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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 천국! 섬진강과 옥정호의 빛깔에 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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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신록 천국! 섬진강과 옥정호의 빛깔에 홀리다

[2022년 5월 고을학교는 <임실고을>]

온 세상이 신록인 5월의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는 남도의 정취 가득한 섬진강, 물안개 피어오르는 옥정호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전북 <임실고을>을 만나러 갑니다.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호남좌도농악의 대표 격인 필봉농악이 전수되고 있으며, 왕건과 이성계의 기도처의 전설, 오수(獒樹)라는 지명을 얻게 된 의견(義犬)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고을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아침 햇살을 받아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마치 신선이 노니는 듯 아름다운 옥정호는 섬진강 상류의 맑은 물을 담고 있다.Ⓒ임실군

고을학교 제85강은 2022년 5월 22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 압구정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출발합니다.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임실IC-성수면(상이암/부도/환희담비석/삼청동비석)-지사면(영천서원/김개인생가)-오수면(의견비/이웅재고가)-삼계면(오괴정/만취정/노동환가옥/광제정)-임실읍(점심식사/임실향교/신안서원)-옥정호-운암면(양요정)-신평면(진구사지석등)-관촌면(사선대/운서정)-임실IC-서울의 순입니다.

▲<임실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85강 답사지인 임실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삼한시대 마한의 신운신국

임실은 북쪽으로는 만덕산(763.3m)을 경계로 전주와, 북동쪽으로는 성수산(875.9m)을 경계로 진안과, 남서쪽으로는 회문산(774.8m)을 경계로 순창과, 서쪽으로는 옥정호 너머로 정읍과, 남쪽으로는 섬진강 건너 남원과 접하고 있습니다.

임실의 물줄기는 만덕산서 발원한 오원천(烏院川)이 임실의 북서쪽을 관통하여 옥정호를 이루고 성수산서 발원한 오수천(獒樹川)이 임실의 동남쪽을 관통하여 섬진강 본류와 합류합니다.

임실의 역사는 삼한시대는 마한에 속하여 신운신국이라 했으며, 백제시대 ‘잉힐군’으로 거사물현과 마돌현을 거느렸고, 통일신라시대는 남원부에 임실군을 두었으며, 759년(경덕왕 16) 잉힐군을 임실군, 거사물현은 청웅현, 마돌현은 마령현으로 개칭하였습니다. 고려시대는 전라도 전주목에 임실군을 두었고 조선시대는 1413(태종 13) 임실군을 임실현으로 개칭하였다가 1895년 다시 임실군으로 개편되었습니다. 1906년 남원부의 6개방이 임실군으로 편입되었고 1914년 12면 130리, 1979년 임실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1읍 11면이 되었습니다.

임실향교는 1413년(태종 13)에 창건된 것으로 임진왜란 때 일부 소실되었다가 1854년(철종 5) 대성전을 중수하고, 1869년(고종 6) 명륜당을 보수하였습니다. 그 뒤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릅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고, 명륜당의 현판은 명나라 주지번의 글씨를 집자한 것입니다. 명륜당 옆으로 수령 약 7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습니다. 대성전에는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5성과 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 등 송조 4현, 그리고 동국 18현 등 27위가 배향되어 있습니다.

▲사선대는 예로부터 물이 맑고 경치가 아름다워 하늘에서 신선과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임실군

신안리 지명들의 유래

임실에는 유서 깊은 서원과 고택, 정자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지명은 보통 유명한 산의 이름을 따르거나 하천의 이름을 따라 명명하던 것과 달리 이곳 신안리의 지명은 유교적 이념 혹은 유학자들의 이름을 따라 지었는데, 다시 말해 조선시대 유교적 이상향을 투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안은 주희의 관향으로 보통 주희의 글을 보면 '신안 주희'라 쓰곤 하였는데, 이러한 연유로 신안사에 주희 영정을 봉안하고 그 격을 높여 신안서원이라 하였습니다. 구곡천은 주희가 말년에 지냈다는 무이의 구곡천을 따서 지은 것입니다. 낙촌과 정촌은 낙양에 살던 정호, 정이 형제를 가리키는 말이며 장재리는 장자동이라고도 불렸는데 장자는 횡거 장재를 뜻합니다.

신안서원(新安書院)은 1588년(선조 21)에 신재 한호겸의 문하들이 스승을 위해 세웠으며, 정유재란으로 불탄 것을 1669년(현종 10)에 다시 복립하였고, 1788년(정조 12)에 송경원, 한필성, 홍운정, 한명유, 송시웅을 추가로 배향하였습니다. 1819년(순조 19) 순창의 무이서원의 예에 따라 주자의 영정을 함평 자양서원에서 모사해 와서 봉안하였고, 같은 해 신안사를 신안서원으로 고쳤습니다. 1852년에는 이서를, 1860년에는 김수근을 추가로 배향하였습니다. 1869년에 훼철된 후 1958년에 복설할 때 원래의 신안면 낙천리에서 금동마을로 옮겨 세웠으며 1968년 중건 시 강백진을 추가로 배향하였습니다. 한호겸은 송경원의 외증손이며, 한명유와 한필성은 한호겸의 후손들이고, 송시태는 송경원의 후손입니다.

송경원은 단종이 폐위될 즈음 관직을 버리고 홀로 백이산 아래로 낙향하였습니다. 송경원은 공주에 있는 단종과 그 신하들을 배향하고 있는 숙모전에 배향된 인물입니다. 같은 시기 한호겸의 할아버지 한세신 또한 이러한 이유로 남원으로 낙향하고 한호겸의 아버지 한부가 이곳 신안리에 입향하게 되어 송경원의 손녀와 인연을 맺으면서 한호겸을 낳습니다. 한호겸은 일재 이항의 문인인데 이항은 명종, 선조 대 사람으로 정읍 태인에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면서 하서 김인후와 교류하였으며 그 문하에서 많은 선비들이 의병활동을 하였습니다.

이 일대 호남학맥의 중심

영천서원(寧川書院)은 1619년(광해군 11) 창건되었으며, 1688년(숙종 12) 김유경의 상소로 사액되었습니다. 이 서원에는 기묘명현 안처순, 을사명현 정환, 정황, 그리고 이대유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임실군내 유일한 사액서원으로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가 1959년에 후손들에 의해 사우인 숭현사가 복원되었습니다. 안처순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안침-안처순으로 이어지고, 이대유와 정황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정황-이대유, 정염으로 이어집니다. 이대유와 정염으로부터 최온, 김복흥, 이상형, 이상길, 장만, 김벽 등으로 이어지고 있어 명실공히 임실, 남원, 순창, 장수 일대의 호남학맥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사우, 강당, 전사청, 고사만 남아있습니다.

주암서원(舟巖書院)은 1714년에 남원부 지사방 주암촌에 사우로 창건되었는데, 최덕지를 주벽으로 최연손을 배향한 후 1787년 장급, 장경세를 추배하였습니다. 1871년 조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59년 복설되었습니다. 영당에는 보물로 지정된 최덕지의 모사본 영정과 배향인물의 위패가 있습니다. 최덕지는 예문관직제학이었고 전주의 서산사와 영암의 녹동서원 등에 제향 되었습니다. 최연손은 최덕지의 증손으로 벼슬은 이조참판에 이르렀고 장급은 남원 출신의 효자이며 사촌 장경세는 장건의 아들이었으나 장급에게 입양되었습니다.

관곡서원(館谷書院)은 1820년(순조 20)에 최윤덕, 이형남, 이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58년 후손에 의해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웅재 고가는 조선중기 종가의 규범을 지키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위엄을 갖추면서도 드러내지 않는 품위를 느끼게 한다.Ⓒ임실군

이웅재 고가의 품위

이웅재 고가는 효령대군의 증손 춘성정 이담손이 낙향하여, 1552년경에 세운 것으로 약 460여 년 된 종가이며, 17대 종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조선중기 종가의 규범을 지키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위엄을 갖추었으면서도 드러내지 않는 품위를 갖추고 있으며 안채, 사랑채, 안행랑채, 대문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솟을대문에는 1870년(고종 7)에 세운 이문주의 효자정려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대문채 앞에는 하마석이 양쪽에 놓여 있고, 대문채 안쪽으로 마굿간과 창고가 갖춰져 있습니다. 안채는 축대 위에 남향으로 대청마루와 연결하여 지었고, 대청을 가운데에 두고 왼편으로 안방을 두고, 오른쪽으로는 도장방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노동환 가옥은 마을이 형성될 당시 진씨들이 6~7대를 지내오다가 양씨들이 다시 3~4대를 살았는데, 노동환의 8대조 노엽이 1650년(효종 1)에 구입하여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었습니다. 서쪽으로부터 앞쪽에 부엌이 있고, 뒤쪽으로 방이 두 개 있습니다. 다음 안방, 대청마루, 건넌방 등이 이어져 있고, 뒤쪽으로 도장이 있습니다. 툇마루 처마에는 ‘정량사’ 현판과 7대조 노기원이 쓴 ‘북계정사’ 현판 및 <북계정사기>라는 기문이 걸려 있습니다.

항일의병장 이석용

이석용 생가는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이석용은 1878년(고종 15)에 이곳에서 태어나 1903년까지 거주하다가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로 이사 갔다고 합니다. 그는 1907년 9월 12일에 진안의 마이산에서 ‘호남의병 창의동맹단’을 결성하여 1908년까지 항일운동을 하였는데, 항일의병장으로 부하 300여 명을 거느리고 전라남북도, 경상남도 등지에서 투쟁하다가, 소위 일본군의 ‘무신대살육’ 때문에 활동이 어렵게 되자 군을 해산하고 잠적하였습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 천황 주살을 계획하였고, 1912년에는 ‘임자밀맹단’을 조직하여 조선총독, 을사오적, 정미칠적 등을 암살하려 하였으며 동경, 대판 등지를 방화하려고도 하였습니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려다 정동석의 배반으로 1913년 일경에 체포되어 1914년 전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36세의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습니다. 소충사(昭忠祠)는 이석용과 그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28의사를 배향하는 사당입니다.

▲파란만장한 독립운동가 이석용 생가Ⓒ임실군

만취정(晩翠亭)은 1572년(선조 5)에 김위가 세운 건물로, 1834년(헌종 1)에 마지막으로 중수되었습니다. ‘만취’란 겨울에도 변하지 않는 초목의 푸른빛이라는 뜻으로 김위의 인품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정자의 이름은 1580년(선조 13)에 조선을 찾은 명나라 사람 서계신이 지어 주었고, 글씨는 선조의 친필이라는 얘기가 전합니다. 정철, 기대승, 임제 등 대학자들과 김위가 술잔을 기울이며 주고받던 시가 담긴 ‘상호헌시판’이 정자 안에 걸려 있습니다. 김위는 조선 개국 공신인 김균의 7대손으로, 1532년(중종 27)에 태어나 1558년(명종 13) 문과에 등급 하였고, 예조정랑에 오른 뒤 1562년 합천군수 등 아홉 고을의 부사를 지냈으며 시문에도 능하였고 이이와도 교분이 두터웠으며 사후 승정원 도승지에 추서되었습니다.

전형적인 호남지방의 정자

오괴정(五槐亭)은 뢰계리에 세거한 해주오씨 입향조인 돈암 오양손이 지은 정자로, 가운데에 방을 두고 사방에 퇴를 두른 전형적인 호남지방의 정자입니다. 오양손은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으로 벼슬은 참봉이었습니다. 1519년(중종 14)에 을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 등 많은 선비가 화를 입은 것을 보고 처음에는 수원으로, 다시 1521년(중종 16)에 남원 말천방 목기촌으로 터를 잡아 옮겨왔습니다. 그가 이 마을에 들어와서 은거하면서 정자를 짓고 그 옆에 다섯 그루의 괴목을 심어 정자의 이름을 오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옛날 중국의 왕진이 세 그루의 괴목을 심은 고사를 본 딴 것입니다.

구로정(九老亭)은 1656년(효종 7)에 건립되어 처음에는 단구정이라 하였습니다. 정자 아래 큰 바위가 서있는데 이를 단구대라 합니다. 둔덕리 일대 4개 성씨가 모여 조직한 구로계에서 구로정을 지었던 것이 1663년의 일입니다. 단구대 바위에는 구로계의 구로일소(九老一少)의 명단이 암각되어 있으며 구로는 60세 이상으로 장제, 한빈, 하득도, 한유, 장서, 하선, 하만리, 최휘지, 최유지이며 일소는 48세의 이문규입니다. 현재의 정자는 1906년에 구로의 후손들이 세웠습니다. 단구대의 아래쪽에는 ‘단구(丹丘)’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 글씨는 삭녕 최유지의 필적입니다. 이 산에 적성(赤城)이 있고, 앞에는 대천대(對天臺)가 있으며, 동쪽에는 방장(方丈)이 읍(揖)을 하고 서쪽에는 동산(銅山)이 고(告)하고 있어 참으로 하나의 선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의 위아래에는 총석(叢石)이 벌려 있습니다.

삼계석문(三溪石門)은 구로정의 서쪽으로 100m쯤 떨어진 큰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글자가 커서 그 획이 서까래와 같다고 합니다. 삼계석문의 글자의 총길이는 4m에 이르며 1663년(현종 4) 계축년 가을 9월 26~29일의 4일간 역사로 완성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서체와 필획이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비와 흡사하며, 고운 최치원의 글씨라 전해지고 있는 쌍계사 입구의 ‘쌍계석문(雙磎石門)’의 글씨를 모작하여 최유지의 아들 최기옹이 썼다고 합니다.

수운정(睡雲亭)은 1862년(철종 13)에 수운 김낙현이 세운 정자로, 신덕면 금정마을에 있으며 경주김씨 계림공파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슬하에 성운, 성홍, 성철 등 아들 셋을 두었는데, 성운과 성홍 두 아들이 죽자 슬픔을 금할 길 없어 자연을 벗 삼아 소요하고자 이 정자를 세웠습니다. 금정마을은 경주김씨 9세조 김재오가 입향한 이후에 경주김씨들이 대대로 살아, 마을이름도 본래는 도곡(陶谷, 都谷)이었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경주김씨의 ‘금(金)’자와 수운정의 ‘정(亭)’자를 따서 금정리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양요정(兩樂亭)은 최응숙이 임진왜란 때 이곳에 낙향하여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건물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고 시문을 논하였고, 그의 호를 따서 양요정이라 하였습니다. 12명의 진사를 배출하였다고 하며 많은 선비들이 시문을 숭상하게 되어 풍류객이 시문을 지어 이 정자에 남기고 간 시구가 14편이나 됩니다. 최응숙은 임진왜란 때 공적으로 호성공신 3등에 책봉되었으며 시호는 충현공입니다.

광제정(光霽亭)은 언제 지었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약 200년 전에 양돈이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래 삼계면 후천리 광제마을에 있다가 1872년(고종 9)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김인후의 글과 기정진의 <광제정중건기> 등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계단식 축대 위에 정자가 있고 한 가운데에 계단식 통로가 있으며 정자 안쪽에는 ‘매당(梅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정자 한 가운데에 온돌방이 하나 있는 점이 특징입니다. 양돈은 서울에서 생원, 진사를 지내다가 무오사화를 피해 아산방(봉현리)에서 은거하였는데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으며 남효온의 천거로 조정에서 불렀으나 이를 마다하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오괴정은 가운데에 방을 두고 사방에 퇴를 두른 전형적인 호남지방의 정자이다.Ⓒ임실군

그곳에 밤이 되어 달이 떠오르면

월파정(月波亭)은 밀양박씨 종중 밀성 부원군파 후손들이 주축이 되어 선조들의 유덕을 경모하기 위하여 지은 정각으로 처음에는 월회정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월파정 뒤로는 천담계곡이, 앞으로는 회문산이 자리 잡고 있는데 월파정에 밤이 되어 달이 떠오르면 정자 아래로 잔잔한 물 흐름과 물위에 비치는 달이 어우러져 색다른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운서정(雲棲亭)은 일본강점기의 부호인 승지 김양근의 아들 김승희가 부친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8년 당시 쌀 3백석을 들여 6년에 걸쳐 지었다 합니다. 정각과 동, 서재 그리고 가정문으로 이루어졌으며, 조선조 본래 건축양식으로 된 거대한 목재와 석축 등은 감탄을 금할 수 없게 하고 있습니다.

관촌 사선대는 예로부터 물이 맑고 경치가 아름다워 하늘에서 신선과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깃든 곳으로 섬진강 상류 오원천과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어 자연환경이 빼어난 곳입니다. 봄에는 산개나리와 벚꽃, 여름에는 푸른 신록, 가을에는 붉은 단풍과 낙엽, 겨울에는 하얀 눈길이 있어 각 계절별 정취를 흠뻑 느끼게 합니다.

임실에는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창건된 사찰이 많이 있습니다.

상이암에 전하는 전설

상이암(上耳庵)은 875년(헌강왕 1) 도선국사가 창건하여 도선암이라 하였습니다. 그 후 1394년(태조 3) 각여선사가 중수하였으나 1894년 동학혁명 때 병화를 입어 1909년 김대건이 중건하였습니다. 일본 강점기에는 의병장 이석용이 상이암을 근거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여파로 절은 일본군대에 의해 불에 타버렸습니다. 1912년 대원스님이 재건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다가 1958년 임실군수 양창현이 중심이 된 상이암 재건위원들이 빈터에 법당과 요사를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894년에 고려 태조 왕건이 17세의 나이로 도선국사와 함께 이곳에서 100일 기도를 드리고 다시 3일을 더 기도를 올렸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또 조선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1380)을 승리로 장식하고 개선하는 길에 이곳에 들러 3일간 치성을 드리자, 천신이 내려와 ‘성수만세(聖壽萬歲)’’를 세 번 외쳤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습니다. 이후 조선 태조가 도선암을 상이암으로 고쳐 불렀다고 합니다. 경내에는 고려 태조가 썼다는 ‘환희담(歡喜潭)’ 비석과 태조 이성계가 썼다는 ‘삼청동(三淸洞)’ 비석이 있고, 혜월당과 두곡당 부도가 있습니다.

혜월당 부도와 두곡당 부도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는데 해월당 부도는 항아리 모양의 몸체위에 8각형의 옥개석을 올리고 그 위에 보주를 갖추었습니다. 두곡당 부도는 석종형 부도로 8각의 하대석 위에 고복형으로 된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보주를 얹었는데 형식 구조면에서 볼 때 조선 중기의 것으로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세워진 듯 하고, 상세한 내력이나 전설조차 없으나 예술적인 면에서 볼 때 문화재적 가치가 있습니다.

삼청동비(三淸洞碑)는 상이암 입구에 있는 어필각으로, 안에는 태조 이성계가 쓴 ‘삼청동(三淸洞)’을 새긴 비석이 있습니다.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 무학대사의 권유로 이곳에 와서 치성을 드렸는데, 삼업(三業)이 청정함을 깨닫고 ‘삼청동’이라 글씨를 새겼습니다.

어필각의 맞은편에는 ‘환희담’이라는 비가 전하는데 신라 말 도선국사가 이 산을 둘러보고 천자봉조지형(天子奉朝地形)으로 주변의 여러 봉우리들이 하례하는 형국이라며 탄복하면서 산 이름을 팔공산(八公山)이라 하고, 장차 여덟 성인이 차례로 날 것이라고 하였답니다.

도선국사는 송도로 올라가 왕건의 부친 왕융을 찾아 왕건으로 하여금 이곳 성수산에서 백일치성을 드리도록 권유하여 왕건이 17살이 되어 이곳에 내려와서 백일기도를 올렸으나 응답이 없자 다시 3일을 더 기도한 후 못에 들어가 목욕을 하는데 더벅머리 동자가 못 옆에 서있어 왕건이 말하기를, “너는 어디에 사는가?” 하니 “이름 없는 마을에 삽니다” 하여 다시 묻기를 “너의 성명은 어찌 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성은 불성(佛姓)으로 불성은 본래 이름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산 정상에 올라 “하늘에서 땅을 만들 때는 형체와 모양이 없는 것이고 땅으로 사람을 빚었으니 목욕을 해도 씻어낼 수 없는 것이다” 하고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왕건이 기연을 얻었음을 알고 환희를 억누를 수가 없어 바위에 글씨를 새기니 이것이 환희담입니다.

진구사지 석등의 아름다움

진구사지 석등(珍丘寺址 石燈)은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높이는 5.18m로 6.4m의 각황전 석등보다는 낮은데 망실된 상륜부의 보주와 보륜을 더하면 그 높이가 비슷할 것 같습니다. 석등의 팔각 받침대에는 연꽃무늬와 구름무늬, 안상(眼象)을 새기고, 연화대석에는 팔각으로 연화문을 새겼습니다. 화사석에는 장방형의 화창이 6개 뚫려 있고 옥개석 추녀 끝에 큼직한 귀꽃을 세웠습니다. 상륜부는 현재 팔각의 노반과 양화석 만이 남아있으나 원래는 보개와 보주 등 여러 가지 상륜부재가 있었을 것입니다. 석등은 전체적으로 웅장하면서도 경쾌한 모습이 섬세한 문양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진구사(珍丘寺)는 650년(의자왕 10) 고구려에서 망명한 보덕의 제자인 적멸과 의융이 창건한 이래 통일신라시대에는 열반종 사찰이었다가 고려시대에는 조계종 사찰에서 천태종 사찰로 바뀌었고, 조선 전기인 1407년(태종 7)에는 88개의 자복사(資福寺) 중 하나로 지정되었습니다. 1992년부터 2001년까지 진행한 발굴 조사에서 ‘진구사(珍丘寺)’ 명문기와가 출토되자 이전 명칭인 용암리사지 석등을 진구사지 석등으로 바꾸었습니다.

죽림암(竹林庵)은 임실의 안산이라 할 수 있는 용요산의 중턱에 있으며 9세기 말경 신라의 진감혜소가 암자를 짓고 수도하였던 것이라고 전하는데, 창건 연대는 정확치 않습니다. 다만 죽림암의 연혁기에 의하면, 1584년(연산군 18)에 태고보우의 4세손인 벽송지엄이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64년(현종 5) 진묵대사가 다시 중창하였으며, 그 이후 헌담덕진이 전남의 어느 민가를 해체하여 옮겨 세운 것이 현재의 죽림암입니다.

해월암(海月庵)은 고려 말 1352경 오수면에 해경대사와 월산대사가 창건하여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해월암이라 합니다. 이와는 달리 1396년(태조 5)에 무학자초가 창건했다고도 합니다. 1556년(명종 11)에 남원부사가 중건했고, 1747년(영조 23)에 양정봉이 중수했으며 1858년(철종 9)에도 한 차례 중건이 있었습니다.

신흥사(新興寺)는 사자산 남쪽에 있으며 529년(성왕 7)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신라 진감국사가 점지한 곳으로 “산이 병풍처럼 둘러 봉황이 글을 물고 안개 속에서 일어나는 듯하고, 시내가 주위를 흘러 옥룡이 일렁이는 물결을 마시는 것 같았다. 황금으로 된 지상의 궁궐이 지어지지 않으면 옥으로 만든 천도(天都)가 될 터”라고 하였답니다. 1619년에 인화, 청옥이 1652년에 두심이 중창하였고, 수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임실에는 고려시대의 석불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학정리석불은 세련미보다 둔중한 느낌을 주는 고려시대의 석불로 추정됩니다. 성문안마을 밭 가운데에 하반신이 땅에 묻혀있고, 대좌와 광배가 각각 떨어져 있었는데 현재는 석불의 보호를 위하여 인근 성문사 법당으로 석불을 옮겨 임시 보존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둔중하고 풍만한 생김새를 보이고 있으며 팽만한 체구이지만 세련미보다는 둔중한 느낌을 표현하고 있어서 시대적인 특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수리석불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허리 아래가 땅에 묻혀 있던 것을 최근 발굴과 복원을 통해서 그 모습을 완연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뒷산에서 집채만 한 바위덩이가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 아낙네 하나가 큰 소리를 치자 바위가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으며 그것이 석불인 것을 알게 된 동네 사람들이 그 때부터 불공을 드리고 정성을 다해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 100여 년 뒤에 동네 사람 최경태가 움막 같은 집을 만들어 주었고 지금부터 1910년경에 진안 마이산의 처사 이갑룡이 꿈에 “내가 옷을 벗고 있으니 집을 지어 달라”는 석불의 부탁을 받고, 개축하여 현재에 이른 것이라고 합니다.

▲임실에는 주인을 구한 의견(義犬) 이야기가 전해지며 의견비도 세워져 있다.Ⓒ임실군

주인을 구한 의견(義犬) 이야기

임실에는 주인을 구한 의견(義犬)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옵니다.

신라시대 거령현, 오늘날의 지사면 영천리에 김개인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개 한 마리를 기르며 어디를 다닐 때면 항상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개를 데리고 장이 선 오수에 나갔다가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다가 잔디밭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개는 주인이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지키고 있었는데 때마침 부근에서 들불이 일어나 가까이로 번지고 있었습니다. 개는 주인을 입으로 물고 밀면서 깨우려 했으나 주인은 깨어나지 않자 개는 가까운 냇물로 달려가 온몸에 물을 흠뻑 묻혀와 잔디를 적셨습니다. 여러 번을 왔다 갔다 하여 잔디는 물에 젖고 싸늘함을 느낀 주인은 잠에서 깨어났으나 힘이 빠진 개는 주인의 옆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주인은 개를 장사지낸 뒤 이곳을 잊지 않기 위해 개의 무덤 앞에 평소 자기가 지니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두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얼마 후 지팡이에 싹이 돋아 큰 느티나무가 되었고 이때부터 고을 이름을 '개 오'(獒)​자와 '나무 수'(樹)를 합하여 '오수'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의견비(義犬碑)는 원래 오수개 무덤 옆에 있었을 것인데, 유실되었던 것을 찾아오는 과정에서 현재의 위치인 오수 원동산으로 옮겨 세워졌습니다. 건립 시기와 이유가 명확하지 않았으나, 2005년 ‘오수 의견비 학술대회’를 통해서 그나마 조금은 밝혀질 수 있었는데 비문의 전, 후면을 탁본하여 전면에서는 개의 형상을 찾았고, 뒷면에서는 약 100자가 넘는 글자를 판독해 냈습니다. 뒷면은 모두 인명으로 시주자, 대시주, 금물대시주의 명단이 나오는데 약 65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하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 전승되고 있는 필봉농악Ⓒ임실군

임실에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필봉농악이 보존 전승되고 있습니다.

강진 필봉농악은 호남좌도농악의 대표적인 마을 풍물 굿으로 40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마을 주민들의 생활과 노동의 문화 속에서 꽃피운 삶의 소리와 한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필봉 굿은 앞 굿 중심이 강한 다른 지방 농악에 비해 뒷 굿 중심에 치중하며 전체적으로 힘차고 꿋꿋하며 남성적인 느낌을 줍니다. 필봉마을은 40여 가구가 모여 사는데 호남 좌도농악 굿 7채 가락을 90여 년 전부터 꾸준히 대를 이어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들당산굿>을 비롯, <날당산굿> <당산제국> <장원리굿> <이사굿> <매굿> 등이 전승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카페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고을학교 기사(5월)를 확인 바랍니다.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자는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최종 백신접종을 완료하시고, 항상 마스크를 착용하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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