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사회에 대한 비전 부재, 시대에 뒤떨어진 인식, 타자에 대한 배려 부족, 무속과 역술에 대한 지나친 몰입…. 대선 과정에서 윤석열 당선인을 반대한 사람들이 느낀 국가 최고지도자로서의 그의 부적격 사유들이다. 특히 무속·역술에 대한 지나친 선호는 국가 중대사를 비합리적으로 결정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합리와 이성이 최고도로 작동해야 할 국가 운영에 비합리와 맹신이 개입하면 국가에 대재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가 생각보다 일찍 현실로 나타났다.
청와대를 국방부로 옮기겠다는 계획은 상식적 사고의 눈으로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비합리적 결정이다.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민과 교감하고 소통하기 위해서다" "청와대를 시민들에게 돌려주겠다" 등 윤석열 당선인이 20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청와대 이전의 명분은 막대한 예산 소요, 안보 시스템 교란 등 엄청난 혼란과 문제점에 비하면 합당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윤 당선인은 '제왕적 대통령제와의 결별'을 외치지만 오히려 지금의 태도는 '제왕'의 모습 그 자체다. 천하를 손에 얻었다고 한껏 기고만장해 권력에 취한 왕의 모습이다. 국방부에 '강제 퇴거'를 명하는 고압적 태도부터 그렇다. "짐이 그곳에서 살아야겠으니 하루빨리 방을 빼도록 하라. 이것은 지엄한 어명이니라." 국방부 쪽의 고충 따위는 알 바도 아니다. 아직 군통수권자도 아니고, 현 정부와 협의도 없이 이런 지시를 내릴 법적인 권한이 없다는 지적 등은 귓등으로 듣지도 않는다. 곁에서 부복한 신하들, 그리고 그동안 '비판언론'을 자처했던 보수언론들은 입을 모아 "폐하의 총명하신 결정이 국가의 큰 복이옵니다"라며 머리를 조아린다. 앞으로 전개될 브레이크 없는 밀어붙이기 국정 운영이 상상 이상이 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윤 당선인은 청와대 이전의 명분을 국민과의 '소통'에서 찾고 있는데 정작 청와대 이전을 추진하는 행태는 '불통'의 극치다. 국가운영과 안보의 중추 시설인 청와대와 국방부를 한꺼번에 옮기는 일은 비할 데 없이 엄중한 국가 중대사다. 청와대 집무실은 윤석열 당선자 한 명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나올 새 대통령들의 거처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졸속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 충분히 토의하고 국민적 합의 속에 진행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윤 당선인 쪽은 청와대 이전에 대한 여론조사도 한 차례 한 적이 없고, 그 흔한 공청회 한번 열지 않았다.
윤 당선인은 "용산 공원에서 시민과 소통" 운운했으나 이 역시 어불성설이다. 본질적으로 공원이니 시장이니 하는 곳에서 권력자가 시민들과 만나는 것이 실제로는 보여주기용 '소통 퍼포먼스'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를 사람도 없다. 소통은 집무실의 위치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열린 마음'이 있으면 어디에서나 소통할 수 있다. 마음은 꽉 닫아놓고 소통을 말하는 것은 기만이고 사기다. 이런 일방통행식 국가 운영 행태로 협치와 상생, 화합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청와대를 국민의 품에 돌려드리겠다'는 말 또한 허점투성이다. 청와대 이전은 아무리 줄잡아도 수천억원에서 많게는 1조원 가까운 예산이 들어가는 '대역사'(大役事)다. 군의 특수 방호·보안 시설과 정보 시스템을 갖춘 새 시설 건립에만 5천억원이 소요될 것이라고 국방부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보고했다고 한다. 이런 막대한 예산 투입을 단순히 "국민의 품" 운운으로 눙치고 넘어갈 문제인가. 청와대 터는 조선시대 이래 시민들의 공간인 적은 한 번도 없으니 사실 정확히 말하면 '되돌려준다'는 말부터가 어폐가 있다. 그러니 청와대를 돌려주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청와대 이전에 소요되는 막대한 예산을 아껴서 국민복지로 되돌려 주었으면 한다. 멀쩡한 궁을 놔두고 새 궁으로 옮기느라 백성의 고혈을 짜는 일부터 멈추는 것이 국민을 위하는 일이다.
윤 당선인의 '타자에 대한 배려 부재'는 이미 '열차 안 구둣발' 사건으로도 감지됐으나 실제 나타나는 모습은 섬뜩할 정도다. 국방부 퇴거를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게 마치 생이빨을 무조건 뽑으라는 식이다. '군은 사기를 먹고 사는 조직'이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군을 무참하게 만들어 놓고 무슨 군의 사기며 안보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청와대를 국방부로 이전하는 것의 문제점을 일일이 꼽자면 한이 없다. 아무리 따져봐도 합리성보다는 비합리성이 두드러진다. 결국 풍수지리적 연관성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청와대 터가 좋지 않다'는 말은 그동안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풍수학자인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일찍이 "경복궁 북쪽 문인 신무문과 청와대 정문 사이에 난 도로를 경계로 하여 그 아래는 사람들의 거주처고 그 위쪽은 신령의 강림지다"고 말해 청와대 터 논쟁에 불을 당겼다. "청와대 터는 신사(神祠)를 지어야 마땅한 터"(김두규 우석대 교수) 등 청와대 흉지(凶地)론은 풍수 쪽 세계에서는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사실 그동안 역대 정부에서 청와대 이전을 검토한 배경에는 현재의 청와대가 민주주의 시대에 걸맞지 않게 너무 폐쇄적인 공간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 말고도 풍수지리적으로 '나쁜 터'라는 인식도 깔려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대통령 집무실 광화문 이전' 보류를 발표하며 "풍수상의 불길한 점을 생각할 적에 (청와대를) 옮겨야 하는데 못했다"고 덧붙였다가 '풍수 논쟁'이 벌어진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런데도 역대 정부가 결국 청와대 이전을 보류한 것은 그만큼 현실적으로 난점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윤석열 당선인은 모든 시급한 현안을 뒤로 하고 청와대 이전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으니 여기에는 분명히 곡절이 있을 법하다.
윤 당선인의 부인 김건희씨는 <서울의 소리> 이명수 기자와의 '7시간 통화'에서 청와대 영빈관 이전에 대한 명확한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이 기자가 "내가 아는 도사 중에 총장님이 대통령 된다고 하더라, 근데 그 사람이 청와대 들어가자마자 영빈관을 옮겨야 한다고 해"라고 말하자 김씨는 "응, 옮길 거야"라고 답한다. 이 기자가 거듭 확인하자 "응"이라며 확신에 찬 답을 되풀이했다. '청와대 터가 나빠서 역대 대통령이 불행한 말로를 맞았으므로 청와대를 옮겨야 한다'는 풍수인, 도사, 지관들의 주장에 동조해 이를 실행에 옮길 생각임을 분명히 한 셈이다.
이번 대선은 결과적으로 김건희씨의 '예언'이 맞았다. 그는 "내가 웬만한 무당보다 낫다" "이번에는 우리가 된다"고 미리부터 승리를 예언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됐다. 그러니 무속, 역술, 풍수 등의 세계에 더욱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윤 당선인 부부의 지난 행적을 보면 중요한 고비마다 역술인, 무속인 등의 '컨설팅'을 받은 흔적이 역력한데 청와대 이전에 대해서도 강력한 조언을 받았을 가능성이 짙다. 이재오 국민의힘 상임고문 역시 "누가 봐도 용산으로 간다는 것은 풍수지리설을 믿는 것"이라며 "개인 살림집을 옮기는 게 아니라 대통령의 집무실을 옮기는데 무슨 풍수지리설 따라가듯이 용산으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개탄했다.
윤석열 당선자는 20일 기자회견에서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말 역시 풍수지리적 인식을 담고 있다. 사람이 어느 곳에 거주하느냐에 따라 생각이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 것은 맞지만 '의식이 지배를 당한다'는 말은 의미가 사뭇 다르다. '지리적 공간이 의식을 지배하고, 기운을 결정하고, 결국 운명을 지배한다'는 것이 바로 풍수지리학의 뼈대다. 현재의 청와대 터를 두고 "대통령이 생활하는 관저를 풍수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곳에 머물게 되면 물이 고여 있는 것처럼 밖으로 나가기 싫어지고, 은둔하게 되며, 시간이 지날수록 폐쇄적인 성향으로 변하게 되며, 우울증 등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높다"(조수범 단국대 평생교육원 풍수지리학과 교수) 등의 주장이 있는데, 윤 당선자는 이런 말을 깊이 신봉하고 있는 셈이다.
용산이 청와대 새 터로 낙점된 것도 풍수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용산이 "수태극(水太極)의 땅"으로 '명당'이라는 주장은 예로부터 많았다. "용(龍)도 임금이고, 산(山)도 임금으로 대통령 기운에 맞는다" "국방부 터는 용산의 내청룡(內靑龍)에 해당돼 권력·명예의 기운이 강한 땅이다" 등 풍수지리 용산예찬론이 적지 않다. 풍수지리학자 지창학씨는 한 걸음 나아가 "용산은 풍수지리학적으로도 중요하지만 용산을 지배했던 세력이 한반도를 좌지우지했으며 강대국이었다. 이번 대통령부터 용산에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우리가 강대국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윤석열 당선인과 김건희씨는 아마도 이런 주장에 솔깃했을 수 있다. 지금의 청와대를 떠나 '새로운 왕조시대'를 열겠다는 야심이 청와대 용산 이전의 밑바탕에는 꿈틀거리는 듯하다. 대선에서 승리는 했지만 도덕적·법률적 약점이 많은 상태에서 '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터가 나쁜' 청와대로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판단할 법도 하다.
윤석열 당선인과 김건희씨는 술사, 도사, 지관 등의 말을 맹신한 나머지 숱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청와대 이전에 사력을 다해 뛰어들었을 수 있다. 그러나 '풍수의 진짜 고수'들은 술사나 지관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말한다. 청와대가 나쁜 터라는 문제를 처음 제기한 최창조 교수는 저서 <땅의 눈물 땅의 희망>에서 이렇게 말했다.
"풍수가 진정 중시하는 것은 땅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다. 땅은 그저 무대일 뿐이다. 무대는 중요하다. 그러나 무대가 좋아도 엉터리 배우들이 비윤리적 각본을 가지고 공연을 한들 좋은 연극이 될 까닭은 없다. 반대로 훌륭한 배우들이 인간적인 각본을 가지고 연기를 한다면 비록 무대의 품격이 좀 떨어진다 하더라도 크게 비난받을 연극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죄 없는 무대를 덧대어 그 터가 나쁘니, 살이 끼었느니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엉터리 배우들이 죄 없는 무대 탓을 하면서 좋은 무대로 옮겨서 비윤리적 각본을 가지고 공연을 하겠다고 나선 형국, 지금 윤 당선인이 보이는 모습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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