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21년 7월 8일자 본지에 실린 박찬숙의 '탈춤과 나'에 이어진 글입니다.
탈의 추억 1 - 푸른 옷의 그 아저씨
새해 벽두, 채희완 선배님의 새해인사 겸 원고 모집의 정성어린 문자를 받았다. 탈 단톡방에 올리긴 하였으나 아무도 답을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선배님의 수고를 대답 없는 메아리로 만들어버릴 수는 없을 것 같아 이번엔 탈반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던 초기의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어릴 적, 몰래 먹고 뱉어내지 못한 살구 씨가 아직 뱃속 깊이 박혀있기라도 한 듯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기도 하다. 이제껏 남편 이외에 그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해 보지 못한, 그렇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처럼 굉장한 비하인드 스토리는 전혀 아니며, 소소하고도 시시할 수도 있는 이야기다.
대학 입학 전부터 꿈꾸어오던 동아리 활동이 있었다. 영어 잘해보는 것이 소원이었으므로 ‘타임’지 강독반, 그리고 소녀시절 한때 작곡과 지망생이어서 늘 클래식음악을 가까이하며 가곡 부르기를 즐겨해 왔으니 휴식시간을 갖듯 합창반, 그렇게 두 개의 동아리와 그리고 발표공포증 혹은 무대공포증의 열등감을 극복해보고자 연극반을 고려해보던 중이었다.
입학 초 대강당에서 열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중 영상으로 각 동아리 활동을 소개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화면이 내 가슴팍을 치고 들어왔다. 생전 처음 보는 춤이었다. 울긋불긋한 술 달린 커다란 탈바가지가 고개를 사자 갈기 털듯 털어대며 껑충껑충 뛰는데 어찌 그리 위용이 넘치던지, 한삼자락의 힘찬 곡선은 왜 그리 멋들어지던지, 충격 그 자체였다. 또 두들겨대는 징, 북, 장구, 꽹과리 사물의 각기 다르면서도 요란한 듯 장중한 조합은 바흐의 대위법을 단숨에 제압해버릴 만한 기막힌 조화로움이 아닌가? 우리 전통춤 중에 저런 게 있었던 말인가? 나는 그날로 결심을 굳혔다. 합창반, 타임반, 탈반, 특히 탈반은 연극반에 대한 나의 선망을 충분히 대체해줄 것 같기에 일찌감치 가입 등록을 마쳤다. 그러나 세 가지 동아리 활동은 무리였고, 합창반은 내 어린 시절의 문화와 소리세계의 연장선이었기에 부담없이 즐기는 마음으로 가끔씩, 또 탈반은 신세계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으로 열심히 참여하게 되었다.
아마도 5월 5~10일쯤이었을 것이다. 첫 학기의 중간고사가 다가오고 잔뜩 긴장된 마음으로 시험 준비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날도 아침 일찍 도서관을 찾았지만 빈 자리 찾기에 실패한 나는 인문관의 넓은 강의실 한 곳에서 열심히 교양영어 단어와 문장을 외우고 있었다. 화장실을 갈 때마저도 영어단어 카드를 들고 갈 정도로 열심히.... 이런 내 곁으로 푸른 옷의 경비아저씨가 슬며시 다가왔다. “학생, 가방 다 싸서 조용히 나 좀 따라오지” 한다. 영문도 모른 채 나는 그 지시에 압도되어 그를 따라나섰고, 후문 께에서 기다리고 있던 검은 지프에 순순히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서대문경찰서 취조실에 앉혀졌다.
”학생, 아까 화장실에서 뭐 했는지 빼먹지 말고 다 써, 이 종이 한 장에 꽉 차도록 자세히 쓰라고, 그리고 한 장 말고 여기 있는 종이만큼 같은 내용으로 반복해서 써, 그리고 서두에는 집 주소, 전화번호, 부모 이름, 소속 학과, 학번과 가입 써클명, 과 친구, 써클 친구 각 5명의 이름도!” 형사인 듯한 그는 연필과 볼펜으로 번갈아 쓰라는 명령과 함께 스무장 쯤의 16절 시험지를 남겨두고 나의 주민등록증과 함께 나가버렸다.
영문도 모른 채 잡혀온 나는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상황에 직면하였지만 ‘왜 경찰서에 데려왔는지, 왜 그걸 써야 하는지’, 한 마디도 묻지 못했다. 이게 정말 실제 상황인가? 그냥 공포에 질려서 머릿속이 아득해질 뿐이었다. 왜 안 쓰고 있냐는 호통에 나는 마치 자동인형처럼 써대기 시작했다. ‘화장실에서 뭐 했냐니’, 나는 내가 외우고자 했던 단어와 숙어 몇 문장을 썼던 것 같다. 상습적으로 변비를 달고 살아서 집에서도 화장실에서 오래 앉아있다고도.....다시 들어온 그는 내가 쓴 것을 보더니 화를 내기 시작했다. “화장실 벽에 뭐라고 쓰고 나왔냐고”....그제서야 나는 눈치를 챘던 것 같다. 화장실에 오래 머물러 있던 내가 불온낙서의 현행범으로 찍혀, 이른바 대학 내에 상주하는 짭새라 불리는 그에 의해 체포당해 왔다는 것을.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관심은커녕 수년을 입시지옥에서만 살다가 이제 해방된 지 딱 두 달, 그런 처지에 단어조차 생소한 불온낙서라니... 그는 몇 시간이 지나자 자신이 헛다리 짚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자신이 데려온 처자가 이제 1학년이라는 것, 타임반과 합창반이라는 얌전한 동아리 활동만을 한다는 것, 무엇보다 아버지가 군인출신이라 잘못 건드리면 자기가 도리어 화를 입겠다는 것을 내 신원조회를 통해 깨달았을 터- 목소리가 좀 상냥해졌다. 스무 장을 채 못다 끝냈지만 그만 쓰고 기다리라 했다. 아침 10시경 들어가서 해질 무렵쯤 되어서야 나는 다시 검은 지프에 올라 학교 후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찰서에서 나오기 전, 나는 부모님 놀라시니 오늘 일을 집에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나보다 더 간곡히 아니 고압적으로 오늘 있었던 일을 절대 부모님께 말하지 말라고 엄포인지 당부인지 약속인지를 주고받았었다. 나는 그날 하루, 그에게 그 어떤 항의나 사과의 말을 청하기는 커녕 무탈하게 나온 것만으로도 안도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날이 가면 갈수록 나는 다시 공포와 불안의 감정에 휩싸이기 시작했으며, 이 억울하고 기막힌 일을 어디에 하소연해야할까? 동아리 언니나 친구들에게 하소연하자니 그날의 나는 돌이켜보아도 너무 한심하고 바보, 쫄보,...창피해서 도저히 입 밖에 낼 수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그 와중에도 다행이라 여겼던 것은 탈반 가입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탈반을 입에 담으면 안 되겠구나. 내가 세 개의 동아리에 가입했지만(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대부분이 두 개의 동아리 정도만을 가입하는 추세였다) 두 개를 성실히 적어내었으니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구나, 또 내가 1학년이어서, 아버지가 군 출신이어서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구나.
나의 본능은 적중하여서 탈반은 동아리들 중 조금은 불온시 되는 대상이었던 것을 그 일이 있은 직후에야 알 수 있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대강당 앞에서 벌어진 ‘독재타도, 유신철폐’ 집회에 탈반 선배들이 대거 앉아있었고 지나가는 1학년 신입들에게 다가오라고 손짓을 했으니 말이다.
그 뒤로 나는 전공보다도 더 열심히 탈반 활동을 하였다. 탈춤을 배우면서 기울어진 마당에서 어떻게 중심을 잡고 두 발을 굳건히 내디뎌야 하는지, 세상의 억압과 부조리를 향해 어떻게 소리 내 외쳐야 하는지를 배우고 단련해나갔다. 그리고 그날의 슬픔도 홀로 치유해나갔다. 또한 사회과학서적을 제법 탐독하는 운동권학생이 되었다.
만약 그날의 내가 2학년이었다면, 또 탈반 구성원인 것이 파악되었었다면, 그는 나를 어떻게든 불온낙서의 현행범으로 몰아넣고 승진의 기회를 거머쥐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푸른 옷의 그 아저씨는 비록 실패했으나 나를 지금의 길로 이끈 최초의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탈의 추억’ 2 - 무대 위의 ’한두레’
(이 시처럼 쓴 글은 2004년 6월 8일, 순창 고추장축제에서 우연히 한두레 공연을 보고 당시 나의 개인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이다. 안타깝게도 글만 존재할 뿐 그 날의 사진은 한 장도 없으며 극의 내용이나 출연진 등 실제 기억 역시 머릿속에서 까마득히 사라져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다. 다만 내가 당시에 직접 보았고 느꼈으므로 일기장과도 같았던 홈페이지에 올렸다는 것,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던 이글을 며칠 전 나의 블로그에서 우연히 찾아냈다는 것 외에는 더 이상 구체적인 사실을 전할 수 없음에 독자님들께 미리 양해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혹 당시 순창공연에 참여했거나 활동했던 한두레 성원이 계시다면 구체적인 사실의 증거를 보태어주시길 소망하며, 누추한 글이지만 탈의 추억 한 조각으로 내밀어본다)
나도 저렇게 오금질 다리 위에
주저앉혔다 곧추세웠다
북, 장구소리 질탕한대로 움찔움찔
영 가만있지 못하는 허리를 잘 모시고서
두 팔은 꺼정하게 치켜들고 어깨는 들썩
된장 바른 보릿대처럼 춤추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저렇게 맨얼굴은 아니었어
늘 바보 같은 탈바가지를 덮어쓰고서
서로를 온전히 바라볼 수 없는 채로
악만 바락바락 써댔었지
표정 연기 따위 신경 안 써도 되고
몸짓과 목소리만 키우면 족했다
후져빠진 마이크나 음향기기 하나 없이
몸짓과 생소리만으로도
수 백 수 천의 우리는 마음끼리 만났고
사실 내용은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탈바가지가 악을 써댈 땐
귀 기울이는 일보다 박자 맞춰 추임새 섞어주는 일이 더 급했지
짭새가 드문드문 박혀있었긴 해도
간만에 째지게 흥겨웠었다.
바라볼 수 없어서 더 간절히 들여다 보려했나 보다
들리지 않아서 모든 게 더 명료했었나 보다
머릿속이, 마음이 두루치기로 한데 섞이고
몸뚱아리가 저절로 꿈틀대다 휘몰아치며 솟구치니
장단 비껴간 어정쩡한 걸음걸이조차도
진짜 춤이 될 수 있었던 그때
그리고 저렇게 높은 무대는 없었다
가장 낮은 마당이었어.
생각해봐, 올려다보는 것보다 내려다 보는 게
얼마나 편안히 집중할 수 있는지,
눈을 치뜨지 않고서도
실눈 뜨고 혹은 아예 눈감고 있더라도
몸뚱아리가 그냥 마당으로 확 쏟아져버리고
참 신기한 일이었다
엎드려서 신문보다 꾸벅 졸았을 때
좁쌀만 한 활자가 내 얼굴만하게 부딪쳐오고
나의 하루가 그대로 신문기사가 되고 하루쯤 신문을 보지 않아도
내가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는 걸 아프게 깨닫던 시대에
술 먹다가 까불다가 소리를 놓치고
간혹 잘못 끼어든 추임새가 되어도
바보가 되지 않는 해방구, 그 흙마당
무대가 없는 마당에선 모두 그렇게 주인공이 되어 역사를 썼는데...
맨얼굴로 무대에 올라선 한두레는
왜 그리 말도 많은지
화장실 한 번 갔다 오니 박자를 영 놓쳐서 도무지 끼어들 수가 없더군
관객들 모두 배우들의 얼굴만 치어다보고
소리 잘 들리는 곳으로만 몰켜 앉아서는
방금 뭐라고 혔어? 저 할맘이, 하다가 같이 줄거리를 놓치고 있다.
줄거리 놓친 관객들은 하나둘 자리를 뜨고...
말씀이 많아진 한두레, 결국
한결 섬세하고 고급진 음향기기가 없는 관계로
사람은 많았으나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진땀만 뽑아내다 갔다.
탈패없는 탈반이 30주년을 맞는 즈음
우리는 간격없는 맨얼굴로 서로의 샅샅한 표정을 다 바라볼 수 있어도
점점 마음을 더듬을 수 없어 날마다 말 수를 늘린다.
늘리는 걸로 모자라 점점 더 정교하게 말에다 수까지 놓는다
몇 마디 안 되는 대사로 악써대던 탈패도 짭새도 없어진
세월 보낸 평화로운 교정에서
나는 귀마개를 하고 다녀야겠다.
때때로 스피커를 찢고 나오는 굉음과 랩송
아마도 4절지 대자보 두 장쯤 분량의 말씀
1분 안에 그 기럭지를 어떻게 구겨 넣었는지
아무래도 그 궁금증 나는 풀지 못하겠다
그냥 구겨버려야겠다.
그런데, 세월이 흘렀다고 늙어버렸다고
그만 구겨버리는 건
탈패로서 할 짓이 아니라고
어느 교주님이
겨울 들판에서 초록 밀싹처럼 말씀하신다.
‘탈의 추억‘3- 필봉에서 고성오광대를 만나다 (2006년 11월 전북일보 칼럼으로 기고했던 글 중 발췌)
임실 필봉의 옛 풍물굿 가락을 정리 복원하고 필봉농악의 전국적인 보급과 전승 활동에 일생을 바친 고 양순용 선생의 1주기 추모제로부터 시작되었고, 11주기 추모제를 맞은 지금은 ‘필봉풍물굿’이라 하여 선생의 추모제와 함께 전국 규모의 풍물놀이판을 꿈꾸고 있는, 매년 여름 막바지에 열리는 필봉 전수관 마당의 풍물굿판을 떠올린다. 해마다 구경꾼도 늘고행사도 풍성해지고 체계도 잡혀가는 느낌이어서 다행하고 매일처럼 쏟아지던 소나기도 그날은 웬일인지 참아주니 그것도 다행하였다.
1978년도이던가? 서울 국기원에서 있었던 좌도풍물굿 필봉농악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 재현되던 날의 기억, 30년 가까운 세월 저 너머에 먼지 둘러쓴 낡은 사진 몇 장으로 남아있다. 공연용으로만 짜여진 화려한 마스게임식의 농악만을 보아오던 나에게, 논두렁길을 지나 비포장 황톳길을 행진하듯 유장한 길굿 가락과 노동과 놀이와 삶의 땀 냄새, 액 막음과 속세의 기원 등이 틈틈이 배어있는 옛 농촌공동체의 풍물굿 그대로를 복원, 재현한 필봉농악을 처음 접했던 당시의 기억, 그것은 아마도 잔잔한 흥분이 뒤섞인 경외의 기억이 아니었나 싶다.
양순용 선생의 유품 사진들을 들여다보면서 30년 전의 국기원 공연과 15년 전, 남원 대강면으로 전수갔을 때, 선생과 나의 날들이 마주치던 순간이 두 번 있었구나, 새삼 기억하며, 필봉농악의 오늘을 있게 하기 위한 선생의 고난에 찬 객지생활과 광기어린 신념,... 그 '고난'과 '신념'에 대하여 다시 또 경외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의 굿판에서 특히 반가웠던 것은 고성오광대 초청 공연이었다. 잔뜩 기대했던 것에 비해 기대에는 못 미쳤지만 -여름날인데다 오늘날 최신 옷감의 질량 탓일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것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것이, 때로 힘차고 위엄있게, 때로 거드름피우듯 능청맞게, 그렇게 흔들리는 도포자락의 움직임을 십분 살려내는 멋들어진 춤사위는 볼 수 없이, 시종일관 활달하기만 한 춤사위에다 미얄 할매도 젊은 첩에게 밀리기에는 너무 혈기왕성한 연기와 몸짓, 경상도 고성사투리가 아닌 표준말의 재담에 이르기까지... - 그래도 반갑고 고마운 공연이었다. 오늘날 민속문화 중에서도 비인기종목으로 추락해버린 탈춤을 지금껏 보존하며 공연한다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었겠는가. 그리 생각하면 공연의 질을 놓고 실망할 것이 아니라 그 또한 경외스럽다.
인기종목에 신념을 갖고 성공하며 사는 일도 훌륭하지만 비인기종목이라 하여도, 비록 성공과 거리가 멀다 해도 신념을 놓지 않고 지속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삶일지, 그래서 순탄하게 성공한 그 성공보다 고난 투성이로 지켜진 신념이 두고두고 타인에게 더 진한 감동을 주는 성공을 거둔다.
살아생전 고향집으로 들지 못하고 떠돌았던 양순용 선생이 흙으로 돌아가서야 비로소 고향마을 앞에 마련해준 필봉굿마당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고성오광대를 보며 다시금 세상의 고난 투성이 신념들에 대하여 고개 숙여지던 늦여름 밤의 기억, 이렇듯 탈의 추억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만나도 내 안에서 늘 싱싱하다.
박찬숙: 이화여자대학교 민속극연구회 78학번, 전북 순창에서 1983년부터 현재까지 살며 논, 밭농사와 돼지를 자연농업 방식으로 키우고 있다.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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