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북미 정상회담이 연이어 개최되면서 한반도가 평화와 대화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에 일본 정부도 북한과 관계 개선을 위한 움직임을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북미 정상회담이 끝난 지 이틀 후인 지난 6월 14일(현지 시각) 몽골에서 일본과 북한의 당국자들이 접촉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북일 양측이 물밑 접촉을 시작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하지만 양측 관계 개선에는 상당한 장애물이 있다.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자 문제가 최대 현안인데, 일본은 북한과 관계 개선 문제에 있어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뿐만 아니라 납치자 문제 해결을 조건으로 걸어왔다.
이에 일본 내에서는 언제까지 납치자 문제를 가지고 북일 관계 개선을 미룰 것이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교수는 "최근 일본 내에서는 납치자 문제보다 미사일 문제부터 먼저 해결해야 하지 않느냐, 납치자 문제 풀지 않으면 모든 것을 풀지 못한다는 식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등의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남 교수는 "실제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는 보도 이후 실시된 몇 차례의 여론조사를 보면 북일 정상회담을 지지한다는 응답이 60% 이상, 70% 가까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납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는 높지 않다"며 "납치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정상회담을 하라는 공감대가 일본 사회 내에서 어느 정도 자리잡고 있다. 그만큼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 교수는 한반도가 평화 국면을 맞이하면서 한국이 일본과 함께 '볼란테 외교'를 할 수 있도록 일본을 설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남 교수는 "'볼란테'란 포르투갈어로 미드필더를 지칭하는 축구 용어인데, 박지성이나 나카타와 같은 미드필더 선수들이, 비록 덩치는 크지 않아도 넓은 시야와 큰 폐활량을 가지고 운동장을 누비면서 경기를 조율하는 것처럼 한국과 일본이 동아시아 외교 판에서 이러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이 남북, 북미 정상회담으로 변화된 지형에 적응하려면 미국과 함께 자신들이 세계에서 '투톱'으로 외교를 펼쳐간다는 구상을 버리고 한국과 함께 '볼란테 외교'를 해야 한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비가 전쟁방지, 공격이 평화구축이라고 한다면 한국과 일본이 전쟁방지와 평화구축 모두에 가담해서 지역 내 여러 구상이 만들어질 때 어디에나 끼어 있을 수 있는 두 국가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구상"이라고 설명했다.
남 교수는 "물론 일본 외교 당국은 미국과 '투톱 외교'를 하자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구상을 싫어할 수도 있다. 이게 잘못 보면 '미들파워 외교'로 비춰질 수도 있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축구에서 볼란테, 즉 미드필더는 야전 사령관이다. 어쩌면 감독보다도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게임을 조율하는 사령탑의 역할을 하자는 식으로 일본에 메시지를 던지면 일본도 따라올 수 있지 않겠나 싶은 생각도 든다"고 내다봤다.
인터뷰는 지난 6월 28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프레시안 : 지난 12일 역사상 최초로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회담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 회담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 일본 내에서는 북일 관계 정상화와 관련한 논의나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는지?
남기정 : 물밑에서 북한과 일본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지난 14일 몽골에서 북일 접촉이 있었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시미즈 후미오(志水史雄)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 참사관이, 북한에서는 외무성 군축평화연구소 소장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는 미일간의 협의를 통해 12일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대략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접촉이었다고 본다.
정상회담의 결과가 별다를 것 없다는 평가도 있지만, 일본은 이면에서 북미 간 나눴던 이야기를 상당 부분 듣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미국의 태도도 확실하고 앞으로 미국이 이 방향으로 가겠다는 것을 일본도 알고 있기 때문에 북한과 대화를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지금까지 북한과 관계 정상화 또는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납치자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일본 납치자 가족과 그 주변은 이미 아베 정부에게 북한과 직접 대화해야 한다며 방향 전환을 요구했다. 북한에 대한 압력을 넣는 것만으로는 어렵다면서 대화도 병행해달라는 이야기를 지난해부터 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베 총리 입장에서도 북한과 대화를 하겠다고 방향을 전환한다고 해도 큰 부담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은 지난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간 북일 정상회담 당시 북한에 납치 피해자 13명의 생존을 확인해달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대해 북한은 4명이 생존해있고 8명이 사망했으며 1명의 입국은 확인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후 생존자 4명과 일본이 조사를 요구한 13명에 포함되지 않았던 1명의 납치 피해자 등 5명이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후 일본은 3명의 납치 피해자가 더 있다며, 북한이 입국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회답했던 1명 등 4명에 대한 조사와 귀환을 북한에 요구하고 있다. 또 일본은 8명의 납치 피해자가 사망했다는 북한의 대답을 믿지 않았다. 북한으로부터 받은 정보가 죽음을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자료가 아니라는 것이 일본의 입장이다.
일본은 북한이 확실한 정보를 주기 전까지 이들이 생존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협상을 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에 일본은 납치 피해자 12명에 대한 정보를 내놓으라고 북한에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은 일본이 재조사를 요구하고 있는 12명 중에 1명, 그리고 일본이 납치 피해자로 공인하지 않았지만 북한에 입국해 생존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1명 이렇게 해서 총 2명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지난 2014년 납치자 문제 해결을 위해 스톡홀름에서 북일 간 대화가 있었는데 이 때 북한이 이와 같은 정보를 줬다는 관측이다. 또 북한이 사망했다고 주장하는 8명의 납치 피해자와 관련해 2002년 일본에 전달한 자료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인 정황 자료를 일본에 제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프레시안 : 그런데 북한은 원래 2002년 북일 정상회담 때 납치자 문제는 이미 끝났다는 것이 공식 입장 아니었나? 만약 북한이 2014년 실무회담 당시에 위와 같은 정보를 줬다면 이건 나름 북한이 성의를 보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남기정 : 당시 북일 양측은 납치자 문제에 대해 재조사를 실시하겠다는 데 합의했다. 그래서 북한은 재조사를 진행했고 일본에 이 자료를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일본은 이를 받지 않았다. 여전히 사망했다는 납치 피해자 8명과 관련해 북한이 건넨 자료가 불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이제와서 북한의 정보제공 사실과 보고서의 존재를 인정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이 사실을 국민들에게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사실들을 인정하게 되면, 아베 정부가 정치적으로 납치 피해자 문제를 활용하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할 가능성도 높다. 그럼에도 이 사실이 3월 중순, 즉 북미정상회담 개최가 가시화된 시점에서 일본 정부 관계자의 말로 <교도통신>을 통해 보도된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본다.
프레시안 : 일본이 납치자 문제를 너무 신성시하고 있는 것 아닌가?
남기정 : 한일 관계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입구에 놓음으로써 문제가 꼬인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일본은 스스로 납치자 문제를 너무 큰 외교적 숙제로 만들어버렸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 납치자 문제는 북한과 관계에서 속도를 조절하는 브레이크였다. 그런데 아베 정권은 이 브레이크를 너무 세게 밟았고, 심지어는 사이드 브레이크까지 올려버렸다.
올려놓은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려면 일본의 입장을 합리화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한데, 동북아시아를 둘러싼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북한과 대화를 하겠다는 식으로 합리화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해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일본이 북한에 나서려면 일본 정부가 국제사회를 선도해서 압력을 가해 왔고 이러한 노력이 통했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할지는 의구심이 있다.
물론 북한이 2014년 실무회담 때 제안했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일본이 이걸 받는 조건으로 북일 간 타협의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 납치 책임자 또는 실행자 처벌이라는 조건까지 붙이면 일본이 움직일 수 있는 여지는 더 커진다.
책임자 처벌 문제와 관련, 지난 2002년 북일 정상회담 때는 김정일 위원장 본인에게도 책임론이 불거질 수 있었기 때문에 북한이 인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 입장에서는 납치자 문제가 선대에 벌어졌던 일이기 때문에 당시에 잘못했던 사람들에게 잘못을 묻겠다는 식으로 일본과 타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북한에서 내부 반발이 있을 수 있는데, 이를 어느 정도까지 통제 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프레시안 :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외무상을 비롯해 일본 내에서는 언제까지 납치자 문제를 가지고 북일 관계 개선을 미룰 것이냐는 의견도 나온다고 하는데, 이러한 의견 제기가 일본 내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나?
남기정 : 가능하다고 본다. 사실 그런 목소리는 최근 들어와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었다. "납치자 문제보다 중요한 미사일 문제부터 먼저 해결해야 하지 않느냐", "납치자 문제 풀지 않으면 모든 것을 풀지 못한다는 식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등의 지적이 계속 나왔었다.
그런데 이번 고노 전 외상의 발언이 지니는 의미는, 이제 이런 이야기가 묻히지 않고 언론에서도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일본에서 이런 민감한 문제에서 언론이 여론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된 지 이미 오래다. 거꾸로 여론 위에 언론이 올라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노 전 외상의 발언은 최근 일본의 대북 외교와 관련해서 여론의 흐름이 바뀌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실제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는 보도 이후 실시된 몇 차례의 여론조사를 보면 북일 정상회담을 지지한다는 응답이 60% 이상 70% 가까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납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는 높지 않다. 즉 납치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정상회담을 하라는 공감대가 일본 사회 내에서 어느 정도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한일, '더블 볼란테 외교'가 필요하다
프레시안 : 일본은 북한의 미사일 문제를 상당히 우려하고 있는데, 일본 현지에서도 정말 그렇게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고 있나?
남기정 : 북한 미사일에 대해 일본이 상당히 우려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일본이 이를 과도하게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측면도 있기는 하지만, 북한의 미사일이 실제로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당한 나라는 일본이 유일했고, 일본 국민이 이로부터 이른바 '합리적 안보 위협'을 느끼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일본이 정말 두려워하는 안보 위협은 중국이다. 일본의 한반도 문제 또는 안보 문제 전문가들은 중국-러시아와 미국-일본 간 신(新)냉전이 발생했을 때 한국이 어떻게 할지에 대한 의구심이 있다면서 한국이 한미일 협력 체제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 우려된다고 하여 한국이 태도를 분명히 해 줄 것을 은근히 또는 명시적으로 요구하곤 한다.
저는 이렇게 지정학적 계산에 매몰된 일본의 전문가들에게 역사적 사고를 요청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후사'에서 미일 동맹이 기원한 구조를 고민해 보라고 지적한다. 일본이 미일동맹을 가지고 상황을 제어하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럴수록 일본은 미국에 끌려갈 수밖에 없고 미일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는 더 심각해질 것이다.
일본은 이런 불평등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동아시아에서 안보 역할을 확대하겠다고 나서지만, 그렇게 되면 중국이 이에 대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결국 일본은 스스로 중국의 위협을 계속 키워가면서 미국에 끌려가는 구조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이 그러한 악순환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가능성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던져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일본이 적극적으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 수긍하는 사람들이 있다.
프레시안 : 그런데 일본에서는 여전히 한국의 주도로 남북‧북미 간 화해 분위기로 들어서는 것에 대해 환영하기 보다는 우려하는 분위기가 크지 않나?
남기정 : 그렇다. 분위기는 조금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려가 크다. 아무리 미국이 북한과 관계개선을 한다고 해도 여전히 일본 내에서는 북일 관계 개선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있다.
아베 총리 자신이 북한과의 대화를 싫어한다는 이야기도 일본 식자들 사이에서는 돌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른바 미일 동맹주의자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북미 정상회담의 의미를 역사적‧성찰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지정학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아까 이야기한 대로 일본이 다가올 신냉전 구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는 이야기만 하고 있다.
이들은 미국이 빠진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면서, 이를 완성시켜 놓고 미국을 다시 끌어들여서 미국과 함께 이른바 '법에 기반한 자유주의 국제질서(rule-based liberal international order)'의 옹호자가 되어, 글로벌 리더로 나서겠다는 전략을 수립해 놓고 이를 실행하려 하고 있었다.
기존의 질서에 거칠게 도전하는 중국을 염두에 두고, 이를 제어하는 데 미국과 일본이 글로벌 외교 무대에서 '투톱'으로 나선다는 구상이다. 이게 현재 일본 외교를 이끌어가는 당국자들의 기본 개념이다.
'글로벌한 미일동맹', '지구본을 부감하는 외교', '적극적 평화주의' 등으로 표현되는 외교 구상들이 이러한 생각들에서 전개되어 나온 것이다. 최근에 이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 전략(Free and Open Indo-pacific Strategy)'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아시아에 왔을 때 일본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이야기했고, 마치 미국도 여기에 함께할 것처럼 이야기했다. 일본은 이때 매우 고무되었다. 종래 일본의 외교 구상은 미국의 대전략에 대응하는 수준의 것이었는데, 일본이 제시하는 대전략에 미국이 호응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과 중국을 연이어 방문하고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EAS(동아시아정상회의 협력) 등을 거치면서 인도-태평양 전략은 사실상 지워졌다.
그래도 일본은 일단 TPP를 출범시켜서 미국을 끌어들이는 전략에 올인했다. 그 성과가 칠레에서 11개국이 서명한 TPP였는데, 당일 백악관에서 한국 특사단은 북미 정상회담의 개최를 발표했다. 일본으로서는 정말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 이후에 일본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중국에 대항하는 안보구상이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경제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심지어 일본은 이 전략이 중국의 '일대일로'에도 호응할 수 있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일본 재계 쪽의 요구도 들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재계는 TPP가 확실하지 않으면 일대일로에 보험을 들어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던 것 같다.
사실 일본 정부가 인도-태평양 구상에 대해 언급할 때, 분위기가 바뀐 것은 올해 1월 아베 총리의 시정방침 연설부터였다. 북한의 신년사 이후 달라진 한반도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고,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 이후 달라진 상황도 반영된 셈이다.
프레시안 : 미국과 일본이 투톱 외교를 해야한다는 것은 언제부터 나온 구상인가?
남기정 : 2006년 제1차 아베 내각 당시 외무상이었던 아소 다로(麻生太郞)는 '가치관 외교'를 표방하면서, 중동이 '불안정의 호(弧)'가 되어 있는 데 대응해 일본이 '자유와 번영의 호'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게 인도-태평양 전략과 겹치는 부분이다.
그러다 재집권한 아베 내각에서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지구본을 부감하는 외교'라는 말이 나왔고 안보정책으로는 '적극적 평화주의'를 제시한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안보 역할을 확장해서 미일동맹을 강화시키고, 미일동맹을 축으로 동아시아 질서를 재구축한다는 것이 일본의 구상이었다.
그리고 2012년 경부터는 '스윙 스테이트' 전략이 나오는데,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있는 국가들을 묶어서 일본이 이들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상들이 합쳐져서 최근 들어와서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완성된 셈이다.
그런데 저는 일본이 남북, 북미 정상회담으로 변화된 지형에 적응하려면 투톱외교 구상을 버리고 한국과 함께 '볼란테 외교'를 해야 한다고 본다. 볼란테란 포르투갈어로 미드필더를 지칭하는 축구 용어인데, 박지성이나 나카타와 같은 미드필더 선수들이, 비록 덩치는 크지 않아도 넓은 시야와 큰 폐활량을 가지고 운동장을 누비면서 경기를 조율하는 것처럼 한국과 일본이 동아시아 외교 판에서 이러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비가 전쟁방지, 공격이 평화구축이라고 한다면 한국과 일본이 전쟁방지와 평화구축 모두에 가담해서 지역 내 여러 구상이 만들어질 때 어디에나 끼어 있을 수 있는 두 국가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구상이다.
물론 일본 외교 당국은 미국과 '투톱 외교'를 하자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구상을 싫어할 수도 있다. 이게 잘못 보면 '미들파워 외교'로 비춰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미일동맹론자들은 미들파워 외교가 국격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축구에서 볼란테, 즉 미드필더는 야전 사령관이다. 어쩌면 감독보다도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게임을 조율하는 사령탑의 역할을 하자는 식으로 일본에 메시지를 던지면 일본도 따라올 수 있지 않겠나 싶은 생각도 든다.
프레시안 : 그렇지만 여전히 일본 내에서는 트럼프에 대한 불신이 크고, 과거 미일 동맹주의자들의 목소리가 강한 상황이라, 8월 내로 북미 간 비핵화에 대한 가시적 성과가 나와야 북일 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여론의 공감대가 있을 것 같다.
남기정 : 그렇다. 일본 내에서는 8~9월을 북일 정상회담 시기로 보고 있다. 8월에 일본이 독자적으로 움직여서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한다는 이야기도 일본 안팎에서는 나오고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무언가 가시적인 성과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일본에서는 늦어도 9월 동방경제포럼에서는 북일 정상이 만나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 전쟁 책임을 지게 하려면
프레시안 : 남한 입장에서는 북미, 북일이 화해하고 중국과 일본도 좋은 사이를 유지하는 것이 좋은데, 문재인 정부가 중일 간 중재자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남기정 : 북미 간 관계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가 일정한 역할을 했는데 북일 관계에 대해서는 그만큼의 역할이 없는 것 같아 아쉬운 측면이 있다. 한반도 주변에서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놓지 않으면 한반도 해빙 국면을 장기적으로 끌고 가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1단계가 미국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관여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2단계는 일본을 끌어들이는 것이 돼야 한다. 왜냐하면 이 과정은 7.7선언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발표한 7.7선언은 한반도 화해 프로세스와 교차승인이 핵심인데 이 교차승인이 반쪽만 이뤄졌다. 즉 우리와 중국, 러시아는 수교를 했지만 북한과 일본, 북한과 미국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북한 입장에서는 '기울어진 운동장'이었고, 이걸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택한 수단이 핵과 미사일이었다. 따라서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려면 북미, 북일 관계 정상화가 필요하다.
그런데 일단 북미 관계는 평화협정까지 체결하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가능성이 높다. 국교 정상화 역시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 사이에 북일 관계 정상화가 가능할 수 있다. 이는 지금까지 동아시아 국제정치에서 벌어졌던 프로세스를 봐도 알 수 있다. 따라서 북한에게 실질적인 CVIG(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Guarantee‧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체제 보장)는 오히려 일본을 통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본다.
한편, 북일 국교정상화 과정은 일본의 정치와 대외정책 방향을 주도하는 정치세력의 재편을 가져 올 수 있다. 북일 국교정상화를 통해 아베를 둘러싸고 있는 국가주의자들로부터 아베를 분리시킬 수 있고,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를 이끌어 왔던 이른바 '리버럴' 세력들이 아베를 끌어오게 할 수 있다.
프레시안 : 종전선언과 관련해 청와대는 남북미 3국이 해야한다는 입장이다. 이를 보면 청와대가 중국이나 일본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중요한 플레이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남기정 : 종전선언 문제를 '단칼에 뽑아버리겠다'라고 하면 가능한 변수를 줄여서 남북미 간에 합의를 보는게 좋을 수 있다고 본다. 또 중국 역시 종전선언까지는 어느 정도 한국의 자율적인 범위를 인정할 가능성이 남아있다고 본다. 중국도 계속 간섭하겠다는 모습으로 비치는 것이 그만큼 부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전선언은 남북미 3자가 하는 것도 여전히 가능하다고 보는데, 문제는 그 이후다.
종전선언 이후에는 중국과 일본, 러시아 등이 관여하게 될 텐데, 이 과정에 일본이 기여하도록 역할이 부여되어야 한다. 동아시아의 역사 구조를 염두에 두더라도 그렇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결국 전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정전체제를 끝내자는 것인데, 일본은 한국전쟁에서 후방 기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일본은 한반도 휴전체제에 기지국가로 편입되어 있었는데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로 가는 과정에서 일본은 '기지국가'의 역할을 종료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북한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로 완성되는 것인데, 일본이 기지국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프로세스를 우리가 고려할 필요도 있다.
프레시안 : 북일 간 교섭을 촉진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
남기정 : 일본의 기여는 주로 경제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일본 국민들 가운데는 논리적으로는 납득해도, 납치 일본인 문제로 인해 감성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국민의 감성에 다가가는 조치도 고려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충분히 그런 매력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다. 특히 일본의 리버럴들에게는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텐데 아직은 그런 기회를 만들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다.
지금 한반도 상황을 변화시키는 우리 외교력을 국제사회가 목도하고 있고, 일본도 서서히 문재인 정부의 외교력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선제적으로 움직여서 한일 관계를 개선해 놓는 것이 필요하다.
일본은 어떻게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관여할 수밖에 없다. 일본이 북한과 관계를 정상화하게 되면, 일본도 한반도에 개입할 독자적인 채널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한일관계가 악화된 상태로는 이러한 구도 속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장악하기 어려워진다.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봐야 한다.
프레시안 : 우리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북일관계를 중재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제스처가 있을까?
남기정 : 올해 10월이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0주년이다. 이 때가 한 번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또 8.15 역시 하나의 전기가 될 수 있다. 한반도에 전쟁의 그림자를 없애는 것이 진정한 과거 청산이라고 규정하고 일본에 크게 역할을 던지는 것도 좋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역시 일본의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도록, 일본 사회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조금 더 큰 전략적 구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전투적인 양심세력과 우익 역사수정주의자들 사이의 중간지대에 있는 일본 사람들은 위안부 문제의 존재와 일본의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2015년 합의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위안부 문제를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해결하고 우리 정부가 전개하는 평화 외교의 우군으로 만들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사죄의 가시화, 소녀상의 내면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2015년 합의에서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와 반성을 표명했다고 하지만 사죄를 받아야 할 분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으니,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어떻게 일본 정부의 사죄가 제대로 전달될지에 대한 방식을 고민하고 이를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10억 엔의 의미를 확인하는 것이 그 방법이 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세워진 소녀상은 남산 기억의 터에 모시는 것이 어떨까 싶다. 이 로드맵을 일본과 공유하고 이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녀상이 있었던 자리에는 표지석을 놓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이 자리에 계셨음을 기리고, 할머니들이 계셨기에 우리가 그 동안 싸워 이 만큼을 해결했고, 앞으로 나머지 문제들은 소녀상을 계속 가슴 속에 품고 기억하면서 풀어 나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한국전쟁을 법적으로 종식시키는 과정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있었던 과거의 전쟁들을 끝내는 과정에 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까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시작해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관여하지 않은 전쟁은 찾기 힘들다. 이들 전쟁은 한국전쟁의 먼 기원이 되고 있다.
21세기 지정학에 몰두하여, 냉전이 끝나기도 전에 신냉전을 우려하는 일본에게 이러한 역사 과정을 이해하게 하여, 이 전쟁의 세기를 종식시키는 데 일본이 총체적으로 책임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가 일본을 한반도 평화를 논의하는 테이블로 이끌어 와서 어두웠던 역사를 극복할 미래 비전을 일본에 제시할 필요가 있다. 지금 일본 사람들은 미래 비전이 없어서 두렵고, 두렵기 때문에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일본을 비판하면서 독일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유럽의 안전보장과 평화구축에서 독일에 일정한 역할이 주어짐으로써 독일이 역사 문제에 마주 서게 되었고, 이를 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우리는 독일의 사례에서 유럽의 역사화해와 평화구축이 불가분의 관계로 얽히면서 전개된 역사적 경로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내년이 3.1운동 100주년이다. 이 시기를 맞이해 남북이 일본과 함께 '신(新) 역사선언'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의미있는 결과물을 만들기 쉽지 않겠지만, 2019년에 이러한 노력을 개시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2010년 8월 10일에는 간 나오토(菅直人) 당시 일본 총리가 발표한 담화에서 "정치적·군사적 배경 하에 당시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한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나라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고 말했다. 일본 내각이 식민 통치의 강제성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북한에도 적용되는 것임을 확인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2019년에 남북한과 일본이 함께 새로운 100년의 역사로 나아간다는 선언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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