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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벽두 강타한 두 개의 사건, 김지하의 오적(五賊)과 전태일의 분신(焚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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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70년대 벽두 강타한 두 개의 사건, 김지하의 오적(五賊)과 전태일의 분신(焚身)

[탈춤과 나] 임진택의 '탈춤과 마당극' 1

1970년대는 정치사회사적 관점에서 보면 군사독재권력에 대한 부단한 저항의 시대이자 노동·인권을 향한 최초의 자각이 생겨난 시대였고, 언론의 관점에서 보면 자유언론 쟁취를 위한 고단한 싸움이 시작된 시대였으며, 문화예술사적 관점에서 보면 탈춤을 비롯한 민속부흥운동의 시대, 다시말해 ‘우리문화 찾기운동’의 시대였다.

이 말을 뒤집어 살펴보면 1970년대는 군사독재권력의 횡포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고, 근대화·산업화의 명분 앞에서 노동과 인권은 무시당하던 시기였으며, 동아·조선 등 유력 신문사들은 독재권력의 협박에 진실을 외면하고 있던 시기였고, 문화적으로는 일제의 잔재를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미국을 위시한 서양 외래문화(소위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 빠져들어가던 시기였다.

그러한 시대, 내가 겪었던 몇가지 사건을 기억해보고자 한다.

대학 입학 - 우연히 연극에 입문하다

어떤 평론가가 1970년대 벽두를 상징하는 두가지 역사적 사건으로 ‘김지하의 오적 필화사건’과 ‘전태일의 분신사건’을 꼽은 적이 있다.

김지하 시인은 젊은 시절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선배이다. 1969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외교학과에 입학해서 1학년 교양과정부에 소속되어 있던 때, 나는 동숭동 문리대 교정에 갔다가 우연히 연극전용 시청각실에서 ‘문리대 연극회’가 공연한 ‘혈맥’이라는 연극을 구경했는데, 대학 재학생 출연진만으로 꾸려진 그 연극이 내용과 수준에 있어 매우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작품의 연출자가 59학번 문리대 미학과 출신의 김지하였다.

‘혈맥’은 해방 이후 전개된 한국연극사에서 국내 작가의 자연주의(시간과 공간의 순서에 따라 사건을 전개하는 희곡 작법의 한 방식) 계통 희곡으로는 최우수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실은 서울대 문리대 연극회가 그 작품을 레파토리로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획기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각 대학 연극반 풍토는 번역극 위주의 공연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연극이 그렇게 재미있는 장르라는 것을 알게 된 나에게 뜻밖의 기회가 주어졌다. 교양과정부가 끝나갈 무렵인 1학년말, 연극을 좋아하고 자랑하던 어떤 친구가 나에게 연극을 한번 같이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권해왔다. 그렇지않아도 연극에 흥미를 처음 느끼게 된지라 뒷일이라도 하면서 끼어보려고 응했는데, 그 친구는 서양연극에 더 관심이 많았고 기획도 담대해서 서울대만이 아니라 이화여대·서강대 학생들까지 접촉하더니 ‘범대학연극연구회’라는 것을 출범시켰다. 그리하여 1970년초 준비한 첫 작품이 희랍 비극 ‘박코스의 여신도들’(에우리피데스 作)이었고, 초빙된 연출자는 당시 신예로 부각되던 이승규 선생이셨다.

마땅한 뒷일도 없고해서 의상·소품 구하는 일이나마 어슬렁거리며 돕고있던 나에게 뜻밖의 기회가 온 바, 배역을 맡았던 한 친구가 갑자기 사정이 생겨 대타를 뽑아야 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맡게된 배역이 ‘티레시아스’라는 예언자 역할이었다. 티레시아스라는 인물은 희랍비극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전형적인 ‘눈 먼 늙은 예언자’로서, 나의 첫 연극 작품에서 내가 맡은 배역이 ‘비극적 운명을 예감하는’ 티레시아스였다는 사실은 10년 후인 1980년 광주에서의 처절한 민중항쟁에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약하다 산화한 윤상원의 역할을 운명적으로 반추(反芻)하게 한다.

앞서 어떤 평론가가 지적했듯 1970년대 벽두에 두 개의 사건이 발생했다. 하나는 문화·정치적 사건이었고 하나는 사회·정치적 사건이었다.

1970년 5월, 김지하의 담시(譚詩) 오적(五賊)이 사상계(思想界)지에 발표될 때만 해도 그것은 문학적 돌발(突發)이고 문화적 도발(挑發)이었다. 그러나 그 작품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사상계’ 잡지가 압수를 당하고, 민주당 기관지인 ‘민주전선’이 이를 다시 전격 공개함으로써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폭발·비화하였다.

▲<사진1> 오적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재판받는 시인 김지하, 사상계 대표 부완혁, 편집인 김승균. 이 사건으로 폐간조치되어 마지막 호가 되고만 ‘사상계’ 1970년 5월호. 

그 시대 만약 우리에게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 창작‧표현의 자유, 출판의 자유가 있었다면 정치풍자 담시 ‘오적’은 문학적 혹은 문화적 도발에 국한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에게는 그같은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김지하의 창작 행위는 권력자들에게 독재탄압에 저항하는 언론적 도발행위로 비쳤고, 급기야 작가는 정보기관에 붙들려 끌려가고 ‘사상계’와 ‘민주전선’은 압수·폐간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우리는 문학과 예술이 본래 언론의 기능을 담지하고 있으며, 평화시에는 잠재해 있다가 유사시에 돌출해 나온다는 불멸의 진리를 간파할 수 있다. 그 좋은 예로, 케이블TV Arte채널에 전원경이라는 미술사가(美術史家)가 등장하여 ‘명화에 담긴 역사’를 주제로 강의하는 내용이 있는바, 요약하면 “서양미술사에서 ‘그림’은 사진이 없던 시기의 증거기록이며, ‘그림’ 속에는 당대 엄청난 사건에 대한 보도·비평 관점이 숨겨져있다”는 취지이다.

시위(示威)의 계절, 학과 수업보다 시위와 연극에 빠지다

1970년 2학년이 되어 동숭동 문리대로 등교한 내가 학교 부근에 머무른 시간은 외교학과 강의실보다 연극회실과 학림다방에 드나든 시간이 더 많았을 터이다. 학기 초부터 ‘삼선개헌 반대’다 ‘교련 반대’다 해서 크고작은 집회와 시위가 이어지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휴강이 잦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학과 수업에서 일부 교수들로부터 배우는 내용과 방법론에 심각한 의문을 갖게된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한마디로 주체성의 결여(缺如)였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서울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부 외교학은 강대국 입장의 국제정치론을 그대로 이식·전달하는 매판(買辦)지식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러한 내용들은 약소국가 외교 공무원이 알아두어야 할 일종의 보신(保身) 지침일 수는 있겠으나, 분단의 현실을 인식하고 민족 주체의 진정한 독립과 자주 통일을 모색하는 방향과는 맞지 않았다.

▲<사진2> 삼선개헌을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 ⓒ(사진 : 한국민족문화대사전)

그러던 중 문리대 연극회장이 무슨 정보를 접했는지 임진택을 열심히 찾아 연극회 가입을 권유했고, 심지어는 나를 앞으로 연극회장을 맡아할 기대주로 추켜세우는 통에, 순진한 나는 책임감을 못 이기고 넘어가고 말았다.

당시 문리대 연극회가 내세운 방향성은 ‘창작극’이었다. ‘창작극’은 ‘번역극’의 반대되는 개념이다. 말하자면 연극이란 것이 우리 현실문제를 담은 우리의 이야기여야지 현실과 동떨어진 남의 나라 관념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야 되겠느냐는 문제의식이었다. 이는 전국의 각 대학 연극반에서 행해지고 있던 번역극 위주의 풍토를 질타한 선도적인 방향성이지만, 그 시도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국내 작가의 창작 수준이 세계연극사에 빛나는 명작들의 품격과 완성도를 따라잡기 쉽지 않은 상황인지라, 연극계는 대체로 창작극 부재(不在)라는 한계를 감내할 수 밖에 없던 때였다.

그런 중에도 서울대 문리대 연극회는 김영수의 ‘혈맥’을 비롯해 김동식의 ‘유민가’, 천승세의 ‘만선’ 같은 자연주의 계통의 수작들을 발굴하여 공연하였고, 나는 1970년 봄 오영진의 사회풍자극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에, 가을에는 조동일의 사회풍자극 ‘허주찬 궐기하다’에 배우로 출연하여 참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때마다 내가 맡은 역은 예외없이 노인 역이었다. 연극 배역에서 젊은 주인공은 못되고 노인 역할에 적합하다는 것은 언뜻 좀 민망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단 두 편의 연극 출연으로 대번에 문리대의 명배우(?)로 소문이 났다. 그 평을 취합하면, “임진택이 등장하면 재미없던 연극도 대번에 재미있는 연극으로 변한다”는 것!

배우로서 이보다 더한 찬사를 받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그러한 나의 ‘끼’가 통상의 연극배우와는 다른 ‘마당극 광대’ 나아가 ‘판소리꾼’으로서의 소질과 재주를 예비한 것이었음을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문리대 연극회에서 대선배 김지하를 만나다

1970년 가을, ‘허주찬 궐기하다’ 연습을 하고 있던 중 뜻밖에 김지하 선배가 문리대 연극회실을 찾아왔다. 김 선배는 전년에 후배들을 데리고 ‘혈맥’을 연출하여 공연한지라 대다수 회원들이 잘 알고 있었고, 특히 몇 달 전 ‘오적’ 필화사건으로 엄청 유명해지기도 하고 엄청 고난을 겪고난 후라 모두들 탄성을 지르며 맞이하였다. 연습 당장 때려치고 바로 막걸리에 값싼 안주 사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술판과 이야기판을 벌였다.

그 날 지하 형에게 초면 인사를 드린 사람은 나와 홍세화 형이다. 세화 형은 원래 나보다 고교 3년 선배로, 서울공대를 다니다가 그만 두고 외교학과 69학번으로 다시 입학하여 괜스레 연극회를 기웃거리던 때였다. 연극회장이 나를 “경기고 출신으로 엄청 똑똑한데 무지하게 사람을 웃기며, 내년에 연극회장을 맡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날 김지하 선배가 한 이야기 중에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말은 세 가지이다. 하나는 자기가 쓴 ‘오적’이라는 담시가 우리 전통예술의 하나인 판소리에서 나온 문체라는 것. 판소리? 나는 그때까지 판소리라는 걸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고향이 전라도인데도... 나는 너무 일찍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던 것이다.

또하나는 ‘자연주의’ 연극 갖고는 우리 사회 복잡한 정치·현실문제가 표현이 안된다는 것. 뭐라고? 작년에 ‘혈맥’이라는 작품을 구경하고 충분히 감동 받고도 남았는데, 자연주의 연극 갖고는 안된다고...?

그리고 또하나는 나에 대한 평가였다. 그 날 좌중에서 내가 재치있는(?) 재담으로 사람들을 꽤나 웃긴바, 지하 형이 자기 중심으로 좌중을 압도하는데 좀 방해가 됐던가보다. “진택이 너는 너무 똑똑해서 이 바닥에 오래 있을 것 같지 않다. 너는 무슨 고시 같은 것 봐서 딴데로 갈 타이프야.”

나는 술도 좀 취했고 기분도 좀 불콰해져서 한쪽 방 소파에 누워 잠시 쉬다가 잠이 들고 말았는데, 한밤중 누군가 주고받는 얘기소리에 잠이 깼다. 통금 시간이 넘었는지 회원들 모두 집으로 돌아간 텅 빈 연습실에서 지하 형과 세화 형 둘만 남아 밤새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내용은 대체로 예술미학과 철학에 관한 어떤 얘기들, 판소리·가면극을 비롯한 우리의 전통 민속연희 안에 해답이 있다는 것, 그리고 답보(踏步)에 빠진 학생운동의 방향에 대한 진지한 모색과, 조심스럽지만 사회주의에 관한 내재적 혹은 비판적 시각을 상호 탐색했던 것 같다.

나는 옆방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나보다 한단계 수준높은 대화를 주고받는 두 선배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며 다시 잠을 청했다.

전태일의 분신(焚身)이 각인(刻印)되다

1970년대 벽두를 강타한 또하나의 사건은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일어난 어느 청년노동자의 분신(焚身) 사건이다.

▲<사진3>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보도하고 있는 1970년 11월 14일자 경향신문 ⓒ경향신문

전태일이라는 청계천 평화시장 젊은 노동자가 자신의 몸을 불살라 우리 사회 불평등과 불공정을 폭로하고 만인의 생존권을 선언한 그 때, 나는 그 곳에서 멀지 않은 동숭동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치외교학도이자 연극도였다. 나는 그 날 연극회실에서 ‘허주찬 궐기하다’ 작품의 대사 연습을 하고 있다가 운동권 학생 몇몇이 급히 뛰어다니며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평화시장에서 노동자가 분신했다. 모두들 나와 그리로 가자.”

나는 그 때 그 곳으로 달려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 날의 상황은 줄곧 나의 뇌리에 박혀 있었던 바, 나는 후에 독일의 유명한 극작가 귄터그라스가 쓴 ‘민중들 반란을 연습하다’라는 희곡을 접하고는 전태일의 분신 상황을 소재로 삼아 어떤 연극을 하나 만들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그 연극은 이런 것이었다.

"어떤 극단의 단원들이 민중봉기를 주제로 하는 작품의 공연을 앞두고 마지막 연습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실제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 때 단원들은 밖으로 뛰쳐나가 봉기에 참여해야 하는가, 아니면 공연을 완성하여 보여줌으로써 더 많은 관객들로 하여금 봉기에 참여하도록 고무(鼓舞)해야 하는가?"

말하자면 나의 머리 속에서는 ‘예술의 사회참여’ 나아가 ‘예술인의 사회참여’에 대한 구체적 고민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태일을 소재로 한 이같은 ‘서사극-변증법적 연극’을 나는 끝내 실행하지 못했다. 대신 전태일 분신 50주년을 맞은 재작년(2020년)에야 우여곡절 끝에 <판소리 전태일>을 창작하여 선보였다.

사설을 쓰느라고 자료를 섭렵하던 중에 나는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묘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그가 남긴 편지와 수기, 일기 등 원 자료를 그대로 접하면서, 동시대 동년배로서(전태일은 나보다 두 살 위다) 평화시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서울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맞춤법도 맞지 않는 태일의 서투른 글씨체는 그가 추구했던 내용들의 절박성과 창의성을 진실 그대로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고등공민학교를 1년 남짓 다니다 만 그가 치열하게 고뇌하고 찾아내어 끝내 결단에 이른 그 생각들은 주입식 지식과는 차원이 다른 스스로의 깨우침이요 사상이며 정신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자신의 생각과 포부를 초보적인 소설 형식으로 써놓았는가 하면 심지어는 희곡 형태로도 시도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살아 이 분야에서 활동했다면 아마 대단한 작가가 되었으리라. 아니, 그가 구상해놓은 ‘태일 피복공장’ 설계서를 보면, 그는 어떤 기업인보다도 뛰어난 대단한 ‘사회적 기업가’가 될 수 있는 탁월한 능력까지도 갖고 있었다.

▲<사진 4> 1970년 어느 날, 허름한 판자촌 동네에서의 전태일

내가 새삼 안타깝게 생각한 대목은, 재단사로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신분상승을 꾀할 수 있었던 그가 참혹한 현실에 허덕이는 시다와 미싱사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했던 것에는 노동청과 서울시청 등 주무관청의 책임 뿐 아니라 기회주의적이고 안일한 언론의 태도에도 책임이 작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전태일은 어렸을 적 무작정 서울로 왔을 때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 닥치는대로 안해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배달하던 신문, 그 신문에 왜 평화시장의 참혹한 현실은 실리지 않는 걸까?

노동운동을 이유로 피복공장에서 쫒겨난 전태일은 자비를 들여 평화시장 근로조건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그 보고서를 작성하여 관계기관과 언론사에 호소하지만 모두가 묵묵부답... 천신만고 끝에 유일하게 경향신문 사회면에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 평화시장의 참상에 관한 보도가 크게 실렸을 때,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너무나 기뻐서 전당포에 탱크시계 맡기고 신문을 몽땅 사서 평화시장·동화시장·통일상가 삼동을 누비며 돌려보기까지 했다.

그만큼 언론의 영향력은 중요하고, 선량한 시민들은 그러한 언론의 역할에 신뢰와 기대를 가졌건만, 노회한 언론사 사주측은 힘없고 선량한 시민들을 외면한 채 도리어 야합하고 기만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지난 일을 가정한다는 것이 부질없지만, 만약 언론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전태일은 죽지 않고 끝까지 힘을 합쳐 싸워 이겨냈을 것이다.

2020년대 팬데믹 시대에 1970년대를 반추(反芻)하는 이유

돌아보건대 전태일이 분신한지 50년이 지났건만 우리네 민중들 삶의 모습은 아직도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

현대의 불과 50년 동안에 우리는 신석기 시대의 농업과 소위 4차원 시대의 AI를 동시에 경험하며 살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계층별‧세대별 불평등과 불공정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고, 국가제도와 관료체제는 이제는 동맥경화증을 유발하고 있는가 하면, 언론과 방송은 자유를 남용하여 가짜뉴스와 궤변이 판치고 있으며, 무엇보다 인간이 무분별하게 파괴해온 자연과 지구가 이제 기후 변괴(變怪)와 팬데믹 역병(疫病)으로 인간에게 보복해오는, 총체적 위기상황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오늘날 팬데믹의 시대에 한물 간(?) 듯한 「탈춤과 마당극」을 놓고 다시금 1970년대를 반추(反芻)하는 것은 우리 젊은 날의 열정과 헌신이 결코 헛되이 잊혀져서는 안되겠다는 조바심의 발로임을 솔직히 고백한다.

▲<사진 5> 2020년 11월, 전태일 분신 50주년을 맞아 창작판소리 '전태일'을 준비하며 마석 모란공원 묘역에서 전태일 열사에게 사설(辭說)을 헌정하는 예를 올리는 필자. ⓒ임진택

필자 임진택 마당극 연출가, 판소리 명창. 현재 : 경기아트센터 이사장, 애국가바로잡기국민운동 상임대표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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