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7월 13살이던 소녀는 200여 명의 또래들과 함께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 일본 시모노세키를 거쳐 도야마현의 군수공장인 후지코시로 갔다. 이들은 새벽 4시 40분에 기상해 일요일도 없이 하루에 적게는 10시간 많게는 14시간씩 일했다. 그러나 임금은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식사가 제공됐지만 멀건 죽으로, 아사(餓死)를 겨우 면하는 수준이었다. 고된 노동과 굶주림 외에도 군대식 훈련으로 쓰려지거나 실려 나가는 이들이 속출했다.
1945년 7월 미군의 일본 본토 폭격이 시작되자, 후지코시 측은 황해도 사리원으로 공장을 옮긴다면서 소녀들에게 집으로 돌아가 기다리라고 했다. 그 사이 해방을 맞았지만 소녀들의 귀환은 즉시 이뤄지지 못했다. 미 육군 통신대는 그해 10월 후쿠오카에서 군산항으로 가는 귀국선을 기다리는 소녀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흰 머리띠를 한 소녀들은 모두 앳된 모습이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원이었던 이종숙·양춘희·이춘면·안희수 증언 재구성. 이춘면 할머니는 2019년 10월 26일 88세를 일기로, 안희수 할머니는 지난 2월 10일 9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여러 개의 진실' 중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사는?
책 <여자정신대, 그 기억과 진실>(박광준 지음, 뿌리와이파리 펴냄)은 일제의 강제 노역에 시달린 소녀들, 즉 '조선여자근로정신대'에 대한 기록이다.
동아시아 비교사회정책 혹은 비교사회정책사를 연구해온 저자(현 붓쿄대학 교수)는 정부조사자료집에 실린 23명의 구술과 개인 연구자들의 논문, 그리고 조선정신대가 일본 정부 혹은 기업을 상대로 일본재판소에 제소한 소송 자료 등을 바탕으로 일제의 노무 동원 전반을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특히 정신대에 관한 우리 사회의 '만들어진' 오해를 풀기 위해 1939년 후지코시 신입사원모집용 안내자료에 기재된 여자공원 임금 자료까지 찾아가며 정신대 피해자들의 구술자료를 팩트체크했다. 학자라면 응당 해야 하는 일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저자가 증언의 상호 대조 및 확인 과정을 거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경험자의 구술자료는 사적 기억이기 때문에 증언자에 따라 '여러 개의 진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한 경우라도 그 기억 내용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점,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약 50년이나 지난 후 고령의 나이가 되어 회상하는 형식의 구술로 사회통념이나 주위 사람들의 기억이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 등.
무엇보다 저자는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 할 지라도 당사자 증언을 곧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는 태도는 삼가야 한다고 말한다.
'정신대=위안부'라는 오해
정신대는 곧 위안부라는 오해가 대표적이다.
'정신대'는 '자진해서 나옴. 무슨 일에든 앞장섬'이라는 뜻을 가진 '정신(挺身)'이란 이름의 단체다. 하지만 '자진', 자발성은 허울일뿐 "극단적인 군국주의 시대였던 1940년대 일본은 국가총동원체제를 갖추고 초중고 학생이든 주부든 모든 조직에 대隊를 붙여서 군대처럼 조직하고 동원했다".(위의 책 28쪽)
1944년 8월 23일 시행된 칙령 여자정신근로령(이하 정신대령)에 따라 여자정신대는 원칙적으로 미혼여성으로 구성된 근로협력단체였다. 일본어를 알아야 했기 때문에 국민학교를 정상적으로 졸업한, 또 일본 공장법이 규정한 최저노동연령인 만 12세 이상을 동원 대상으로 삼았다.
일본은 여자정신대를 일시적 사업이 아닌 지속적인 사업으로 계획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정신대가 일본으로 떠날 때 '장행회'라는 환송식을 열고 정신대를 인솔해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인솔자의 보고회를 개최했다. 또 정신대 관련 미담기사와 정신대원들의 감사편지를 신문에 내고 총독부 명의의 담화를 발표하는 등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그럼에도 '여자공출'과 '여자징용'에 대한 반감으로 여자정신대를 피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했고, 그 수단은 조혼과 취업이었다.
<경성일보>는 '조혼자早婚者로 범람하는 도시'(1944년 4월 22일 자)라는 기사를 통해 1년 전 19~21/22세였던 여자의 결혼연령이 17/18~20세, 심한 경우 15/16세도 있다고 보도했다. <매일신보>는 '여학생 취업 단연 많아졌다'라는 기사(1944년 4월 17일 자)를 내기도 했다.
특히 정신대가 군 위안부라는 소문은, 당시 조선총독부도 인지하고 있었다.
"총독부가 작성하여 일본 각의로 제출한 문건인 '관제개정 설명 자료'는 "미혼여자 징용은 필시 그들 일부를 위안부로 만든다는 등 황당무계한 유언流言이나, 항간에 떠도는 악질적 유언 등이 섞여 있어서 노무동원은 앞으로 점점 더 곤란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조선에 나가 정신대를 모집하던 기업의 직원들도 그 점을 의식해서 '위안부가 아니라 예절을 가르치고 공부도 가르치니 안심하라'고 대원의 부모들을 안심시켰던 모양이다. 조선정신대를 인솔하기 위해 조선에 나갔던 미쓰비시명항 관계자가 그렇게 증언한다."(위의 책 211쪽)
다만, 저자는 1990년대 이후 '정신대=군위안부'라는 오해는 언론에도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정신대를 군위안부와 동일시하는 현상은,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후 해방 전의 국민학교 학적부가 공개되면서 한국사회 전체를 뒤흔들었고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키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만 12세의 졸업생 혹은 재학생 학적부에 '여자정신대로 일본에 동원'이라고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그것을 근거로 '국민학생을 군위안부로 삼았다'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네이버라이브러리로 검색할 수 있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겨레신문 경향신문은 물론, 확인 가능한 모든 신문이 그런 오보를 실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일본에서도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이 오보를 실었다가 후일 공식 사죄했고, 요미우리신문読売新聞(1987.8.14)도 오보에 가까운 기사를 실었다고 판단된다."(위의 책 36쪽)
'한 푼도 받지 못했다'라는 오해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 사회 분위기는 완전히 군대식으로 바뀌었다. 학생들은 교가 대신 군가를 불렀으며 군마를 위한 사료용 풀베기나 징병 나간 가족 돌보기 등에 동원되었다. 무엇보다 배급제 시행에도 불구하고 물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에 더해 저자는 정신대원으로 끌려간 10대 소녀들이 느꼈을 '문화충격'에도 주목했다.
"조선정신대원들이 일본생활을 시작하면서 받았던 군사교육과 공습대피훈련 등은 큰 고통이었음에 틀림없다.
저녁시간 등에는 꽃꽃이나 일상예절(行儀)을 배우기도 했는데, 예절이라는 것 자체가 문화충격이었다. 일본에서는 꿇어앉는 것이 정좌正坐이며, 양반다리나 무릎을 세우고 앉는 것은 좋지 않은 행실로 취급된다. 예절교육을 한답시고 벌 받을 때나 하는 꿇어앉기를 강요당했기 때문에 소녀들은 그것을 예절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된장국(미소시루)에 밥을 넣어 먹었다는 이유로 벌을 서기도 했다(후지코시 원고, 최희순). 일본에서는 밥그릇에 된장국을 부어 넣어 먹는 것은 문제되지 않으나, 조선문화처럼 국그릇에 밥을 말아머근 것은 좋지 않은 행동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조선문화에 대한 배려는 아예 기대할 수 없었으며, 대원들은 황민정신이 투철하지 못한 아이들, 일상예절을 모르는 아이들로 간주되기 일쑤였다."(위의 책 283쪽)
정신대원 상당수는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현혹돼 강제적으로 일본 본토까지 넘어왔다. '회사측요강'에도 기본급에 수당이 지급되는 임금 체제가 명시되어 있다. 노동시간 또한 10시간 이내가 원칙이었으며 새벽근무나 잔업도 12시간을 넘지 않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휴게/휴가와 건강관리를 산부인과 의사 촉탁, 생활상담이나 결혼상담이 규정에 들어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규정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2003년 후지코시를 상대로 피해 소송을 진행한 정신대원의 임금 관련 증언은 대부분 비슷하다. "끌려간 뒤 바로 군대식 훈련을 받는 등 혹독한 노역에 시달리며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느꼈지만, 단 한 번도 임금도 받은 적이 없다"는 것.
그러나 증언에 입각한 진실은 여러 개다.
"임금에 관한 증언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며, 최근까지 있어온 정신대 소송의 본질과도 관련되어 있다. 당시 공식용어는 보상금報償金이었으나 여기에서는 임금이라고 표기한다. 임금에 관한 대원들의 증언을 다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임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 임금봉투 받은 것은 기억하는데, 소액이었다(간단한 물건을 살 정도).
○ 임금은 받았지만(사원수첩에 임금 기록) 강제저축되어 돌아올 때 받지 못했다.
○ 임금은 직접 받지 못했으나 집에서 부쳐온 편지에 돈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었다.
○ 임금이 30엔이었는데 일부만 받고 나머지는 집으로 송금했다."(위의 책 335쪽)
'여러 개의 진실'이 담긴 기억 활용법
소설가 김숨은 위안부 피해자 증언을 토대로 한 장편소설 <한명>(현대문학 펴냄)에 덧붙인 '작가의 말'에서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을 시작으로, 피해자들의 증언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그 증언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소설을 쓰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경험자들의 사적 기억에 따른 '여러 개의 진실' 덕에 상상으로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참혹한 기억이 소설이라는 또 다른 형태로 기록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기억을 사실로 확인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는다.
"좋은 사회과학 책은 좋은 소설과 같아야 한다고들 말한다. 좋은 소설은 사회를 더 많이 알게 해준다. 그리고 사회의 깊은 곳에 존재하는 문제까지 날카롭게 파고들어 관찰하는 눈을 제공해준다. 나는 이 책이 여자정신대 문제와 관련된 당시 조선과 일본의 사회제도와 사회문화를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고 입체적으로 전하는 자료가 되기를 바란다."(<여자정신대, 그 기억과 진실> 4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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