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는 TV토론에서의 이 말 한마디로 많은 국민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1997년 민주적 정권 교체로 대통령이 바뀌었지만 국민들의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권 후보의 말에 힘을 실어줬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22년, 한국에는 새로운 대통령의 집권을 앞두고 있지만 '살림살이'가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여기에는 역대급 '비호감'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혼탁한 선거 과정, 역대 최소 표차가 보여주고 있는 여론 분열 상황, 대통령 집무실 이전 및 공공기관 인사 문제로 불거진 신구 권력 갈등, 여소 야대 정국 등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런데 이보다 근본적인 요인은 한국의 정치체제에 있다. 대통령 개인이 국민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진정성이 있다고 해도, '승자독식'이라는 한국의 정치체제가 국민들의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하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에 '독일에서 살아보니'라는 연재를 통해 독일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을 소개했던 조성복 중앙대학교 독일유럽연구센터 연구교수는 최근 출간한 <누가 그들에게 그런 권리를 주었는가?>에서 이 부분을 지적하면서 정치체제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성복 교수는 "1987년 이후 벌써 7번의 대통령 선거를 치렀고 그들은 매번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공약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 약자의 형편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며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선의에 기대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과거 왕조시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그는 한국의 대통령선거를 포함해 국회의원 선거, 지방선거 등 대부분의 선거가 '다수대표제'를 통한 승자독식이 이뤄지고 있는데, 이러한 체제에서는 사회적 약자의 문제가 주요 관심사가 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지금과 같은 승자독식의 정치제도에서는 항상 다수를 지향하는 정책이나 정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약자를 배려하는 정책은 소외되기 쉽다"며 "기존의 시스템에서는 약자를 위한 정당은 집권에 참여하기 불가능할뿐만 아니라 (국회 및 지방의회) 의원을 배출하기도 힘든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현재의 선거체제에서는 "당선자 말고 다른 후보에 투표한 표는 모두 사표가 된다"며 "유권자는 사표에 대한 우려 때문에 자신의 선호와 무관하게 주로 당선 가능성이 있는 거대 양당의 후보에게 투표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조 교수는 양당제에 기반한 대통령제에 대한 문제도 제기했다. 그는 "약자나 소수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집단이나 계층 간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한데, 대통령제는 그런 합의를 끌어내는 데 취약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대통령제는 대표적인 승자 독식의 정치시스템으로 정부의 인사권이나 제정권에서 대통령의 권한은 막강하지만, 사회변화를 가져올 제도의 변경이나 입법에는 대통령이 영향력이 한계가 있다"며 "법을 만드는 것은 의회의 권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 교수는 이같은 구조적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선거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정치 세력이 의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선거제도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정권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정부형태(권력구조)를 바꾸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군소정당도 집권할 수 있어야 그들의 어젠다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의 다수제 민주주의가 소선거구 단순다수제 선거제도, 거대 양당제, 단독정부에 기반하면서 '자유시장경제' 체제와 친화성을 갖고 있는데, 이는 경제 성장이나 효율성, 경쟁 등을 중시하며 대부분의 경제 활동이 기업에 의해 시장의 원리대로 작동되는 것에 가치를 두고 있다고 본다.
반면 합의제 민주주의의 경우 비례대표제 선거제도, 다당제, 연립정부를 구성하면서 분배나 사회복지에 관심을 두는 '조정시장경제' 체제와 친화성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조 교수는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는 대체로 다수제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유지해왔다. 기업과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이런 신자유주의 정책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양극화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며 "사회 경제적 양극화, 불평등 또는 불공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시급하면서도 근본적인 과제는 기존의 다수제 민주주의 시스템을 합의제 민주주의 시스템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선거제도를 단순다수제에서 비례대표제로 변경하여 다당제를 정착시키고, 정부형태를 대통령제에서 의회중심제로 바꾸며 국가형태를 강력한 중앙집권제에서 지방분권이 강화된 연방제로 바꾸는 것"이라고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는 선거제도에서는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해 유권자의 의사가 실제 의회 의석으로 반영되는 구조를 만들고 집권 방식은 대통령제가 아닌 의원내각제를, 국가 체제는 중앙집권에서 독일식 연방제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조 교수는 저서에서 한국의 선거 결과를 독일의 제도에 대입, 선거 제도가 변화될 경우 얼마나 민의를 정확히 반영할 수 있는지를 직접 시연했다. 또 내각제와 연방제를 통한 통치가 독일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구체적 사례를 제시하며, 한국 역시 이러한 방향으로 국가를 운영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지난 수십년 간 한국 정치는 끊임없이 새로운 인물을 내세웠으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훌륭한 정치인은 나오지 않고, 정치인에 대한 신뢰는 바닥을 치고 있다. 대다수 대통령은 임기를 마치고 나면 감옥에 가거나 말로가 좋지 않다"며 "이런 결과는 정치인이나 대통령 등 인물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시스템상의 문제로 보는 것이 정확한 진단"이라고 꼬집었다.
"좋은 사람을 뽑는 것보다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조 교수의 주장처럼 1987년 이후 30여 년이 지난 한국의 정치 체제는 국민들의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하는데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한국 사회 내 각종 문제를 '정치'가 해결할 수 있도록, 그래서 지속가능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도록 선거제도의 변화가 필요한 때다.
이러한 변화를 현실화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주권자인 국민의 관심이다. 하지만 국민들의 관심과 지지만으로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려운 것 또한 현실이다. 스스로 개혁적이고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지난 5년 간 기득권의 모습을 보이면서 대통령 선거에 패배한 여당을 비롯해,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정치세력들의 결단이 그래서 중요하다. 이들이 '비례용 위성 정당'을 만드는 근시안적 대처가 아닌, 보다 긴 안목으로 한국 정치에 이바지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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