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 현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과 국민연합 후보 마린 르펜이 올라갔다. 예상외로 급진좌파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후보 장 뤽 멜랑숑이 선전했지만(21.95%), 르펜(23.15%)과 불과 1.2% 차이로 결선투표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애석하지는 하기만, 대선 직후에 실시될 총선에서 사회당-공산당 붕괴를 딛고 새로운 '생태사회주의' 좌파가 부상할 토대를 마련했기에 상당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4월 24일에 프랑스인들은 신자유주의자와 극우 포퓰리스트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표차야 어떻든 결국 마크롱이 당선되리라 예상되지만, 르펜의 만만치 않은 도전은 2010년대 내내 대서양 양안을 뒤흔든 극우 포퓰리즘 바람이 여전히 건재함을 확인해준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극우 포퓰리즘 세력이 여러 나라에서 일정하게 쇠퇴하기는 했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2020년대에도 긴박하고 중대한 현안 목록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지금껏 이런 상황에 맞서 좌파 쪽에서 나온 가장 적극적인 대응은 '좌파 포퓰리즘' 논의였다. 샹탈 무페 같은 논자들은 포퓰리즘 바람이 한때의 유행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국면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전반적 정치 지형이라 분석했다. 따라서 극우 포퓰리즘을 극복할 길은 신자유주의 시기의 중도 합의를 계속 옹호하는 게 아니라 극우 포퓰리즘과는 또 다른 방향에서 기존 정치를 공격하고 대체해가는 좌파 포퓰리즘 뿐이라는 것이었다.
실은 2017년 대선과 올해 대선에서 멜랑숑 진영이 취한 전략이 좌파 포퓰리즘의 전형적 사례였다. 그 결과, 멜랑숑 진영이 프랑스 좌파의 대표 세력이 되었고, 기존에 주류였던 사회당 후보 안 이달고가 받은 지지는 2%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 점에서 좌파 포퓰리즘은 근래에 좌파에서 제출된 논의 가운데에는 가장 주목할 만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좌파 포퓰리즘이 처음 제기될 때부터 지금까지 이 흐름에 만족하지만은 못하겠다는 목소리도 상당히 많았다. 주된 불만은 좌파 포퓰리즘 논의에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사회경제 프로그램에 관한 고민보다는 극우파 담론과 경쟁하려는 담론 전술만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사회 세력들(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범주는 물론 계급일 것이다)에 관한 분석이 모호하기에 대안적 사회경제 프로그램을 실현할 사회 세력들의 연합을 구축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좌파 포퓰리즘론이 출발하는 그곳에서 발을 떼면서도 이러한 한계를 과감히 넘어서는 이론적 개입이 등장했다. 원서가 작년에 나오고 최근에 우리말 번역본이 나온 이탈리아 출신 영국 사회학자 파올로 제르바우도의 <거대한 반격: 포퓰리즘과 팬데믹 이후의 정치>(남상백 옮김, 다른백년, 2022)가 바로 그 책이다.
신자유주의 이후 시대의 메타 이데올로기 지평 – 주권, 보호, 통제
'거대한 반격'이라는 제목이 마치 '좌파의 반격'을 말하는 듯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저자도 밝히고 역자도 상세히 부연 설명을 단 것처럼, 원제의 recoil은 단순히 정치-군사적 대항 행동을 뜻하지는 않는다. 영어사전은 이 단어를 총을 발사했을 때에 발사 방향과 반대로 힘이 튀는 상황이라 풀이한다. 흔히 '반동'이라 불리는 물리적 운동 말이다.
'반격'이라 번역된 제목에서 저자가 의도하는 것은 실은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지나간 이후 인류 사회 전체를 가로지르며 흔드는 힘의 작용이다. 제르바우도는 2008년 금융위기와 이후의 장기 침체, 2019년에서 지금에 이르는 글로벌 팬데믹 속에서 지구자본주의 전반이 그간 신자유주의가 이끌어온 방향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몸부림치고 있다고 본다. 좌우 포퓰리즘이란 다름 아니라 이런 몸부림이 정치 공간에서 나타난 결과다.
그래서 무페가 '포퓰리즘 계기'라 진단한 현 상황을 제르바우도는 신자유주의 이후의 새로운 '메타 이데올로기 지평'이라 규정한다. 메타 이데올로기 지평이란 당대의 좌우 이데올로기가 공히 발을 딛고 선 더 근본적인 이데올로기 지형을 뜻한다. 물론 좌파와 우파는 어느 정도 시대를 뛰어넘어 경쟁과 대립을 이어가지만, 각 시대마다 좌우파 모두 연기를 펼칠 주된 공간으로 여기는 특정한 무대가 있게 마련이다. 지난 40여 년 동안 신자유주의도 바로 이런 무대였다. 그 전 시대에는 전후 케인스주의 합의가 또한 이런 무대였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무대가 바뀌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주류였던 중도우파와 중도좌파는 이런 변동을 한사코 부인하려 하지만, 극우 포퓰리즘 세력은 이를 가장 민감하게 수용하며 새 시대의 선두를 자처하고 나선다. 이들이 치고 나간 덕분에 우리 시대의 메타 이데올로기 지평이 어떤 모양새인지는 이미 대체로 밝혀졌다. <거대한 반격>에 따르면, '주권', '보호', '통제'가 그 세 가지 핵심 요소다.
주권도 그렇고, 보호, 통제 모두 신자유주의 전성기에는 거의 금기시됐던 말들이다. 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좌파는 어떤 식으로든 권위주의와 엮이기보다는 자유주의와 한 배를 타야 한다고 믿는 이들에게 제르바우도가 제시하는 메타 이데올로기 지평은 세상에 지옥이 예정돼 있다는 선고처럼 들릴 수도 있다. 게다가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자기네 전매특허인 양 선수치고 있으니 반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대한 반격>이 던지는 냉철한 메시지는 우리가 이미 주권, 보호, 통제가 옳은지 그른지 다투는 게 아니라 이들을 '어떤 방향에서' 추진할지를 놓고 논쟁하고 투쟁해야 하는 시대에 진입했고 이는 돌이킬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가 전장이다. 다른 전선은 없다. 그래서 <거대한 반격>의 몸통이라 할 부분은 주권, 보호, 통제, 이 세 주제를 놓고 신자유주의 시대와 그 이후가, 극우 포퓰리즘과 좌파적 대안이 어떻게 다르고 또한 달라질 수 있으며 달라져야 하는가를 분석하는 데 할애된다.
나는 제르바우도의 논의에 크게 공감했고, 동지의식마저 느꼈다. 오늘날 어떤 정치 세력이든 공유할 수밖에 없는 주권-보호-통제, 이 세 축이 이루는 공간에서 좌파적 지향과 우파적 지향이 나뉘는 미묘한 지점을 제대로 짚었다 싶었기 때문이다. 제르바우도에 따르면, 주권을 놓고 그 대립은 국가 주권과 인민 주권의 강조점 차이로 나타난다. 보호 측면에서는 사회를 지구자본주의라는 망망대해에서 서로 경쟁하는 선단들로 보고 그 선두에 선 국내 자본 세력을 보호의 우선 대상으로 보는 입장과, 그 자리에 노동 대중, 소외된 지역, 생태계를 놓는 입장으로 나뉜다.
그리고 통제라는 쟁점이 있다. 이것만큼 신자유주의 시기에 교양을 쌓고 인격을 연마한 이들에게 차마 입에 담기도 꺼려지는 말이 또 있을까. 팬데믹 와중에도 이게 싫다고 한사코 마스크 쓰길 거부한 이들이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닌 영국에서 이 책을 쓴 저자도 이를 잘 알기에 이 말이 동반하는 국가권위주의나 테크노크라시의 기억과 거리를 둘 필요성을 강조하길 그치질 않는다.
그럼에도 결론은 단호하다. 경제 위기, 건강 위기, 기후 위기가 동시에 엄습하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든 통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자신이 참여하여 대중을 위해 결정하는 민주적 통제다. 그리고 이는 외주하청 중심 생산 체제 해체, 지역 소외와 소멸 극복, 탈탄소 전환 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간 시장지상주의자들이 그토록 말살하려 한 계획의 요소를 강화하고 확산함으로써 실현될 것이다.
새로운 사회적 블록을 향해 – 누가 누구와 동맹할 것인가
한데 <거대한 반격>의 백미는 오히려 주권, 보호, 통제에 관한 흥미로운 논의가 끝난 뒤에 등장하는 내용("제6장 새로운 사회적 블록")에 있다. 이 대목에서 제르바우도는 선행 좌파 포퓰리즘 논의들과 달리 2010년대에 등장한 정치 세력 간 구도를 놓고 계급 분석을 시도한다. 극우 포퓰리즘을 비롯한 각 정치 세력의 지지연합이 어떤 계급들로 이뤄져 있고 어느 계급으로 지지를 확대하려는 전략을 펼치고 있는지 분석하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신우파는 구중간계급과 블루칼라 노동계급 사이에 연합을 구축하려 하며, 실제로 얼마간 성공했다. 그러나 이 세력은 일단 집권한 뒤에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권력을 강화한 최상층계급의 이해를 결코 침해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집권기에 시행한 정책을 보면, 극명히 드러난다. 중국과 무역 분쟁을 벌이고 멕시코 쪽 국경에 장벽을 세운 것 외에 그가 진지하게 추진한 정책이라곤 부자 감세뿐이었다.
반면에 영국 노동당의 코빈 좌파나 버니 샌더스 대선 캠페인을 지지한 미국 민주적 사회주의자들, 프랑스의 멜랑숑 후보 진영 같은 신진 좌파는 우선 도시 중간계급 일부(특히 금융 위기 이후 좌표를 잃은 젊은 세대)와 서비스 부문의 '핑크 칼라' 노동자, 프레카리아트 사이에 동맹을 구축하는 경향을 보인다. 제르바우도는 일단 출발 단계에서는 이런 전략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보며, 이 초기 동맹이 극우 포퓰리즘에서 제조업 노동계급을 떼어내 이들까지 끌어안는 새로운 사회적 블록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여기에는 난점이 많다. 담론 분석에만 머물지 않고 계급 분석을 시도하기에 이런 난점들은 더욱 부각된다. 현재 반이민 선전에 공감하며 르펜 후보를 지지하는 프랑스의 블루칼라 노동자들을 다시 좌파 쪽으로 설득하는 게 쉽지 않은 것처럼, 유럽연합 잔류는 선이고 탈퇴는 악이라는 구도에 집착해 영국 노동당의 선택을 제약한 런던의 신중간계급이 신자유주의 주류 세력과 확실히 절연하게 만드는 것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제르바우도는 1980년대 한국 대학생 일부의 노동 현장 이전을 연상시키는 "중간계급의 고행 실천"(293쪽)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신중간계급과 구노동계급 사이에 불가능할 것만 같은 동맹을 성사시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거대한 반격>이 바로 이 난제 탓에 영국 노동당의 코빈 좌파가 2019년 총선에서 크게 좌절한 뒤에 쓰인 저작이기에 이는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우리에게도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논의 끝에 마침내 <거대한 반격>이 도달하는 결론은 무엇인가? '보호 중심 사회주의'와 '민주적 애국주의'이다. '보호 중심 사회주의'에 당황하는 이들이 있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민주적 애국주의에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직접 읽어보면, 저자가 말하는 '애국주의'는 민족주의와는 오히려 대립하는 말이며 연합왕국(UK) 바깥이라면 '공화주의'라 불렸을 의미에 더 가까움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저자는 코빈 이후에 키어 스타머가 이끄는 영국 노동당이 한때 만지작거렸던 '진보 애국주의'와도 선을 긋는다. 이쪽은 '보호'와 관련한 보리스 존슨(현 영국 총리이며 영국판 극우 포퓰리즘의 화신)식 수사를 일부 채택할 뿐, 신자유주의와 전혀 단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저자의 결론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이들이라도 이것이 오랜만에 시도되는 진지한 계급분석과 대안적인 계급동맹 전략에서 나온 결론임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거대한 반격>은 비판하거나 논박할 수는 있어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저작이다. 새로운 시대나 토론 지평을 연 저작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말이다. 아마도 앞으로 위기에 몰린 자본주의 너머를 상상하거나 그리로 나아가고픈 이라면 한 번은 반드시 대화하거나 대결해야 할 책이 아닐까.
그리고 꼭 덧붙여야 할 말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말 번역본에 담긴 뛰어난 번역과 놀라운 정성이다. 읽기 편하고 정확한 번역은 물론이고, 상세하게 꼼꼼히 단 역자 주석들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낯선 사회과학 용어나 철학 개념들이 돌출하는 책인데도 굳이 다른 참고도서들을 곁에 두지 않고 역자 주석에만 의지해 물 흐르듯 읽어 내려갈 수 있을 정도다. 덕분에 <거대한 반격> 국역본은 그 자체로 우리 시대 진보적 대안 논의의 출발점일 뿐만 아니라, 이 논의를 위해 반드시 참고해야 할 선행 연구나 토론으로 인도하는 안내자로도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 되었다.
결코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고민과 비전의 문이 하나 열렸다. 되도록 많은 이들이 감히 그 문 너머를 엿보고 발을 내딛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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