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만에 집안이 쓰레기로 가득 찬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쓰레기 차는 속도가 빨라진다. 더 못참겠다, 쓰레기를 버려야겠다 싶어서 재활용 쓰레기 분리를 시작한다. 플라스틱, 캔, 유리병, 비닐봉지 등... 쪼그려 앉아서 분리하자니 짜증이 난다. 과자 하나 샀을 뿐인데 포장지가 왜 이리도 많은지, 왜 호박은 비닐 봉투에 넣어서 판매하는지, 음료수병의 포장지는 이리도 떼어내기 힘든지.... 급기야 비닐 우편 봉투에 붙은 주소 스티커를 떼다가 화까지 치민다. 유럽 시민들이 항의의 뜻으로 슈퍼마켓에서 구입한 물건의 비닐 포장재를 까서 산더미처럼 쌓아 버리는 행동에 저절로 동감이 된다. 마침내 어렵게 분리해서 쓰레기장으로 가져가니, 투명 플라스틱만 따로 모으라던 분리수거 자루가 없어졌다. 커다란 자루 안에 애써 포장 비닐을 떼어낸 투명 플라스틱병이 다른 플라스틱들과 뒤섞여 있다. 꼼꼼히 분리 배출하는 시민들의 노력이 쓸모없는 경우도 많다.
애초에 제대로 수거되지 않는 쓰레기가 많다. 전세계적으로 1950~2017년 사이 생산된 플라스틱 92억 톤(t) 중 70억 톤가량이 버려졌다. 제대로 수거되지 않은 쓰레기는 빗물을 타고 강으로, 다시 바다로 흘러나가고, 그 중 썩지 않는 플라스틱이 넓은 바다를 떠돈다. 그 양이 1억 5000만 톤에 달하며, 해마다 800만 톤이 추가된다. 그 중 일부는 태평양의 거대한 쓰레기섬으로 모인다. 그렇지 않은 경우 해안가의 나뭇가지와 바위에 걸린 채 해양 동물의 목숨을 노린다. 부서지고 마모되어 눈에도 보이지 않을 만큼의 작은 알갱이가 되어 바다 생물의 몸 속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것을 잡아먹는 사람들의 입으로도 들어간다. 이미 과학자들은 사람들의 피를 타고 미세 플라스틱이 흐르고 있음을 발견했다. 유엔이 플라스틱의 생산, 소비, 폐기에 이르는 과정 전체를 관리하는 국제협약을 만들려 한다는 소식이 반갑지만, 플라스틱을 생산하여 이익을 얻는 기업과 국가들의 딴지걸기도 벌써 시작되었다.
쓰레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매일같이 전해지는 충격적인 뉴스들을 보며 시민들은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하다. 누군가는 바쁜 일상에 기후위기와 환경 오염 소식을 잊어버리기로 마음먹지만, 다른 이는 현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해 무기력감을 느낀다. 반면 어떤 이들은 무엇인가 바꾸려고 노력한다. 지금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한다. 이미 많은 시민들이 에코백, 텀블러, 손수건을 들고 다닌다. 웬만한 거리면 걸어 다니고, 자동차보다는 공유 자전거를 이용한다. 전기 소비를 줄이기 위해서 불필요한 가전 제품의 코드는 뽑아두고, 옷 구매를 자제하고 서로 바꿔 입으며 소비를 줄이려 애쓴다. 환경 영향을 덜기 위해서 새로운 생활 방식을 실험하고 동참하려는 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 다행이다. 지구를 구하는 시민들의 '작은 실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떤 이들의 노력은 존경스럽다. 조금이라도 비닐봉지 사용을 더 줄이려고 빈 통을 들고 다니며, 포장이 안 된 식재료나 음식을 담아간다. 그들의 가방은 항상 그 그릇으로 빵빵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이쯤 되면 '작은 실천'이라고 부르기도 미안하다. 어떤 이들은 고기 먹기를 거부한다. 공장식 축산에 저항하거나 채식으로도 충분하다 여기는 이들이다. 그러나 그런 신념을 지키는데 감수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고 거대하다. 어떤 고기도 먹지 않겠다고 결심한 비건(vegan)들이 밖에서 밥을 사먹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비건들과 밥을 먹으려 식당을 찾다 보면, 고기와 육수를 쓰지 않는 음식이 거의 없다. 비건 음식을 찾지 못하면, 같이 밥먹기를 포기하거나 그들만 밥먹기를 포기한다. 그래서 함께 먹는 밥이라는 사회 생활을 포기하는 비건이 적지 않다. 이것은 올바로 살겠다는 이들의 '일상의 격렬한 투쟁'이다.
정부와 기업들은 시민들의 이런 '작은 실천'을 칭송한다.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철강기업 포스코의 회장도 텀블러를 쓰자는 SNS 챌린지에 나선다. 환경부 장관도 이메일을 자주 지워 온실가스를 줄이자고 제안한다. 대통령은 폐 플라스틱에서 뽑아낸 넥타이를 자랑하면서 '녹색 상품'을 구매하는 '녹색 생활'에 동참할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이 같은 홍보에 비건들의 '격렬한 저항'은 제외된다. 외려 각자 조용히 실천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면 안된다며 벌금을 내린다.
'작은 실천'에 들어가지 않는 것들이 또 있다. '비행 수치심'이라는 말을 만들며 항공여행을 피하려는 작은 실천은 환영받지 못한다. 제주며 부산 가덕도, 새만금에 공항을 더 짓겠다는 계획은 강행되고 있다. 심지어 국가가 코로나 재난 속에서 '무착륙 국제관광 비행'으로 관광 상품을 지원하고 나선다. 대체 정부와 기업들이 권유하는 지구를 구하는 '작은 실천'이란 무엇인지, 일관성은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미 오래전부터 텀블러를 알뜰히 챙겨 써왔던 이들은 화가 난다. 시민들은 일찍부터 '작은 실천'으로 제 역할을 다하려 노력해왔는데, 정부와 기업들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묻고 싶어 한다. 포스코는 기후위기 시대에도 강원도 삼척에 대규모 석탄발전소를 건설하고 있다. 주민들이 반대하고 시민들이 포스코 빌딩 앞에서 시위를 해도 건설을 중지하지 않는다. 정부는 과거에 합법적으로 승인되었기 때문에 사업을 취소할 수 없다고 말하고, 국회는 석탄발전소 건설을 중단시킬 법안 심사를 외면하고 있다. 이 석탄발전소가 가동되면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작은 실천'으로 줄인 온실가스를 한꺼번에 배출하게 되는데도 말이다. 기업, 정부, 국회가 마땅히 해야 할 '큰 실천'은 하지 않은 채, 시민들의 '작은 실천'만 요청하는 셈이다. 시민들이 정부와 기업이 요청하는 고분고분한 '작은 실천'에만 매달린다면, 우리는 기후위기를 해결하고 기후정의를 실현하려는 싸움에서 패배하게 될 것이다.
4월 22일, 지구의 날이다. 지구를 지키는 일은 착한 소비자들의 '작은 실천'만으로는 안 된다. 지구를 파괴하는 기업과 무책임하게 방치하는 정부, 나아가 이윤 축적을 위해서 끊임없이 채굴하고 생산하고 소비하고 폐기하는 자본주의 성장체제에 맞서 싸우는 시민들의 정치적 저항이 절실하다. 지구의 날, 시민들의 정치적 의무에 대해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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