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서 <도둑이야!: 공통장, 인클로저, 그리고 저항>는 역사서이다. 역서는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터 국내에서도 많이 회자되고 있는 (역서에서는 '공통장'으로 번역된) 커먼즈(commons)의 역사를 다룬다. 먼저 생각해볼 것은 역서가 왜 커먼즈의 역사를 다루는가하는 점이다. 커먼즈의 역사를 다루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부제 '공통장(커먼즈), 인클로저, 그리고 저항'에서 알 수 있듯 역서는 커먼즈의 '인클로저'와 그에 맞선 '저항'의 역사를 다룬다. 공동목장이나 공동어장, 공유지, 지하수 같은 소위 자연 커먼즈의 성공적 운영의 역사 혹은 관리 실패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인클로저에 맞서 커먼즈를 지켜내려했던 저항의 사건, 역사를 다룬다는 점이 역서의 특징이다. 즉 과거를 기록하는 저자 피터 라인보우(Peter Linebaugh)가 역사적 해석의 대상이자 과제로서 제기하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은, 일반화하여 말한다면, 커먼즈의 수탈에 맞선 저항·반란·봉기·혁명 및 혁명가이다.
양떼를 키우기 위해 공유지에 울타리를 쳐서 농민을 내쫓은 공유지의 인클로저, 커먼즈의 수탈이 자본주의의 이른바 시초 축적―혹은 본원적 축적―의 토대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커먼즈의 수탈은 사실 자본주의 초기만이 아닌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지구와 그 생태계에 대한 수탈과 사회적 협력의 산물인 지식과 정보, 데이터와 코드, 아이디어와 이미지 등에 대한 수탈이 커먼즈에 대한 수탈의 두 가지 대표적 양태로서 오늘날 자본 축적의 핵심 토대이기 때문이다. 결국 커먼즈의 수탈은 어제의 문제이자 오늘의 문제로서 자본주의 역사에서 지속된, 자본주의 역사와 함께 한 문제이다.
커먼즈의 수탈이 어제의 문제이자 오늘의 문제이기도 하다면, 그에 대한 저항 역시 과거의 과제였을 뿐 아니라 현재의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 커먼즈를 수탈하고 해체하는 자본에 맞서 커먼즈를 관리하고 보호하며 또 새로이 구성하는 활동으로서의 커머닝(commoning)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하고 중요하다. 역서에서 알려주듯 커먼즈의 해체가 역사적으로 농민과 노동자를 생존수단이자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했다면, 커머닝은 이러한 분리에 저항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활동이었기 때문이다(148).
생각해볼 것은 커먼즈의 인클로저에서 시작한, 자본주의의 병폐를 해결할 뿐 아니라 나아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활동인 커머닝이 자본주의를 역사초월적인 어떤 것이 아닌 역사적인 것, 변혁에 열려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 '비자본주의적 미래'(327)를 그려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인클로저에 맞서 커먼즈를 지키고 만들며 키워간 관습, 즉 커머닝의 관습이 노동자와 농민에게 살아남아 있다는 점(275)이 비자본주의적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중요한 원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러한 관습을 일반화하는 것 혹은 자본의 관점을 당연한 것으로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커먼즈적 시각에 입각하여 세계를 이해하는 것(21)이 변혁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커먼즈적 시각에 입각한 세계 이해: 커먼즈가 첫째이고 자본은 둘째
사실 커먼즈가 수탈되어왔다는 것은 커먼즈가 존재해왔음을 함축한다. 역서에서 알려주듯 인클로저 뒤에 커먼즈가 있듯이 말이다(19). 커먼즈가 존재해왔을 뿐 아니라 커먼즈의 수탈에 맞서는 활동들, 저항들이 존재해왔다. 물론 저항은 커머닝을 실천하는 커머너들(commoners)이 자본이나 권력이 강제하는 질서에 순종하기를 거부했던 자기 변화의 표현이었다. 커먼즈의 승리가 새로운 종류의 인간의 탄생을 수반한다면(222), 그 인간은 이와 같이 강압적 질서에 맞춰 살기를 거부하는 인간, 강압적 질서에 맞춰 살던 과거의 삶에서 오늘 스스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 자기 변화하는 인간일 것이다.
그리고 커먼즈적 시각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이 세계가 자본에 의한 커먼즈의 수탈과 그에 맞선 저항, 재전유의 각축장이라는 점을, 커먼즈의 수탈은 자연법칙과도 같은 자연스러운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그것은 수탈과 재전유를 둘러싼 투쟁의 결과라는 점을, 그리고 우선적이고 일차적인 것은 커먼즈이고 커머닝이며 자본에 의한 커먼즈의 수탈은 부차적이고 이차적일 뿐이라는 점을 의미할 것이다.
만약 커먼즈의 수탈이 어제의 문제였을 뿐 아니라 오늘의 문제이기도 하다면, 확인했듯 커먼즈의 수탈에 맞선 저항과 커먼즈를 재구성·재전유하는 실천 역시 다름 아닌 현재 우리의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실천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고 자란 우리가 흡사 당연한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사적 소유', '소유 개인주의'에서 벗어나는 자기 변화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공통적인 것'(the common)으로서의 커먼즈가 우선적으로 사인이나 자본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사적인 것'(the private)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커먼즈는 국가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공적인 것'(the public)도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자기 변화에 입각한 자본주의 사회의 변혁에는 분명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현재의 과제를 미래로 미루어도 좋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금 비자본주의적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씨앗인 커먼즈가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점, 미래가 현재에 내재하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147). 우리에게 이미 미래의 씨앗이 있으며 나아가 이를 발아시킬 역량이 있기 때문에, 커먼즈적 시각에 입각하여 세계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자기 변화의 실천을 통해서, 설령 작더라도 실질적인 변화들을 우리는 만들어나갈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들이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로 되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일 수는 없다. 앞서 확인했듯 커먼즈는 수탈에 맞선 저항 속에서 재구성되어왔다. 예컨대 이제는 전통적 공유지가 아닌 지식·정보·데이터와 같은 비물질적 생산수단이 오늘날의 대표적 커먼즈인 것처럼 말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 우리가 지키고 만들며 키워가야 하는 커먼즈는 과거의 그것과 분명 다르며, 오늘날의 커머닝 역시 과거의 그것과 똑같은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커먼즈 수탈·해체의 토대가 되는 소유 개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오늘날의 실천이 다시금 새로이 창안될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커먼즈를 지키고 가꾸는 사회적 협력이, 그 양태가 역사적으로 변화했음에도, 그것의 수탈보다 우선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강한 저항을 동반하면서 전개됐다는 점이다. 역서가 알려주듯 이미 청년 마르크스가 편집장으로서 <라인신문>에서 다루었던, 1840년대 초 독일 서부 라인 지역에서 일어난 목재 절도는 죽은 나무를 사용하는 것을 관습적으로 인정해온 게르만법에 반하는, 목재 절도에 관한 법률에 맞섰던 빈자의 저항이었다.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죽은 나무, 즉 모두의 것으로서, 빈자가 각자의 필요에 따라 사용했던 죽은 나무는 본래 사적인 것도 아니고 공적인 것도 아닌 커먼즈였다(66-69).
커먼즈를 지키고 가꾸는 사회적 협력이 커먼즈에 대한 수탈보다 우선한다는 점, 그리고 수탈에 맞선 저항이 역사적으로 존재해왔다는 점은, 이러한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사적 소유에 입각하여 커먼즈를 수탈하는 자본에 맞설 수 있는 역량이 우리에게 이미 있음을 함축한다. 예컨대 창작자의 권리 보호라는 미명 하에 실질적으로는 대체로 자본 축적에 기여하는 데 그치고 말뿐인 저작권은 사회적 협력을 통해 생산되는 지식 등을 수탈하는, 오늘날의 자본의 도구 중 하나이다. 생각해볼 것은 인터넷의 발전과 함께 시작한 정보공유운동의 결과 중 하나인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reative Commons License, CCL)를 통해서 지식 등이 얼마든지 자유롭게 공유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정보공유운동·지식공유운동과 같은 집단적 실천을 통해서 우리가 협력적으로 생산한 '공통의 부', 커먼즈를 수탈로부터 지켜내고 키워낼 수 있다.
역사를 열어가는 과제
커먼즈의 수탈에 맞선 저항의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래왔듯 저항을 우리가 여전히 실천할 필요가 있다는 점, 물론 새로운 방식으로 실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는 '과거'의 저항을 기록한 역사가 역설적이게도 '현재'의 과제를 제기하는 것, 즉 비자본주의적 미래를 현재에 현실화하라는 ‘지금’의 과제를 제기하는 것이지 않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과거를 기록한 역사가 현재를 새로이 열어가는 과제를, 역사를 새로이 열어가는 과제를 우리에게 제기한다는 점이 다른 무엇보다 커먼즈와 인클로저 그리고 저항을 다룬 역서의 독특함인 듯하다.
사실 역사는 인클로저에 맞서는 저항에 의해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다. 너무도 쉽사리 영원불멸할 것으로 여겨지곤하는 자본주의 역시 인클로저와 그에 대한 저항이라는 대결, 즉 계급투쟁으로부터 귀결된 역사적 산물일 뿐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이러한 대결의 산물이었듯 저항의 실천 속에서 역사를 새로 열어가는 것 역시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이 대결의 결과이듯, 역사 역시 이러한 대결을 통해 우리가 열어갈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 아마도 인클로저와 저항을 다룬 역서가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일 것이다. 물론 역서가 이러한 교훈을 주는 것은 위와 같은 시선에서 역사적 사건, 인물에 접근하여 그것들을 해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역사적 탐구가 위와 같은 점에서 그 자체 오늘날의 현실에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투쟁적인 성격을 가지는 동시에 (커먼즈의 인클로저와 그에 대한 저항이 계속해서 전개되고 있는) 오늘날의 대결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 역사적 탐구가 가지는 위와 같은 성격이 라인보우의 스승인 또 다른 저명한 역사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의 저자인 E.P. 톰슨을 통해 전수된 것이 아닐까한다. 그리고 역서를 통해서 우리는 다시금 라인보우가 전수하는 역사적 시각을 접할 수 있고 그러한 시각으로 세계를, 역사를, 그리고 무엇보다 더 이 세계와 역사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에 관한 통찰을 접할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커먼즈의 가치가 계속해서 가르쳐지고 갱신되어야 하듯이(25) E.P. 톰슨을 거쳐 라인보우에게 전수된 역사적 시각 역시 계속해서 갱신되고 교육되어야 할 듯하다. 그것은 이러한 갱신과 교육이, 라인보우가 어떤 혁명가가 즐겨 인용했다고 알려준, "우리의 의식 속에서 인류의 지적 유산 전체를 곱씹는 일을 부단하게 일상적인 실천의 일부로 만[드는]"(189) 활동의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역서는 이러한 활동의 구체적 실천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