 길이 없다. 섬은 짐수레 매단 오토바이 한 대가 간신히 지나다닐 만큼 좁은 오솔길들로 이어져 있다. 게다가 섬의 일부는 포장도로지만 활주로에서 샛끝별여 부근 망루로 난 길을 비롯해 섬의 여러 갈래 길들은 고스란히 흙길이다. 이런 비포장의 흙길은 어느 섬에서도 좀체 만나기 어려운 행운이다. 참으로 귀하고 귀한 길이다.

길의 본 뜻은 무엇일까. 한자 길 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다. 나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자연과 소통하고 나아가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했다.

하지만 도시의 길들은 자동차와 온갖 장애물들의 위협으로 더이상 생각에 몰두해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그 길들은 오로지 통로로서의 기능만 할 뿐이다. 이런 오솔길, 흙길들, 사람이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길들을 더이상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만드는 소중한 토양이 아닐까. 나그네는 많은 길들이 '사유의 확장' 기능을 되찾을 때 이 소란하고 얕은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 더 깊고 고요해질 것을 믿는다.

▲지심도 원시림 동백 터널길Ⓒ섬학교

왕대나무 숲 부근에 섬의 방향 표지석이 서 있다. 동서남북의 방위를 알려주는 표지석. 바다가 보이지 않는 깊은 숲속에 들어와서야 섬의 방향이 제대로 가늠된다. 매일 매일 삶이 혼돈스럽다. 내 삶의 방향 표지석은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실상 삶에는 방향 표지석 따위는 없을지도 모른다. 삶은 정해진 방향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주어진 삶은 없다. 어디에서도 삶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삶일 뿐이다. 어둑한 숲의 터널을 빠져나가면 환한 빛이 쏟아질 것이다. 그러나 숲의 끝은 절벽이다. 넘어서고자 하지만 건너뛸 수 없다. 삶 건너 삶은 없다. 세상에 없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해안 절벽에 가까워질수록 파도소리 거세지고 숲은 바람 속에서 깊어진다.

[해산물 요리 향연에 예술가들의 향기 가득한 통영]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었다!

맛의 고장, 전라도 태생인 내가 처음 경상도 통영에 매혹된 것은 오로지 음식 때문이었다. 통영이 전라도 음식에서 발견되던 ‘개미’진 맛의 유전자가 경상도에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경상도 음식은 맛없다는 편견을 깨뜨려준 도시 통영. 특히 해산물 요리에 관한 한 통영은 이 나라 원탑이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역시 ‘다찌집’ 문화다. 다찌집이란 술을 시키면 안주는 그날그날 주인 마음대로 내주는 선술집이다. 관광 다찌가 아니라 지역 사람들이 애용하는 다찌 집을 잘만 찾아가면 제철에 맛볼 수 있는 거의 모든 해산물을 한상에서 받아볼 수 있다. 그것도 이미 만들어놓은 식은 음식이 아니라 즉석에서 해주는 대면 요리다. 최근에 자주 가는 단골 다찌집에서 헤아려보니 회를 포함한 싱싱한 해산물의 수만 11가지나 된 날도 있었다. 도미회, 전복, 멍게, 호래기, 개불, 피조개, 오징어, 참소라, 굴, 해삼, 해삼내장젓. 통영이 아니면 불가능한 차림이다. 시금치나 몰 등의 나물류도 더없이 맛깔스럽다. 개조개 유곽이나 해물잡채 등 통영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진귀한 요리들도 나온다. 경상도 음식을 얕잡아 보던 전주나 목포 사람들도 통영 다찌 음식을 한번 맛보고 나면 엄지를 치켜든다.

▲내내 해변을 따라 걷는 십리길. 삼칭이 해안길Ⓒ섬학교

대체 통영이 유독 맛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이 궁금해서 나그네는 통영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로 <통영은 맛있다>란 제목의 책까지 낸 바 있다. 처음엔 통영사람들에게 통영이 특별히 맛있는 이유를 물어봐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이가 없었다. 조선시대 높은 벼슬아치가 통영을 다스렸기 때문에 한양에서 궁중음식 문화를 가져온 것이 이유가 아니겠느냐 짐작할 뿐이었다.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왕이 살았던 서울의 음식이 가장 맛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같은 고위직이 다스리던 다른 지역도 다 맛있어야지 않겠는가. 그런데 왕이 살았던 서울 음식 맛있다는 소리 들어보질 못했다. 그래서 통영 맛의 근원을 파헤쳤던 것이다.

결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조선시대 내내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 있던 통영은 어느 지역보다 물산이 풍부했다는 점이다. 맛이란 물질적 풍요 속에서 나온다. 전라도의 음식문화가 발달한 이유는 배후에 호남평야나 나주평야 같은 곡창 지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배 채우기도 급급하다면 맛을 따질 여유가 없다. 요리가 발달할 수도 없다. 부가 있어야 요리도 발달하게 된다. 아무리 맛있는 도미라도 맨날 구워 먹기만 하면 질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도미의 뱃속을 가르고 소고기와 야채를 다져 넣고 삼색 지단을 올린 뒤 쪄내는 도미찜이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멋을 부리며 음식문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통영 음식문화의 발전 또한 조선 최대 군사도시 통영의 물적 기반과 남해바다의 풍부한 해산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해로교통이 활발했던 과거에 수군사령부인 통영으로 각지의 물산과 문화가 자유롭고 활발하게 유입되었다. 풍부한 식재료와 여러 지방의 음식문화가 하나로 융합되어 통영의 음식문화가 발전했던 것이다. 통영이 경상도 타 지역과는 차원이 다른 뛰어난 음식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이다.

통영은 조선시대 500여 척의 전함과 수군 3만 명 이상이 주둔한 최고의 군사도시였다. 군수물자가 넘치니 물산이 풍요로울 수밖에 없었다. 정조 때는 심지어 화폐를 발행하는 주전소까지 있었다. 게다가 통영은 1602년 공사를 시작해 1604년에 완공된 신도시였다. 임진왜란 직후 여수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이 통영 땅으로 옮겨 오면서 전라도 출신 군사들이 대거 이주해 왔고 여기에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 병사들까지 합류했다. 군수품을 조달하는 12공방을 만들면서 8도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들을 불러왔다. 또 전국 각지의 상인들이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해 통영으로 몰려와 살았다. 경상도 땅에 생긴 도시에 전라도를 주축으로 한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뒤섞여서 만들어진 융복합 도시가 통영이었다. 게다가 경상도 관찰사나 삼도수군통제사나 같은 직급이었으니 지휘를 받을 일이 없었다. 통영은 특별자치구역이었다. 통영과 경상도는 동급이었던 것이다. 그 기간이 통제영이 폐영 되는 1895년까지 무려 3백 년 동안이나 지속됐다.

3백 년 동안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었고 그 문화 또한 통영만의 독자적인 것이었다. 지금처럼 육로가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바다가 고속도로였으니 통영은 길이 불편한 경상도 내륙보다는 수로를 통해 경상도 해안이나 전라, 충청 등 타 지역들과 더 적극적인 문물교류를 했다. 군사도시인 까닭에 양반보다는 중인들이 주축이었고 장인들의 수공업과 객주, 상인들의 상업 활동이 전국 어느 곳보다 활발했다. 많은 통영사람들이 나전칠기, 소목, 화공 등 12공방의 일을 3백 년 동안이나 가업으로 이어오면서 그들의 몸속에는 예술적 유전자가 형성됐다.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선생의 아버지도 유명한 소목장이었다.

▲뜨겁게 소멸해가는 통영의 저녁Ⓒ이상희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과 가깝고 교류가 활발했던 까닭에 서양문물이 어느 곳보다 먼저 유입될 수 있었다. 1914년에 이미 ‘봉래좌’란 극장이 들어섰고 1930년대는 영화사가 2곳이나 있었다. 통영삼광영화사는 1930년에 김유영 감독의 <화륜>을, 1931년에는 이구영 감독의 <갈대꽃>을 제작하기도 했다. 대표적 친일연극인 유치진이나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소설가 박경리, 시인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화가 전혁림 등 통영 출신 예술가들이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도 모두 통제영 12공방에서 비롯된 예술적 유전자와 신문물을 일찍 수용할 수 있었던 통영의 경제적 부와 역사, 지리적 요인들 때문이다.

그래서 통영은 음식문화 또한 지금의 경상도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빼어난 전통을 이어 올 수 있었다. 아무튼 술꾼들이나 해산물을 좋아하는 미식가들에게 통영은 천국이다. 통영의 경관과 역사, 문화자원도 빼어나지만 그래도 모든 것의 으뜸은 맛이다. 통영에 가야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은가!

▲6월의 섬학교 답사 지도Ⓒ섬학교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카페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섬학교 기사(6월)를 확인 바랍니다.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자는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최종 백신접종을 완료하시고, 항상 마스크를 착용하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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