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대선 투표일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정확히 한 달 뒤인 2월 23일부터는 재외 투표가 먼저 시작된다.
작년 6월, 우리는 대선이 이 나라와 정치공동체가 나아갈 길에 대한 비전을 논의할 유일한 기회라고 말했다. 대선 후보로 나선 정치인들은 심화하는 불평등, 초미의 기후 위기, 포스트 코로나 체제로의 전환이라는 시대정신과 역사적 과제에 대한 전망과 구상을 내놓아야 한다고. 우리 시민들은 정치인들에게 이를 요구하고 압박하는 동시에, 내놓은 전망과 구상을 공유하고 논의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바로 보기 : "코로나 '재난'에도 새 지도자를 뽑는 과정은 구태의연하다")
주요 정당 대선 후보가 모두 확정되고도 3개월여가 지난 지금, 비전은 고사하고 정책경쟁도, 심지어는 토론마저 사라진 대선을 보고 있다. 1분미만의 짧은 동영상, 맥락 없이 게시되는 한 줄 공약과 해시태그가 넘쳐나지만, 정작 각 당 후보의 공약집 하나 찾기가 어렵다. 온라인 라이브 방송, 인공지능 아바타까지 등장한 마당에, 모든 후보가 한자리에 모인 TV 토론회조차 보지 못했다.
거대양당 대선 후보는 이름만 가리면 어느 당, 누구 후보인지도 가늠할 수 없는 단편적 공약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생활밀착형'이라는 명목의 이 공약들이 과연 어떤 체계적인 구상으로 모일 수 있을까? '나를 위해' '합니다' '정권교체'와 같은 슬로건이 드러내는 비전과 철학은 대체 무엇일까.
오늘 논평은 7개월 전 논평에서 제시했던 시대정신과 역사적 과제로 되돌아간다. 주요 대선 후보들이 내놓은 전망과 구상이 있는지. 제대로 된 공약집도 TV 토론회도 없는 지금, 주요 후보들의 입장을 비교 확인할 방법은 시민사회의 질의에 대한 답변뿐이다.
전국 95개 노동·시민사회 단체가 참여하는 대선유권자네트워크, '불평등 끝장넷'은 20대 대선에서 한국 사회가 풀어야 할 가장 큰 과제와 그 방안을 불평등 해소와 국가책임 강화로 진단하고, 사회보장, 주거·부동산, 고용·일터 세 분야에 걸친 38개 실행과제에 대한 찬반과 대안을 주요 대선 후보에게 물었다.(☞ 바로 가기 : 불평등끝장넷)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시민사회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대부분 실행과제에 대해 찬성 견해를 밝혔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힘 후보는 전체의 절반가량을 찬반이 아닌 '기타'로 응답했고, 여러 답변에서 명확성, 일관성, 적극성, 이행 의지, 실효성, 구체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두 후보 모두 부동산 보유세 강화에 반대했고,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의 경우 기업을 규제해 비정규 노동자를 보호하는 방안에 반대했다.
민주노총 산하 의료연대본부는 의료공공성 확대, 보건의료·돌봄 인력 대책 마련, 의료민영화 중단,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기업규제에 관해 물었다. 윤석열 후보는 응답하지 않았고, 심상정 후보와 김재연 진보당 후보는 모든 항목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이재명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답변은 '부분 동의'가 대부분이었는데, 안철수 후보의 경우 보건의료 노동자 보호 방안에 반대했고, 이재명 후보는 바이오·헬스와 원격의료 관련 규제 완화를 중단하지 않겠다는 견해를 밝혔다.(☞바로 가기 : 1월 17일 자 '[보도자료] 의료연대본부 대선정책요구안 발표 기자회견(각 캠프 정책질의 답변서 포함)')
여기에서 우리는 경제권력 비호라는 압도적 경향성을 확인할 수 있다. 개별적인 과제와 정책 방안을 넘어, 포스트 코로나 체제의 비전은 어떤가. 기실 이는 사회, 경제, 정치체제를 포괄하는 의미이지만, 여기서는 공중보건 체제에 국한해 살펴보자. 다른 무엇보다, 포스트 코로나 체제의 최소한, 기본 중의 기본이 아닌가?
공약 개발 진척에서 가장 앞서있는 이재명 후보는 작년 말 '코로나19 감염병 대응 및 의료불평등 해소를 위한 공공의료 확충 정책공약'을 직접 발표했다. 이례적이지만, 후보 본인이 공공병원 설립 운동을 통해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는 점, 코로나를 겪으며 공공의료의 중요성과 국가책임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높아진 점을 고려했다고 했다.(☞ 바로 보기 : 재명이네 마을 '이재명 대통령 후보, 코로나19 감염병 대응 및 의료불평등 해소를 위한 '공공의료 확충 정책공약' 발표문')
이재명 후보가 내놓은 공공병원 확충, 필수 의료인력 확보, 지역 의료기관 협력체계 구축, 전 국민 주치의 제도는 모두 의료체계 측면에서 중요한 정책이다. 하지만 여기서 의료체계로 환원되지 않는 예방과 방역 등 공중보건 체계 측면은 고스란히 빠져있다. 긴 공약 발표문에서 '보건소'는 단 한 차례 언급되고, 그나마 재택의료를 위한 수단으로 묘사된다. (공중보건 체계와 보건소가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다음의 글을 참조할 것. ☞ 관련 기사 : <프레시안> 6월 2일 자 '코로나 대응의 최전선 보건소, 인력부족으로 병들고 있다')
백신 부작용 관련 약속, 중증 환자 치료의 공공병원 전담, 코로나 극복을 위한 지원 등으로 구성된 윤석열 후보의 '코로나 극복' 공약에서는 '보건소'는 물론 '인력(노동자)'에 대한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비전이라고는 '윤석열 정부는 책임지겠습니다'가 고작이니, 포스트 코로나는 고사하고 코로나 대응의 비전도 난망이다.(☞ 바로 가기 : 윤석열 공약위키 '코로나|코로나 극복') 심상정, 안철수 후보의 경우 단편적 발언 외에 따로 발표한 공약이 없다.
'체계'를 넘어서는 '체제'는 인력, 조직, 거버넌스 그 이상이다. 제도뿐만 아니라, 이념과 정치경제가 어우러진 것. 그렇다면 우리는 주요 대선 후보들이 가진 포스트 코로나 체제의 비전을 확인할 수 있는가? 그 비전을 어떻게 달성하려고 하는지는?
코로나19는 우리 사회 곳곳의 불평등을 극명하게 드러냈고, 또 심화시켰다. 불평등과 고통은 더 널리 경험되고 인식되었지만, 여전히 개개인의 희생과 책임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다. '불평등 해소'와 '체제 전환'이라는 과제가 가진 성격(추상적, 구조적)으로 보면, 현실 정치가 훨씬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 사람들의 고통을 요구로 전환하는 것, 경험해 본 적 없는 대안을 상상하고 기획하는 것, 이행을 위해 힘을 모아내는 것. 시민들은 물론 그 과정에 참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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