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제일교회에서 시작된 기독교 문화운동의 현장
1972년에서 1973년으로 넘어가는 그 겨울에 나는 서울제일교회와 새문안교회의 청년부 대학생들과 만나 연극작업을 하게 된다. 그 작업은 홍세화 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간 세화형을 한동안 못 만났는데, 어느날 그가 제일교회 청년부 대학생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말을 꺼냈다.
교회 대학생들을 데리고 연극을 만드는 것은 너무 아마추어적인 수준이 될 것 같아서 마땅치 않았지만, 세화형이 각색도 하랴 연출도 하랴 힘이 부칠 것 같아서 일단 도와주기로 했다.
세화형이 택한 작품은 윤정규 작 ‘장렬한 화염’이었는데,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노동자의 분신(焚身)을 연상시키는 작품이었다.
제일교회는 퇴계로 근처 오장동에 자리잡고 있는 개척교회로 그 책임목사가 박형규 목사님이셨다. 시멘트로 지어진 교회 건물은 아주 낡았고, 본당으로 쓰는 좁은 공간 자체가 반듯하질 못했다. 자연주의(사실주의) 양식으로 각색한 이 작품의 무대로 쓸만한 공간마저 없어서 박 목사님은 자신이 사용하는 신성한 연단 자리를 무대로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
그처럼 낙후한 조건에서의 아마추어 공연이었지만, 공연의 열기와 관객의 반응은 나 자신도 놀랄만큼 대단히 뜨거웠다. 이 열기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하, 현장성! 그리고 주체성! 그 곳은 젊은 청년신도들이 교회의 사명에 대해 치열하게 고뇌하는 현장이었고, 남이 보여주는 공연이 아니라 드물게 자기들 스스로 참여해서 만들어가는 공연이었다. ‘미적 성취’ 혹은 ‘미적 감동’이란 것이 극장 조건이나 무대 시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는 순수한 열정(熱情), 나아가 어떤 본원적인 기세(氣勢)에 있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그런데 얼마 후 이번에는 새문안 교회 청년들이 자기네들도 연극을 하고 싶으니 맡아달라고 부탁이 왔다. 제일교회에서의 감동을 목격한 청년들이다. 그들은 박태순 원작 ‘무너지는 산’이라는 작품을 선택해 각색·연출해주기를 원했다. 이 작품은 얼마 전 주민 폭동으로까지 치달았던 광주(성남) 대단지사건을 다룬 작품이었다.
새문안교회는 제일교회에 비해 무척 보수적이고 완고한 분위기여서 교당 안에서 사회성 짙은 작품을 공연한다는 것이 무척 까다로웠으나, 참여한 대학생들의 사명감과 성취감은 제일교회 못지 않았다.
서울제일교회와 새문안교회의 청년 대학생들은 이후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사회운동과 문화운동의 주축으로 성장한다. 우리가 잘 아는 고(故) 김경남 목사와 풀빛 나병식 동지가 바로 그 무렵의 기독 청년 학생들이다.
모순과 실천이 범벅된 ‘반공법 사건’
1973년 4월에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나는 휘경동에서 작은누나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늦게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놀란 눈으로 알려주시기를, 아까 낮에 형사 둘이 찾아와서 내 방을 뒤지고 무슨 공책을 한 권 갖고 갔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공책 찾으려면 내일 남대문경찰서로 나오라고 했단다.
방에 들어가 살펴보니, 없어진 공책은 며칠 전 친구 김민기로부터 빌려온 공책인데 그 안에 마오쩌뚱(毛澤東)의 ‘모순론’과 ‘실천론’이 번역되어 있는 노트로, 원 임자는 문리대 정치학과 손학규 선배였다. 그 노트는 정치학도 손 선배가 전공과목의 일환으로 번역·기록해놓은 것으로, 김민기가 빌려보고 있던 것을 내가 발견하고 다시 빌려온 것이었다.
나는 나 자신 외교학도로서 ‘모택동 연구’는 전공과목의 일환이므로 별 걱정 안하고 다음날 남대문경찰서로 공책을 찾으러 자진 출두했다. 그러자 담당형사는 대뜸 그 공책이 누구 것이며 무슨 내용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제서야 본능적으로 형사들이 노트 내용 갖고 시비를 걸려고 하는 것을 느끼고 일단 군대 가있는 다른 친구 이름을 댔다. 그랬더니 이 자들이 알았다며 순순히 나를 내보내면서 내일 다시 출두하란다.
경찰서를 빠져나온 나는 바로 그 길로 줄행랑을 쳤다. 내가 도망치면 김민기나 손학규 선배를 그들이 알아낼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마침 조직휘라는 친구가 이화여대 앞에 음악감상실을 차린다고 얻어놓은 홀이 있어 거기 가서 며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 생각지도 않은 김민기가 내가 숨어있던 장소로 나를 찾아왔다. 깜짝 놀라 반갑게 맞은즉 그 뒤로 형사 둘이 따라붙어 있었다. 민기와 나 두 사람은 남대문경찰서로 붙들려가 노트의 입수 경위를 조사받았고, 결국 노트의 원 임자인 손학규 선배(당시 송정동 판자촌에서 쪽방 생활을 하면서 빈민운동에 종사하고 있었다)도 붙잡혀왔다. 그리하여 손 선배는 불온서적 소지·유포·탐독 혐의로 기소되었고, 민기와 나는 다행히 불기소로 풀려나왔다.
집에 돌아와보니 근처 이문동 살던 큰누나 하는 말이 형사들이 선처해주겠다며 돈을 요구해서, 없는 살림에 큰 돈을 뜯겼단다. 형들이 많아 형편이 나은 김민기는 몇 배 더 뜯겼단다.
공교로운 것은 원래 형사들이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은 부활절날 남산에 뿌려진 반(反)유신 유인물 때문에 투망수사를 하던 과정이었는데, 유인물 배포의 주동 인물은 다름아닌 서울제일교회 박형규 목사이셨고, 손 선배는 박 목사님이 주도하시던 도시빈민선교 일환으로 송정동 판자촌에 기거하면서 빈민운동 실천 중이었으며, 손학규가 투망에 걸림으로써 부활절 사건 주모자인 박 목사님까지 들통이 난 것이었다.
구속 기소된 손학규 선배는 1심에서 반공법으로 징역 10개월의 유죄 판결을 받아 복역하면서 항소하여 2심에서 결국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그간 8개월 동안이나 애꿎게 생으로 옥살이를 했으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모순과 실천이 범벅된 모택동 ‘모순론·실천론’ 노트 사건은 불온서적 소지·탐독을 이유로 기소되어 재판받은 반공법 사건으로는 분단 이후 최초의 사례로 기록된다.
탈춤과 결합한 최초의 농촌계몽 마당극 <진오귀 – 청산별곡(靑山別哭)>
나의 불찰로 인해 애꿎은 선배가 옥살이를 하고, 숨겨야 할 어른이 들통났다는 사실에 나는 한동안 그 죄책감과 민망함을 견딜 수 없었다. 복학은 해놓았지만 학년이 틀어지는 바람에 수업도 잘 안되고 해서, 나는 그 괴로운 사연을 원주의 김지하 선배에게 편지로 알리며 조언을 청했다. 그랬더니 김 선배로부터 즉각 답장이 왔는데, 원주 카톨릭 교구가 농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순회연극을 준비하고 있으니 당장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휴학원을 내고 원주로 달려갔다. 김 선배는 황폐해가는 농촌문제 · 농업문제 · 농민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한국사회 본래의 모습이자 미래의 모습이라는 확신에서 농촌 협업운동을 전개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위해 농촌을 순회할 계몽연극을 만들되 그것은 탈춤과 연극이 결합된 ‘마당극’이 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제목은 진오귀! 우리 전통굿에 나오는 ‘귀신 누르는 굿’이다.
김 선배는 우리 농촌을 피폐시키고 농민을 괴롭히는 못된 귀신을 ‘소농귀’ ‘수해귀’ ‘외곡귀’로 설정하여 탈판을 구성하고, 소농·중농·대농 세 부류의 농민층이 갈등하는 장면은 신파적 자연주의로 처리하고, 협업으로 함께 농촌공동체를 일구어가는 과정은 풍물굿 농악으로 표현해내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마당극’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처음 시도한다는 자부심에 기꺼이 원주에 기거하면서 출연배우로 연습에 가담했다.
한달쯤 지난 무렵, 연습장에 나온 김 선배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순회공연 계획이 무산될 것 같다고 말을 꺼냈다. 그 무렵이 가톨릭농민회가 막 태동하는 시기였다고 기억되는데, 논의의 핵심은 농촌문제가 협업과 협동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단계에 와있다는 문제였다. 우리 사회는 싫든 좋든 이미 농촌사회에서 노동사회로 옮겨가는 중이었고, 농민들의 협업·협동은 관행적인 계몽용어일 뿐 실제로는 농촌문제 해결의 관건이 못된다는 우려였다.
김 선배는 고심 끝에 ‘진오귀’의 연습 중단을 선언했다. 시대 상황의 여건 때문에 농촌계몽 작품을 보류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나는 그 작품으로 마당극 양식실험이라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와 곧바로 문리대 연극회에서 공연하는 것을 추진했으나 역시나 학교 당국의 허가는 나지 않았고, 해서 나는 제일교회 박형규 목사님을 찾아뵙고 교회 청년들과의 작업을 허락해주시기를 요청했다. 박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흔쾌하게 승낙하셨다.
제일교회에서 작품을 준비하면서 작품의 제목을 <청산별곡(靑山別哭)>으로 바꾸게 되었다. <진오귀>라는 제목이 사람들에게 생경했으므로, 곡조 곡(曲)자 대신에 곡할 곡(哭)자로 바꾸어 ‘농민들의 통곡소리’라는 주제를 담은 제목으로 바꾼 것이다.
나는 판소리 도창(導唱) 해설자 역할에 작품의 기획과 연출까지 맡는 1인 3역의 역할을 맡았다. 말이 판소리 도창이지 아직 판소리를 배운 적이 없었으므로 그냥 장단에 얹어 큰소리로 읊어나가는 정도였지만, 어떻든 그만한 기량을 가진 배우는 그 당시에 나 말고는 없었다.
마당극 <청산별곡>에서 가장 큰 성과를 낸 부분은 이른바 ‘도깨비 마당’이었다. 소농(小農) · 수해(水害) · 외곡(外穀)으로 분류한 각 도깨비의 성격을 나타내는 큰 탈을 쓰고, 운문화된 불림사설을 외친 후 장단에 맞춰 춤동작으로 표현한 마당인 바, 이는 최초의 ‘창작탈춤’이라 할 획기적인 시도였다.
<청산별곡> 마당극이 공연된 날짜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거룩한 성탄절에 제일교회에서는 본당 연단까지 치워놓고 한바탕 마당판을 벌인 것이다.
1973년말은 유신독재를 반대하는 국민 저항이 부글부글 끓고 있던 시기였다. 돌아보면 그 무렵의 대표적인 문화집회로 12월 26일 을지로 입구 흥사단 대성빌딩에서 열린 ‘항일 민족문학의 밤’을 들 수 있다. 장준하 선생이 주도하고 백기완 선생이 앞장서서 ‘개헌청원(유신헌법철폐) 100만인 서명운동’ 화살을 쏘아올린 정치적 문화집회이다(이에 놀란 군사독재정권은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한다).
그 바로 전날, 퇴계로 5가 박형규 목사가 계시는 제일교회에서는 ‘마당극’을 표방한 또하나의 문화집회가 있었던 셈이다(이 행사는 긴급조치 4호에 긴밀히 연계된다). 이 날 김지하 형이 특별히 모신 손님 중에 리영희 선생님(‘전환시대의 논리’라는 책으로 젊은이들의 의식을 일깨워주신 ‘시대의 스승’)이 오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날 제일교회 마당극판 전후에 또다른 비밀스런 일이 진행되었다. 며칠 전 지하 형이 묻기를, “일본인 기자가 한국의 반독재 학생운동에 관해 취재하고 싶어 하는데 누가 좋을까?” 해서 전후관계를 따져보다가 유인태로 낙착이 된 바, 인태 형에게 어렵사리 연락해서(그 당시는 핸드폰은커녕 집전화도 없던 때이다) 마당극 공연하는 날 제일교회로 구경 오기로 약속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인 기자 두 명이 크리스마스 이브 날 제일교회로 와서 마당극을 구경한 후 유인태와 따로 인터뷰를 한 바, 마침 일본어를 잘 아는 조직휘 친구가 어울려 있다가 통역으로 동석하게 되었다. 이 만남은 일본 잡지사 기자와의 단순한 언론 인터뷰였을 뿐인데, 이 회동이 몇 달 후 돌발한 긴급조치 4호 민청학련 사건에서 일본 국제공산당과의 접선으로 둔갑한다.
우연히 통역에 끼었던 조직휘가 민청학련 사건이 난 후 중앙정보부의 협박에 겁먹고 군법회의 재판정에서 놈들 시키는대로 사실과 다른 허위증언을 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각설하고, 그 날의 공연은 당시 침체된 정세 현실에서 꽤나 흥청거리는 분위기로 진행되었던 터라, 나로서는 김지하 선배로부터 칭찬은 아니더라도 수고했다는 격려는 들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결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뒷정리하느라고 부산한 중에 김 선배가 갑자기 정색하고 나를 비판하는 것 아닌가?
“한목, 이걸 작품이라고 하냐? 이건 연출(演出) 부재(不在)야.”
뜻밖의 힐난에 당황한 나는 어쩔줄 몰라하며 구차하게 변명을 했다.
“아, 이건 원주에서 연습할 때 ‘두목님’ 연출하신 그대로 배워서 한 건데요.”
그러자 김 두목(?)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더니 이렇게 질책했다.
“마당이 없잖아. 마당의 미학(美學)이 없어. 둥글게 앉아있다고 마당이 아냐. 선수(船首)가 있고 선미(船尾)가 있어야지. 배가 떠야지, 그래야 역동할 거 아냐?”
그러고 보니 김지하는 미학과(59학번)였고, 나는 외교학과(69학번)였다.
나의 역량 부족으로 인해 마당극 <청산별곡>은 ‘미학적으로’ 완성된 작품이 못되었으나, 채희완(미학과 70학번, 원래는 68학번) 형이 안무한 ‘도깨비 마당’만큼은 예상 밖으로 큰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봉산탈춤 먹중과장을 변용하여 창작한 ‘도깨비마당’의 탈과 춤사위은 70년대 후반 ~ 80년대 초반 대학가 창작탈춤의 선구(先驅)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어떻든, 그리하여, 제일교회에서 공연된 농촌계몽극 ‘청산별곡(원제 진오귀)은 한국연극사에 있어 최초의 ’마당극‘으로, 소농귀 ‧ 수해귀 ‧ 외곡귀 세 마리 도깨비탈춤은 최초의 ’창작탈춤‘으로 기록된다.
탈춤에 바탕한 최초의 음악극(가무극) <소리굿 아구>
70년대 초 탈춤반이 태동하면서 탈춤, 연극, 노래, 국악, 춤 등 인접 장르의 몇몇 사람이 자주 만나게 되었다. 탈춤에는 채희완이 있었고, 연극에는 임진택과 김석만이 있었고, 노래에는 김민기가, 국악에는 김구한 ‧ 이종구 ‧ 김영동이, 그리고 춤에는 이애주가 있었다.
그 중 김구한 형이 좀 독특한 사람이었다. 66학번쯤 되는 연배로 원래는 국립국악원 계통인데, 음대를 다니다가 우연히 흙공예를 접하고 미대로 전학한 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후배 김민기를 만났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 미대생이면서 음악에 재질이 있는지라, 둘이서 가깝게 지내다보니 국악 쪽의 이종구와 김영동, 연극‧탈춤 쪽의 임진택 채희완 이애주까지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말하자면 김구한 형을 통해 음악 하는 이종구 형과 김영동을 알게 된 셈인데, 김구한은 이후 도예(陶藝)쪽으로 눈을 돌려 경기도 이천에서 도자기 공방을 운영하다가 만년에는 ‘즈엄집’이라고 하는 도자기 형태의 큰 집을 굽는 엄청난 작업을 시도하게 된다.
이종구 형도 66학번쯤 되는 연배로 원래 서양음악 작곡을 전공한 학도인데, 학창 시절부터 국악 작곡에 남다른 관심과 재질을 보인 인물이다.
이종구 형의 음악작업에 내가 찬조 출연한 첫 계기는 그의 대학 졸업작품 발표회 때였다. 그가 만든 작품의 제목이 ‘동학’이었고, 양식은 합창 형식 ‘칸타타’였다. 그 시절 그 연배에 ‘동학’에 관심 가지고 있었다는 자체가 만만치 않거니와, 그가 나한테 주문한 것은 합창 말고 그 안에 들어있는 외침을 판소리 조(調)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당시는 내가 판소리를 정식으로 배우기 전이므로 그의 작품에 내 기량이 음악적으로 미흡했을 터이지만, 연극적으로는 작품 효과에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자부한다.
이 날 이종구 형의 졸업작품 발표회를 구경한 ‘문화운동 1세대’들이 일종의 평가를 곁들인 뒷풀이를 하던 중 ‘아침이슬’의 작곡가 겸 가수로 이미 역량이 알려진 김민기가 획기적인 제안을 꺼냈다. 우리 힘으로 음악극을 하나 만들어보되, 탈춤과 국악을 엮어서 전통에 바탕한 새로운 ‘소리굿’을 한번 시도해보자는 것이었다.
김민기의 제안에 역시 창작욕이 넘치던 이종구 형이 적극 찬성했고 다양한 논의가 오간 결과, 당시는 시국 문제에 관련하여 공연윤리위원회의 규제가 심하던 때라, 공연윤리 심사를 거치지 않고 공연하자면 개인발표회 명분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공연 명분을 ‘이종구 작곡발표회’로 세우고, 1부에는 이종구 작곡의 가곡(歌曲)들을 연주하고, 2부에는 ‘소리굿’ 한판을 새로 짜기로 의기투합하였다.
‘소리굿 아구’는 남사당 덧뵈기 탈놀이 중 먹중과장을 원용해서 현재의 이야기를 담아보려는 착상에서 출발한다. 이는 봉산탈춤 노장과장의 전개와도 흡사한데, 남사당 덧뵈기에서의 등장인물은 노장, 피조리(소무) 1, 2. 그리고 취발이 이렇게 4명이다.
줄거리는 매우 간단해서 늙은 노승이 피조리 2인을 데리고 희롱하면, 젊은 취발이가 나와서 노승을 물리치고 여인들을 되찾는다는 내용이다. 이는 노승의 위선적 행동과 봉건시대의 축첩제도를 풍자하면서, 한편으로는 ‘젊음이 늙음을 물리치는’, ‘여름이 겨울을 몰아내는’ 근원적 주제를 담고 있다고 해석되고 있다.
우리는 덧뵈기 탈놀이 구조를 오늘날(1970년대)로 이입해서 한일관계를 풍자하는 내용으로 각색하기로 했다. 그 당시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경제적 침략이 노골화되고 있던 시기로, 특히 ‘기생관광 - 섹스관광’이라 일컬어지는 퇴폐적 관광사업이 국가의 묵인하에 성행하고 있던 시절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당시의 한일관계나 경제 조건이 그런 정도로 부끄러운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노장은 일본 관광객 쪽바리 사장으로, 피조리1은 피해받는 마산공단 여공으로, 피조리2는 허영에 빠진 철부지 여대생으로, 그리고 취발이는 패기있는 한국청년 ‘아구’로 대체해서 작품을 짜기로 합의하였다. 극본은 창작욕이 넘치던 김민기가 책임지고 쓰기로 하고, 작곡은 이종구가 맡기로 해서 본격 작업에 들어갔다.
1974년 3월 어느날 장충동에 신축된지 얼마 안되는 국립극장 중극장(500석 규모)에서 <이종구 작곡발표회>가 열렸다. 당시의 정세는 앞서 언급했듯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의 기운이 높아져가던, 살벌하면서도 긴장된 시기였다. 공연장이 ‘국립’ 극장이어서 행여 대관이 취소되기라도 하면 낭패인지라 더욱 조심스러웠다.
그 날 두 번의 공연이 펼쳐진 바, 관객은 두 번 다 전석 만원(滿員)이었다. 1부에서 이종구가 작곡한 몇 개의 노래와 연주를 선보였는데, 그 중에서 압권은 김지하의 시(詩)를 이종구가 작곡하여 김민기가 부른 ‘빈 산’이라는 노래였다. 나는 2부 ‘소리굿 아구’에 쪽바리 사장으로 출연하는지라, 일본전통극 노(能) 분장을 한 채 무대 한쪽 편에 대기하고 있으면서 ‘빈 산’ 노래를 들었는데, 그 가사와 곡조가 어찌나 절절하던지 내가 곧 출연할 배우라는 것도 잊고 두 번 다 그 노래에 빠져들어갔었다.
지금 생각하면 곧바로 닥쳐올 긴급조치 전야의 적막(寂寞)같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민기가 노래를 끝내고 들어온 후에도 나는 한참이나 감흥을 추슬러야 했다.
김영동을 위시한 연주단의 반주가 시작되면서 ‘소리굿 아구’ 공연이 시작되었다.
"이애주가 여공 역을 맡아 ‘가난하고 순박한’ 춤을 추며 등장하면, 거기에 채희완이 여대생을 맡아 여장(女裝)을 하고는 ‘사치스럽고 교만한’ 춤을 춰대며 등장한다.
여공과 여대생이 각기 자기의 처지와 생각을 춤으로 표현하여 대조되면서 두 여성의 사회적 관계가 표출된다.
여기에 임진택이 기생관광차 한국에 온 왜놈 쪽바리 사장을 맡아 커다란 게다짝을 신고 등장한다. 여공과 여대생을 발견한 쪽바리 사장이 두 한국여성을 꼬시려고 온갖 돈과 수표를 꺼내들고 유혹하면, 처음에는 거부하던 여공과 여대생이 점차 돈에 홀려 쪽바리에게 조종당한다.
이때에 김석만이 호기로운 한국청년 아구 역을 맡아 등장하여 쪽바리를 발견하고 분이 나서 야단친다.
쪽바리 사장이 가소롭다는 듯 비웃으며 노래 한 곡을 뽑는데, ‘마라데스’라는 신곡(新曲)이다.
마라데스 마라데스 웃기지 좀 마라데스
산 너머노 물 건너노 좃센 땅으로 들어올 때
와따꾸시가 골이노 비어
알몸으로노 왔겠데스까? (추임새–요오씨!) .....
분통이 터진 한국청년 아구가 왜놈 쪽바리를 혼내주려고 결투를 신청하니, 아구와 쪽바리 간에 맞대결이 펼쳐진다. 아구는 두 주먹 불끈 쥐고 두 다리 번쩍 들어올리며 힘찬 동작으로 공격하고, 쪽바리는 졸망졸망 손춤에다 촐랑거리는 게다짝 걸음으로 얄밉게 응수한다.
승부가 가려지지 않자 잽이(연주자)가 개입하여 비나리 고사(告祀)부터 올릴 것을 권하니, 아구가 잽이들 도움을 받아 비나리로 기운을 모아 청중들 기운까지 합세시켜 하늘께 고하고 힘차게 왜놈 쪽바리를 물리친다."
이런 식으로 한판 전개된 ‘소리굿 아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관객의 반응이 대단했다. 탈춤에 바탕한 음악극으로 ’소리굿‘이라는 장르를 표방하고 내놓은, 당시로서는 너무나 파격적이고 신선한 시도였기 때문이다. 이애주의 여공춤, 채희완의 여대생춤, 임진택의 마라데스춤, 김석만의 아구춤... 여기에 이종구의 작곡과 김영동의 연주... 거기에 또 이 작품을 기획하고 극본을 쓰고 뒷일까지 맡은 김민기의 노래...
후에 민중문화운동 ‧ 민족문화운동의 문화패 후배들은 ‘소리굿 아구’ 공연에 참가한 이들 선배들을 ‘문화운동 1세대’라 칭하게 된다.(계속)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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