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소원도 세우고 희망도 다져본다. 그러나 이런저런 걱정이 더 먼저 밀려 온다. 어떤 문제들이 우리 앞에 걸려 있나? 지난 주 KBS가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이 지적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은 집값 안정, 일자리 창출, 언론과 사법의 개혁, 경제불평등 해소 등이다.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늘 나온 문제인데 해결은 안되고 있다. 걱정을 하면 이 문제들의 해결에 도움이 좀 될까?
겨울 추위가 매서운 가운데서도 여기 저기 공사가 진행되는 곳이 있다. 노변이나 천변에 갑자기 벤치를 만들거나 공원을 정비하고 보도 블록을 새로 까는 등 지자체의 예산 털기 공사들이다. 나쁜 행정의 대표적인 사례들로 매년 지적되곤 하는 이런 공사들을 보면서 이번 겨울엔 좀 다른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예산 털기가 없다면 이런 공사가 시행될 수 있을까? 공원을 새로 단장하고 도로를 보수하고 자전거 쉼터나 아침 운동을 위한 장소를 마련하는 등 생활 환경이 무척 좋아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 더 요긴하게 쓰일 수도 있을 재원이 예산 털기에 몰려 이렇게 쓰이는 것이 문제이긴 한데,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실패한 행정 덕분에 개선되는 것들도 있으니, 모든 일에는 음지와 양지가 공존한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의 도시 공간이 세계적인 수준에 밀리지 않게 깨끗해진 데에는 실패한 행정의 역할도 한 몫을 했을 지 모른다.
최근 홍콩에서 좀 지낼 계기가 있어 살다 보니 도심에 낡고 더러운 건물이 방치된 사례가 허다했다. 자꾸 눈에 거슬려 현지 친구들에게 물어보았지만 대개는 뭐가 문제냐, 혹은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부동산 가격이 세계 최고인 도시에 왜 저렇게 낡고 더러운 건물이 방치되는 것일까 의문을 버릴 수가 없었는데, 그것이 결국은 이 도시가 채택하고 있는 여러 가지 규제와 관련이 있고, 더 깊게는 부동산 소유와 개발에 대한 홍콩식 체제가 바탕에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또 그런 점들이 자꾸 눈에 거슬리는 것은 내가 한국의 도시공간에 익숙한 시선을 가지고 홍콩을 보기 때문이라는 점도 깨달았다. 홍콩인의 눈에 익숙한 공간의 결점이 잘 보이지 않듯이, 한국인의 눈에는 한국 사회의 문제들이 잘 띄지 않을 수도 있다.
홍콩이 아니고 독일이나 프랑스의 거리를 보았다면 왜 한국의 도시는 이렇게 멋지게 관리되지 않는 것인가 생각을 했을 것 같다. 한국은 한국식의 도시공간 관리 체제를 형성해 왔기 때문에 갑자기 유럽식이나 미국식을 뒤집어 씌우기 어렵다. 스페인의 지중해변 어느 도시에는 도시 전체의 건물을 하얀색으로 칠해야 하는 규제가 있다. 비용도 문제고 취향도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모두 규정을 따른다. 덕분에 도시는 그림에 나오는 마을처럼 예쁜 미관을 가진다. 한국에서 이런 실험을 해 볼 수 있는 도시가 있을까?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여러 가지 여건에 맞춰 나름대로 형성되어 온 한국식 체제가 있기 때문이다. 홍콩보다 나은 것 같기는 한데 유럽보다는 못해 보이는 체제. 이런 것들이 사회의 모든 구석을 규정한다.
한국의 경제 성장이나 사회 발전, 그리고 최근에 일약 세계를 놀라게 만든 한류의 도약 등은 주목할 가치가 있는 하위 체제들의 발전이라고 본다. 그런데 유독 정치의 발전은 왜 그렇게 어려운가? 한국뿐만이 아니다. 트럼프 사태로 한동안 세계가 시끄러웠던 미국이나 혹은 지금의 중국 등도 정치의 미로에 발이 묶여 헤매는 모습을 보인다. 대선을 목전에 둔 한국의 사정은 딱하다 못해 분이 날 정도이다. 국제사회의 우등생으로 여러 과목에서 골고루 수를 받는 한국이 정치에 관한 한 오히려 미나 양으로 추락하는 형국이다 정치와 함께 언론과 사법 등이 동반 추락이다. 거시적으로 국가의 정치 과정에 모두 연관되는 제도들이다. 정치는 왜 이렇게 뒷걸음 질을 치는가? 도대체 정치는 왜 이렇게 발전이 어려운 것일까?
지난 세기 대부분의 나라들이 당연하게 수용해 온 근대민주주의체제는 근본적으로 발전이 불가능한 요소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근대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선거를 기반으로 지배권 부여/획득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통치 및 관리 제도이다. 누가 다스릴/통치한 것인가? 다스리거나 통치한다는 개념 자체가 군주제적인 느낌이 강하지만, 인간 사회는 어떻든 다스리는 자가 없는 체제를 고안하지는 못한 상태이다. 그런데 이 선거 민주주의를 통한 다스리는 자의 선출은 그 제도 자체가 지니는 결함으로 인해 결코 양질의 발전을 이룰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대통령이 바뀌어도 정치의 질은 바뀌지 않는다면 사람에 문제가 있다기 보다 반복적으로 사람을 잘 못 뽑게 만드는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당연하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이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전제 요건의 충족이 우선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양질의 정치적 주자를 대상으로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품질이 떨어지는 정치 주자들만 선택지로 공급된다면 그 시스템은 뭔가 결함이 생긴 것이다. 한국 정치는 이 함정에 빠져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정당의 실패와 직결된다. 대의제 민주정에서 정당은 정치엘리트의 양성과 공급의 역할을 맡는 조직이다. 원칙적으로 그리고 이상적으로 보았을 때 그렇다. 한국의 정당이 그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 선거 때마다 간판을 갈아 다는 정당들에 그런 역할을 수행할 능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 정당이 정치엘리트의 발굴, 양성, 공급 기능을 상실한 상태에서 정치인의 공급은 원맨쇼에 의존하거나 파당적 파행에 의존하게 된다. 한국의 정치인 공급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원맨쇼적 요소가 두드러지며 동시에 포퓰리스트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원맨쇼란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빠'정치를 불러온다. '빠'정치의 폐단은 지금 한국의 대선 정국을 관통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선거에 기반한 대의제 민주주의란 희망이 있는 것일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당이란 과연 필요한 것일까? 혹은 대통령제가 과연 지금 한국에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일까 회의하게 된다. 올 해 대선에서 어느 당이 집권하든 이 문제는 앞으로 진지하게 다뤄질 필요가 있다. 이미 문제제기도 이루어 진 것으로 안다. 오히려 대수 국민들이 대통령제 변경에 거부감을 가진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막연한 거부감은 도움이 안된다. 공론화를 통해 국민적 이해를 충분히 높이고 선택해 나가면 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지치지 말고 꾸준히 논의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필요를 국민들이 더 깊게 느끼고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이번 선거과정에서 양당의 후보에 대한 심각한 실망과 의문이 국민들로 하여금 시스템의 변화를 요구하도록 자극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1592년 임진년 전쟁은 동아시아의 전면적 국제전이었다. 왜와 명, 조선 가운데 가장 약한 고리는 조선이었고 결과적으로 가장 큰 전란의 피해를 입었다. 전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군사강국이 된 이웃에 대해 쇄국과 외면으로 일관한 사람들이 보여준 특징은 국제정세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다. 천하의 세력 판도를 바꾸려는 왜와 지키려는 명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이른바 작전을 하지만 영문을 모르고 있던 조선은 눈치만 살피다 호되게 얻어맞았다. 임진년의 치욕을 부른 이러한 태도는 구한말에 재현된다. 그런데 임진년의 상황에 대해 모든 조선인들이 그렇게 깜깜이였던 것은 아니다. 전란이 터지기 오년전인 1587년 공주 제독 조헌은 상소를 올려 정부가 어떤 대비를 해야할 지 소상히 의견을 밝힌다. 당시 국제 정세를 그 정도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놀랍다. 그러나 그는 상소의 대가로 유배형을 받았다. 옳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헛소리를 숭상한 나라의 운명은 비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바야하르 일본을 통일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구축한 뒤 류큐와 조선에 대해 정명가도를 외치면서 왜의 편에 서서 명을 치는데 협력할 것을 요구해 온다. 선조의 조정은 어찌해야 할 지 우왕좌왕하다가 명으로부터는 왜의 앞잡이가 되지 않았나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왜로부터는 결국 타격의 제일 목표가 되었다. 조선의 이 우물쭈물 눈치보기 외교를 당시의 핵심관련자들은 현명한 실리외교라고 믿었을 것이다. 천하의 판도를 바꾸고 싶은 중국과 유지하고 싶은 미국이 대결구도로 들어섰다. 미중간 대립이 격렬해지는 국제정치의 난기류 속에서 정부가 일관적으로 내놓은 소리는 양강 사이에 서서 국익을 위한 균형외교를 한다는 것이다. 임진년과 구한말은 계속된다. 국제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의 뒷걸음질은 놀랍다. 정치 부문과 함께 답이 안보이는 실패가 국제문제에 대한 인식과 대응에서 발견된다. 말로는 균형외교를 말하지만 사실상 원칙이 없는 눈치보기에 불과하다. 뉴스를 보면 정부의 전략적 고심이 커져간다는 말만 계속 되풀이될 뿐 균형외교의 구체적 내용이 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없다는 이야기다. 계속 눈치만 보다가 어느 한 쪽이 강하게 내리치면 그냥 얻어맞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식이다. 여야 어느쪽으로부터도 그럴듯한 외교 정책 시나리오는 제시된 바가 없다. 임진년의 우왕좌왕을 다시 잘 반성해 보아야 한다.
올해 계속되는 다른 걱정거리 가운데 에너지 문제도도 있다.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탄소중립이 채택되고 이를 위해 화석연료 사용을 중지 혹은 축소해야 하는 것이 국제적 합의다. 대안으로 풍력과 태양광이 제시되었다. 에너지 공급의 중추를 담당하던 원자력이 퇴출 대상이 되었는데 대안 에너지만으로는 그 공백을 메울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원자력에 대한 불분명한 정책이 지속되면서 국론은 분열되고 에너지 정책은 더욱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국민은 불안하다. 올해는 이것도 이념적 수사를 털어버리고 현실적으로 정리가 되기를 바란다.
KBS 조사에 의하면 우리 국민의 가장 큰 고민은 뭐니뭐니해도 천정부지 집값인 것으로 나왔다. 지난 사 년 사이 서울의 집값이 두 배도 더 뛰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믿고 싶지 않다. 그냥 기가 막힐 뿐 속수무책이다. 대도시 부동산의 폭등은 서울에서만 일어난 일은 물론 아니다. 샌프란시스코와 런던, 홍콩과 베를린 등에서도 심각한 상승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정말 큰 문제다. 불행히도 집값이 떨어질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빚을 내 집을 산 사람들이 많아 집값이 폭락해도 문제라는 식이다. 집값을 안정시킬 뾰족한 방안도 없는 것 같다. 정부는 이미 손을 놓고 차기 정권으로 공을 넘긴 꼴이다. 믿을 수 있는 공공주택 공급 확대 이외에 정부가 쓸 수 있는 방책이 얼마나 될 지 모르겠다.
국민들은 사법부와 언론의 개혁도 걱정을 한다. 사법개혁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그림도 잘 보이지 않는다. 언론의 개혁을 국민이 아니면 누가 한단 말인가? 언론의 수준은 국민의 수준이라는 말이 있다. 이제 한국의 언론 소비자들은 스스로 좀 더 똑똑해 질 필요가 있다. 헛소리하는 언론은 안보고 안 사면 된다. 거짓뉴스나 과장보도를 하는 언론에 대해서는 엄격한 법적 제재를 실행하면 된다. 언론을 오남용하는 정권은 투표로 심판하면 된다. 언론개혁은 국민의 손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더 걱정스럽다. 어려우니까.
새해는 이렇든 많은 걱정거리로 시작되고 있다. 뽑을 사람 없는 대통령 선거에서 누군가를 뽑아야 하며, 대책이 없는 균형외교를 보아야 하고, 떨어지지 않는 집값이 떨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거짓말이나 과장으로 점점 망해가는 언론에 의지하여 세상을 보면서 이게 맞나 걱정을 계속 해야 한다. 우리는 정말 걱정을 멈출 수가 없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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