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좌파생활>은 경제학자 우석훈의 '이생망' 선언이다. 이미 30대 때 '주류 경제학자'로서 잘 나가는 길을 포기했다는 저자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나는 좌파"라고 공개 선언하는 일은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다. 최근 발간된 이 책에서 그는 왜 이런 '선언'을 해야만 하는지 밝히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재탄생, 보수정당인 국민의 힘에서 30대 중반의 이준석 대표의 당선, 2022년 대선에서 정권교체 열망을 어느 때보다 크게 부풀린 힘은 소위 '이대남(20대 남성)' 현상 때문이라고 많은 이들이 말한다. 그 규모와 힘은 어쩌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우파 포퓰리스트 정치인들(대표적으로 이준석, 윤석열) 때문에 더 크게 보일수 있지만, 이런 흐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한국만의 독특한 정치사회 현상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일정 정도 성숙한 이후에 저소득 노동자와 청년을 중심으로 인종주의가 강화되면서 극우파가 핵심 세력으로 대두하는 것은 더 이상 궁금한 일이 아니다. 보통은 같은 노동 시장에서 외국인 노동자와 경쟁해야 하는 청년들이 극우파의 새로운 세력이 되는데, 한국은 외국인 노동자 대신 여성이 그 대상에 놓이게 되었다고 해석하면 어려운 해석도 아니다. 외국인을 여성으로 바꾸면 전체적인 담론 구조가 같다."
미국의 '트럼프 현상', 영국의 '브렉시트', 프랑스 등 유럽국가에서 극우 정당의 재부상 등이 다 맥을 같이 하는 일이다. 전세계적인 '대세'라고도 할 수 있다.
<21세기 자본론>을 쓴 토마 피케티는 지난 몇년간 경제 흐름을 보면서 "나는 이제부터 사회주의자"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우석훈은 이렇게 설명했다.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론>으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21세기에는 임금 격차가 아니라 자산 격차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얘기로 요약할 수 있다. 부모가 자식에서 자산을 물려주는 현상에 따른 세습 자본주의에 대한 질문도 여기에서 나왔다...많은 국가에서 복지의 증가로 소득에 따른 불평등은 조금씩 개선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자산의 불균형은 전혀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은 물론이고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곳에서도 이런 자산 격차가 발견된다고 한다. 한국의 사례도 검토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많은 곳에서 하위 50퍼센트가 자산의 5퍼센트만을 소유한다는 사실이 관찰된다."
정치사회적으론 '이대남' 현상으로, 경제적으론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로 부동산, 주식, 암호화폐에 투자하는 '자산 투쟁'의 형태로 드러난 20-30대의 존재감은 한국사회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보여준다.
우석훈의 "나는 진보가 아닌 좌파"라는 선언은 피케티의 사회주의자 선언과 같은 문제의식에서 나왔다.
그는 '이대남'들의 '여성혐오'는 한국적 자본주의를 완성시키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청소년기를 강요하는 교육제도를 통해 취향이자 정체성으로 발아, 숙성, 완성된다고 지적한다.
"대체로 중학교 2학년 나이에 특목고를 갈 학생과 그렇지 않을 학생이 어느 정도는 나뉜다. 특목고 트랙에 들어간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이 같은 반에 있는데, 이 시기는 극도로 민감한 시기다...이번 생은 망했어! 특목고와 상관없는 삶을 사는 중학생들이 느끼는 절망감을 나도 전에는 살피지 못했다. 중학교 2학년, 여기가 최전선이다..그런 중학생들이 고등학교를 거쳐서 마침내 대학에 들어가면 ‘완성형 여혐’이 된다."
때문에 우석훈은 이들의 정치적 주장이 토론을 통해 설득하거나 특정 정책을 통해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 '취향', 더 나아가 '정체성'의 수준이 됐다고 판단하며 이런 흐름은 쉽사리 끊어지기 힘들 것이라고 내다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 실패로 트럼프가 대통령 선거에 패해 물러났지만, 트럼프 지지 세력의 목소리는 여전히 미국 정치와 사회를 흔들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를 가볍게 보는 것은 20-30대가 보기에 자녀들에게 자산과 특권을 세습하면서 도덕적 우월감까지 전유하려고 하는 일부 '진보' 진영 인사들이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한국에서 죄 지은 사람은 좌파고, 세력되고 넉넉하고 힘쓰는 사람들은 진보라고 부른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이런 이상하고 분열증적인 분류법을 가진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을 듯 하다...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좌파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뭔가 이상하거나 손해를 감수하고 기꺼이 살아갈 '개또라이'임에 분명하다."
너무 아득해 요원해 보이지만, 한국에서 '이대남'이라는 '신(新) 우파' 집단의 문제는 결국 한국식 자본주의의 문제에 천착하지 않는 한 해소 내지는 완화되기 어렵다고 우석훈은 주장한다. 그의 '좌파' 선언은 이미 30대 이후 주류 경제학자로서 삶을 포기하면서 어느 정도 판가름이 나기는 했지만 더 확실히 "진보"가 아닌 "좌파"가 되겠다는 연대 선언이다.
"극적인 반전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20대에서 점차적으로 보수가 우세할 것이고, 그중에 더욱 강렬한 마초 스타일 극우파가 분화되어 지금보다 한결 업그레이드 된 초강경 청년 극우파도 등장할 것이다. 그 속에서도 멸종 위기종 같은 좌파들은 한국 사회에서 계속해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고통받을 것이다. 내가 이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편안하게 입을 수 있고, 적당히 숨을 수 있는 ‘진보’라는 강력한 갑옷을 벗고, ‘좌파’라는 새로운 붉은 셔츠를 입는 것은 내가 한국의 2030 좌파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연대 표시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다."
엄청 거창해 보이지만, '진보'든, '보수'든 성공신화를 향해 자신과 자녀들을 몰아넣고 끊임없이 욕망을 부채질하면서 소유 자산에 따라 위계질서를 만드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한국 자본주의 질서에 "상냥하고 유쾌한" 저항을 하자는 제안이다.
"한국의 진보는 재집권 5년 만에 정책적으로 실패했고, 미학적으로 파산했다. 한국의 좌파는 미학적으로 실패한 곳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이칼리테리언, 21세기 좌파의 본질은 평등주의자다. 모든 사람은 동등한 권리를 갖고 태어나고,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게 좌파다...한국에서 좌파는 이제 멸종 직전이다. 좌파의 집권 혹은 주류화, 이런 건 꿈도 꾸지 않는다. ‘좌파 정권’은 보수의 구호 속에만 존재한다. 전 세계 선진국들을 돌아보시라. 우리처럼 좌파가 아예 명맥도 유지하기 힘든 나라가 어디 있는가? 가장 낮은 수준의 좌파 활동인 취미로서의 좌파 생활이 필요한 순간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저자는 이 문제를 '중2병'에 걸린 아들과 '갱년기' 엄마의 갈등으로 돌리며 방관하거나 뒤로 숨는 남성들의 무책임을 꼬집고 있다.
"한국 사회가 이렇게 된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다. 그 원인은 교육 구조와 노동 시장 관리에 실패한 한국 자본주의에 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그 문제를 여자 교사와 엄마에게 찾고, 여성가족부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엄마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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