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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최초의 창작판소리 '소리내력'과 문화운동의 길

[탈춤과 나] 임진택의 탈춤과 마당극 4

서대문구치소 감방에서의 ‘소리내력’ 강창(講唱)

1974년 1월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이 주도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에 화들짝 놀란 유신 독재정권은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하고 두 분 재야인사를 긴급 체포 감금하였다.

그리고는 이어 4월 3일 긴급조치 4호를 발동, 이른바 민청학련사건을 발표하였다. 당국의 엄포에 의하면 긴급조치를 위반하거나 비방하는 자는 최고 사형에 처해지며, 현상수배된 주동자 3인(유인태·이철·강구철)을 은닉(隱匿)하는 자는 최고 무기징역에 처한다는 무시무시한 공갈(恐喝)이었다. 현상금 200만원은 당시 간첩 신고 포상금의 2배나 되는 액수였다.

나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선후배들이 언제 어떻게 이런 어마어마한 모반을 계획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또 나 자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으므로 별 동요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긴급조치 현상수배 전단 벽보

그런데 바로 다음날, 휘경동 큰 길 건너 옆동네에 살고있는 유홍준 형이 급하게 나를 찾아와 하는 말이 유인태가 지금 숨을 데가 없어 찾아왔는데 자기 집은 위험하니 너의 집에 좀 숨겨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언뜻 생각하더라도 자기 집이 위험하면 임진택 집도 위험할 것이라고 판단할 만한데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 급하긴 급한 모양이었다.

나는 마침 큰누나가 옆동네 이문동에 살고 있었으므로 무조건 큰누나 집으로 데려가 누나에게 사정을 말했더니, 오호! 우리 누나가 대범하게 받아들이는 것 아닌가? 누나는 인태 형을 안방에서 부엌 위쪽으로 설치된 다락방에 숨겨주고 하루에 한 번 밥도 몰래 넣어주었다고 한다.

인태 형은 닷새간 큰누나 집에 숨어있다가 피신지를 바꾸어 이동한 후 결국은 체포되는데, 문제는 인태 형이 체포되기 전에 그가 우리(누나) 집에 숨어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우리 집에 갑자기 형사들이 들이닥친 것. 설상가상, 들이닥친 형사들은 하필 예전에 모택동 노트 관련하여 악연을 맺었던 바로 그 남대문경찰서 형사들이었다.

나는 현상 수배자 유인태를 은닉했다는 이유로 잡혀가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 먼저 붙들려온 이로 당연히 유홍준 형이 있었고, 연관되어 붙들려온 또다른 이로 안병욱(근현대 역사학자로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 역임) 형이 있었다. 형사들은 날더러 유인태 간 곳을 불라고 악다구니를 썼지만, 내가 모른다고 하자 공연히 손찌검을 하며 화풀이를 했다. 하긴 현상수배자를 검거하면 1계급 특진에 포상금도 어마어마해서 간첩 잡는 일보다 수입이 나은지라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유인태는 다른 관할에서 체포되었고, 이후 형사들의 악다구니는 줄어들었다. 어떻든 민청학련 사건은 워낙 방대한 사건이어서 조직도(組織圖)를 조작하는데만도 두어달이 걸렸으므로, 경찰서 유치장에서 무료하게 지내던 우리는 웬만큼 조직도가 그려진 6월말 경에야 서대문 인근 서울구치소로 이감되었다.

▲1974년 서대문 인근 서울구치소 전경, 현재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오른쪽)

서울구치소 7사(舍) 7방에 수감되어 소위 잡범(?)들과 함께 지내게 된 나는 입소한 첫날 감방 안에서 내 죄에 대한 예비재판을 받았다. 감방장이 재판장을 맡고 기율부장이 검사를 맡아 약식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과정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기율 : (의아한 듯) 대학생이라꼬? 뭔 대학인데?

피고 : 서울대학교입니다.

방장 : (놀라며) 서울대학? 대학생이 공부는 안하고 와 여기 들어왔노?

피고 : 긴급조치를 위반해서 들어왔습니다.

방장 : 긴급조치? (기율에게) 야, 그런 조치가 있었나?

기율 : (당황하며) 잘 모르겠습니다.

방장 : 음, 긴급한 걸로 봐서 급하게 새로 만들었는갑다. (기율에게) 기소 해.

기율 : 예. (피고에게) 그래, 긴급하게 무엇을 어떻게 위반했다는거냐?

피고 : 긴급조치 4호에 현상수배된 주모자가 있는데, 그 주모자를 은닉하면 최고 무기징역에 처한다고 합니다.

기율 : (놀라며) 은닉? 무기징역? (생각난 듯) 야, 그런데 은닉이 뭐냐?

피고 : 아, 숨겨주는 겁니다.

방장 : (관심이 가는 듯) 현상수배자를 숨겨주면 무기징역이라? 그럼 그 현상수배자는 형량이 얼마꼬?

피고 : 최고 사형입니다.

방장 : (어리둥절 놀라며) 사형? 와, 쎄네. (기율에게) 계속 해

기율 : 예. (피고에게) 그래, 그 현상수배 갸들이 뭔 죄를 저질렀는데?

피고 : 긴급조치를 위반했습니다.

기율 : (윽박지르며) 그러니까 긴급조치 뭐를 위반했냐 말이야.

피고 : (생각을 가다듬으며) 그러니까 말하자면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것, 군사독재 정권의 종신집권 획책을 반대하는 것, 이런 것입니다.

방장 : 유신체제를 반대한다? 종신집권을 반대한다? 와, 무섭네. (기율에게) 계속해.

기율 : 예. (피고에게) 그럼 너도 유신체제를 반대했냐?

피고 : 반대하는 마음은 있지만, 나서서 반대한 것은 아니고, 나는 주모자 중 한 사람을 은닉했을 뿐입니다.

기율 : 은닉? (알아들었다는 듯이) 그러니까 너는 현상수배 주모자를 숨겨준 것밖에 죄가 없다 이 말이지?

피고 : 그렇습니다.

기율 : (방장에게) 이상입니다.

방장 : 어렵네... (피고에게) 그래 그 주모자를 어디다 어떻게 숨겨줬노?

피고 : 누나 집 다락방에 숨겨줬습니다.

방장 : (눈빛을 빛내며) 누나 집 다락방이라...? 너희 누나 시집 안 갔나?

피고 : 아, 큰누나 시집 갔습니다.

방장 : (약간 실망하며) 그래 며칠이나 숨겨줬나?

피고 : 한 닷새 정도 됩니다.

방장 : (아직 안 풀린다는 듯이) 닷새라...?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숨겨준 것 말고 뭐 다른 일은 없었나? 잘 생각해보라, 숨기지 말고...

피고 : (생각난 듯) 아, 누나 말이 하루에 한번씩 몰래 밥을 올려줬답니다.

방장 : (다시 실망하며) 밥을 줬다? 식사 제공, 음... (곰곰 생각하더니) 그러니까 몰래 재워주고 멕여주고 했다 이 말이지?

피고 : 그렇습니다.

방장 : (하찮다는듯이) 니 걱정마라. ‘은닉죄’ 그런 어려운 거 상관말고, 마 기다리마 된다. 네가 한 짓은 ‘무허가 숙박업’이라꼬, 경범이다 경범.

감옥은 겨울철도 어렵지만 여름이 더 어렵다고 한다. 추울 때는 옆사람의 체온이 고맙게 느껴지나, 무더위 속에서는 옆사람의 체온이 짜증만 더 나게 하기 때문이다. 더위가 한참인 7월 중순경, 밖에서 크게 외치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른 일어나 쇠창틀을 붙들고 큰소리로 물었다. “누구요?”

그러자 사람들이 큰소리로 자기 이름을 대며 외치는데, 김지하 형을 비롯해서 유인태 이철 나병식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크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그러자 이들은 다시 왁자지껄 큰소리로 답했다. “사형이다 사형, 우하하하하.”

이 날이 바로 민청학련 주모자들이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돌아온 날이었다. 김병곤 동지가 사형 선고를 받자 “영광입니다” 하고 대응했다는 바로 그 날이었다. 사형을 선고받았다면서 도리어 껄껄대며 웃어제끼는 거리낌 없는 당당한 태도에 내가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긴급조치 4호 민청학련사건 비상고등군법회의 모습(1974년 7월)

이 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감방장이 뜻밖의 제안을 내놨다. 아마도 낮에 있었던 사형수들 태도를 본 감방장이 아무래도 마음이 싱숭생숭했던지, 기율부장에게 오락시간을 갖도록 지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감방 안에서 함께 지내던 10여명의 잡범들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노래 한 자락씩을 불렀는데, 소리는 안 내고 입모양으로만 노래하며 동작 시늉을 더 열심히 하는 색다른 오락시간이었다.

그 중 ‘저 푸른 초원 위에’라는 유행가는 무려 세 번이나 불릴만큼 인기곡이었는데, 가족(연인)과 함께 내 집에서 살고싶다는 염원이 그만큼 강하다는 증거로 느껴졌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되자 방장은 별 기대도 않는 태도로 한 곡 뽑아보라고 지시했다. 나는 아까 낮에 사형선고 받은 사람들 중에 유명한 시인 선배가 있는데, 그 시인이 쓴 긴 담시가 있어 그걸 내가 다 외고 있으므로 한번 읊어보겠노라고 했다.

방장은 그 담시가 얼마나 긴지 묻지도 않고, 어차피 별 기대도 않는 표정으로 한번 해보라고 손목을 저어 신호를 보냈다. 시 낭송(강창)을 소리내지 않고 입모양으로만 할 수는 없는지라, 나는 숨 죽여가면서 밖으로 안 들리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담시 ‘소리내력’을 읊기 시작했다.

서울 장안에 얼마 전부터

이상야릇한 소리가 자꾸만 들려와

그 소리만 들으면 사시같이 떨어대며

식은 땀을 줄줄 흘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해괴한 일이다.

이는 대개 돈푼 깨나 있고

똥 깨나 뀌는 사람들이니 더욱 해괴한 일이다.

쿵!

바로 저 소리다. 쿵!

저 소리가 무슨 소리? ............

이 담시는 1972년 김지하 시인이 카톨릭 계통의 ‘창조’라는 잡지에 발표한 것인데, 제목은 ‘소리내력’이다. 이 작품은 담시 ‘오적’으로 곤욕을 치른 김시인이 2년만에 또다시 내놓은 정치풍자 담시(譚詩) <비어(蜚語)> 세 편 중 한 편으로, 나머지 두 편은 각기 ‘고관’ ‘육혈포 숭배’라는 제목을 달았다.

‘고관’은 몇 해 전 일어난 대연각호텔 화재사건을 소재로 해서 부패·탐욕한 고관들의 행태와 인과응보를 풍자한 작품이고, ‘육혈포 숭배’는 총질을 좋아하는 군인출신 독재자가 총에 맞아 죽는다는, 어찌보면 몇 해 후 일어날 궁정동 시해사건을 예언한 듯한 섬뜩한 작품이다.

‘창조’지(誌)는 김지하의 정치풍자 담시 <비어>로 인해 1972년 즉각 폐간조치된다. 앞서 1970년 담시 오적(五賊) 때문에 월간 시사지 ‘사상계’가 폐간된 것과 같은 궤에 있는 무소불위의 폭압적인 언론탄압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무렵 판소리를 접하기 전인데도, 세 편의 비어(蜚語) 중에서 ‘소리내력’이 가장 재미있고 읽을 때 자연스럽게 가락이 느껴져서 무조건 혼자 달달 외어놓은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 첫 시연이 전혀 뜻하지 않게 서울구치소 감방 안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감방 안의 청중들은 크게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소리내력’의 주인공 ‘안도’는, 시골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먹고 살려고 별별 짓을 다하다가 억울하게 잡혀와 감옥 안에 갇혀있는 자기네들 처지 아닌가?

그 날 이후 감방 안에서 나에 대한 예우가 싹 달라진 것만 보아도 그들이 얼마나 감동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각설하고, 나의 첫 ‘창작판소리’ 공연은 서대문구치소 7사 7방에서의 ‘소리내력’ 강창이었다. 다만 그것은 내가 판소리를 배우기도 전, 북 장단도 없이, 혼자 알아서 제멋대로 낭송→강창했던 수준이었다.

죽음을 앞둔 김지하의 유언같은 당부 –문화운동-

1974년 7월 중순경 어느 날 간수가 와서 내 번호를 불렀다. 검사가 취조하기 위해 나를 부른다는 것이다. 몇 달 동안 가족과의 면회도 금지되고 검사 취조 한번 받아보지 못한 채 대기하던 터라, 우선 반가웠다.

어디로 가는 건지도 알지 못한채 호송차에 올라탔는데, 차 안에 아무도 없고 달랑 나 혼자다. 하릴없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제 덜컹 차문이 열리더니 누가 올라 타는데, 엇! 지하 형 아닌가? 깜짝 놀래 인사를 하려는데, 지하 형이 얼른 수갑 찬 두 손을 들어 손가락을 입에 대고 말하지 말라는 시늉을 한다. 아무 내색도 못한채 몸을 꼿꼿이 하고 앉아있는데, 호송 간수가 지하 형을 밀어넣고 문을 잠근 후 칸막이 앞자리로 가 앉는지라, 뒷자리에는 지하 형과 나 두사람만 앉아있는 형국이 되었다.

덜컹거리며 달리던 호송차에서 눈치를 살피던 지하 형이 가래끓는 목소리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진택아, 나는 죽는다. 너에게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래?”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끄덕이며 답했다.

“네.”

뭔가를 깊이 생각하며 잠시 숨을 고르던 지하 형이 다시 말을 꺼냈다.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네가 그 일을 해줬으면 한다.”

나도 잠시 숨을 고르고 물었다.

“어떤 일인가요?”

그러자 지하 형은 또 무엇을 깊이 생각하더니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문화운동이다.”

전혀 예기치 못한 단어였으므로 나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그랬더니 잠시 생각하던 지하 형이 다시한번 가래끓는 목소리로 나직이 묻는다.

“진택아, 네가 해줄래? 문화운동이야. 문화운동밖에 길이 없어.”

나는 다시 몸을 세우고 앞을 바라보며 가만히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1974년 8월 8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출옥한 나는 사형선고를 받은 지하 형이 유언처럼 남긴 ‘문화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방안을 모색했으나,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우선 급한 것은 민청학련 구속자 석방을 위한 구명활동이었기에, 그 해 12월 31일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구속자 석방을 위한 문화의 밤'을 개최하였다. 

▲명동성당 모습. 70년대에는 별관 강당을 ‘문화관’이라 불렀다.

삼엄한 시절, 나에게는 기획에서부터 홍보, 집객, 연출, 출연까지 도맡아야 하는 무거운 책임이 주어졌는데, 무엇보다 나는 그 날 행사에서 담시 ’소리내력‘의 강창을 공식적으로 처음 시도하게 된다.

나는 그 해 겨울, 판소리 명창이신 정권진 선생님을 우연히 찾아뵙게 되어 다음해 1월부터 서울대 총연극회 후배들을 데리고 최초의 판소리 강습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니 나 자신 아직 판소리를 직접 배운 적이 없거니와, 내가 설혹 판소리를 제대로 한다해도 북 쳐줄 고수가 우리에게는 없었다.

다행히 ‘소리굿 아구’ 이후 우리와 함께 어울리기 시작한 춤꾼 이애주 누님이 장고장단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명동성당에서의 ‘소리내력’ 북반주는 영광스럽게도 애주누님이 맡아주었다.

‘구속자 석방을 위한 문화의 밤’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거니와, 그 중 ‘소리내력’ 공연은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감흥과 호기심을 안겨주었다. 담시를 판소리로 강창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분야였다. 판소리란 것이 있는지도 모르던 시절, 새로운 이야기를 판소리로 표현해낸 것이 일단은 대견하게 받아들여졌는지 모두들 ‘생경하지만 참신했다’는 것이 중평이었다.

돌이켜보면 문화운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리내력’을 공연하고 다니는 것이 바로 문화운동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나는 당시에 자각(自覺)하지도 자부(自負)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날의 공연이 외교학도이자 연극도였으며 마당극의 창출자였던 내가 창작판소리꾼으로 나서게 되고 또 끝내 남게 된 ‘소리꾼의 내력’이다.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와 유신체제 찬반 국민투표

긴급조치 1호와 4호가 발동된 1974년의 정세는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의 목숨을 건 반독재 투쟁과 더불어 언론이 긴 침묵을 뚫고 자성(自省)과 더불어 직접적인 행동에 나선 시기이다. 1974년 10월, 권력의 압력에 굴종한 언론의 보도태도에 불만을 품은 대학생들이 동아일보사 앞에서 ‘언론 화형식’을 벌이자, 기개있는 일단의 기자들이 이에 호응, 10월 24일 자유언론수호대회를 열어 결의문을 채택하고 그 결의문을 신문에 게재함으로써 언론자유 투쟁의 막이 올랐다.

당황한 박정희 유신정권은 동아일보의 광고주들을 불러내 광고를 내지 못하도록 회유·협박하였고, 광고주들이 계약을 철회함으로써 12월 26일부터 급기야 광고 지면이 백지 상태로 나가게 되었다. 궁여지책으로 격려 협찬광고를 모집하는 광고를 내자 예상 밖으로 국민들의 격려 광고와 성금이 물밀 듯이 답지한즉, 이것이 바로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의 전말이다.

▲백지 상태의 동아일보 광고 지면(1974년 12월 16일자 동아일보)

국민적 저항에 부딪친 박정희 정권은 해가 바뀌자 다시한번 국민 여론을 호도할 목적으로 1975년 2월 12일 ‘유신체제 찬반 국민투표’를 계획한다. 나는 유신체제를 반대하고 국민투표를 무산시킬 ‘문화적’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 근대 유럽의 사회사상가들이 발굴한 천부인권(天賦人權)으로서의 ‘시민불복종’ 개념을 찾아냈다.

그렇지! 투표에 참가해서 반대표를 던진다 한들 어차피 부정선거와 허위 통계로 찬성 가결될 것은 뻔한 일... 차라리 국민투표 거부운동, 불참운동을 벌이자! 그런데 투표 거부운동, 불참운동을 국민들에게 홍보하려면 어떻게 하지? 옳지, 동아일보 백지광고난에 ‘국민투표 거부 시민불복종 행동’ 문안을 광고하자. 허나 그것만으로 일이 될까? 문화적인 어떤 행동이 필요하지 않을까?

오호라, 국민투표가 행해지는 그 시간에 우리는 명동성당 문화관에 모여 하루종일 공연판을 벌이는거야. 투표를 거부하고 불참할 사람은 그 시간에 명동성당 문화관으로 모여라!

이리 생각하고 바로 기획 작업에 들어갔다. 기획의 내용은 두 가지. 하나는 국민투표 당일 10시간 가까이 벌여야 할 공연의 내용을 섭외하고 준비하는 일, 다른 하나는 적절한 날짜에 동아일보 백지광고난에 ‘시민불복종 문화행동’에 관한 광고를 싣는 일.

그래서 한편으로는 내가 접촉할 수 있는 연극패와 탈춤패, 춤패, 음악패 등을 총동원해서 연습에 돌입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배들을 접촉하여 광고는 물론 기사가 날 수 있는 방안을 찾아 여러 갈래로 노력했다. 보도까지는 성사가 안 됐지만, 국민투표 사흘 전에 동아일보 백지광고난에 ‘시민불복종 문화행동’ 광고를 게재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문화공연 준비를 한영숙 선생님 무용전수소를 빌려 진행하고 있었다. 한영숙 선생님은 승무·살풀이춤의 인간문화재로, 그 수제자가 이애주였다.

행사를 이틀 앞두고 신설동 무용전수소 3층에서 한참 종합연습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박차고 잠바 입은 사내들 십여명이 쳐들어왔다. 동대문경찰서 형사들이었다. 그들의 강압에 일렬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현관 앞에 호송차가 뒷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동대문경찰서로 끌려가 신원조사들을 마친 후, 나와 애주 누님만 남기고 다른 참가자들은 모두 훈방되었는데, 밤 늦게 어떤 중년의 부인이 오셔서 주모자인 나를 크게 야단치시고는 덜 주모자인 ‘연습장소 제공책’ 이애주를 마저 데리고 나가셨다(그 분이 애주누님의 어머님으로 후에 나의 장모님이 되셨다).

나는 이틀 밤낮을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국민투표가 거의 끝나가는 시간에 훈방되었다. 명동성당을 가보니 아무도 없고 문화관 문은 닫혀있었다.

1975년 2월 12일 내가 계획한 ‘국민투표 거부 시민불복종 행동’은 내가 본격적으로 시도한 최초의 ‘문화운동’이었다. 그 자체로는 성사조차 안되고 무산되었지만, 실패로 끝난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한 여러 노력들의 총화로 국민투표 실시 바로 사흘 뒤인 2월 15일 긴급조치 1호와 4호 구속자들이 대부분 가석방되는 일단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석방되어 풀려난 김지하와 환영하는 지인들(1975. 2. 15. 동아일보)

여기서 일단 1970년대 전반, 탈춤과 연극이 조우하여 마당극을 창출했던 이른바 ‘문화운동 1세대’의 만남과 어울림에 관한 추억을 마치고자 한다.

이어진다면 정권진 명창님께 처음 판소리를 배우던 때의 광경, 첫 직장 대한항공(KAL)에 입사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표를 내게 된 경위, 블랙리스트를 뚫고 어렵게 중앙일보·동양방송(TBC-TV)에 입사하여 제작부→편성부→심의실로 밀려난 정황, 이화여대 문리대 연극부 누이들과 함께 한 신선한 마당극 실험, 김민기가 심혈을 기울여 창작한 노래굿 ‘공장의 불빛’ 이야기, 70년대 후반 불길같이 번진 탈패‧풍물패의 활약과 노학(勞學)연대 노동문화운동의 파장, 전라도 광주의 놀이패 '광대' 결성과 ‘돼지풀이 마당굿’ 공연, 제주 놀이패 ‘한라산’의 독특한 마당굿 작품들, 그리고 독재자 박정희를 시살한 김재규와의 숨겨져 있던 인연, 1980년 TBC가 KBS로 통폐합된 후 국풍81 참여를 거부하고 타의반 자의반 피신한 상황, 무엇보다 광주 민중항쟁의 핵심인물로 ‘소리내력’을 강창한 또 한 사람의 광대 윤상원에 관한 추억 등... 

▲2019년 12월, 인사동 ‘미술세계’ 화랑에서 열린 김봉준 화백의 전시회 축하 자리에서 오랜만에 <소리내력>을 강창하는 광대 임진택의 모습 ⓒ임진택

이번에 못다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1970년대 후반 민중문화운동에 관한 단상(斷想)'이라는 제목으로 이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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